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전 세계에 흩으져서 조국을 찾으려는 대한인의 모습- ☆발굴영상☆ 영친왕 부부의 유럽 여행길 / 순종의 장례식 / 동양의 비경,금강산과 천지 | 현대사영상프로젝트 ①편 우리의 얼..

2023. 2. 13. 16:10역사의 연구/한국역사

다시 보는 전 세계에 흩으져서 조국을 찾으려는 대한인의 모습

 

최초의 미국대학졸업생 조선청년 변수의 꿈 [역사실험]

KBS 2013.03.13 방송

https://youtu.be/lVN6Q3kyYWQ

Aug 14, 2021
 

▶최초로 미국대학을 졸업한 한국인은 조선의 역적이었다 지난 해 12월, 취재진에 의해 최초로 미국대학을 졸업한 한국인의 졸업장이 발견되었다.

 

7개월간의 추적 끝에 발굴된 졸업장의 주인공은 조선 청년 변수. ‘최초’라는 말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닌 구한말 최고의 엘리트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망명죄인, 조선의 역적이었다. 31세,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그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졌다. 천재라 불리던 조선의 젊은 엘리트는 어쩌다가 조선의 역적이 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쫓기는 몸으로 미국 명문가의 자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미국 대학에서 공부, 한국인 최초로 이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을까? 구한말 격변기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조선을 위해 원대한 꿈을 꾸었고, 그 포부와 그에 대한 헌신은 그의 삶을 누구보다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걸고 조선 근대화를 이루려 했던 격동기 조선 최고의 지식인, 10여 년이 넘게 그의 흔적을 찾아 온 그의 후손과 함께 일본, 중국,미국 워싱턴, 볼티모어, 버지니아 등 7개월 넘은 추적 끝에 조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완전히 잊혀져버린 한 혁명가의 삶이 되살아난다.

 

▶1891년 미국을 뒤흔든 조선인의 죽음, 그리고 벨츠빌 묘지 비석에 새겨진 한글 이름 ‘벤수’ 1891년 10월 22일 워싱턴 근교의 기차역에서 한 조선인이 기차에 치여 사망했다. 31세 젊은 나이의 청년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농무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미국 전 지역의 주요 신문들이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변수가 누구이기에 그의 죽음은 미전역을 요란하게 만들었을까? 그러나 정작 미국에 파견나와 있던 조선공사관에서는 그를 모른척했다. 당대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암멘 장군은 그를 자신이 묻히려고 준비해 두었던 벨츠빌의 묘지에 변수를 직접 안장했다. 암멘 장군과 변수의 친구들은 변수의 비석에 그의 이름을 한글로 새겨주었다. 조선공사관은 왜 그를 외면했을까? 그리고 조국에서조차 버림받은 그에게 암멘 장군은 어째서 그토록 친절을 베풀었던 것일까? 한국인 최초로 미국대학을 졸업한 그의 삶은 알면 알수록 흥미롭고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

 

▶당시 양잠학과 근대화의 얽힌 비밀 최초공개. 최고의 엘리트 청년, 조선 최초로 양잠학과 화학을 공부, 개화의 최전선에 나서다. 중국어 역관 집안 출신으로 뛰어난 어학실력을 가지고 있던 그는 어린 나이에 개화당의 지도자 김옥균에게 발탁, 그의 일본사행 수행원이 된다. 그리고 그의 남다른 포부와 그를 눈여겨본 김옥균은 특명을 내린다. 일본의 한 실업학교에서 양잠과 화학을 공부하라. 왜 그는 일본에가서 양잠학과 화학을 공부해야했는가? 근대문화혁명과 밀접한 관계인 양잠학의 비밀을 공개한다. 그리고 뒤이어 조선 최초의 견미사절단 보빙사의 일원으로 발탁, 조선인 최초로 미국 땅을 밟고, 뒤이어 세계 일주를 한 후 귀국했다. 넓은 식견과 근대화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은 그는 의욕적으로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던 고종의 신임을 얻었고, 중인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왕의 측근에서 일하는 관리가 되어 참위 급인 차관보까지 승진한다. 이제 그는 그의 숙원이던 조선의 근대화를 직접 실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꿈꾸던 조선 최고의 젊은 엘리트들은 혁명을 기도했다. 그 중에는 변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혁명은 3일 천하로 끝이 났고, 실패한 혁명은 그에게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다.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자신은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 목숨의 위협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중인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혁명에 주역으로 참여했던 변수. 거사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무엇일까? 그의 행적을 좇아 일본으로 향한 취재진. 게이오대학 고문서보관서에서 발굴한 자료를 바탕으로 갑신정변의 주동자 김옥균과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관계, 그리고 갑신정변에서 변수의 활약 등이 최초로 공개된다.

