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1)- 전원철 박사 인터뷰 /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 칭기스 칸의 선조, 영원히 이 땅을 떠나다 (2) / 칭기스 칸, 발해 왕가의 후손임을 잊..

2023. 2. 17. 16:07역사의 연구/한국역사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1)- 전원철 박사 인터뷰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130호
2015.08.05 09:49
  
<월간조선> 6월호에는 북방민족사학자 주몽예씨의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王家)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다소 \'도발적인\' 기고문이 한편 실렸다. 주몽예씨는 칭기스 칸 연구를 위해 29개국 언어로 된 사서를 읽고 이를 전부 비교대조한 결과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고문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주몽예씨의 본명은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을 펴낸 전원철 박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pub>은 그가 칭기스 칸 연구에 뛰어든 계기와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직접 만나 보았다. 인터뷰 분량이 길어 3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

[역사탐험]  古代史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 주몽예 북방민족사학자·법률학 박사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
  
 
칭기즈 칸(1162~1227년)이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조금 지난 1260년경 페르시아 사가(史家) 주바이니(Ata^-Malek Juvayni·1226~1283)는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史書)를 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세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 칸(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2004)》이라는 책에서 칭기즈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칭기즈 칸의 선조는 누구일까?
 
  12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를 보면, 칭기즈 칸에서 위로 10대(代)를 올라가면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그녀에서 다시 10대를 더 올라가면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우리는 이 부르테 치노가 당연히 몽골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칭기즈 칸과 그의 조상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는 책 이름을 《몽골사》나 《칭기즈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이라는 말을 붙여 《몽골비(秘)사》라고 한다. 왜일까? 바로 칭기즈 칸 선조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칭기즈 칸 관련 역사책들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놀랍게도 칭기즈 칸의 직계 시조는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이다. 칭기즈 칸은 그의 19대손(代孫)이다.
 
  칭기즈 칸이 ‘칸(=왕=황제)’이 되기 전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이다. 이 이름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는 대조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의 옛 소리인 ‘텡기즈 콘(Тenggizkon=팅기즈 칸=팅궤트 칸)’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예이자, 발해국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한 것이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종족 이름으로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몽골’이라는 말은 ‘말갈(靺鞨)’, 곧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에서 나온 것이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
 
《집사》를 지은 라시드 웃딘의 동상.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기반을 잡은 일칸국(Il Khanate·지금의 이란 및 이라크 지역에 있던 몽골제국의 칸국 중 하나-편집자 주)의 재상(宰相)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은 1310년경 《집사(集史)》라는 역사책을 지었다. ‘모든 튀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고 하는 이 책은 ‘튀르크와 모골(몽골의 튀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의 4대 칸이었던 울룩벡(Ulugh Beg·1394~1449)이 집필한 《사국사(Tarixi arba’ ulus)》에는 ‘에르게네 콘’을 ‘아르카나 콘(Arkanak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몽골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집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 《집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필자 주)에 다른 튀르크 종족들과 적대와 대립을 벌여,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두 가족은 적(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콘이었다.
 
  …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이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서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서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을 해서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키얀에 소속된 지파가 그 풀무들을 불었다고 한다. 네쿠즈라고 알려진 종족과 그 지파인 우량카트 종족도 마찬가지로 불었다고 한다.〉 (《김호동 역주의 라시드 웃딘의 집사 부족지》, 파주, 2005, 252~256쪽)

 
몽골, 타타르, 튀르크
  칭기즈 칸은 스스로 자신의 종족을 ‘몽골’이라고 일컬었다. 원래는 칭기즈 칸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것이었지만, 후일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튀르크·페르시아 등에는 ‘모골’, 인도에는 ‘무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타타르(韃靼)’는 칭기즈 칸의 몽골 종족과 대립하다가 칭기즈 칸에게 정복된 종족 중 하나였지만, 중동이나 서방세계에는 몽골족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이후에는 몽골족을 ‘달단’이라고 칭했다.
 
  ‘튀르크(突厥)’는 6세기 이후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족으로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튀르크로 알려졌다. 후일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등이 중동 지역의 패자(覇者)가 됐다. 중동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튀르크족은 물론 몽골족과 타타르족을 통틀어서 ‘튀르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생존자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한편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래전 옛날 엘 콘(El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ibn Faridun)은 타타르 칸(Totor Khoni)인 세빈치 칸(Sevinchkhon)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
 
  엘 콘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엘 콘의 아들 카욘(Kayon)과 엘 콘의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그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 콘(《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사》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의하면, 이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집사》가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 칸의 선조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Kiyot)씨가 칭기즈 칸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사》가 칭기즈 칸의 직계 선조로 거명한 카욘의 아버지 엘 콘은 《튀르크의 계보》(17세기 히바 칸국·Xiva xonligi·의 아불가지 바하디르 칸이 지은 역사책) 등 다른 사서들에서는 일 한(Il Ha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 콘(일 한)과 그의 아들 ‘카욘/키얀(Kiyan)’은 과연 누구인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 일 한은 바로 일하이다. 일 한과 일하는 같은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 기록을 통해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 한이 대야발의 아들 일하라는 것은 그의 아들 키얀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야트’는 ‘클(大)’씨라는 뜻
 
  그렇다면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키야트(《사국사》의 ‘키요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키요트씨는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놀랍게도 바로 ‘걸(乞)’씨의 옛 소리(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면 ‘khiot/qiot’인데, 《집사》 등이 말하는 ‘키야트’와 정확히 일치한다. ‘걸’씨는 우리말 ‘크다’에서 나온 ‘클’씨를 음차(音借)한 것이고, ‘대(大)’씨는 그 뜻(의미)을 따른 한자를 성으로 삼은 것으로,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乞乞仲相)이었지만, 대조영은 왕조를 세우면서 ‘대’씨를 자신의 성으로 삼았는데, ‘걸’이나 ‘대’는 모두 ‘크다’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명칭은 ‘걸씨(乞氏)’, 곧 ‘클씨(大氏)’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키얀의 성씨도 ‘키요트’씨, 곧 ‘걸씨’, 달리 ‘클씨’라는 얘기가 된다.
 
  라시드의 《집사》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쓰면 ‘산골 물 간(澗)’이다. 키얀을 한자로 표기하면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 된다.
 
  《사국사》에서 ‘카욘’과 함께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다고 한 ‘엘 콘의 양자 누쿠즈(《집사》의 ‘네쿠즈(Nequz)’, 《튀르크의 계보》 등의 ‘니쿠즈(Nikuz)’)는 누구일까? 그는 발해 제2대 왕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 도리행(都利幸)의 아들인 ‘님금’이다.
 
  《사국사》에서는 누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이라고 했다. ‘다를라킨’은 곧 무왕(武王)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을 의미한다. 《송본광운》 등을 참조하면 ‘도리행’의 8~9세기경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幸, 行)’은 ‘항’으로도 읽는데(‘行列’의 경우), ‘항’의 8~9세기경의 발음은 ‘캉(khang)’이었다.
 
  몽골/퉁구스어나 북방 중국어에는 발음을 하면서 ‘r(ㄹ)’ 발음을 집어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중삽입(語中揷入) 소리라고 한다. 도리캉에 ‘r(ㄹ)’ 소리가 들어가면 ‘도리-ㄹ-캉’이 되는데, ‘다를라킨’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누쿠즈(니쿠즈/네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일컬은 것은, 네쿠즈의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6세기에 나온 《시바니의 서(書)(Shibani-name)》라는 책이다. 이 사서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샤이바니 왕가는 칭기즈 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네쿠즈를 ‘데르리긴 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데르리긴 한’은 곧 ‘다를라킨 한’이다(‘한’과 ‘칸’은 같은 의미이다).
 
  《집사》를 보면 〈…‘링쿰(lı⁻ngqu⁻m)’이란 말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의 평민들은 ‘링쿰’이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운운하는 기록이 나온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이라는 의미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에미르(Emir)’라고도 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텡기즈 콘’ 대야발
 
  여기서 보듯 바로 키타이어 ‘링쿰’은 ‘군주(임금)’라는 의미다.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의미했지만, 원나라 때는 양쯔강 이북 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키타이에서 나왔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 ‘한인(漢人)’ 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쯔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 곧 ‘남인(南人) 지역’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원나라 때 ‘키타이’에는 거란은 물론, 고려, 여진, 발해가 포함된다. 따라서 《집사》에서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말일 수도 있지만, 고려, 여진, 발해어일 수도 있다.
 
  ‘엘 콘의 양자 네쿠즈’는 바로 발해 무왕(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 한)의 아들이다. 그는 《사국사》에는 기록되었으나, 동방사서와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님금’이다.
 
  그러면 《사국사》가 일 한(엘 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 콘(Tengizkhon)은 누구인가?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이라는 의미다. 《송본광운》에 따르면 ‘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 칸’이다. 이것이 ‘팅기즈 칸/텡기즈 콘’으로 바뀐 것이다.
 
  즉위 전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진국왕’과 유사한 ‘진국공’이라는 칭호도 썼다.
 
  《사국사》는 일 한(엘 콘, 일하)의 아버지가 텡기즈 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텡기즈 콘은 ‘진국왕(진국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필자는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동방사서(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는 대야발을 발해 반안군왕(盤安郡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사서들, 《대씨대동보》 등을 종합해 보면,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 텡기즈 콘은 대야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집사》에서 ‘튀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으로, 《사국사》가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이라고 기록한 전쟁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바로 발해 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선조인 키얀과 네쿠즈가 아르카나 콘으로 숨어들어 갔다.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발해 大씨는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발해를 세운 대조영.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靺鞨), 곧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營州·랴오닝성 조양·朝陽)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걸(대)조영은 이때를 틈타 동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조상의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에서 말골과 구려(고구려) 백성을 규합하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우리가 흔히 ‘발해’라고 하는 ‘진국(震國) 고려(高麗)’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이다. 다만 이들은 고구려 왕실의 서자(庶孼·서얼)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그와 유사한 의미의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과 《당문습유(唐文拾遺)》 권 43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을 보자. 이 기록들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高句麗殘孽=대조영)이 무리로 모여(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년(현종의 개원 13년), 곧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대문예의 망명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 부분을 《사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 콘 통치 시에 그의 둘째 아들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와 튀르키스탄(Turkistan) 땅으로 떠났다. 그는…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며 살지 않고, 튀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실은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튀르키스탄’은 당시의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내몽골·당나라 때 만주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편집자 주)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년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禮)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발해-唐 전쟁
 

《집사》에 실린 몽골족의 전쟁 모습.

 

그로부터 4년5개월이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이,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년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년(무왕 15년)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이 이를 기록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가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은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문예가 쳐들어오자 무예는 발해군을 몸소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유명한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 부근의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공격했다. 이때 오늘날 당나라 장액(張掖·장쑤성) 출신 오승자(烏承玼)가 요로(要路)를 막고 큰 돌들을 깨어 ‘400리’의 석성(石城)을 구축(構築)했다.
 
  이 때문에 발해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고, 발해군의 진격으로 흩어졌던 당나라 백성들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승자가 구축했다는 석성의 규모로 보아 당나라 군사는 기록상의 ‘1만명’이 아니라, 발해 남쪽 국경으로 출동한 신라군 10만보다 몇 배나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사상자도 매우 컸을 것이다. 이 싸움의 자세한 경과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이때 《자치통감》 및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10만명은 당시로 보아 대단한 수의 병력이므로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앞서 본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대무예는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로 옮겼다. 현주는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북고성촌(北古城村)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년(무왕 19년, 개원 25년) 무예가 세상을 떠났다. 당에서 죽은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 흠무(欽茂)가 뒤를 이었다.
 
  발해-당나라 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파악한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사국사》에서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 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 한이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과 누쿠즈(도리행 아들 님금)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갓 혼인한 그들의 아내들과 몇 명의 시종만 데리고 밤의 어스름을 틈타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고대(中古代) 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청말(淸末)의 역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하)·渤海國記(下)》에는 “당 현종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以南) 땅을 신라에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 전선에서는 발해가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발해가 상실한 이 땅은 바로 《요사(遼史)》가 전하는 ‘발해 서경(渤海 西京) 압록군(鴨綠軍=鴨綠郡)’ 이남 지역이다. 압록군은 바로 ‘대전쟁’에 패한 후 살아남은 키얀(乞澗)과 네쿠즈(님금)가 적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는 ‘모든 튀르크 종족과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아르카나 콘(Arkanakun=Arqanaqun·《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다.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몽골학자 빌렉트(L. Bilegt), 부랴트(몽골족 후예들이 세운 러시아의 공화국) 학자 조릭투예프(B. Zoriktuyev), 김호동 서울대 교수 등은 일반적으로 《집사》가 ‘아르카나 콘’으로 기록한 것을 ‘에르게네 쿤(Ergenekun)’으로 읽는다. 빌렉트는 그 땅을 ‘에르군 콘(Ergun Kun)’으로도 읽으면서, 러시아 측에 있는 ‘아무르강(흑룡강) 상류의 아르군(Argun’)’ 또는 ‘에르구네 물(Ergu’ne mo’r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집사》가 말하는 ‘아르카나 콘(Arqanaqun)’은 오늘날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 아르군(Argun’)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서경(渤海西京) 압록군(鴨綠軍)’으로 적힌 지역이다. 곧 말갈(발해) 구어(口語)로 ‘압록강(鴨綠江)나/네(의) 군(郡)’이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에 ‘아-ㅇ/ㅂ-로군’으로 소리 났을 ‘압록군(鴨綠軍/鴨綠郡)’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 보면, 이는 ‘아우로군(鴨綠郡)네(의) 군’ 또는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필자 등 몽골어·튀르크어 등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튀르크어화하면서 그 소리가 ‘아로간나 쿤’을 거쳐 ‘아르카나 콘’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그 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특히 《집사》와 《사국사》가 말한 그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일 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 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걸간), 그의 양자 네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
 
  또 종족 이름인 ‘모굴’은 말갈-발해어(靺鞨-渤海語) ‘몰골(馬忽)’, 곧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의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인 키얀(澗)과 무왕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인 ‘님금’이 발해-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그 ‘아르카나 콘’은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문어(文語)로는 《요사》의 ‘발해서경 압록군’이고 말갈 구어로는 바로 ‘압록강나/네(의) 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가 ‘에르게네 콘’ 계곡으로 들어간 뒤 세월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불어나, ‘키야트’와, 또 원래는 몽골이 아니었던, 우량카트(우리 사서의 吾良哈=오랑캐) 등 및 몇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왔다. 이어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사》가 말한 그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라는 인물이다. 《집사》는 그를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가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그는 타타르어 사서인 《칭기스의 서》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었다.
 
 
  今幸의 등장
 
  이 ‘황금의 칸’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금행(金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황금’이고, ‘행(幸)’은 앞에서 ‘도리행’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옛날 한자음은 ‘캉’, 즉 ‘칸(汗=군주)’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의 조상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이다. 19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은 ‘황금의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곧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라는 이야기이다.
 
  일부 우리 학자들은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을 잘못 이해해 이 금행의 아들 함보를 ‘신라인(新羅人) 김함보’로 보고 있다. 또 조선 시대 김세겸의 잘못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함보의 아버지 ‘금행’을 ‘신라인 김행’, 곧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은 칭기즈 칸과 그의 부인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우진의 선조가 된 《집사》의 ‘황금항아리(=황금의 칸=알툰 칸)’이고, 대야발의 4세손이다.
 
  《집사》에 의하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추를룩 메르겐(조선 말갈)’ ‘쿠바이시레(커가씨네=흘석렬·紇石烈)’, 그리고 ‘투스부다우(대씨부 대왕)’가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고려사》 ‘금행’의 세 아들, 곧 《금사》에 나오는 금 시조 삼형제, 곧 카고라이(阿古逎=아고래=고구려), 함보(=큰보=큰가), 그리고 보코리(보활리·保活里=무구리=고구려) 삼형제와 같은 인물들이다.
 
