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 선조(先祖) ‘황금항아리’는 발해(渤海) 대야발의 후손 대조선(大朝鮮) 보혈(寶血)이 서토(西土)의 강역을 휩쓸었나니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후예’ 주장하는 전원철 변호사..

2023. 2. 17. 17:27역사의 연구/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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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칭기즈칸 선조(先祖) ‘황금항아리’는 발해(渤海) 대야발의 후손 대조선(大朝鮮) 보

지난 6월호에서 우리는 <집사>와 <사국사>의 기록을 통해 칭기즈칸과 몽골족의 선조에 대해 알아보았다. <집사>와 <사국사>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의 일한(Il Han) 시대에 ‘몽골(몰골/말갈)과 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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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칭기즈칸 선조(先祖) ‘황금항아리’는 발해(渤海) 대야발의 후손

대조선(大朝鮮) 보혈(寶血)이 서토(西土)의 강역을 휩쓸었나니

중앙일보  입력 2017.06.24 23:30

업데이트 2017.07.22 13:29

몽골 기마병 부대가 평원지대를 힘차게 달리고 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족과 발해 제10대 군주 선왕(宣王)이 협력해 발해의 영토를 신라의 한주 지역까지 넓혔다고 주장한다. 더하여 몽고제국의 창업자 칭기즈칸의 선조(先祖)가 발해의 왕통(王統)에서 비롯됐다는 흥미로운 역사 이론(異論)을 제시한다. [사진·중앙포토]

 

문제의 인물 ‘금행(金幸)-황금항아리’는 용녀(龍女)와 삼지파(三支派)를 낳아 동아시아에 거문대족(巨門大族)을 번성케 했다. 위로는 고구려의 국혼(國魂)을 이은 대발해(大渤海)의 왕통(王統)을 승계하고, 아래로는 몽고제국의 시황(始皇) 칭기즈칸과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에게까지 혈맥(血脈)이 이어졌다. 필자는 <집사>와 <사국사>를 비롯해 동서고문헌을 넘나들며, 중원과 고토(古土)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파헤친다. 과연 그 옛날 세계제국 몽고의 비밀은 밝혀질 것인가? 허황한 대국론(大國論)이 횡행하고 동북공정의 마수(魔手)가 암약하는 오늘날, 북방비사(北方祕史)를 추적한 이론(異論) 속으로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지난 6월호에서 우리는 <집사>와 <사국사>의 기록을 통해 칭기즈칸과 몽골족의 선조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면서 최근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만난 자리에서, 북핵 제거문제와 관하여 중국 측의 협조를 요청하는 트럼프의 말에 불협화음을 내면서 시진핑이 한 말에 대해 논평했다.

 

당시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지나의 일부이므로 남북한 문제에서 손을 떼라’는 투의 발언을 하면서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be part of China)”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진핑의 말과 역사적 진실은 정반대다. 지금까지의 연재에서 살펴본 것처럼 청·명·원의 역사만 돌아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포함한 칭기즈칸 세계제국의 뿌리가 왜 우리 민족에 있는지 못 다한 이야기를 해보자.

 

<집사>와 <사국사>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의 일한(Il Han) 시대에 ‘몽골(몰골/말갈)과 타타르 종족 간의 대전쟁’이라 부르는 큰 전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몽골군이 참패하여 오직 ‘키얀(Kiyan)’과 ‘니쿠즈(Nikuz)’라는 남자 두 명과 그 둘의 아내, 시종 몇 명만이 살아남았다.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가나 쿤’이라는 골짜기로 숨어들어갔다. 이 둘의 후손이 불어나 후에 몽골족과 칭기즈칸의 선조가 되었다. 일한의 아들 키얀의 후손은 몽골족 키야트(乞)씨로서 칭기즈칸의 선조가 되었다. 니쿠즈의 후손은 보통 몽골 종족인 다를라킨(都利行)씨와 원래는 몽골 종족이 아니었던 우량카트(吾良哈) 종족이 되는 등 몇 지파로 나뉘었다고 한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왕건의 초상. 필자는 왕건이발해의 후손‘금행-황금항아리’외증손자라는 이색주장을 제기한다.

[사진캡처·위키피디아]

 

키얀은 발해 반안군왕, 또는 진국왕 대야발의 차남 ‘일하’, 즉 일한의 아들인 ‘걸간’이었다. 키얀은 칭기즈칸의 직계선조다. 그들은 발해 제2대왕 무왕 대 무예 시절의 인물들이다. <집사>와 <사국사>가 전하는 그 전설적인 전쟁은, 당나라 현종이 새로이 태어난 제2의 고구려·발해를 와해시키기 위해 흑수말갈을 분리시키려는 획책을 한 것에 대한 대무예의 항의와, 그 항의에도 불구하고 현종이 발해가 소국이라고 얕본 결과 일어난 전쟁이었다. 마치 지난해 12월 천하이(陳海) 중국 외교부국장이 방한했을 때, 한국의 사드배치에 관련하여 중지를 요구하며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에 대항해서 되겠느냐”고 한 태도와 같다.