 

▶미국 최초의 동양인 미연방 농무부 직원. 미국에서 시작된 그의 새로운 도전. 1886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시작된 또 다른 삶. 당시는 미국에서도 대학공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왜 출세가 보장된 다른 전공을 두고 하필 농학을 선택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아직 포기하지 않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변화와 개혁을 위하여 선택한 농학!! 그는 남다른 각오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 결과, 그는 명문가의 자제들을 제치고 당시 소수만이 취득할 수 있는 이학사 학위와 졸업식때 대표연설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에 더해 미연방정부의 직원이 되는 빛나는 성과를 거둔다. 망명죄인의 신분으로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돌봐줄 이 하나 없었던 그가 이뤄낸 값진 결실. 그 성공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120년만의 귀환, 백 년의 세월 동안 묻혀있던 역사적인 최초 졸업장 발굴 그러나 운명은 가혹했다. 졸업한 지 3개월 남짓, 그는 뜻밖의 기차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한국인이 최초로 취득한 대학 졸업학위. 그리고 미국 농무부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논문 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의 졸업장은 한국의 후손들에게도, 미국 메릴랜드 대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취재진은 7개월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기적적으로 그의 졸업장을 찾아낸다. KBS 취재 도중 찾아낸 120년전 졸업장을 얼마 뒤 메릴랜드 대학에 있는 그의 기념관에서는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모교인 메릴랜드 대학에 변수 졸업장 기증식이 열렸다. 메릴랜드 대학에는 그를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기념관 방이 있다. 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 메릴랜드 대학교.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걸출한 인재들을 제치고 대학이 특별히 그를 지금도 기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뿐만 아니라 대학의 정문입구에 학교의 역사와 함께 그의 사진과 소개문을 나란히 새겨 넣었다. 과연 120년전 졸업하고 죽은 변수를 이토록 이 대학에서 기억하려는 의도가 무엇일까? 그의 졸업장 기증식에서 대학 부총장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은 그가 약 150년의 학교 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의미를 지닌 중추적인 인물, 빛나는 스타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죽어서까지 120년동안 미국 한복판에서 한국을 빛내고 있다. 120년 전 한 조선청년이 그토록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미국인들에게 큰 울림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조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죽음과 삶은 지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되새겨본다.

 

 

 

 

 

☆발굴영상☆ 영친왕 부부의 유럽 여행길 / 순종의 장례식 / 동양의

비경, 금강산과 천지 | 현대사영상프로젝트 ①편 우리의 얼굴

(KBS 20220804 방송)

https://youtu.be/lF5RJqDj1xE

KBS 다큐 인사이트 (목요일 밤 10시 KBS 1TV) “현대사 영상 프로젝트 8.15 기획 영상 아카이브 2부작 -

 

1편 우리의 얼굴 1863-1938” KBS는 그동안 세계 곳곳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던 우리의 현대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공개하는 현대사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8.15 기획 영상 아카이브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화기부터 해방까지의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와 그 속에서도 견지해 온 주권 회복의 열망을 2편에 걸쳐 재구성한다.

 

영국 영화사인 ‘브리티시 파테(British Pathe)’와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새롭게 수집한 영상에는 개화기 조선의 풍경과 생활상 그리고 일제에 고통받았던 선조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또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호주 국립영화및녹음보관소(NFSA)’ 등을 통해 최초로 발굴한 영상에는 태평양전쟁 뉴기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 연합군 포로수용소 등 전쟁에 강제 동원돼 희생을 강요당했던 실상이 기록돼 있다.

한편 루즈벨트 라이브러리 등에서 수집한 영상을 통해서는 해외에서 벌어졌던 국권 회복 운동의 현장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 수난의 역사를 살아온 이들 20세기 최초의 국제전인 러일전쟁은 당시 세계적으로 초미의 관심사였다. 초기 영화사인 에디슨 회사에서 제작된 러일전쟁의 주요 전쟁, 압록강과 제물포 전투 재연 영상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이를 통해 삶의 터전을 일제의 전쟁터로 내줘야 했던 조상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돌아본다.