  두 그룹으로 대조되는 이들의 이름은 얼핏 보면 매우 낯선 이름들이지만, 두 가지는 다 위의 괄호 속 이름 풀이에서 보듯이, 우리말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추를룩 메르겐)와 말갈어(쿠바이시레), 그리고 한자(투스부다우)로 된 칭호이다.
 
 
  ‘황금항아리’의 失地 회복
 

金나라 태조 완안아골타.

 

《집사》에 의하면, 이 황금항아리(=금행)의 일족은 그들의 8촌 형제인 발해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발해서경 압록강네 군’을 뛰쳐나왔다. 선왕이 90여 년 전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흑수말갈 등 북방 영토와 남국(南國)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황금항아리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때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모골(말갈) 종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골 종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급히 전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는 발해 남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것이 《집사》에 나오는 ‘콩그라트 종족의 에르게네 콘 대이탈-대장정’ 이야기이다.
 
  그 결과 황금항아리 일행은 신라와의 싸움에 이겨, 평주(平州), 곧 오늘날 황해도 평산 이남까지 회복했다. 어쩌면 경기도 개성은 물론,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황금항아리 금행은 그 공으로 평주에 눌러앉아 군왕(郡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집사》는 그를 ‘군주(왕)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예종 조 본문은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는 비밀코드로 그를 기록했다.
 
  《튀르크의 계보》에 의하면, 황금항아리(=금칸=금행)의 큰아들인 아고래(=카고라이=고구려)에게는 ‘콩그라트(Konkirat)’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집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이 이 종족 출신이다. ‘콩그라트’는 ‘큰고려씨’, 곧 ‘고구려씨’라는 말이다.
 
  황금항아리의 둘째 아들 함보는 당시의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다. 《금사》에서 함보가 여진 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가 완안부인(完顔部人) 혹은 완안부장(完顔部長)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의 생시에는 이른바 여진은 없었고, ‘발해’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보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코로(烏魯·오로=胡來·코라이=高麗·호래)이다. 이 코로의 6세대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 카고리다(阿骨打·아골타)이다. 이 가계는 《집사》가 말하는 예키라스 종족이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놀랍게도 이 종족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역라씨)’라고 기록했다. 이 가계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모든 몽골의 어머니’ 알란 고와
 

라시드 웃딘의 《집사》에서 묘사한 칭기즈 칸의 즉위식 장면. 칭기즈 칸은 그의 호칭을 통해 자신이 고구려-발해의 후예임을 드러냈다.

 

함보의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야라(耶懶·오늘날 함흥)로 들어갔다. 이 보활리의 3대손이 바로 《집사》의 투스부다우의 3세손 코를라스다.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 종족’으로 불린다.
 
  ‘코를라스 종족’은 《원사(元史)》와 우리 사서가 말하는 ‘카라로스/합란로씨(合蘭路氏)’다. 청대(淸代)에 나온 《황조통지(皇朝通志)》는 이들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이 가계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고려나라씨 말갈)의 코리-투마드(고려-주몽) 부’라고 한다. 부랴트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의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이라고 한다.
 
  이 지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코를라스의 딸이자, 칭기즈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고와(함경도 阿蘭지방의 乞哥, 곧 걸씨 부인)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 태조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命)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놀라운 일이다. 고구려와 말갈의 발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커부려 칸=고구려 칸)’의 시대에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Il Milione)》에서 ‘칭기즈 칸’을 ‘친기 칸(Cinghi Kane)’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친구이 칸’이라고 발음하던 ‘진국왕(震國王=발해왕)’이라는 의미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쇠(터머르/데미르)를 다루는 대장장이’ 또는 ‘철인(鐵人)’이라고 해석한다. 이 이름에 대해 《원사》 ‘태조기(太祖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太祖)…의 휘(諱)는 테무진이고,성(姓)은 키얀씨(奇渥溫氏, 기옥온씨=키야트 칸씨)이고, 몽골부인(蒙古部人)이다. … 처음에 열조(烈祖·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부를 쳤을 적에 그 부장(部長) 테무진을 사로잡았다. … 열조는 … 이로 말미암아 사로잡은 테무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名之),그 뜻(志)은 무공(武功)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듯 ‘테무진’은 ‘위대한 무공(武功)의 신(神)’이라는 뜻인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라는 말이다.
 
 
  칭기즈 칸의 후예들
 
  테무진은 자기 시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없던 땅에서 태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 사가 모스투피 카즈비니(Mostufi Qazvini·1281~1349)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e Gojide)》가 말하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이름을 ‘몽골(=말갈)’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진국왕(=발해왕)’을 뜻하는 ‘칭기즈 칸’을 자신의 왕호로 택했다.
 
  결론적으로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늘날에도 남북한과 몽골공화국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5-06-18 05:49 | 수정일 : 2015-06-19 10:08

 
 
 

칭기스 칸의 선조, 영원히 이 땅을 떠나다/칭기스칸의 가계 비밀코드(2) 

2015. 11. 3. 8:02

https://blog.naver.com/lyon4338/220527419902

 

칭기스 칸의 선조, 영원히 이 땅을 떠나다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2)- 전원철 박사 인터뷰

세계 정복자 칭기스 칸-중원의 지배자 금나라 황제-고려 왕건은 한집안

 | 이상흔 조선pub 기자

페르시아어판 칭기스 칸의 계보도 영인본.

칸의 특명으로 집필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
 
-앞서 말씀하신 《집사》나 《사국사》 같은 사서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집사》는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가 다스린 일칸국(곧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자기 황제의 엄명을 받고 1310년경에 지은 역사책입니다. 가잔 칸이 그에게 ‘나의 선조인 칭기스 칸의 선조에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쓰라’라고 엄명을 내린 겁니다.  
 
라시드 웃딘은 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당시 4칸국의 종주국이던 원(元)나라에서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와 역사에 관해 정통한 원로대신 볼라드 칭상(승상)과 여러 학자들, 그리고 《황금의 책》이라고 라시드가 부르는 책, 곧 ‘족보’를 비롯하여 막대한 분량의 기록물을 수레에 싣고 오도록 하여 그들의 설명과 해석 아래 그 사서를 집필했습니다.”  
 
전 박사는 “이 사서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모골(몽골) 종족의 기원 이야기’로 칭기스 칸의 선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뒤에 쓰였으나, 라시드가 말한 그 《황금의 책》을 더욱 충실히 반영한 《사국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준다고 한다. 
 
 《사국사》에 대한 전 박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국사》는 티무르 왕조의 4대 칸이자, 역시 칭기스 칸의 후손이었던 울룩벡(1394~1449)이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집사》속의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보다 훨씬 앞선 칭키스칸의 선조 계보로 《집사》가 생략한 부분까지 적고 있다.  
 
울룩벡은 제2의 칭기스 칸으로 전 유럽과 아랍지역을 덜덜 떨게 했던 아미르 티무르(1336~1405)가 세운 왕조의 칸인데, 그의 할아버지인 아무르 티무르 역시 부계의 모계로 칭기스 칸의 후손이면서 부계가 칭기스 칸의 선조대에서 갈라져 나온 몽골 바를라스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인 《황금의 책》 자체는 오늘날에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 박사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그 자신도 이것을 꼼꼼히 참조하고 글을 썼고, 그 족보의 골자는 방금 말한 다른 사서들에도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중세 서방의 사서와 함께 《몽골비사》등 동방의 책을 비교 대조하며 이면에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만 칭기스 칸 선조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설명이다.  
 
 
《집사》에 기록된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비밀  
 
-위 사서를 쓴 사람들은 세계를 정복한 자랑스러운 칭기스 칸의 조상을 이야기하는데 왜 굳이 그 이면의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 알 수 있도록 기술해 놓았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시 사서들은 당연히 칭기스 칸 가문에 내려오는 족보를 본대로 들은 대로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 10대 혹은 20대 선조의 이야기이다 보니까 원래의 고대 말갈어(우리말)로 된 인명과 고대의 지명이 몽골어나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또는 한자어화되면서 원음과 많이 달라졌고, 또 그마저도 오늘날의 언어들이 아니라, 중세기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페르시아어와 몽골어 등 그 외국어 본문 속에 있는 인명 지명들은 본문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말갈어로 된 말입니다. 이 때문에 단번에 그 의미를 해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 사서를 교차 대조하고, 칭기스 칸이나 그 이전 선조들이 살았던 당대의 언어 고증을 통해 이런 인명과 지명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이들 몇 가지 사서는 원래 《황금의 책》 곧 ‘족보’에 기반하여 그 선조들의 생전의 활동기록인 행장(行狀)을 곁들인 글들입니다. 그 《황금의 책》 족보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말하듯이 황제의 재고에 비밀스럽게 간수되어, 황족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대아미르들이 항상 지키고 있던 책입니다. 곧 이 책은 비밀스러운 황족의 뿌리를 적은 책인데, 그 내용을 올바로 풀이하지 않으면 그것에 바탕을 둔 사서들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칭기스 칸 선조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분화되었습니까. 
 
“《사국사》에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이 전쟁은 우리에게 보통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략’으로 알려진 싸움이 시발이 된 발해와 당나라 간의 전쟁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래 약 한 세대 29년 뒤인 69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는데, 이는 곧 고구려를 재건한 겁니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를 재건 한 지 34년 만에 또다시 대전쟁이 터졌습니다. 당나라가 다시 일어선 고구려, 곧 발해를 보면서 과거의 고구려가 다시 나타난 악몽에 겁을 먹고 발해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부립니다.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떼어 내려고 획책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개략적으로만 적은 것이 《사국사》가 말하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 간의 대전쟁’입니다.  
 
여기서 ‘모골’은 곧 ‘말갈’, 곧 ‘발해’입니다.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말갈, 곧 발해가 패하면서 칭기스 칸 선조들은 그들이 원래 살던 터전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고, 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 박사는 이후 이야기를 《집사》의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모골(말갈) 군이 전멸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이름이 ‘키얀’과 ‘네쿠즈’다. 이 둘은 마침 갓 혼인한 그들 각자의 아내들, 그리고 몇 명의 시종과 함께 마침 전쟁에서 주인을 잃는 말들을 잡아타고 야간의 어스름을 이용하여 포위를 뚫고 심심산골의 계곡 속으로 도망쳤다.  
 
그 계곡은 오직 한 필의 말과 한 명의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험준한 곳으로 거기를 넘자 마치 하늘이 만든 천국 같은 벌판과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쿤’이다.  
 
오늘날에도 터키인들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이곳을 자기네들 모든 투르크 종족의 선조와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동방아시아의 그 어느 곳이라고 막연히는 알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다고들 말하곤 한다. 터키에서는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의 전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테헤란에서 발간된 《집사》 페르시아어의 한 본(좌)과 《집사》 아랍어 본(우)
 
 
 
‘아르가나 콘’으로 피신한 칭기스 칸의 시조들
 
전 박사는 이 전쟁에 나오는 ‘키안’은 라시드가 ‘모골어(몽골어)’로 ‘산골 사이를 세차게 흐르는 물’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이름은 사실은 말갈인들이 한자말로 표현한 ‘산골 물 간(澗)’이고 ‘니쿠즈’는 말갈말로 ‘님금’이란 말이 모양을 바꾼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라시드가 말한 ‘모골어’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말 방언인 ‘말갈어’였고, 또 ‘니쿠즈’는 발해 제 2대왕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로, ‘님금’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또 ‘에르게네 쿤’은 예전 《집사》에서는 ‘아르카나 쿤’, 《사국사》는 ‘아르카나 콘’으로 쓰는데 이는 발해서경(渤海西京)이라는 별칭을 가진 발해의 수도급 행정구인 ‘압록강네 郡(군)’(압록강 나의 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발해어 행정구 이름이 734년경에서 《집사》가 편찬되는 1310년경까지 근 58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 또 고구려/말갈어(발해어)→몽골어→투르크어→페르시아어를 거치면서 ‘압록강 나의 군’→아로강나 군→아르가나 콘이라는 투르크/몽골어로 음가 변화를 거쳤다는 것이다.  
 
“이때 아르가나 콘으로 도망간 칭기스 칸의 전설적 시조인 키얀과 네쿠즈 중에 키얀은 바로,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손자 ‘간(澗)’입니다. 또 두 번째 인물 네쿠즈는 ‘님금’이란 이름을 페르시아어로 ‘링쿰(Linqum)’이라고 적고 한자로는 ‘닛곰(捏昆, 날곤)’으로 적은 이름의 변화형입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그는 바로 그 전설적 전쟁의 주역이었던 발해 제2대왕 무왕 대무예의 아들 발해왕자 도리행(都利行)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대도리행은 흑수말갈을 정벌하라는 형 무왕의 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한 숙부 대문예를 발해로 귀환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독살당한 차기 왕감이었죠. 그 ‘도리행(都利行)’이 바로 《집사》가 ‘다를라킨(Darlaqin)’이라고 기록한 인물인데, 님금, 곧 ‘니쿠즈’는 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죠.”
 
 
콩그라트 지파가 아르가나 콘을 빠져 나온 이야기 
 
전 박사는 “그 전설적인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한 두 가계에서 나중에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무리의 숫자가 불어나서 그들이 여러 종족, 곧 지파로 갈라졌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그 계곡이 좁아져 거기를 빠져나와 더 넓은 터전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과정이 700년 전 쓴 《집사》에 ‘아르가나 콘 탈출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탈출한 발해 왕가의 일족이 칭기스 칸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오늘날 여러 종족으로 분화되는데 그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모골족의 아르가나 콘 탈출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나온 종족은 ‘콩크라트’ 종족의 시조인 ‘황금항아리’가 이끄는 부류로, ‘다른 종족과 상의도 없이 다른 종족의 쇠를 녹여 연장을 만드는 용광로지를 짓밟고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이때는 탈출이 아니라 발해 10대 왕 선왕(宣王)의 밀지를 받고, 압록강네 군을 빠져 나와 그 전설적인 ‘타타르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 곧 ‘발해-당·신라전’에서 잃어버린 발해의 남쪽 땅과 북쪽의 흑수 땅 등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흑수 등 말갈 고을들을 치러 출정한 것입니다.  
 
발해의 남쪽 땅이라고 제가 표현한 땅은 평양의 대동강에서 한강 이북 땅을 말하고, 원래 고구려 땅이자 발해 초기의 땅입니다. 이 땅을 되찾기 위해서 콩그라트 종족이 뛰쳐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 공격에서 발해가 이겼던 것이 확실합니다. 동방사서 《통감》 등 당나라 측의 사정을 적은 사서들은 ‘선왕이 바다 북쪽의 말갈 등을 쳐서 땅을 크게 넓혔다’고 합니다. 또 신라 측 기록도 발해와 신라 국경이 한강 이북의 경기도 땅으로 바뀌었음을 기록합니다. 또 이때부터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콩크라트 종족의 시조라는 ‘황금항아리’는 또 누구인지요.  
 
“놀랍게도 이분은 우리 《고려사》가 <우리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함보)가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 선조가 되었다>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콩그라트 종족이 아르가나 콘을 떨쳐 일어나 발해의 남쪽 주군을 회복한 이 황금항아리 즉 금행은 황해도 평주를 수복했습니다. 곧 그들은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증조부 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이 때문에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은 <고려사>의 서문 격으로 왕건의 선조를 기록한 <고려세계(高麗世系)>에서는 왕건의 외증조부로’ ‘서해용왕(西海龍王)’으로 기록되었고, 이 칭호를 쓰며 그곳을 다스립니다.” 
 
전원철 박사는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은 ‘서해’, 곧 ‘발해’ 바다를 말하고 ‘용왕(龍王)’은 그가 정말 ‘구렝이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는 우리말의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발해-고려식 향찰(鄕札)로 적힌 칭호라고 한다.  
 
곧 ‘용왕(龍王)’의 ‘용(龍)-’은 우리말로 ‘고렝이/고레이’라고 하는데, 이 소리가 ‘고려’의 옛소리인 ‘고라이’와 같아, 그 고려를 ‘용’에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이는 왕건의 즉위를 예고하는 도참설(圖讖說)의 비문(秘文, 비밀코드)에서도 사용한 당시의 표현방식이라고 한다. 결국 왕건의 외증조가 ‘서해용왕(西海龍王)’이라고 쓴 것은 그가 ‘발해(서해)-고려왕’(고레이, 고렝이, 구렁이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남(내)몽골 다구르 족 에르덴타이와 아르다잡 선생 주해의 《몽골비사》 위구르 몽문판(좌). 《황금사강》이라고 번역되는 《알탄 톱치》. 티베트-몽골계 사서로 칭기스 칸의 9대조 보잔자르(보돈차르)의 부계의 계보를 비밀코드로 기록한 사서(우). 
 
 
여진(女眞)은 조선(朝鮮)·숙신(肅愼)과 같은 소리값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 
 
한편 신라는 당시 금행이 회복하여 다스리던 땅을 다시 빼앗기 위해 자주 침공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발해의 내지인 반안군(盤安郡)에서도 부락이 두 개의 종족(지파)으로 서로 나뉘어 싸우는 혼란스런 일이 있어났다. 이어지는 전 박사의 설명. 
 
“신라의 침공을 받자 할 수 없이 금행과 그 맏아들, 《금사》에서 아고래(阿古迺), 곧 그 소리가 ‘고구려’와 같은 ‘카고라이’로 기록된 인물은 고향 평주에 남고, 둘째와 셋째 아들인 함보(函普)와 보활리가 ‘복간수(僕幹水)의 물가’와 ‘야라(耶懶)’로 각각 들어갑니다. 이 지역은 약 250년 뒤 고려 예종 때인 1113년경에는 《고려사》에서는 ‘여진(女眞)’으로 적히고, 《금사》에는 ‘완안부(完顔部)’로 불리게 되는 지방입니다. 
 
형인 함보가 들어간 《금사》의 ‘복간수(僕幹水)의 물가 땅(涯)’에서 ‘복간수(僕幹水)’는 ‘보카리’ 곧 ‘모구리(고구려, 무쿠리) 물’이라는 강 이름이고, 그 물가의 땅은 《고려사》가 오늘날의 소리로 ‘여진 아지거촌(女眞 阿之居村)’이라고 기록한 곳입니다. 아우 보활리가 들어간 ‘야라(耶懶)’는 당시 ‘갸라이(고려)’라는 소리를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이 지명은 또 옛소리로는 ‘코라이 땅’, 오늘날의 소리로는 ‘고려땅’이라는 지명입니다. 여진 및 고려식 이두로 적은 ‘갈라전(曷懶甸)’이 바로 그것이고, 원나라 때 몽골어 소리를 한자로 적은 ‘코랄라(合蘭路, 합란로)’가 같은 땅입니다. 이 둘은 조선시대 대학자 정약용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각각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와 함경남도 함흥지방입니다.”  
 
-당시에 여진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여진(女眞)은 옛 한자 방언소리를 아직도 간직한 오늘날 일본어(日本語) 한자 소리로 ‘죠신’인 것과 같이, 예전에 그 소리가 ‘조신’이라는 소리인데, 이는 ‘조선(朝鮮)’과 ‘숙신(肅愼)’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입니다. 이 말들을 두고 우리 학자들 대부분과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은 서로 다르다고 보는데, 그것은 우리 역사를 뺏으려고 하는 이들의 잘못이죠. 그들이 누구인지는 이미 아셨겠지만요.” 
 
전 박사는 “여진이라고 하니까 우리와 상관없는 별다른 종족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며 여진에 대해 보완설명을 이어갔다. 
 
“옛 조선, 곧 고조선에서 나온 고구려의 가닥족속인 발해왕족 대조영의 가계를 숙신의 후예라고 하는 《금사》의 기록을 보세요. 고구려와 발해가 한 집안이고 고구려는 옛 조선(朝鮮)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조선’과 ‘숙신’은 한 가지 같은 것을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이 말을 후대에 와서 당시에 같은 소리 값을 가졌던 ‘조신(女眞)’으로 쓴 것입니다.  
 
이 조신(女眞)을 여직(女直), 여정(女貞), 여진(慮眞), 주신(珠申)등으로도 쓰는데, 이는 모두 옛 조선(朝鮮)=숙신(肅愼)이라는 말입니다. 중세 몽골어로 이를 ‘조르친(Jurchen)’이라고 하고 만주어로는 ‘주션(Jushen)’이라고 하는 것도 다 같은 말이죠.  
 
오늘날 우리는 남방 한어(漢語) 방언소리를 받아들여 이를 ‘여진’이라고 합니다. 단, 당시의 소리로 읽어야 제대로 그 뜻 ‘조선(朝鮮)’이 나오는 것이죠. 그 ‘조신(女眞)’ 땅인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의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간 이 함보의 7대손이 바로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입니다. 발해가 망한지 약 190년 후이죠.” 
 
 
조상의 영지인 발해 반안군으로 돌아간 칭기스칸 선조 
 
전 박사는 바로 ‘반안군(盤安郡)’이 곧 칭기스 칸의 19대 조부인 대야발(大野勃)의 영지라고 말했다.  
 
“대야발 자신이 ‘돌궐’ 땅, 곧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카자흐스탄 땅에까지 가서 사서를 구해 지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저자서문에는 자신의 칭호를 분명히 반안군왕(盤安郡王)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요사》 등에는 분명히 발해의 한 행정구를 ‘반안군(盤安郡)’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함보 형제는 함보 형제→금행→키얀의 아들→키얀→일하→야발으로 올라가는 계보에서 그들의 5대 선조인 대야발의 영지로 들어간 거지요.” 
 
-우리 학자들은 함보를 발해가 아닌 신라 사람이라고 주장하는데요. 
 
“분명하게 잘못된 견해입니다. 우리 학자들 중에는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 사람들이 신라가 망하는 936년 이후에 신라 왕족이나 유민이 그곳으로 간 사람들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함보 형제는 이보다 근 80년 앞서 857년경 발해시대에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가 아니라, 발해(渤海) 시대의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함보는 왕건보다 할아버지뻘입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이 왕건의 외증조부이고 그 아들이 함보니까요. 이 물음을 좀 차분하게 잠시만 봅시다. 아골타와 같은 시대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때이고 왕건과 같은 항렬의 시대가 《금사》의 발해(拔海), 곧 함보의 손자 때입니다. 그런데 왕건 조차도 이미 나이가 늙은 시절인 936년경에 신라 말대왕 김부가 그에게 귀부하여 옵니다. 고려는 이 덕택에 이른 바 후삼국 통일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왕건보다 2~3대 전에 어찌 신라왕의 아들 마의태자나, 그 유민들이 강원도도 아니고 발해의 내지인 함경도로 들어갔겠습니까?”  
 
-사서에 함보가 신라인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지 않나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대금국지(大金國志)》나 《송막기문》 등에는 그가 ‘신라인(新羅人)’이라고 적어두었고, 《금사》에서는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이 때 나이는 이미 60 몇 살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그가 신라 사람이거나 왕건의 고려 사람이라고 잘못된 풀이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오해한 우리 학계나 재야 사학자들의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전 박사는 “함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과 동시대인이라며 이는 곧 발해와 신라가 남북국으로 대치하던 시대(함보 출생년도 대략 ?~849년)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함보의 아버지인 《고려사》의 금행은 <고려사 고려세계>가 비밀코드로 기록한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의 장인이므로 곧 금행은 작제건의 아버지뻘이고, 그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그 금행에게 8대 외손이 되는 이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1079~1122년)인데, 아골타와 예종은 동시대 사람이고, 왕건과 그 외증조부 금행의 가계와 친족 계보 상 같은 항렬입니다.
 
결국 왕건의 할아버지 항렬이 함보이고 증조부 항렬이 금행입니다. 왕건시대 사람일 수가 없죠. 더구나 금행과 함보의 시대에 북에는 ‘발해’, 남에는 ‘신라’, 그 사이에는 궁예의 ‘(후)고구려’, 또 서남쪽에는 ‘(후)백제’가 엄연히 병존하던 시대입니다.”
                                영국 동인도회사 출신의 마일스 대령이 1838년 번역한 <투르크와 타타르의 계보>.
 
 
 
고구려 건국에 참여하는 금행의 후손들
 
전 박사는 “또 《금사》에서 아골타가 발해인 양복을 통해 발해 유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라고 했다”며 “그가 ‘여진인과 신라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여진인 아골타 자신과 발해 왕족은 같은 집안이니, 발해인들은 발해왕족 출신인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말이지요. 아골타가 신라인 김행(金幸), 곧 권행(權幸)의 후손이었다면 그는 북국 발해의 ‘적국’인 남국 신라인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을 듣고 적국의 왕손에게 발해 유민이 들러붙겠습니까?”
 
-그렇군요. 오늘날 학자들이 잘못 알게 된 데에는 그들의 연구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처음부터 여러 기록이 좀 두서없이 기록된 이유도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더라도 학자라면 사실 관계를 고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풍토 중에 하나가 사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시대나 인물의 정체를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주장이라도 교수나 학계 학자들의 입을 통하면 마치 사실인양 받아들여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백의종군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교수나 제도권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학문적 풍토이자 사회 현실입니다. 
 
제 책의 본문에 실어 둔 것처럼, 두 집안의 계보에 기반하여 간단한 세대 비교도표 하나만 만들면 이미 답이 나오는데, 게으른 학자들은 이것조차 하지 않고 마음대로 글을 써서 논문 발표회이다, 언론이다, 방송에 나와서 대중을 헛된 지식으로 이끈 결과라고 봅니다.” 
 
-박사님 말씀을 요약하면 결국 함보는 시기적으로 신라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군요. 아무튼, 고향에 남았다는 금행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금행의 맏아들인 아고래, 곧 ‘카고라이’(고구려)의 손자로 난 ‘아지태(阿志泰)’ 와 역시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로 태어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 때에 와서 궁예가 신라를 치고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이 때 ‘아지태(阿志泰)’와 ‘발해 대상 랑’도 남하하여 궁예의 정권에 참가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합니다.”  
 
-아고래가 어떻게 고구려라는 뜻인지요. 
 
“칭기스 칸 선조들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름들에 관해 설명할 필이 필요하겠네요. 제가 금행의 맏아로 밝힌 아고래(阿古迺)는 그 옛소리가 ‘카고라이’, 곧 ‘고구려’라는 소리입니다. 그의 손자 <금사>에는 적히지 않았고, 서방사서 《행운의 정원》이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칼지타이 칸(Qaljiday Khan)’이라고 적었지요.
 
그런데 그의 이름이《고려사》에 ‘아지태(阿志泰)’로 적혔습니다. 이 이름의 오늘날의 소리와는 달리 당시의 한자소리는 ‘카지타이’입니다. ‘아지태(阿志泰)’라는 이름에는 <행운의 정원>이 기록한 그 “칼지다이 칸”에서 다만 존칭인 ‘-칸’이 빠진 이름이죠. 물론 소리문자로 적은 <행운의 정원> 속의 “칼지다이 칸”은 오늘날 우리말 ‘클씨씨 왕(乞氏氏 王)’이라는 우리말 소리에 아주 가까이 적혔죠.  
 
또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집사》 등 여러 사서에서 ‘투스부다우’로 적혔는데, 이는 ‘대씨부 대/두(大. 頭)’, 곧 ‘대씨부의 수령’이라는 이름입니다. 그의 손자로 《사국사》가 ‘율두즈 콘(조선씨 왕)’이라고 하고, 《셀렝게 부랴트인들의 역사》 등이 ‘바르가 타이상 노욘’이라고 기록한 이가 있습니다. 말갈어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라는 이름이죠. 여기서 칼지다이 칸은 칭기스 칸의 부인인 부르테의 선조입니다. 바르가 타이상 노욘은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로 《집사》에서는 ‘미사르 울룩’이라는 사람입니다.” 
 
 
궁예와 장보고는 고구려 보장왕 핏줄 
 
전 박사는 “이 칼지다이 칸 ‘아지태’와 ‘바르가 타이상 노욘’, 곧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 섬긴 궁예는 스스로가 ‘신라에 나라를 잃은 고구려인’이라는 자각을 가진 혁명가였다”고 말했다.
 
“제가 족보를 면밀히 조사해보니 궁예의 외할아버지가 궁파(弓巴), 달리 궁복(弓福)인데 이 궁파는 바로 함보의 이름과도 같은 것으로 ‘큰 바’, 곧 ‘큰 가(대씨, 고씨)’를 이두로 적은 이름입니다. 함보의 이름은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는 칸보(鐶浦, 환포), 청대에는 캄부(堪布, 감포)로도 적혔죠. 이 궁파(弓巴)가 바로 해상왕으로 알려진 장보고(張保皐)의 다른 이름, 아니 사실은 고구려-말갈식 ‘성씨’를 이름처럼 쓴 것입니다.” 
 
-장보고의 성씨는 장씨인데 무슨 근거로 그가 궁씨라고 연결지을 수가 있는지요. 
 
“장보고의 한문식 성은 ‘활 당길 장(張)’ 자를 써서 ‘활’ 곧 ‘궁(弓)’ 으로 하고, 활의 옛소리인 ‘코리’(弓)로 한 성씨입니다. 이는 ‘고려’를 말하는 겹뜻말(중첩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또 몽골어로도 덮개 달린 화살통(dabčitu qor)을 ‘코르(qor)’라고 합니다. 이는 《몽골비사》 리게티(Ligeti)본을 확인해 보면 아실 것입니다만.
 
또 장보고의 성씨 ‘장’ 을 뺀 그의 이름은 ‘고구려’를 말하는 ‘무구리/무쿠리/보코리’인데, 이를 한자로 ‘보코리(保皐)’로 쓴 겁니다. 맨 끝의 ‘-리’ 소리는 오늘날에도 말할 때에는 ‘-ㄹ’소리를 내면서도 글자로 적을 때에는 안 쓰는 이른 바 북경화(北京話)의 ‘얼화(兒話)’와 같이 당시에도 안 쓴 겁니다.  
 
곧 ‘고려-무쿠리’ 장보고는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곧 고장(高藏)의 아들로 신라에 항복한 고구려 왕족 안승의 증손입니다. 보장왕에서 치면 4대손이죠. 궁예는 그 이름이 기록 안 되었지만 사서가 말하기로 궁예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다고 하므로 어머니 ‘궁씨녀’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6대 외손이죠.”  
 
-이런 내용도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찾은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군요.   
 
“맞습니다. 이 때문에 궁예가 신라왕궁에서 버림을 당하자, 성씨를 외가성 궁파(弓巴), 곧 ‘궁가(弓哥)’로 쓰고 이름을 ‘예(裔)’로 한 것입니다. ‘궁(弓=高)씨의 후예(裔)’, 곧 고구려 왕가의 서자가계의 후손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큰(大)=궁(弓)=높은(高)씨의 후예(裔)’라는 뜻이죠.” 
 
-칭기스 칸 선조 이야기가 결국 이야기가 왕건의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네요. 우리 역사와 이렇게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궁예를 도운 발해대상랑, 곧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가 결국 고구려-마진-태봉 창건의 주역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처음에는 그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궁예를 도운 왕건이 나중에는 오히려 주군인 궁예를 제거하고 자기가 새 왕이 되죠. 그런데 이 왕건은 아까 말한 대로 서해용왕(금행)의 외증손입니다. 발해대상랑과는 재종외아저씨와 조카 사이이죠. 이들은 때로 신라 땅이 된 곳에 살면서도 스스로 고구려인이라고 자부한 인물들입니다.”
 