 

■ 일제강점기 조선의 풍경 이번에 최초로 입수한 브리티시 파테의 ‘뉴스영화(Newsreel)’는 당시 장편영화 중간에 상영됐던 기록영화로 조선 왕가와 백성들의 모습을 전한다. 영상은 6.10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던 순종 장례식과 영친왕 부부가 유럽 여행길에 오른 장면을 담고 있다. 또한 당시 동양 최고의 비경으로 꼽힌 금강산의 절경과 한국 최대 마애불 ‘묘길상’을 감상할 수 있다.

 

1930년대 언더우드 박사 일가의 백두산 여행 장면까지 개선된 화질로 함께 소개한다.

 

 

 

1930년후반 서울 / 한인경위대 / 포로 수용소 / 냅코 프로젝트 / 귀환선

/ 충령탑 폭파식 | 현대사영상프로젝트 ②편 우리의 얼굴

(KBS 20220811 방송)

https://youtu.be/SvNUn3TxsrU

Aug 13, 2022 

KBS 다큐 인사이트 (목요일 밤 10시 KBS 1TV)

 

“현대사 영상 프로젝트 8.15 기획 영상 아카이브 2부작 -

 

1편 우리의 얼굴 1863-1938” KBS는 그동안 세계 곳곳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던 우리의 현대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공개하는 현대사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8.15 기획 영상 아카이브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화기부터 해방까지의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와 그 속에서도 견지해 온 주권 회복의 열망을 2편에 걸쳐 재구성한다. 영국 영화사인 ‘브리티시 파테(British Pathe)’와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새롭게 수집한 영상에는 개화기 조선의 풍경과 생활상 그리고 일제에 고통받았던 선조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또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호주 국립영화및녹음보관소(NFSA)’ 등을 통해 최초로 발굴한 영상에는 태평양전쟁 뉴기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 연합군 포로수용소 등 전쟁에 강제 동원돼 희생을 강요당했던 실상이 기록돼 있다.

 

한편 루즈벨트 라이브러리 등에서 수집한 영상을 통해서는 해외에서 벌어졌던 국권 회복 운동의 현장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 국권 회복의 열망 1942년 8월 29일, 미국 LA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성대한 현기식은 미국 관공서에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걸린 날이자, 미 전역에 태극기를 알리게 된 순간이었다. 한국의 식민지 문제와 독립운동의 뜻을 더욱 널리 알리게 된 이 숭고한 현장을 고화질 컬러 영상으로 함께 공개한다.

 

■ 암호명 A로 불린 선발 요원들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워싱턴 OSS(전략첩보국)는 태평양전쟁을 끝내기 위해 비밀첩보작전을 계획한다. 고난도 특수훈련을 받은 최정예 특수요원들을 한반도에 투입해 내부 정보를 수집하고, 거점을 확보하는, 이른바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

이름 대신 암호명 A, B, C, D로 불린 선발 요원 19명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남아있는 영상을 통해 당시 LA의 외딴 섬 카탈리나에서 이들이 상륙 훈련 및 침투 활동 대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하는 한국인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몸을 실은 한국인들의 모습을 공개한다. 최초로 공개하는 이 영상에는 호주에 억류되어 있던 전쟁포로를 실은 ‘요이즈키함’에서 벌어진 사건과 강제 징용됐던 노동자 최소 3천 700여 명이 승선했던 ‘우키시마호’ 폭발 사건까지. 그야말로 목숨을 건 귀환의 순간이 담겨있다.

 

 

 

갖은 역경을 이기고 러시아 모스크바, 연해주,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대륙 20여 개국에 사는 고려인, 카레이츠, 카레이스키 (KBS 방송)

https://youtu.be/5HLRY5n_uBk

Aug 27, 2022 #고려인

※ 러시아 한인 이주 150년 특별기획 - 카레이스키 150

 

0:00 타이틀

 

0:12 1편 : 디아스포라, 이산 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나타나다 폴란드 탄네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된 고려인들 의병장 5대손 올림픽 메달리스트

 

48:42 2편 : 레지스탕스 항전 연해주 청소년 공연단 상트 페체르부르크 공연 동영상 최초 발굴 체코군단과 연해주 고려인 독립군의 무기 거래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 된 고려인

 

1:37:09 3편 : 오디세이, 기나긴 여정 러시아공영방송 RTR의 여자 앵커 고려인 5세 마리나 김의 1인칭 시각으로 강제이주 이후 현재까지의 고려인들의 역사를 살펴본다.