                                            KBS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모습./ KBS
 

왕건의 궁정혁명에 밀려 후고구려를 떠난 발해 대상랑 
 
-말씀하셨듯이 결국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잖습니까.  
 
“궁정혁명을 일으킨 것이죠. 궁예가 왕건 자신의 선대의 외가쪽인 아내 강(康)씨와 두 아들을 죽이고, 개성 호족을 억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또 궁예는 신라와 후백제를 치고, 갓 세운 나라를 굳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지나쳤습니다. 아직은 나라의 기반이 약했죠. 후백제가 발호하고, 신라가 건재했으니까요.  
 
북쪽에 발해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그런 터에 그 지지세력을 당시 민간에 널리 유행한 불교에서 찾고, 미륵불 신앙을 지나치게 믿었죠. 또 반역을 예방하기 위해 신하들과 백성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觀心法)에 심취하면서 아예 전제적인 폭군으로 변해갔습니다. 
 
이 때문에 근신들이 점점 그로부터 멀어져 갔고, 또 고구려 왕가의 외손인 왕건을 덕 있는 군주감으로 생각한 그 무리의 도움으로 결국 왕건이 정권을 빼앗아 나라 이름을 처음의 ‘고려’ 즉 ‘고구려’로 되돌렸습니다.”
 
-그것이 칭기스 칸 선조가 우리 역사에서 분파하게 된 계기와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건지요. 
 
“문제는 918년의 궁정혁명이 났을 때입니다. 금행의 후손인 발해대상랑이 하필이면 패자인 자기 군주 궁예 편에 섰다는 겁니다. 궁예는 왕건의 궁정혁명군에 밀려 자기의 궁성인 철원에서 머지않은 강원도 부양으로 도망했다가 미복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곡식 이삭을 따다가 백성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죠.  
 
이때 죽은 궁예의 시신을 수많은 승려가 호위하여, 고려를 떠나 오늘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서 장사 지낼 때 발해대상랑도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장례가 끝나고 그의 일행은 다시 그들 자신의 선조 간(키얀)과 님금(니쿠즈)이 들어갔던 전설적인 그 땅 발해서경인 아르카나 콘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쫓겨왔지만, 다행히 거기서 동족을 모으고 도리행 후손 지파의 하나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케) 종족과 합칩니다.” 
 
-후삼국이 분열하고, 왕건이 후고구려, 즉 고려를 건국할 때까지 발해가 건재했었네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다행도 잠시였습니다. 그 918년에서 8년 뒤 926년 발해는 불행히도 발해 왕가의 한 집안 지파가 7세기의 수와 당나라 시대에 통치했던 거란 땅에서 새로이 일어난 추장 야율아보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발해대상랑과 그 일행은 말갈의 고향인 백두산의 압록수원에 있는 별해진(別海津) 주변, 곧 강계와 삼수, 갑산 땅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별해진은 당시 소리로는 ‘바르카이-진’이고 ‘발해-진(渤海-鎭)’을 다른 한자로 쓴 지명입니다. 부랴트어와 몽골어로는 이 소리가 조금 변해 ‘바르고(발해)-진’ 또는 ‘바르가(발해)-잔’이라고 불립니다.”
  
 
영원히 이 땅을 떠난 칭기스 칸의 선조 
 
전 박사는 “하지만 그 뒤 몇 대 후손의 시절, 그러니까 918년과 926년에서 완안 아골타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때, 그러니까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의 시절에 그들이 영원히 이 땅을 떠나게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전쟁이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사실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쓰기로 하고 이번에 펴낸 제 책에서는 깊은 설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전쟁은 바로 지난 세기의 1950년대에 우리 땅에서 일어난 남북한 전쟁을 방불케하는 전쟁이 북쪽의 조신(女眞)과 남쪽의 고려 사이에 일어 난 것입니다.
 
바로 고려 윤관 장군이 무려 17~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신(女眞)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동원된 숫자는 엄청난 수의 군사입니다. 그로부터 약 490년 후인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에도 조선은 단 10만의 군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인구가 약 열 배는 늘어난 오늘날로 치자면 20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에서 북의 함경도로 쳐들어간 전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측 고려가 북측 조신(女眞)으로 쳐들어간 전쟁이죠.” 
 
-이 전쟁을 계기로 드디어 칭기스 칸의 선조들은 우리 땅으로부터 멀리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군요.  
 
“네, 그 때가 시기적으로는 아골타의 청년시대였습니다. 이 때 함경도에 살던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와 그의 숙부 ‘나친’, 곧 제가 볼 때 오늘날 함북 나진(羅津)을 관향이자 자기 이름으로 쓰던 이들의 시대에 그들은 이 땅 함경도를 떠납니다. 그들은 옛 발해 수도 동모산을 지나는 속말수(송화강)의 지류를 따라 흑수(흑룡강)의 윗물줄기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오늘날 남(내)몽골의 훌룬-부이르호를 거쳐서 더 서북으로 나아가 오늘날 몽골리아 동북부 러시아령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칼’은 몽골어로 ‘바이-갈’이라고 합니다. 이 못 이름의 뜻은 제가 보기에 이는 원래 말갈어로 ‘부여-골리(부여-고려)’ 호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 전쟁의 여파로 잘라이르(야라, 곧 함흥) 종족이 쫓기다가 카이도 8형제를 참살한 사건이 있은 후 카이도와 종숙부 나친이 오늘날의 바르고진으로 갔다고 《집사》는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금항아리의 세 아들이 지파, 즉 종족으로 분화되었는데 그 지파의 후손들이 전쟁을 계기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원래 고향땅에 남거나 혹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이동)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단,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전 박사는 결국 “또 다시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며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칸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등록일 : 2015-08-08 오전 8:44:00 | 수정일 : 2015-08-10 10:30

 

 

칭기스 칸, 발해 왕가의 후손임을 잊지 않았다.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3)- 전원철 박사 인터뷰

 | 이상흔 조선pub 기자

영화 <징기스칸>(By The Will Of Genghis Khan)의 한 장면.

'몽골’= 말골, 몰골, 물길, 모골, 몯골, 말갈, 모골, 무크리, 무갈 

 

전원철 박사는 칭기스 칸이 살던 오늘날의 몽골리아에는 칭기스 칸 자신의 시대까지 타타르, 케레이트, 메르기드, 콩그라트 및 나이만 등 여러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때까지 이 지방을 대표하는 통일된 나라 이름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칭기스 칸이 세상을 떠나지 얼마 안 되는 시대에 쓰인 페르시아어 사서 선별된 역사(Tarikh-igojide)도 칭기스 칸이 처음으로 이 지방명을 몽골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음을 지적했다.

 

칭기스 칸의 서로 다른 부족을 통일한 뒤 이 모든 종족을 대표하는 하나의 이름을 고안했는데, 바로 몽골이었습니다. 이 이름의 어원에 대해 후대의 학자들이 여려 어원설을 제시했죠. ()나라 때 팽대아(彭大雅)는 칭기스 칸에게 가는 사신으로 몽골을 방문하고 와서 쓴 자기 보고서에서 <몽골이 몽골어에서 은() 뜻하는 말인 멍거에서 왔다>고 해서 심지어 몽골의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믿었지요. 또 오늘날 부랴트 및 몽골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용감하다는 말뜻의 퉁구스어 망가가 어원이라고 봅니다.”

 

-이상하네요. 몽골 사람이면 한 번에 당연히 몽골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정상 아닙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정작 몽골인들이 자기 종족명이자, 국명의 뜻을 모르는 거죠. 마찬가지로 위대한 칭기스 칸이나, 그의 본 이름인 테무진(칭기스 칸)의 뜻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냥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비슷한 발음이 나는 단어에 꿰맞춰 놓고 이럴 것이다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그 말의 뿌리가 원래의 몽골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죠.

 

“‘몽골은 사실 말갈/몰골(말 골,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에 기원을 둔 말입니다. 말갈은 말 키우는 고을이라는 뜻인데 고구려 옛 소리가 몰 골 , ‘말 골입니다. 말을 제주도 방언으로는 아직도 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몰골이 선비(鮮卑) 시대에 와서 몯골’,  몰길’, 한자로는 勿吉(물길)’로 바뀝니다. 이는 몰 길’,  말 다니는 길이라는 말로 말 고을과 같은 말이죠.  말골이 결국 600년 세월이 흐른 뒤 몽골어 몽골이 된 것입니다.”

 

전 박사는 부랴트어(바이칼호, 내몽고 등지의 종족이 사용하는 말)에서는 지금도 勿吉(물길)’을 북방 한어(漢語)가 아니라, 남방 한어로 읽는 옛 소리인 묻갈리라고 기록한다 말갈어 몰골이 기원이 되어 삼국사기 당서 등에서는 말갈(靺鞨)’로 적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아랍어에서는 모골이라고 하고, 힌두어에서는 무갈제국처럼 무갈이라고도 하지요. 고구려를 옛 산스크리트어로 무쿠리(畝俱理)’, 다른 투르크 방언들로는 마크리 또는 베크린 등으로 부르는 것도 이 말의 변형들입니다.”

 

황금항아리 금행을 기준으로 본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 모든 몽골의 어머니로 불리는 알란 고와의 10대 손이 칭기스 칸이다. /저자 책

 

구전이나 전설이 아닌 족보로 기록된 칭기스 칸 선조 계보

 
-우리는 흔히 유목민은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서 선조에 대해서 알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칭기스 칸의 경우 선조들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이네요. 저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이 그냥 전설이나, 구전의 형태로 내려온 것을 후대에 와서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만에요. 한 왕조의 계보들 중에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만큼 수 많은 언어와 시대에 일관되게 기록된 것은 유럽은 물론 동서방 그 어떠한 왕조에도 없습니다. 라틴어 외에 기록문화가 별로 없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예 빼두고라도, 기록 잘하기로 이름난 아랍 및 페르시아와 지나(China)땅에서도 그런 경우가 없죠.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는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몽골어, 한문, 만주어, 티베트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와 타타르어 몇 개 방언, 부랴트어, 아르메니아어, 또 러시아어 등 10개 민족어 이상의 동·서방 여러 언어로 시대를 달리하며 동·서방에서 수10 종의 사서로 대대로 기록되었습니다. 같은 하나이면서, 이만큼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또 많은 언어로 기록된 왕가의 계보는 전 세계 그 어느 왕조에도 없습니다.”
 
-칭기스 칸을 야만적인 생활을 한 유목민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요. 그런 그들이 어떻게 족보를 기록하고, 전해 왔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서양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무지나, 몽골사에 관한 편견 때문에 이런 숨겨진 역사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선입관이 생긴 겁니다. 또 서양학자들은 자기네들이 그 야만적 동양의 한 종족 때문에 정복을 당하거나, 위협을 느꼈다는 자격지심도 존재했지요. 그래서 ‘야만적인 한 유목민족 출신의 칭기스 칸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전쟁을 통해서 문명세계를 정복했다’고 평가하고 싶었던 점도 있죠.
 
유목민 출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해왔던 겁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의 선조 족보는 단순하게 구전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정식 족보 이상 잘 정리된 형태로 쓰여져 책의 형태로 전해 왔습니다.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부르는 유럽과 세계 각지의 그 어느 문명종족보다도 더 문명적입니다.
 
유럽인들은 자기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지요. 또 수십만 명에 하나 드문 예외로 이른바 ‘family tree book(족보)’ 또는 ‘genealogy book(족보)’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귀족출신 가문에만 그렇고 그것도 5~6세대를 못 가지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우리 관습입니다.
 
가가호호가 수천년에서 수백년 전의 선조에 이르는 족보를 가지고 있지요. 그와 같은 전통을 가진 가문이 칭기스 칸의 가문이고, 나중에 칭기스 칸의 후손들이 자신의 왕가에 전해 내려온 선조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 바로 《몽골비사》와 제가 말씀드린 다른 서방 사서들입니다.”
 
전 박사는 “단순 구전으로 칭기스 칸 자신으로부터 자그마치 20대 전, 발해 반안군왕, 달리 진국공인 대야발까지의 조상들의 명단은 물론 그들이 한 행장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가 있느냐”며 “《사국사》는 대야발을 넘어서서 그 이전의 계보까지 보여주는데, 이를 합치면 적힌 것만 해도 근 30세대나 된다”고 말했다.
 
“이는 당연히 족보책을 보고 쓴 것입니다. 라시드 웃딘도 여러 번 자기가 쓴 《집사》에서 《황금의 책》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죠. 중요한 것은 이처럼 족보를 중시하는 민족은 전 세계에서 오직 한 민족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 조선민족, 한민족입니다.”
 
칭기스 칸의 시조 ‘황금항아리’의 정체
 
-이제는 칭기스 칸 선조가 어떻게 분화되어 나갔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지난 2편의 인터뷰에서 발해-당 전쟁으로 발해 서경 즉, 압록강네 군(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던 ‘키얀’과 ‘네쿠즈’ 후손들 중에 후에 ‘콩그라트 종족’이 먼저 그 지역을 빠져나왔다고 하셨는데.
 
“아, 네, 콩그라트 종족(지파)이 먼저 빠져나오고, 그다음에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 지역을 나옵니다. 콩그라트는 모골, 곧 말갈 종족 가운데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입니다. 이 콩그라트의 전설적 시조가 바로 대야발의 아들인 일하의 아들로 《집사》가 전하는 키얀에게 손자인 황금항아리입니다. 《집사》의 저자 라시드는 이 황금항아리에 대해 이름만 적어놓고, 그의 선조에 대해 적지 않았습니다.
 
그를 제가 추적해 봤습니다. 페르시아어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는 한자로 옮기면 ‘금관(金罐)’인데, 이는 ‘금 칸(金干)’, 달리 표현해서 ‘금 한(金汗)’과 같은 소리이고, 뜻은 ‘황금 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타타르어 사서에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라는 말로 투르크어로 번역하여 적었는데, 때마침 공교롭게도 몽골인들은 조신(女眞)의 금(金)나라 군주를 ‘알탄 칸(금 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조신(女眞)의 금나라 군주의 시조가 바로 《고려사》가 말하는 ‘금행(今幸, 金幸)’입니다. 그런데 나아가 다시 <투르크의 계보>, <행운의 정원> 및 <시바니의 서(書)> 등을 보니 그가 바로 키얀과 네쿠즈 중에 ‘키얀의 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발의 아들 일하, 일하의 아들 ‘간(澗)’에게 손자로 태어난 이가 바로 금행, 황금칸, 황금항아리이죠. 계보 상의 세대로 따지면, 황금항아리는 발해 왕가의 제2시조인 야발의 4대손입니다. 또한 금시조 함보 3형제의 부친이 되는 것이죠.”
 
-지난 2편의 인터뷰에서 ‘황금황아리’가 ‘서해용왕’이라고 했는데요.
 
“그렇습니다. 황금항아리는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 승(僧: 존경받는 직위를 의미, 요즘의 ‘장로’에 해당)’이라고 나와있고, <고려세계>에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용왕의 딸과 혼인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고려세계>는 또 《성원록(聖源錄)》을 인용하여 ‘의조(懿祖: 곧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처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 두은점 각간(豆恩坫角干)의 딸이다’고 합니다. 서해용왕의 실명이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이라고 밝히는 것이죠.
 
그런데, 부랴트 전승에는 그가 ‘토곤 테무르 칸’으로 나옵니다. ‘두은(豆恩)-’의 옛소리는 ‘토곤-’이고 ‘-점(坫)’의 옛소리는 ‘-텸무ㄹ’입니다. 우리 옛말의 ‘ㄷ/ㅌ’이 ‘ㅈ/ㅊ’으로 점차 변하는 구개음화를 생각하면 금새 이해가 가지요. 또 ‘-ㄹ’밭침은 한자에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 변화는 금세 이해가 갑니다. 다음으로 ‘각간(角干)’은 투르크어 ‘카간(Kaghan)’, 곧 몽골어로 ‘카안(Khaan)’, ‘칸(Khan)’입니다. 이처럼 두은점 각간이나 토곤 테무르나 고려어로 된 것이냐 부랴트어로 된 것이냐만 다를뿐 같은 이름입니다.”
 
“우리 고대어 표기 방식인 이두와 향찰에 대한 이해 필요”
 
개성 고려박물관에 소장된 고태조 왕건의 영정.
-서해용왕이 발해-고려왕이라는 말을 도참설(圖讖說) 비문(秘文)의 비밀코드로 적는 표현방식이라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죠.
 
“우리말 표기법에는 한자로 우리말 소리를 그대로 적는 이두(吏讀)와 우리말의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향찰(鄕札)이 있습니다. 예컨대 ‘고려’는 우리말 ‘고을’과 그 옛소리 ‘구루(城)’의 소리를 한자 소리만을 활용하여 적은 것이고, 이것이 이두인데, 향찰의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중천왕’은 또는 ‘중양왕’이라고도 하는데 삼갈 이름은 연불이고 동천왕의 아들이다(中川王 或云中壤 諱然弗 東川王之子)라고 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제5 중천왕조>를 보시죠.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왕이름이 3개나 있습니다. ‘中川王(중천왕)’, ‘中壤王(중양왕)’ 그리고 삼갈 이름(諱) ‘然弗(연불)’입니다. 왜 한 사람의 이름이 3가지일까요. 힌트를 하나 드리죠. 이 3개의 이름은 다 하나의 소리이고 한 가지 뜻입니다. 감이 좀 잡히나요?”
 
-이 세 가지가 다 한 가지 소리이자, 한 가지 뜻이라고요?
 
“답은 이 세 이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두나 향찰을 안 쓰고 한글을 쓰는 우리네가 ‘中川王’은 ‘중천왕’, ‘中壤王’은 ‘중양왕’ 또 ‘然弗’은 ‘연불’로만 읽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식 향찰로 읽어 봅시다. 한자로 쓰되 우리말로 읽는 방법입니다. ‘中’은 ‘가운데 중’이고 ‘천(川)은 내’이고, 또다시 ‘中’은 ‘가운데 중’이고 ‘壤’은 ‘땅 양’입니다.
 
그런데 ‘한 가위’ 또는 ‘한 가우’라고 우리말로 할 때 가우/가우는 한자로 중(中)입니다. 川은 내이고 壤은 나/라입니다. 그러면 中川은 ‘가우내/가우래’이고 ‘中壤’은 ‘가우라’입니다. 또 ‘然弗’은 오늘날에는 ‘연불’이라고 읽지만, 옛소리는 ‘캰부르’입니다. 然자 옆에 개 ‘견(犬)’이 보이죠? 그것이 然자의 옛소리입니다. 이제 왜 이 세 이름이 다 같은 소리이고, 뜻인지 감이 잡히시는지요?”
 
-솔직히 ‘가우내/가우래’와 ‘가우라’는 비슷하긴 합니다만, ‘캰부르’가 어째서 같은 소리인지는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이 세 소리는 모두 다 우리 고어로 ‘가우라이’라고 들렸던 ‘고구려’라는 소리이고 뜻도 같은 말입니다. 고구려는 옛날 한자 소리로도 방언에 따라 ‘카부려, 고리, 까오리, 코오라이’ 등으로 소리가 나고, 오늘날 영어나 불어, 러시아 등 서양어로는 ‘코레아, 꼬레, 까례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중천왕 또는 중양왕 연불의 이름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한자들을 소리로 읽지 말고 뜻으로 읽어 보면 앞이 두 가지는 바로 ‘가우(중)-라(양/천)’이고 ‘연불’은 ‘캰부르=큰 부려=커부려=큰 부여=고구려’입니다.  여기에 다가 ‘왕’을 보태보십시오. 결국 그의 이름은 ‘가우-라=고-구려=커-부여-왕’이라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한자로 쓰고 우리말 소리와 뜻으로 읽는 표기방식이 향찰이고, 한자의 소리를 빌려, 그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말 소리를 적는 것이 이두입니다. 한자의 소리로 우리말 소리를 적은 ‘然弗’은 이두이고, 앞의 두 이름은 한자로 적되 우리말 소리로 읽는 것입니다. 바로 고구려 향찰이죠.”
 
 
고구려 향찰이 신라 향찰보다 먼저 쓰여
 
전 박사는 “우리 학자들이 신라에만 향찰이 있다고 생각하고 고구려나 백제, 발해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 왔다”며 “그런데 한자의 전래과정에서 고대 지나 대륙과 가까운 고구려나 백제가 한자를 먼저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가장 멀리 떨어진 신라가 먼저 받아들였을까 하는 문제는 상식의 문제에 속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고구려와 백제가 한자를 신라보다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간단한 진실이 학자들의 눈에는 뜨지 못하니, 왜 같은 이름이 다른 한자로 적혀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겁니다. 중천왕은 고구려 제12대 왕이고, 248년~270년간에 왕위에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왕들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하다보니, 두 개는 고구려식 향찰로 세 번째 것은 고구려식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그렇군요. 신라 향가 때문에 당연히 신라에만 향찰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전하는 향찰로 적은 글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나오는 신라 향가 14수가 전하므로 신라에만 향찰이 있는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비록 고구려 향가는 전하는 것이 없지만, 고구려 향찰은 오히려 신라보다 먼저 쓰인 것을 증명하는 왕 이름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 드린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려왕(高麗王)의 소리만 따서 또 다른 우리말로 읽으면 바로 ‘고렝이/구레이 왕’이죠. 이것이 또 다른 향찰의 한 방법입니다. 이 ‘고렝이/구레이=고려’를 다시 이번에는 한자로 뜻 적기를 하면 바로 ‘용왕(龍王)’, 곧 ‘구렁이 왕’이 됩니다.
 
또 우리 서쪽의 바다 ‘서해(西海)’는 ‘발해(渤海)-만’이라고 하는 것처럼 발해입니다. 그러면 ‘서해’는 ‘발해’이고, ‘용왕’은 ‘고레이=고려왕’이라는 말이고 이제 최종적으로 그 두 말을 합치면 ‘서해용왕’은 바로 ‘발해-고려왕’이라는 말이 되죠. 이것이 바로 도참설(圖讖說) 비문(秘文)의 비밀코드로 적는 표현방식입니다만, 이 풀이방법을 알면 쉽게 이해가 가죠. 도참설 비문에는 이런 표기방식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도참설 비문은 뭔가요.
 
“한자의 뜻 적기를 활용한 일종의 비밀코드입니다. 주로 비밀스러운 미래 예언 사상을 쓸 때 많이 활용했습니다. 왕건이 궁예가 세운 고려에서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문 문장이나, 군데군데 비밀코드를 넣어 퍼뜨린 것도 그 가운데 하나로 글의 비밀코드가 이두나 향찰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세계>가 재인용하는 글을 보세요. ‘익재(益齋)가 인용한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에는 ‘국조(國祖)의 성은 왕씨다’고 하는데, <금사 국어해 성씨>도 입을 맞추어 말하듯이, 금나라 완안(完顔)씨도 바로 왕(王)씨입니다. 이 왕씨는 바로 대씨(大氏)와 같은데 왜냐하면 완안씨의 시조가 대함보이기 때문이고 그는 대금행의 아들입니다.
 
결국 황금항아리 금행은 대(大)씨이자 달리 왕건과 같은 왕(王)씨이고, 그래서 그 8대손 완안아골타도 <금사 국어해 성씨>에 따르면 왕씨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골타의 8대조 금행은 우리나라 평주의 승이고, 《집사》에 따르면, ‘왕 같은 사람’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 곧 ‘토곤 테무르 칸’입니다.
 
이 평주승 금행은 바로 평주인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과 같은 지방 사람이고, 다 같이 그 지방의 장로이고 왕같은 인물인데, 그 성씨도 같고 시대도 같죠. 또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 곧 발해고려왕이 바로 금행인데, 평주에서 이 서해용왕 칭호를 취한 이는 바로 황금항아리, 금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는 또 완안 아골타의 선조입니다.”
 
-그 황금항아리가 우리 역사에서 왜 중요한 인물입니까.
 
“황금항아리 금행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입니다. 방금 말한 대로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가 바로 <고려세계>의 서해용왕인데, 이 분은 단지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7세 선조 금시조 함보의 아버지인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는 나아가 칭기스 칸의 1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죠. 동시에 그는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가계인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고래의 아들 ‘콩크라트’에게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는 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등 동서양의 여러 역사적으로 유명한 왕조의 혈통 상의 고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선조가 '솔롱고(고려)'에서 왔음을 말하는 솔롱고 뷰라트인의 사진./저자 책
 
 
세 지파로 나뉜 칭기스 칸의 선조들
 
-그 연관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요.
 
“《집사》에 황금항아리 아들 세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추를룩 메르겐’, ‘쿠바이시레’ 그리고 ‘투스부다우’입니다. 이 이름들은 얼핏보면 매우 낯설게 들립니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이는 사실 우리말인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 칭호와 말갈어 칭호, 그리고 한자로 된 칭호입니다. 이들이 바로 《금사》에 나오는 함보 3형제, 즉 카고라이(아고래, 고구려), 함보(큰보, 걸가, 걸씨, 대씨), 보코리(무구리, 고구려)입니다.
 
이 3형제가 각기 당시 신라의 황해도 평산에서 살다가 남국 신라의 그 땅 침략에 더불어 발해내지에서 일어난 발해 왕족간의 내분이라는 내외적인 난국을 맞습니다. 이 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큰형 아고래는 평산에 남아 신라와 싸우고, 둘째형제 함보와 막내 형제 보활리는 당시 발해의 반안군의 두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들어가 살게 됩니다.
 
이 때문에 나중에 그 후손들이 별도의 관향, 곧 다른 본관을 가진 지파, 즉 종족을 이루게 됩니다. 신라로 치자면 경주김씨 안동김씨, 강릉김씨라는 같은 문중의 다른 관향, 본관을 취한 것입니다.큰형 아고래의 콩그라트 종족, 둘째 금시조 함보의 예키라스 종족, 그리고 막내 형제 보활리의 코를라스 종족이 그것입니다.”
 
전원철 박사는 “이 가운데 막내 보활리의 증손자 ‘코를라스’가 바로 칭기스 칸 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종족 지파의 시조”라고 하고 “큰형의 지파인 콩크라트에서는 훗날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곧 말갈말로 ‘부르테 부인’ 및 ‘부여대(씨) 부인’으로 풀리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콩그라트는 ‘큰 고려씨’, 곧 ‘고(高) 구려씨’라는 의미입니다. 《고려사》에 오늘날 몽골리아 지방의 철륵(鐵勒)종족과 함께 왕건에게 병사를 주어 신라를 무찌르게 했다는 ‘콩거라(驩於羅, 환어라)’ 족입니다. ‘驩於羅(환어라)’의 옛소리가 ‘콩고라’, 곧 ‘큰고려=커구려=고구려’입니다.
 
알려진 대로 함보 가문에서는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를 배출하는데 《집사》에는 ‘예키라스 종족’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조선시대 실학자 한치윤의 《해동역사》가 ‘삼한(三韓)의 진한(辰韓) 역라씨(役拏氏)’라고 기록한 종족입니다. 황해도 평산이 자주 신라에 점령당해 ‘진한 땅의 역라씨’이라고 적은 것이죠.
 
마지막으로 막내 보활리는 《금사》에는 갸라이(耶懶, 야라)로 적히고, 《고려사》에는 ‘코라이땅(曷懶甸, 갈라전)’으로 적히고,《원사》에는 ‘코를라(合蘭路, 합란로)’로 적힌 오늘날의 함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땅의 이름 ‘코를라’ 본관을 따서 여기에 ‘씨(氏)’=‘스’를 붙여 자기 칭호로 쓴 사람이 바로 《집사》가 한자는 빼고 그 소리만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코를라스’로 기록한 인물입니다.
 
그는 칭기스 칸의 11대 조부이고, 칭기스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알란 고와의 아버지지요. 이 가문은 청나라 때 만주와 몽골 씨족 계보를 밝힌 《황조통지》에서는 ‘고려나씨(高麗那氏)’로 기록된 가문입니다. 좀 이해가 가시나요?”
 
 
뿌리 의식을 잃지 않은 칭기스 칸 가문
 
반안군왕 대야발의 형인 발해고왕 대조영.
전 박사는 ‘코를라스’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으로 적혔는데, 이는 곧 ‘고려-나라-씨-말갈’이라는 뜻이고, 부랴트 전승들에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 또는 ‘코리도이 메르겐(고려씨 말갈)’으로 나온다고 덧붙인다.
 
“‘메르겐’은 오늘날 몽골어, 카자흐어 등에서는 ‘활 잘 쏘는 싸람’과 ‘현명한 사람’, ‘부족장’으로 이해되지만, 이는 원래 활 잘 쏘고 현명을 추구하는 군주들인 발해왕가의 관향인 ‘말갈(靺鞨)’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금나라 말로는 ‘메르간/베르겐(勃勤, 발근)’이라는 말로도 바뀌었는데, 이는 ‘씨족장’, ‘문중장’을 말합니다. 원래 대조영, 대야발의 말갈가문의 사람만이 씨족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결국 칭기스 칸의 뿌리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서 시작해서, 그 4대손인 황금항아리 금행으로 이어지고, 바로 이 금행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 보활리의 3대손 코를라스의 후손이 바로 칭기스 칸의 코를라스 종족이 되는 겁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이자면, 대야발→아들 일하→간(키얀)→키얀의 아들→금행→3아들 중 보활리→ 아들 콩글리우드(고구려씨)→바르가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 랑)→코를라스(코리라르다이 메르겐)→알란 고와라는 계보입니다.”
 
-결국 칭기스 칸 가문은 왕족으로서 가문에 대한 뿌리 의식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칭기스 칸은 ‘진국왕(震國王)’이라는 말인데, 그 자신이 정벌하는 금나라와 송나라 말기의 한자 소리로 읽은 ‘친기 칸’이라는 소리, 곧 ‘진국왕=발해왕=고려왕’이라는 말입니다. 칭기스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우리 사람들이 이른 바 ‘중국’이라고 잘 못 부르는 지나 땅을 정복하고 대원국, 원나라를 세웁니다.”
 
고구려 왕가의 후손임을 자각
 
전 박사는 “이 때 마르코 폴로가 서방에서 그의 원나라를 찾아오는데,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불행히도 감옥에 갇힌다”며 “이때 감옥 속에서 친구에게 구술하여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우리가 《동방견문록》이라고 부르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 25번이나 칭기스 칸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단 한 번만 빼고 그의 이름은 항상 ‘친기 칸(Chinghi Kane)’으로 나옵니다. ‘칭기-스 칸’이 아니구요. 그런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르코의 시절에 몽골인들이 남쪽 오랑케라는 뜻에서 ‘만지(蠻子)’라고 불렀던 송나라 백성들의 남방한어로 ‘진국왕(震國王)’은 ‘친귀(기) 칸’이었기 때문이죠. 한자를 몰랐던 그 기록자는 마르코가 말하는 대로 이 한자의 당시소리를 토스카나 방언으로 적은 것이죠. 이 사실이 또 한 번 ‘칭기스 칸’의 진정한 소리와 그 뜻을 알려줍니다.”
 