 

 

 

발굴추적 120년전 시카고에 나타난 대조선 / 1893년 시카고박람회,

조선의 보물리스트는 [역사실험] KBS 2014.12.07 방송

https://youtu.be/7mq_7GgaNR4

Sep 16, 2021

 

 

 

[다큐인사이트] 먼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간난신고의 생활을 견딘

조선인들의 삶 “영상 아카이브 최초 발굴 -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

(KBS 20210930 방송)

https://youtu.be/GTQmu4bD9ks

KBS 다큐 인사이트 (목요일 밤 10시 KBS 1TV) “영상 아카이브 최초 발굴

 

-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 (2021년 9월 30일 방송) KBS 다큐인사이트 제작팀은 그동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비롯해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세계 곳곳에 나뉘어 보관돼 쉽게 접할 수 없던 한국 현대사 자료를 수집·공개하는 영상 아카이브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지난해 ‘만삭의 위안부’ 영상 발굴을 시작으로, 1900년대 한반도의 생활상을 담은 [김씨네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촬영된 영상들을 볼 수 있는 [1950 미중전쟁], 올해 5월에는 5·18 민주화운동 아카이브 [오월의 기록]을 시청자에게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될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 역시 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수많은 한국인의 모습이 담긴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은 당시 강제 동원된 한국인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최초로 발굴된 기록이기도 하다.

 

그동안 태평양전쟁 시기 한국인들의 강제 동원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아직 강제 동원된 인원, 지역, 피해상황 등에 대한 총체적 진실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될 [태평양전쟁의 한국인들]이 발판이 되어 역사 진실 규명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길 바란다.

 

■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들 길버트 제도에 위치한 타라와 환초.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미군의 대규모 함포와 항공기의 무차별 공격이 있었던 곳이다. 76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로 미군 1,696명이 사망했고, 장교 1명과 사병 16명을 제외한 모든 일본군이 사망했으며 강제 동원된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된 곳이기도 하다. 길버트에 동원된 조선인 군무원은 1,091명.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150여 명의 조선인만이 살아남았다. 마셜 제도의 콰잘레인 역시 400~600여 명의 조선인이 군속으로 동원된 지역이지만 그중 165명만이 살아남아 미군의 포로가 됐다. 이오지마 역시 일본 해군 군속으로 일했던 한국인들이 미군의 포로가 된 곳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이 타라와, 콰잘레인, 이오지마 지역에서 촬영한 기록을 통해 조선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 사이판, 티니안에서의 수용소 생활 일찍부터 제당 산업이 발달한 사이판은 1939년부터 많은 한국인이 농업 이민의 형태로 동원된 곳이다. 1941년 당시에는 2,775명의 한국인이 머물렀으며 단순 출가자뿐 아니라 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가족 단위 출가자가 많아 남양군도 중 가장 많은 한국인이 있었던 곳이다. 사이판과 티니안이 1944년 7월 미군에 점령되면서 그곳에 남겨진 한국인들은 각각 사이판수용소와 티니안수용소에 수용됐다.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 행정, 교육, 위생, 취사와 같은 노동을 통해 미군에게 돈과 식량을 받아 생활했다. 특히 이번에 최초로 공개될 자료 중 미 해병대가 촬영해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해오던 사진들은 한국인 여성이 수용자들에게 줄 주먹밥을 만들고 있거나, 한 쌍의 조선인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등 수용소 내 생활을 엿볼 수 있다.

 

■ 전쟁의 끝에서 태평양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 본토 공격이 필수라 여겼던 미국은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핵폭탄 ‘리틀 보이’, 3일 뒤에는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 맨’을 떨어뜨렸다. 미군의 원자폭탄 발진 기지였던 티니안 노스필드 비행장은 미군이 티니안을 점령하기 전,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군의 비행장과 활주로 건설을 위해 동원된 곳이기도 하다. 티니안 사탕수수 농장에 징용됐던 조선인 노무자들은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일본군 군속으로 투입됐고, 폭격을 피해가며 이곳 활주로를 닦아야 했다. 티니안 상륙 후 일본군 비행장을 확장해 공군기지를 만든 미군은 이곳에서 ‘팻 맨’이라 불리던 원자폭탄을 B-29에 탑재, 나가사키에 투하되는 모습을 촬영해 영상으로 남겼다.