-‘테무진’이란 이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시죠.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와 일가친척 부락인들은 칭기스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라고 자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게 고구려 제 3대왕 ‘대무신=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준 겁니다. 테무진 자신으로 말하자면, 스스로가 종친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를 취합니다. 이는 테무진 스스로가 자신이 고구려에서 나온 발해국 왕의 후손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몽골이라는 이름을 보세요. 그는 당시에 땅이름조차 없었던 오늘날의 몽골리아에 있던 부족들을 통일하고 ‘몽골’을 창설하는데, 그 ‘몽골=말갈=말고을’입니다 고구려-말갈이라는 두 이름 가운데, 자기가 세운 나라를 친족인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말갈’, 곧 ‘몽골’을 선택한 겁니다. 테무진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죠. ‘조선반도’ 안에 있는 우리와 함께 말입니다.”
 

등록일 : 2015-08-15 오전 7:41:00 | 수정일 : 2015-08-17 15:44

 

 

 

칭기스 칸의 세계정복 신의 징벌 전()’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4)- 전원철 박사 인터뷰

 | 이상흔 조선pub 기자

등록일 : 2015-08-22 11:07   |  수정일 : 2015-08-24 10:25

 

부족을 통일해 나가는 칭기스 칸. 영화 <몽골>의 한 장면.

 

(3편에 이어 이어집니다. 마지막회)

 
칭기스 칸은 세계 정복자라기 보다 세계 징벌자
 
-결국 이렇게 1300년 동안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칭기스 칸 선조의 비밀을 푸셨다는 건데, 지하에 있는 칭기스 칸이 이 사실을 알면 무척 기뻐할 것 같습니다.
 
, ,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 ‘지하가 아니라 제가 본 사서에는 그가 하늘로 갔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제 머릿골 속을 전기와 칼날처럼 번개처럼 스쳐가는 어떤 계시와 같은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솔직히 매일 밤 그의 넋이 저한테 찾아와 자기 자신을 찾아 달라고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칭기스 칸의 혼령이 있다면 동·서방의 학자들이 그의 선조의 이름들을 그 무슨 짐승들의 이름으로 죄다 바꾸어 두고, 또 한편은 위대한 정복자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냉혹한 전쟁광이나, 살인마처럼 그리는 데 대해 넋이라도 만일 있다면 어찌 유감이나 원한이 없었겠습니까.”
 
전 박사는 이번에 펴낸 책 1권과 2권에서 칭기스 칸의 행적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의 선조들에 관해서 촛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칭기스 칸의 업적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조금씩은 알고 있지만, 그의 선조에 관해 아는 사람이 없고, 또 그 선조들이 우리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3편의 인터뷰에서 칭기스 칸 선조들 계보를 이야기했으니 이제부터는 칭기스 칸 자신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봤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칭기스 칸은 동·서양을 벌벌 떨게 한 무자비한 정복자로 각인돼 있는데요.
 
칭기스 칸의 몽골리아 부족통일이나, 그의 이른바 세계정복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세계 정복자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세계 징벌자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비록 수많은 희생과 파괴를 동반한 여러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었지만, 거꾸로 그것을 통해 그는 힘센 부락과 약한 부락, 강한 나라와 약소국, 더 큰 나라와 좀 더 작은 나라들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침략과 억압의 전제적 폭군의 세계를 징벌한 후 약하고 강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족들이, 강대국과 약소국이 좀 더 평화롭고 정상적으로 사는 세계를 추구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좀 역설적인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칭기스 칸의 어떤 점이 그렇다는 것이죠?
 
칭기스 칸은 남의 땅을 침략하여 자기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자기가 통치하는 부족이나 나라를 더 크게 만들려는 목적에서 무모한 희생을 강요했던 여러 제국주의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독자들 가운데 그에 관한 사서들을 읽은 분들이 있다면, 저와 공감할 분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원치 않았던 징벌전으로 부족을 통일해 가는 칭기스 칸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주시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예컨대, 테무진이 칭기스 칸이 되기 전 최초로 전쟁을 통해 정복하는 메르키드 종족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이 종족과의 싸움은 테무진이 최초로 몽골의 여러 다양한 부족을 공격하게 되는 최초의 사건인데, 그 후의 그의 이른바 정복활동 3가지 형태 가운데 그 3가지 대부분의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한 전쟁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테무진의 메르키드 종족 공격은 결코 정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원치 않은 정복을 강요한 사건에 기인했습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 칸의 원치 않은 정복 강요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테무진은 나이 9살에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의 부족 올코노트 종족을 찾으러 갔다가 뜻밖에 콩그라트 종족의 데이 세첸을 만나 그 딸과 정혼했다. 나중에 테무진이 커서 다시 데려온 부인이 부르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은 어느 날, 메르키드 종족이 300명의 전사를 동원하여 새벽녘에 쳐들어와 그녀와 배다른 형제 벨구데이의 어머니를 납치해 갔다. 바로 이들을 되찾기 위해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옹칸과 또 다른 몽골 씨족인 자다란 종족 자모카의 힘을 빌려 탈환전쟁을 벌인다.
 
그다음 타이치오드 종족을 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메르키드 종족을 치고 종친들의 추대를 받아 테무진은 처음으로 자기 종족의 칸,  부족장이자 오늘날의 종친회장으로 칭기스 칸의 칭호를 취했다.
 
그때 이를 시기한 같은 부족의 경쟁자 자모카와 그에 들러붙은 테무진의 족친들인 타이치오드가 싸움을 걸어온다. 그는 텡게르(하늘)의 뜻으로 이를 이긴다. 이후 칭기스 칸은 나중에 몽골리아라고 부르게 될 그 땅에서 여러 다른 종족들을 통일하게 된다. 결국 칭기스 칸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종족이 먼저 칭기스 칸에게 침공할 때 이를 방어한 전쟁에서 다른 종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결과 몽골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다음은 칭기스 칸이 타타르 종족을 친 계기는 금나라와 타타르 사이의 전쟁이다. 이때 그는 옹칸과 함께 타타르족을 협공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그의 나이 9살 때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를 독살했기 때문이다.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부인과 아들을 정혼시킨 뒤 아들을 콩그라트 부족에 데릴사위로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예수게이 바아타르를 타타르 종족이 초청하여 독이 든 음식을 먹여 살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타타르 종족은 테무진 탄생 이전에 타타르 족 그들 자신에게 딸을 주면서 사돈관계를 맺으러 우호의 길을 간 칭기스 칸의 종조부 둘을 오히려 사로잡아 금나라 보내 나무 당나귀에 못 박혀 죽게 했다. 이처럼 피맺힌 한에 차 있던 칭기스 칸에게 그들(타타르 종족)이 자모카와 연합하여 쳐들어온 것이다. 결국 이 전쟁은 그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칭기스 칸의 방어에서 시작한 복수전 내지 징벌전이다

1206년 오논강 상류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추대된 칭기스 칸.

 

두 번째 칸의 자리에 오른 후 금나라에 복수 결심
 
다음은 케레이트 종족과의 전쟁. 칭기스 칸은 한 때 자신이 의붓아버지로 모셨고, 친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케레이트의 옹칸과 원하지 않은 전쟁을 벌인다. 이 경우도 칭기스 칸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첫 도전에 실패한 자모카의 꾐에 빠진 옹칸의 아들이 끈질기게 권유하자, 이에 못 이겨 옹칸은 내 아들(테무진)”을 외치면서 결국은 칭기스 칸에게 선제 공격했다.
 
칭기스 칸은 이 전쟁을 피하려고 계속 물러나 도망하며 싸움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자기가 예수게이 바아타르 친아버지 대신에 그를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게이 바아타르와 자기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을 여러 번 상기시키면서. 그러나 케레이트는 진격해 왔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칭기스 칸도 결국은 대적했다. 그 결과 역시 이를 텡게르의 뜻으로 이겼다.
 
이어지는 나이만의 칭기스 칸에 대한 공격도 칭기스 칸의 방어에서 시작했다. 이 전쟁도 역시 이기고 나이만 왕은 죽고 그 아들은 카라 키타이(‘서료라고도 하며 오늘날 동투르키스탄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어지는 땅에 있던 야율대석의 망명정권)로 도망친다.
 
이 싸움이 끝나, 1207년 그는 이제 자기 몽골 종족만의 칸이 아니라, 모든 여러 서로 다른 당시 몽골리아 땅 여러 부족 모두의 카안으로 두 번째로 칭기스 칸의 자리에 오른다.
 
바로 이때를 이어서 그는 탕구트와 금나라를 친다. 탕구트는 거기로 도망간 메르기트, 나이만 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금나라는 예전에 칭기스 칸의 증조부 카불 칸, 곧 커부려(큰 부여=고구려) 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이다. 칭기스 칸은 하늘에 이 원한을 갚도록 해달라고 기도한 뒤 후일 복수의 전쟁으로 금나라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대학살을 부른 호라즘 제국의 정벌 계기
 
전 박사는 대체로 칭기스 칸을 세계 정복자라고 부르는 긍정적 평판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그를 살인마로 오해되게 한 계기를 준 대학살을 부른 호라즘 제국의 정벌의 경우를 이제 한번 보자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경우 칭기스 칸이 호라즘 샤(황제) 무함마드와 그 아들 잘랄 웃딘의 호라즘 제국을 정복한 동기와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이 제국은 당시 이집트와 유럽, 그리고 아시아 사이에 있는 광대한 아랍, 이란 및 중앙아시아 영토와 아프가니스탄 인도 북부에 걸치는 땅을 속령으로 거느린 대제국이다.
 
당시의 3개의 세계, , 샤마니즘과 불교가 어우러진 아시아와 기독교 유럽세계를 잇던 중간지대가 바로 이슬람세계다. 이 때는 무슬림 아랍과 기독교 유럽은 이미 십자군 전쟁도 여러 번 치고 아직도 이를 계속하고 있던 때다. 그곳의 최고 권력자는 오늘날에도 유럽인들이 간간히 농담하듯이 말하는 동방의 눈이 찢어지고, 머리색이 검은 칭기스 칸의 몽골사절을 무시했다.
 
호라즘 샤는 군주다운 예의로 외교사절단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몰살시키고, 그 막대한 물품마저 강도처럼 빼앗아 버린 것이다. 칭기스 칸은 이에 분개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 군대는 가는 곳마다, 복속하는 이들은 살려주고 저항하는 도시들에서는 때로는 수 천명, 때로는 기록에 따르면 수 만명도 학살했다. 이것이 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 바가 컸다.
 
하지만 이 싸움의 계기와 과정을 보면, 그것은 바로 호라즘 샤와 그 아들 잘랄 웃딘 등의 도발 때문이라는 것이 명백하고, 또한 칭기스 칸의 의도와 의지도 명백했다.
 
이에 앞서 칭기스 칸은 호라즘 샤의 상인들이 온 것을 계기로 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이 가져온 값비싼 직물, 금은보화에 후한 값을 쳐주고, 그들이 돌아 갈 때 이번에는 자신이 대사들과 대상단, 그리고 자신의 친서를 호라즘 샤에게 보내 우호와 친선, 자유무역을 제안했다. 집사에는 칭기스 칸이 호라즘 샤의 상인들을 극진한 우호로 접견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호라즘 샤는 당시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온 상인들과 사신단을 통해 전달한 칭기스 칸의 우호와 친선의 메시지를 묵살하고, 칭기스 칸이 몸소 몽골 각 종족으로부터 선발하라고 시켜 한 조를 지어 보내온 450명의 사신단조차도 모두 몰살하고 그들이 수천리를 넘어 가져온 막대한 재물을 빼앗았다.
 
 
호라즘 샤에 대한 신의 징벌전을 시작한 칭기스 칸
 
이 소식을 들은 칭기스 칸은 분개하며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지만 오만한 호라즘 샤는 이를 다시 무시했다.
 
칭기스 칸은 드디어 텡게르(하늘)”의 이름 아래 이 나라를 징벌하기로 맹세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 결과 벌어진 징벌전에서 호라즘 제국의 샤 무함마드와 그 아들 잘랄 웃딘은 심지어 이라크, 페르시아, 인도의 델리까지 이리 저리 도망가는 신세가 됐다.
 
몽골군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소탕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몽골군은 이란, 아라비아 반도, 우즈베키스탄과 아제르 바이잔, 인도, 아프가니스탄 등등 도처에서 추적전을 펼치고 이 추격전에 방해하거나 적과 연합하여 대항하는 나라들을 정복한다.
 
호라즘 샤를 지지한 킵차크인들이 심지어 남러시아 킵착 초원, 헝가리와 러시아로 도망쳐 러시아인들과도 연합하여 대항했다. 칭기스 칸의 아들 주치의 몽골군은 이에 맞서 러시아와 동유럽도 치게 된다. 이 과정을 후세의 사람들은 세계정복이라고 표현했다. 이 싸움 때 칭기스 칸은 그가 정복한 땅의 백성들과 아미르(, 재상 등)들 앞에서 나는 너희들에게 신의 징벌이다고 선언한다.
 
전 박사는 이처럼 칭기스 칸의 이른 바 세계 정복전은 당시의 세계가 가진 전제와 폭군의 행패에 대항한 영구평화를 위한 최후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전 박사의 이야기.
 
칭기스 칸이 세상을 떠난 이후 아들과 손자들이 이어간 정복전쟁은 당시 칭기스 칸이 못다 끝낸 이 징벌전쟁의 계속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전쟁을 피하기 위기 전에 사전에 갖가지 외교적 노력을 취하고 전제적 폭군들을 향해 사죄하고 복속할 것을 적어도 러 번 요구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칭기스 칸을 얕잡아보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칭기스 칸은 이런 과정이 지나서야 결국 정벌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또 호라즘 샤를 추격하는 이 대장정에서 몽골군은 말발굽이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성들과 도시에 우선 먼저 사신을 보낸다. 성주에게 내게 복속하면 그냥 지나갈 것이요, 저항하면 절멸시키겠다는 평화와 위협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하면서 살륙을 피하려고 하는 노력을 관행으로 한다.
 
그래도 현지의 아미르들과 백성들이 복속하지 않고, 오히려 칭기스 칸의 메시지로 설득하던 그의 사신들을 죽이거나, 그들에게 적대행위를 하곤 했다. 그후에야 몽골군은 화살과 창 끝을 적에게 돌렸다.
​이상학 화백의 처인성 전투 기록화. 용인 부근 처인성에서 벌어진 고려-몽골 간 전투 상상도다.
 
 
몽골이 고려와 전쟁을 한 이유
 
-그가 단순한 제국주의자나, 전쟁을 통해 자기 자신 또는 자기 민족, 나라의 권력을 극대화하려 한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시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 또는 현대의 히틀러나 일본천황 등과는 다르다는 말씀이군요. 이들과 달리 칭기스 칸의 세계정복은 일종의 징벌적 성격이 강했다는 말씀이신데, 그렇다면 고려의 경우는 어떤가요.
 
이들 서방과 벌인 싸움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심지어 고려와의 전쟁도 몽골입장에서 보면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고려를 침공한 몽골에 반감을 가진 우리들의 감정도 100% 이해하고, 또 모든 전쟁은 불행을 동반한다는 면에서 몽골의 고려 침공을 정당화할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독자들 가운데는 몽골의 고려침략을 정당화하려고 하느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한번이라도 몽골 측의 입장이 되어 당시 상황을 한번 살펴봐야 고려 몽골 간의 전쟁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몽골은 고려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는데요.
 
말할 것도 없죠. 중요한 점은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당시 다른 나라들과는 처음부터 매우 특이하였고, 달랐다는 겁니다. 칭기스 칸이 펼친 세계 정복전의 길 위에서 제가 아는 한 고려만이 몽골의 형제국이 되었던 유일한 나라입니다.”
 
-복속관계가 아니고, ‘형제국이 되었나요?
 
복속관계는 나중에 이야기고, 우선 형제국이 된 계기를 말씀드리면, 칭기스 칸 생전에 거란 왕조의 금산태자 일당이 대요수국을 세우려다 몽골에 쫓겨 도망가는 길에 고려의 강동성(평안남도 강동)으로 처들어가 점거하고는 경기도를 거쳐 충북 제천까지 처들어 아수라장을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추격하던 몽골은 고려에게 지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안 그래도 안마당에 붙은 불과 같은 이 사태에서 고려는 당연히 협조했겠죠. 이후 금산태자 일당 수십만을 이기고 두 나라는 골세(만년)에 이르는 영원한 형제국이 되기로 맹세합니다. 이는 고려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칭기스 칸의 역사상 형제국을 논의한 경우는 이것이 유일한 예일 것입니다.”
 
 
형제국에서 적국으로
 
-거란을 협공으로 물리친 것을 계기로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씀이신데, 이런 형제국이 왜 전쟁을 하게 되는지요.
 
형제국이 된지 8년 후 몽골사신 착고여(着古歟, 저고여라고도 함)가 살해되는데, 우리 국사에서는 몽골이 이 사건을 단순한 침략 명분으로 활용하고 고려를 침공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국사책에는 자세히 안 나오지만 원사 외이열전 해동역사 제14에 보면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는 형제국이 되자고 한지 얼마 후 형제관계를 맺은 몽골 장군 찰라(劄刺)를 살해했고,  8년도 못 가서 고려는 몽골 사신 착고여를 압록강에서 암살했고, 그 외에도 고려는 이를 책망하러 온 몽골 칙사에게 활을 겨누어 쫓아내려고 하는 행위를 하기도 하는 등 5번의 도발적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순전히 몽골 입장에서 보았을 때 충분히 고려를 정벌할 명분이 있었다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호라즘 샤의 행동이나, 금나라에 대해서는 즉각 행동을 개시한 칭기스 칸 자신은 생전에 고려를 치라고 하지 않습니다그 아들인 어거데이 칸 시절에 이르기까지 고려에게 사신을 보내 몽골측은 여러 차례 사죄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방금 말한 그 고려의 5가지 적대행위를 하나 하나 열거 하고는 이를 이유로 들어 고려 정벌을 시작합니다.”
 
전 박사는 사료 상에는 송나라나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한대로 몽골도 조공을 요구했다는 기록은 분명 보이지만, 몽골 측이 먼저 고려에 대해 적대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고려는 칭기스 칸 때 형제국이 된 뒤 5번이나 연이어 적대행위를 했고, 이것이 결국 전쟁의 빌미가 됐다고 말했다.
 
물론 고려가 몽골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한 이유에는 오늘날 우리 국사책이 말하듯이 몽골이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는 등 그 나름대로 고려 측의 고충도 있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 몽골은 이미 세계정복자가 되어 있었습니다고려는 그 몽골의 힘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제가 몽골의 고려 침략이 정당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다섯 가지 고려의 적대행위를 몽골 측에서 본다면 고려 정벌전도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를 결국 철저히 몽골 입장에서만 이 전쟁을 보자면 고려 침략은 앞서 다른 나라를 징벌한 것처럼 악행을 한 적대국에 대한 응징 차원이 되는 겁니다.”

MBC 드라마 기황후의 한장면. 기황후는 4명의 고려출신 몽골 제국 황후 중에 한명이다. 몽골 제국에서는 오직 두 씨족 출신의 여인만이 황후가 될 수 있었는데, 고려만 특별히 예외를 인정받았다.

 

고려공녀에 대한 오해
 
-몽골이 고려에 공녀를 요구해서 반발이 심했다면서요.
 
몽골이 이른 바 고려공녀를 요구했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약소국의 설움으로 개탄하는데 사실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몽골공녀가 먼저입니다. 1231 12월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와서 수도 개성을 함락시켰고, 고려 고종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깁니다. 이후 공식적으로 29년의 세월동안 두 나라는 지루한 전쟁과 짧기만 한 강화를 되풀이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241 4월 두 나라 사이의 강화를 위해 왕의 조카를 왕자라고 속이고 볼모로 몽골로 갔던 영녕공(永寧公) 왕순(王綧)왕순이 몽케칸으로부터 먼저 몽골황녀를 아내로 내려받아 몽골에 눌러앉아 살면서 두 나라간의 화해를 위해 중재합니다. 적어도 몽골측이 먼저 두 나라 군주 가문 사이에 혼인을 제안하고 실행하여 전쟁 중에 사돈국가가 된 것입니다.”
 
전 박사는 좀 더 나중에는 고려 원종의 아들이 칭기스칸의 손자 원 세조 쿠빌라이 칸 때인 1271년에 강화를 위해 원나라로 갔다가 쿠빌라이 칸의 부마가 된다고 말했다.
 
“<익제난고권 제9상세가(益齋亂稿卷第九上世家)>를 보면 당시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놀라고 기뻐서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만리(萬里)나 떨어진 나라이다. () 태종(太宗)이 몸소 쳤지만 따르게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세자(世子)가 스스로 와서 내게 귀부했다. 이는 하늘의 뜻(天意)이다. 크게 상을 내려라(大加褒奬)’>라고 하고 자신의 딸 황녀 후투룩겔마스(忽都魯揭里迷失)를 시집보낸 것입니다. 쿠빌라이는 그녀에게서 난 외손자 왕장, 곧 충선왕을 무척 총애했다고 합니다.”
 
-혼인 관계로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 지위가 된 것을 고려공녀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미입니까.
 
쿠빌라이 칸은 그로부터 훨씬 뒤 1287년에야 이른 바 고려 여인을 후궁으로 받아들이 위해 처음으로 공녀제도를 만드는데 이를 통해 고려와 몽골은 쌍사돈 국가가 됩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고려 여자는 44회에 걸쳐 총170명이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고려공녀들을 그 무슨 양공주이기라도 하는양 묘사합니다.”
 
전 박사는 이는 이른 바 고려공녀의 역할이나 성격을 완전히 잘못 파악한 오류라며 그여자들은 사실은 원나라 황제들의 후궁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뽑혀간 여자 중에서 황후만 해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도 기황후 하나가 아니라, 고려 왕황후(王皇后), 다르마시리 김씨 황후 등 3명이나 나왔습니다. 또 사실상의 황후급인 곽비까지 친다면 4명입니다. 그 외 후비와 나아가 북원시대의 후비를 치면 십수 명에 이릅니다.”
 
 
공녀가 아니라 황후나 비빈으로 특별히 선별된 고관대작의 여인들
 
-그러니까 공녀가 아니라, 황후 후보로 선별되어 간 분들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원말의 도종의가 말했듯이 몽고78이라는 말도 있듯이 당시 몽골씨족이 무척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도 오직 콩그라트, 예키라스 두 씨족만이 황제의 후궁과 황후가 될 수 있었는데, 다른 나머지 모든 몽골씨족들을 제치고 고려여인이 방금 말한 두 씨족과 같은 반열에 들어선 겁니다. 말하자면 황제의 자손들을 잇기 위해 고려에서 뽑혀온 고관대작들의 딸들이죠.
 
그들은 그러므로 공녀가 아니라 선입고려녀(選入高麗女)’,  원나라 황후 비빈이 되기 위한 후보로 고려에서 뽑아들여 온 특별히 뛰어난 여성입니다. 이들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고려사 연구 학자들이 몽골의 황후종족 제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고려 측에서 여자를 보냈다는 한 가지 측면밖에 몰랐기 때문에 그들을 양공주 대하듯 잘못된 평가가 나온 것이지요.”
 
전 박사는 반대로 고려 왕실이 원 제국의 황실과 통혼하여, ‘훈신(勳臣), 세족(世族) 및 나라를 봉 받은 군주(封國之君)’로 대우 받은 것은 심왕(瀋王) 왕고(王暠)와 고려왕 5명을 포함, 모두 6명이며, 그들과 혼인한 몽골 여인은 기록상 최소한 1명의 황녀, 7명의 공주(왕의 딸, 곧 황제의 손녀), 1명의 평민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명이라며 이런 관계는 몽골제국과 다른 그 어떤 나라와의 관계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몽골의 세계정복 지도. /출처=/ www.dailycotcodac.ro

 

칭기스 칸의 세계제국이 다른 세계제국과 다른 이유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흘렀습니다. 이제 고려의 경우를 떠나, 앞서 말씀하신 세계정복 부분을 계속에서 말씀 해주시죠. 조금 전에 칭기스 칸과 그 일가 3대의 세계정복대장정은 단순한 침공을 통한 세계정복전(征服戰)’이라기 보다 오히려 세계적 규모의 징벌전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세계제국을 지었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 어떤 인물이 위대하다고만 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세계제국은 그것을 누가 지었던 간에 막대한 인명의 참살과 문명의 파괴를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미주 대륙을 보세요. 스페인인들이 그 땅을 발견하고 들어오고, 영국과 유럽의 종교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피신해 간 유럽 이주민들은 지금부터 600년 전에 이미 남북미의 6000만을 몰살시켰다고 남미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인디언 학자들과 미국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만일 당시 인디언들이 몰살당하지 않았다면 그 인디언(아메리카 토착민, 현재 북미 인구의 1% 정도) 인구가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의 전 인구수와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북미인구는 당시 유럽인들이 북미에 도착한 이후 지속적으로 개척전쟁, 고의적 페스트 유포, 인디안 사냥 등으로 몰살당했고, 원주민 인구대신 유럽인들이 그 자리와 수를 채웠다는 이야기입니다.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대동아 공영권 등 다른 예는 더 들 필요가 있나요? 가능하면 이런 일이 없어야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바람일 뿐이고 이런 일은 이미 인류역사상 여러 번 벌어졌습니다. 어차피 그 사건들은 불가피했기에 벌어진 것이죠.”
 
전 박사는 그렇다면 이제 와서 이 제국들을 평가하는 잣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모든 제국전쟁은 나쁘다라든가, 제국을 지었다는 자체가 위대하다라는 이분법적인 평가가 아니라, 우리의 물음은 제국을 지으려던 그들이 도대체 무슨 원인, 무슨 계기, 이유로 그 제국을 지으려 했거나, 지었느냐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또 그것을 지을 때 어느 정도의 피해를 통해 지었느냐도 살펴봐야합니다. 마지막으로 막대한 참살과 파괴를 동반해 이루어진 그 제국이 역설적으로 혹은 결과적으로 인류와 세계 역사에 도대체 어떤 공헌을 했느냐 하는 것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려 이웃 나라를 정복했던 역대 세계 정복자
 
-인류 역사에서 세계제국을 세우려 한 경우를 들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간단히만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보면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의 시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태리의 무솔리니, 일본천황 등등 여러 제국주의자들이 나름대로 그들 시대에 제국을 건설하여 자신들만의 세계질서를 세우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실패한 제국은 영국과 프로이센 및 유럽 여러 나라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조금 예외이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 대부분이 자기에게 해도 가한 적이 없는 이웃 나라들을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이 침략하여 거대한 제국을 세우려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시대에 망했다는 겁니다.”
 
전 박사는 이들은 모두 다른 권력자, 다른 부족과 다른 나라를 자신의 정복전으로 희생시키고, 단지 자신의 권력과 자기 나라의 확장에만 관심을 가진 전형적 독제적, 침략주의적 제국주의자들이었다며 대표적으로 위대한 독일’,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평화적이던 이웃나라를 침략한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경우를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물들과 같은 인간의 공통적 권력욕구가 칭기스 칸에게도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칭기스 칸에 관한 사서의 기술에 나타난 그는 제가 아는 한 다른 인물들과는 매우 다릅니다. 분명히 정당한 이유와 명분이 없거나, 또는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 해를 가한 원한관계가 없는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결코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외교 사신들을 보내 평화적 교류와 협력을 제안했습니다. 비록 아들과 손자 대에 와서의 일이긴 하지만, 유럽군주들에 대한 외교사절단들이 그런 것들이지요. 또 설사 상대가 자신 또는 몽골인에게 해를 가했더라도 사죄하거나 항복했을 경우에는 결코 더 이상 징벌하지 않았다는 특이한 점이 보입니다.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것이죠.”
 
 
칭기스 칸 가계가 벌인 세계 정복전의 일정한 패턴
 
-칭기스 칸의 정복전쟁이 다른 인물들의 정복전쟁과 특히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흥미롭게도 칭기스 칸이 이끈 전쟁에는 몇 가지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첫째는 칭기스 칸 측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선제공격을 당한 상태에서 이를 이기는 것입니다. 메르키드족에게서 부르테 우진을 되찾아오기 위한 탈환전만 제외하고 몽골 여러 부족들의 통일 과정이 그런 것입니다. 칭기스 칸 자신이 먼저 공격한 것이 아니라, 침공을 당한 상태에서 이를 이겨 통일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히틀러나 천황 같은 다른 제국주의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정복자가 되려고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복을 기도하는 부족과 소왕국의 침략을 방어한 것이죠.
 
둘째는 자신의 선조, 몽골부족 또는 자신이나 자신의 외교대표단에 대해 다른 쪽이 가한 해에 대한 징벌전입니다. 그가 먼저 도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발을 받은 결과 징벌을 결심한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칭기스 칸 징벌전을 보여주는 가장 현저한 예는 유럽세계와 아시아 사이의 가장 거대했던 이슬람제국 호라즘 제국 징벌 및 정복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라즘 제국을 정벌하는 칭기스 칸 군대를 그린 인도 모굴제국의 그림
 
 
셋째는 징벌전 도중에 적군 또는 상대방과 연합하여 대항하거나 그 징벌전을 방해한 측에 대한 전쟁입니다. 킵차크인, 헝가리, 러시아 공국들 등과의 다른 전쟁들이 그러한 유형입니다. 동방에서는 송나라 정벌이 그에 포함됩니다.”
 
전 박사는 이 세 가지 유형의 전쟁의 결과가 이른 바 칭기스 칸 일가 3세대의 세계정복전으로 표현된다고 말했다.
 
넷째는 좀 더 순수제국주의에 가까운 제 4형태입니다. 이는 칭기스 칸 때가 아니라, 손자 때에 와서 그것도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는 월남, 참파, 버마 등 인도지나와 자바 등 동남아 정복전입니다. 다른 역사상 제국주의자들이 주로 이 네 번째 전쟁 형태를 위주로 했는데, 칭기스 칸 가계 3대의 경우 이와는 다른 유형의 전쟁이 대부분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결국 칭기스 칸의 경우 정복전이 아니라, 중세기적 정전(正戰: 바른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러한 정복전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단지 그를 단순히 남들이 이룰 수 없는 세계정복을 이룩했다는 한 가지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평가한다면, 모든 제국의 건설자들도 마찬가지로 칭송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단지 막대한 참살과 문명의 파괴를 부른 전쟁을 쳤다는 것만 보고 그가 살인마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평가는 거꾸로 금나라나 호라즘 샤와 같은 야만적 행동으로 열국간의 세계평화를 위협한 폭군들이 오히려 좋은 사람이었다고 찬양하는 역설적인 결과가 되지요. 칭기스 칸을 무턱대고 야만적 살인마, ‘전쟁광이니 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대를 이어 번영한 칭기스 칸의 제국
 
-, 공감이 가는군요. 오랫동안 서양 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선입견의 영향으로 칭기스 칸을 히틀러 같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단순한 정복자나 야만적인 살인마라고 생각해 왔다는 의미군요.
 