 

■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태평양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타라와에서 그동안 미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은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9년, 한국 정부는 DPAA로부터 아시아계 추정 유해 중 유전자 검사가 가능한 145개의 시료를 제공받아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고, 한 명의 한국인 신원을 확인했다. 바로 1942년 11월, 25살의 나이에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일본 군속으로 강제 징용된 故최병연 씨다. 지난해, 긴 기다림 끝에 故최병연 씨의 유해 봉환이 추진됐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현재 모든 작업이 중단된 상태다. 당시 타라와 전투에 투입됐던 조선인 군속은 1,200여 명. 생존자 129명을 제외하면 아직 천여 명의 희생자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명작다큐]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바다를 건너온 재일동포

642명의 선택 | KBS파노라마 '아버지의 나라'

Aug 14, 2020

KBS 파노라마 “아버지의 나라

 

- 재일동포 청년들의 선택” (2013.6.6 방송)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나자 재일동포 청년들은 앞다투어 전쟁에 자원했다. 청년들이 청춘과 바꿔 선택한 것은 지옥과도 같은 전쟁터였고, 가본적도 없는 '아버지의 나라'였다. '아버지의 나라'를 선택한 642명의 청년들. 그들의 인생을 바꾼 선택의 의미는 무엇일까?

 

■ 청춘시절 선택한 ‘아버지의 나라’ 징용 온 아버지를 따라 세 살 때 일본으로 간 이선욱씨. 일본의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철도 선로설계사로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참전을 결심한다. 결혼한 지 9년이 되던 해, 이선욱씨는 아내와 아이를 남겨놓고 28살의 나이로 기억에도 없는 조국의 전쟁터를 선택했다. 이선욱씨뿐만이 아니었다.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학업, 직업, 가정을 포기한 채 현해탄을 건넜다. 대부분은 전쟁과 무관하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명문대 학생들과 엘리트 청년들이었다. 안정된 현재와 보장된 미래를 버린 그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버지의 나라'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 생존의 갈림길 1950년 9월, 재일동포 청년들은 현해탄을 건너 인천에 상륙했다. 일본의 미군기지에서 군번도 계급도 없이 단 삼일간의 훈련만을 받고 참전한 청년들에게 전쟁터는 지옥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게 언어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였다. 한국어라고는 ‘아버지’, ‘어머니’ 정도밖에 하지 못했던 청년들이 대다수였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투에 나섰지만, 퇴각명령을 알아듣지 못하고 전투에 임하다가 죽어간 청년도 있었다. 결국 135명의 재일동포 청년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전사했다.

 

■ 남겨진 사람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청년들에게는 또 다른 운명의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이 허가 없이 떠난 청년들의 재입국을 거부한 것이다. 242명의 청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남겨졌다. 1952년 5월에 제대한 조승배씨도 며칠 차이로 일본에 돌아가지 못했다. 메이지 대학교를 다니던 엘리트였지만 학업을 포기하고 최연소로 전쟁에 참전한 그였다. 일본에는 그가 다니던 학교와 그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었다.

 

한국에 남겨진 청년들과 함께 부산에서 입국허가를 기다렸지만 끝내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부모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던 김운태씨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청년 중 한명이다. 일본을 떠나올 때 그에게는 세 살배기의 어린 딸과 만삭의 일본인 아내가 있었다. 참전당시, 가족들과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돌아가지 못한 채 한국에 정착해야했던 그는 지금까지 63년 동안 가족의 행방도 알지 못하고 있다. 참전 전에 찍은 딸 미요코의 낡은 사진 한 장만이 그가 기억하는 가족의 마지막 모습이다.