, 칭기스 칸을 단순히 인류최대의 대제국을 지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로 본다면, 그것은 그의 인성과 인격, 그의 시대의 참담한 세계의 현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영웅은 한 시대가 낳은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한 행동은상당부분이 자기가 원해서 하는 행동이기보다는 자기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전쟁을 통해 살육과 문명의 파괴만을 일삼고 자기 자신의 권력만 확장하려 한 제국의 건설가라고 보는 관점은 더더욱 당시 세계의 실정을 모르고 내린 잘못된 관점입니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부족, 국가, 국제, 문명 간에서 끊임없는 폭력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당시 세계의 진면목과 역사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편협한 관점입니다. 그의 징벌전이 나쁘다고 한다면, 거꾸로 그의 징벌전을 유발한 그 제국들의 폭행과 전제, 횡포는 정당했다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제가 방금 조금씩의 예를 들어 설명 드린 바처럼 칭기스 칸이 정복의 길로 나선 원인, 이유, 동기, 그 과정의 적법성을 보아야 하고, 또 그 결과 그가 지은 세계제국이 과연 다른 제국과 달리 후세에 무슨 공헌을 했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칸 제국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 또는 로마의 시저처럼 또는 히틀러나 일본천황의 전쟁과는, 정당한 전쟁의 계기나 명분도 없이 출발하여 당대에 무너진 다른 제국들과 다르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칭기스 칸 연구가인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의 말을 빌리면, 그의 제국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30억 인구를 포괄하는 나라의 영토에 지어진 역사상 가장 방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년 이상 번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칭기스 칸의 대제국이 조각 조각 나뉘어 붕괴된 후에도 러시아, 터키, 인도, 지나와 페르시아 등에서 그의 후손들은 칸, 황제, 술탄, , , 아미르, 달라이 라마 등의 다양한 칭호를 쓰면서 작은 제국과 나라로 700년 이상 존속했다고 평가합니다.
 
그 외에도 인도에서는 모굴 왕조로 1857년까지 존속했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920년까지 존속했습니다. 이것은 여러 제국의 건설을 꿈꾸었던 다른 인물들과는 매우 다른 점입니다.”
 
 
칭기스 칸은 현대세계의 창출자
 
또 잭 웨더포드는 그의 공로를 말합니다. 당시에 세상은 서로 갈리어져 서로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독교 사회의 유럽세계와 이슬람 세계, 아시아의 샤마니즘과 불교, 유교 세계 등으로 갈려져 있었다고요. 이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 것이 칭기스 칸의 제국입니다. 잭 웨더포드는 그래서 그를 현대세계의 창출자라고 부르죠.”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습니까.
 
잭 웨더포드는는 칭기스 칸이 외교특권을 수립하고, 고문을 철폐했고, 세계 각지를 연결하는 도로와 역을 만들고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해 뜨는 극동에서 해 지는 서구까지 과학과 예술과 문화와 상품이 교류되도록 평화적 새로운 세계질서를 창조한 인물이라고 보고 극찬합니다.
 
인류사회에 대한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공헌을 한 그와 그 가문의 이 이야기는 또 다시 몇 권 분량의 긴 책이 필요한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줄이도록 하죠. 다만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오늘날 프랑스의 역사학자의 글을 하나 인용할까 합니다.”
 
아래는 전 박사가 소개한 프랑스 역사학자의 글 인용문이다.
 
<학살은 잊혀졌고, 대신 칭기스 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의 막대한 파괴 뒤에 마침내 문명에 혜택을 주게 되었다. 칭기스 칸이 그의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였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 그는 죽었으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올바른 사람이었고 현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앵빌(Jean de Joinville: 유럽 십자군전쟁 시대의 사가) 그는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했다. 이 평가는 외면상으로는 역설적이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 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아불 가지는 칭기스 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을 당하지 않은 채 [나이 먹은 여인이]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야삭(칸의 칙령, 법률: 전박사 설명)은 전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Pax Chinggis-Qana’를 확립하였다.>
(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유목 제국사 및 윌리암 마일스(William Miles) 중령 번역의 투르크의 계보)
 
-지금까지 칭기스칸이 위대한 정복자’, 또는 그 반대의 나쁜 사람 이라고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분석을 해주셨는데요. 장시간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박사님의 노력으로 인해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룬 칭기스 칸의 선조가 누구였는지에 관한 실제적 진실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만약 칭기스 칸의 혼령이 있다면 그 동안 천추에 맺힌 한이 풀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서야 그의 혼령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그 조상들과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비록 고구려- 발해가 오래전에 망해서 사라진 나라이지만 그 후손인 칭기스 칸은 선조들이 겪은 아픈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칭기스 칸과 함께 또 다른 고구려 -발해의 후손인 우리도 현재 남북분단과 강대국 사이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결코 좌절하지 말고 역경을 이겨낸 칭기스 칸처럼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주몽의 후손인 칭기스 칸이 주는 교훈은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어려움을 이기고, 세계로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끝>
 
 
금행이 신라인이라는 독자들의 오해에 대한 답변
 
글 전원철
 
지난 3회에 걸친 제 인터뷰를 보고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 주셨는데, 과분하게도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칭찬해 주시는 분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우리는 결국 모두 아담과 이브의 자손 아니냐”, 혹은 모든 인류는 결국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등등을 포함하여, 심지어 어떤 분은 저보고 우리 고대어를 제대로 공부해라” “금시조 대함보가 아니라 김함보이다 등 비판의 소리를 보낸 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칭찬을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더욱 정확하고 자세한 연구가 나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우리가 아니, 전세계가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것과 민족사의 인식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이곳에서 논의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다시 우리를 집어삼키거나, 외적이 우리를 점령해도 우리는 다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자식이므로 상관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이야기이죠. 또한 제 고대어 풀이는 인터뷰 전반에 걸쳐 소략하게 나오지만, 제 책에 더욱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제가 꼭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금행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책에서 저는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바로 고구려-발해 왕족이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금 시조의 아버지 금행이 바로 고려 왕건, 금태조 아골타, 그리고 칭기스 칸 세 가문의 직계선조로 이들 사이의 잃어버린 핵심 고리이며, 그는 또 청나라 누르하치의 선조임도 밝혔습니다.
 
그런데 독자분 중에서 금행을 왕건과 같은 시기의 신라인 김행’,  안동권씨 시조 권행이라고 확고하게 믿으며, 저의 연구 전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결코 독자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6년 이후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학자의 주장이 저서나 언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고, 댓글을 단 독자분도 그런 잘못된 정보 외에 다른 정보를 그 동안 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이 문제를 쉽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신라인 김행(金幸)’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 혹은 金幸)’은 동시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은 왕건의 외증조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은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함보라고 주장합니다. 경순왕은 왕건보다 30여 년 더 나이가 적은 항렬인데 그 아들이면 왕건보다도 거의 두 세대 차이로 아래 도표가 보여주듯이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나이입니다. 또한 어느 기록에도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고 기록된 사서나 족보가 없는데도, 일부 학자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설(마의태자가 금행의 아들인 함보라던가,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는 등)을 퍼뜨려 온 겁니다.
 
그들은 금 희종 완안 단 시대에 송나라 사람 홍호(洪皓) 1155년경 지은 송막기문(松漠記聞)과 남송 때 1234년경 우문무소(宇文懋昭)가 편찬한 대금국지(大金國志) 여진추장은 신라인이라고 적어둔 것을 문자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함보가 신라인이고 그렇다면 그 아버지가 고려사에 금행으로 되어 있으니, 함보는 신라김씨 김행, 곧 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같은 사람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신라인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대금국지권수 금초흥본말 1777~1778년에 쓰인 흠정만주원류고 둘인데, 이 사서들은 대개 신라 땅(新羅之地)이 고려에 병합되어 들어갔으므로(并入髙麗), 이 때문에 어떤 이는 고려라 하고 어떤 이는 신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다 한 가지 말이다(故或云髙麗或云新羅其實一也)”고 합니다.
 
함보가 원래 살았던 땅이 원래 발해(-고려) 땅이었다가 당-발해-신라 전쟁으로 빼았겨 신라의 땅이 되었다가, 다시 발해 선왕 때 금행이 빼앗았다가 함보 시절에 또 다시 신라 땅이 될뻔했다가 그 손자 시절에는 궁예의 고려(후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또 얼마 안 가 나중에는 송나라에서는 신라사람으로 이해된 왕건의 땅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함보의 지적(地籍)”이 아니라, 그의 족적(族籍)”을 보아야 하는데, 우리 일부 학자들이 금행과 김행이 한자로 그 이름 하나가 같다는 것과 여러 사서 중에서 두 사서가 신라인이라고 하는 한 마디에 깊은 연구도 없이 책을 쓰고 인터넷에 올리고 KBS방송의 역사스페셜 등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대중을 오도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람들이 혼동을 하는 유일한 이유가 단 하나 이름이 같고 한 두 사서가 그가 신라인이라고 적었다는 정도로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겁니다.
 
하지만,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그 이름을 원래 금행(今幸)으로 쓰고 다른 하나로 금행(金幸)으로 써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이름은 당연히 금행이고 뒤의 이름도 “()금행(金幸)”입니다.
 
발음은 신라의 성이 아니고, 발해의 성의 우리 말인 /을 이두식 한자를 써서 적은 (, )”성이죠. 다시 말해 ()-()(今幸)”은 그 성씨를 한자로 바꾸면 -(-)”이라는 말이고 이는 후대에 대칸(大汗)”으로 쓰죠. 그래서 저는 일부러 고려사에 가장 처음 나오는 글자 ()’ 자로 쓴 겁니다. ‘안동 권씨 시조 김행과는 구분하라고 하는 뜻에서요. 그러니까 금행과 신라인 김행(권행)은 동명이인이지 절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이름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우선 두 분이 산 연도가 다릅니다. 금행은 아래 도표에서 보다시피 김행(권행)보다 대략 120년 전의 사람입니다. ‘신라인 김행 안동권씨 시조 권행이 된 이유는 김행이 후백제의 견훤의 군대를 안동에서 물리치고 그 지방을 들고 왕건에게 귀부해 왔을 때, 왕권이 그에게 공을 세운 상으로 김행에게 안동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의미에서 이라는 성을 하사합니다.
 
 권행과 그보다 4세대전의 금행을 혼동하는 그 오류를 바루기 위해 저는 제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송() 광종(光宗)소희5(紹熙五年, 1194)에 쓰인 삼조북맹회편이 함보,  여진[추장]은 주몽(朱蒙)의 후손이고 말갈(靺鞨) 라고 하고 또 앞서 말한 대로 학자들이 권행이 여진추장이라고 오인할 수도 있도록 또 다시 여진추장은 곧 신라인이라고 말한 그 대금국지조차도 그가 발해에서 갈라진 별족(別族)”이라고 한 것도 제 책에서 인용해 두었습니다.
 
 흠정만주원류고 발해왕(渤海王)이 금나라의 선조이다고 하는 것을 다시 인용해두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함보의 7세손 아골타가 금사에서 양박을 시켜 발해유민들에게 말한 대로 자신이 속한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집안(同一家)”이라고 한 것도 인용해두었습니다.
 
또 그 외, 그들이 살던 시대가 918년 후의 여진시대가 아니라, 810년대의 발해시대이고, 그들이 살던 곳도 황해도 평산과 함경북도 길주이며, 그들의 직업 또는 직책은 서해(발해)군왕 및 반안군왕이었고, 아들의 수자도 신라인 김행(권행)의 아들 1명과는 달리 금행의 아들 수는 3명이었고, 금행이 살던 시대는 신라인 김행보다는 적어도 4세대 빠르고,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시대보다는 5세대 전의 훨씬 이른 때라는 등등 8가지 이유를 들어 기존학자의 설이 잘못임을 증명해 두었습니다.
 
이 가운데 금사 하나만 보더라도 금사에는 금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고 하고 있을 뿐 -함보라고 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 우리 학자들, 예컨데 김운회 교수 등이 그 정사 금사에 그를 김함보라고 적었다고 잘못된 주장을 했습니다. 금사세기에는 김함보는 절대 없습니다.  금사 고려전에는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를 기록했을 분, 함보에 관한 언급을 한 적도 없습니다.
 
 
<金史>
<大金國志, 卷一>
<고려사>
<고려사>
비고
금행(今幸, 金幸, <고려사>)
 
작제건 아버지(발해시대, ?~*819?)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
금행=서해용왕
함보=큰바=큰가(函普)
감복(龕福)
(작제건 아내 용녀의 형제/작제건의 처남/ 용건 외삼촌)
작제건 (발해시대, ?~*849?)
용녀(작제건 아내)
아들(1) 세대
오로(烏魯)
胡來
(용건 외사촌 형제)
용건(고려 세조 왕륭, 王隆, ? ~ 879 5)-후삼국시대
*궁예 세대
손자(2) 세대
발해(跋海)
 
신라인 김행(金幸) 세대
(왕건 외6촌 형제)
 
918년 왕건의 고려 성립, 926년 발해 멸망
왕건
 
(고려 태조, 877~943, 재위: 918~943)
궁예 아들 세대
증손(3) 세대
수가(綏可)
 
경순왕(909?~979) 세대
(안종 외8촌 형제)
 
“[*발해가 망해] 거란을 섬기다(臣伏契丹)”<삼조북맹회편>
 
-발해가 거란 치하에 들어간 시대
-왕건의 맏아들인 고려 제2대 혜종(惠宗, 912~945 재위: 943~945) 세대
-[*셋째 아들] 3대왕 정종(定宗, 923~949 재위: 945~949)
-[넷째 아들] 4대왕 광종(光宗) [925(태조 8)975(광종 26)/ 재위 949975/ 고려 제4대 왕]
-안종(安宗, ? ~996)
 
4대 후손
석로(石魯),
아내 고려여인 후비의 아들이 호실답(胡失答)
 
마의태자 세대
(현종 외10)
 
북국 여진의 남국 고려에서 취한 아내
현종(顯宗, 992~1031년 고려 제8대 왕, 재위: 1009~1031)
-안종(安宗, ? ~996) 아들 세대
 
5대 후손
오고래(烏古乃, ? ~1074, 재위 1021~1074)
호래(胡來)
(문종 외12)
문종(文宗, 1019~1083, 고려 제11대 왕, 재위1046~1083
 
6대 후손
핵리발(劾里鉢, 1039~1092, 오고래 둘째 아들)
파랄숙(頗剌淑), 영가(盈歌) 형제
양할(楊割)
(숙종 외14)
*,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숙종(肅宗, 1054~1105, 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
 
7대 후손
아골타(阿骨打) 1068~1123,
 
핵리발 둘째 아들)
(예종 외16)
楊割生三子長曰阿骨打 *,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예종(睿宗, 1079~1122.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
 
8대 후손
  *는 추정을 나타냄
   
위 도표는 그들이 살던 시기를 알기 쉽게 정리한 것입니다.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바로 그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 왕우 때 형인 금나라 황제가 아우 고려 국왕에게 말 하노니 형제나라가 되자는 국서를 보내옵니다. 그러므로 아골타는 예종과 같은 시대, 같은 세대인데, 바로 그 예종의 8대 선조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아버지인데, 그는 왕건의 외증조부(3대 조부) 금행과 같은 세대라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다시 말해 아골타의 8대 선조 금행은 예종 왕우의 선조 때 외가쪽 8대 선조 금행입니다. 이 분은 왕건의 3대 선조입니다. 그런데, 신라인 김행은 왕건과 동시대인이고, 김행과 왕건은 또 아골타의 5대 선조인 발해(跋海)와 같은 세대인물입니다. 그런 김행이 왕건의 3대 외조 금행일 수가 있습니까.
 
또 왕건에게 신라를 들고 귀부해온 경순왕은 왕건의 아들 세대이고, 그 아들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세대입니다. 마의태자는 아골타의 3대조인 석로(石魯)와 같은 시대 사람인데, 그 마의태자가 아골타의 8대조인 금행이나, 7대조인 함보가 될 수 있나요?
 
금행은 금행키얀()의 아들키얀()일하대야발의 계보속에 있습니다. 제 책에는 자세한 설명과 왕건과 아골타 가계도표까지 첨부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학자들의 설의 진위도 파악하지 않은 독자분들이 이미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같은 내용의 댓글을 반복해서 다는 것을 보고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잘못된 지식이 대중에게 전달되어 고정관념이 될 때 그 파급효과는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는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도서관 비치된 제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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