 

■ 젊음과 맞바꾼 선택의 의미 꽃보다 아름다웠던 청춘, 642명 중에 1/3은 임무를 완수하고 일본의 가족 품으로 돌아갔지만, 1/3은 죽고, 1/3은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참전하지 않았다면,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서 다니며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청춘의 선택은 그들에게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연고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에 홀로 남겨진 이들. 청춘을 바쳐 나라를 지켰지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버지의 나라'에서의 가혹한 삶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불행이었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 제대해 일본에서 살고 있는 이선욱씨. 그는 매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받는 보훈연금 88만원을 통영의 고아원에 기부한다. 전쟁 때 만났던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죽어서도 한국땅에 묻히는 것이다. 세 살 때 일본으로 이주해 기억에도 없는 나라를 위해서 평화로운 청춘시절을 포기했고, 그 보상까지도 한국을 위해서 사용하는 그에게, ‘아버지의 나라’는 대체 어떤 의미일까?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조승배씨와, 63년간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김운태씨, 그리고 수많은 재일 동포 청년들이 젊음과 맞바꾼 선택의 의미는 무엇일까. ※ 관련 영상 보기 63년의 그리움, 내 딸 미요코 https://youtu.be/JEo7TaUqavw

 

 

KBS 역사스페셜 – 조선과 통하라, 코리아호의 출항 /

KBS 2010.1.30 방송

https://youtu.be/VPM3T3UdwgU

Sep 28, 2020 조선 스페셜

- 네덜란드의 긴급명령, 범선 코리아호를 제작하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 대만, 인도 등에 상관을 설치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을 했다.

동인도회사의 업무를 세세히 기록한 자료집에서 놀랍게도 1669년 3월 건조된 ‘코리아’라는 이름의 선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길이 약 25미터, 탑승인원 20명 정도의 소형 크기였던 코리아호. 하멜표류기 이후 미지의 나라였던 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기동성이 뛰어나 빠르게 항해 할 수 있던 코리아호는 조선을 탐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출항한다.

 

- 조선 앞바다로 진입하라 조선은 코리아라는 이름을 제외하곤 알려진 게 없었다. 다만 금과 보석이 많은 부국으로 인식돼 네덜란드, 영국 등 여러 유럽국가에서 교역 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네덜란드는 조선에 가기 위해 1639년 ‘보물섬 원정대’ 라는 탐사대를 꾸려 태평양까지 진출하나 풍랑으로 실패한다. 다른 유럽국가들과 치열한 무역 경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 회사도 조선에 교역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한다.

 

후에 조선, 영국, 네덜란드 사신들이 당시 후시미성이라는 곳에 모이게 된다. 조선의 관료를 눈앞에서 볼 기회가 생긴 영국은 조선통신사와 직접 접촉을 시도하지만 조선통신사의 호위 임무를 맡고 있던 쓰시마 번주는 이들의 요청을 거부한다. - 중국, 일본의 중계무역기지로 조선을 선택한 네덜란드 에도시대 많은 유럽인들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이들의 목적은 일본의 은과 선교. 하지만 일본은 유럽인에게 무역 이외의 것을 원치 않았다. 네덜란드는 무역 이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막부에게 증명했고, 1641년, 막부는 나카사키에 인공섬을 조성해 네덜란드 상인들을 이주시킨다.

 

통상을 업으로 삼는 네덜란드인은 중국과 일본의 중계무역을 위해 새로운 무역기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조선은 매력적인 중계무역기지였다. 네덜란드는 조선과 접촉하여 직교역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코리아호를 건조한 것이다. - 멈춰버린 코리아호, 조선의 운명 코리아호가 출항한 후 암스테르담 동인도회사 위원회에 조선과 관련된 일본 현지 상인이 쓴 편지가 도착한다. 조선은 가난한 농업국가로 교역물품이 적고, 어떠한 거래도 원치않는다는 것과 일본 막부의 반대가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네덜란드는 출항한 지 10년 뒤인 1679년 11월 15일, 코리아호를 폐선한다. 배의 이름인 코리아에는 결국 도착하지 못한 채였다. 신역사스페셜 25회 – 조선과 통하라, 코리아호의 출항 (2010.1.30. 방송)

 

 

 

KBS 다큐멘터리극장 – 파란 눈의 영부인 /

KBS 19940424 방송

https://youtu.be/YcntT4ZYrrQ

Apr 4, 2022

◼︎ 대한민국의 첫번째 영부인이 된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여사.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함께 겪은 ‘푸른 눈의 이방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대기를 당시의 정세와 함께 정리한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만남과 미국에서의 결혼시절, 영부인으로서의 역할과 언어장벽, 피난시절과 하와이 망명시절, 그리고 1970년 귀국 후 생활과 일화들을 소개한다.

 

다큐멘터리극장 47회 – 파란 눈의 영부인 (1994.4.24.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