 

칭기즈칸은 발해 제2왕가 시조 ‘대야발의 후손(後孫)’ 

 

몽골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 세워진 칭기즈칸의 대형 동상. 필자는 세계제국 몽고의 창업자가 발해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사진·중앙포토]

 

이런 역사 속에서 본 ‘일한’과 ‘키얀’, 그 일행인 ‘니쿠즈’의 후손인 다를리칸씨 등에 대해 부분적으로 기록한 <구당서>와 <대씨대동보>와 페르시아어로 집필된 <집사>와 <사국사> 그리고 중세 투르크어로 기록된 <투르크의 계보> 등에 완벽히 기록된 족보를 종합해보면 칭기즈칸은 발해 제2왕가의 시조인 대야발의 제19대손이다.

 

칭기즈칸이 태어나기 앞서 전설적 시조인 키얀과 니쿠즈가 들어갔다는 ‘아르가나쿤’은 발해의 서경인 <요사> 속의 압록군, 곧 ‘압록강나군’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발해 제2왕가의 시조인 대야발이 칭기즈칸의 시조라면, 칭기즈칸은 어째서 우리 땅에서 태어나지 않고 오늘날 몽고라 불리는 땅에서 태어나 몽골인으로 알려지게 됐을까?

 

7세기 인물인 대야발과 12~13세기 인물인 칭기즈칸의 탄생시기, 우리 땅과 동북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즉 칭기즈칸의 선조 계보에 속한 인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겪은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칭기즈칸의 계보를 적은 <집사>와 <사국사>에 따르면, 몽골종족은 역사의 어느 시기에 ‘아르가나쿤’에서 빠져나왔다고 한다. 단 몽골 종족이 그곳을 나오기에 앞서, 우선 그들 중 한 지파인 ‘키얀’의 후손이자 칭기즈칸의 선조 종족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그곳을 뛰쳐나왔다고 전한다. 그 종족의 수령은 ‘황금항아리(Bastu-i-jarrin)’라 불리는 인물로, 그의 영도 아래 한 무리의 몽골 종족이 아르가나쿤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집사> 등에 등장하는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 시조인 ‘황금항아리’는 과연 누구일까? 그는 칭기즈칸의 직계선조인 ‘코르라스’ 지파를 포함하여 ‘콩그라트’와 ‘예기라스’ 등 3개 지파의 공동 선조다. <집사> 등에 따르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장남 ‘추를룩 메르겐’, 차남 ‘쿠바이 시레’, 삼남 ‘투스부다’가 있었다. 그리고 그 셋의 후손은 훗날 콩그라트 종족, 예키라스 종족, 코르라스 종족이 되었다. 칭기즈칸은 이 중 삼남 ‘투스부다’의 후손 가문인 코르라스 종족의 후손이다. 칭기즈칸의 아내인 부르테 우진(부여 대씨 부인)은 장남 추를룩 메르겐의 후손인 콩그라트 종족 출신이다. 차남 쿠바이 시레의 후손인 예키라스 종족은 훗날 ‘알탄칸(金王)’ 즉 금나라 왕가가 된다.

콩그라트 종족 3지파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에서 예키라스 지파인 금나라 왕가의 완안(完顔) 아골타(阿骨打)의 가문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라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또한 청나라 황제의 칙명을 내려 쓴 <황조통지>에는 몽골 코르라스 종족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 기록했기 때문이다. ‘고려(高麗)’가 오늘날 우리 코레아(Korea)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콩그라트씨는 우리 사서에 ‘환어라씨(驩於羅氏)’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황금항아리’, 곧 한자로 ‘금관(金罐)’, 이두로 ‘금 칸’이 되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집사>는 그를 ‘군주와 같은 존재’라고 기록했다. 그에 관해 타타르 종족 사서인 <칭기스의 서>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으로 적었다. 이 ‘황금의 칸’이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보면, 그는 놀랍게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금행(金幸)’, 곧 고려식 이두로 ‘황금의 칸’이다. 이 이름은 <칭기스의 서>에 기록된 ‘알툰 칸(Altun Han)’ 족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의 아들로 <금사>에 기록된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阿骨打)의 조상이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황금’이고, ‘행(幸)’은 전에 다루었던 도리행의 경우에서 살펴보았듯이 옛 한자음이 ‘캉’, 즉 ‘칸(汗=Khan, Qaan, 군주)’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다. 19세기 초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Firdaus al lqbal)>은 ‘황금의 칸’, 곧 알툰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로 기록한다. 즉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인 셈이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6월호에서 본 그 가문의 계보를 참고해보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4세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황금항아리’의 자손인 ‘삼지파(三支派)’는 우리 종족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금행(今幸)’ 혹은 ‘금행(金幸)’이라고 기록된 인물에겐 3명의 아들이 있었다. <금사(金史)>의 ‘권일본기제일세기(卷一本紀第一世紀)’에 따르면 큰 형 아고래(阿古迺), 둘째 함보(函普), 그리고 막내 보활리(保活里) 이렇게 3형제다.

결국 <집사> 와 <사국사>가 페르시아어로 기록한 ‘황금의 칸’의 3아들 추를룩 메르겐, 쿠바이 시레, 투스부다는 <금사(金史)>의 아고래(阿古迺), 함보(函普), 보활리(保活里)라는 말이다. 얼핏 보면 두 사서에서 나오는 이 두 부류의 이름들은 서로 달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그룹의 이름 뜻을 생각해보면 아래의 도표와 같이 합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한자 ‘阿古迺’는 ‘아고래’라고 읽는다. 그러나 원(元) 말 메르키드(말갈) 족 출신의 사편찬 총재 ‘탈탈(脫脫)’이 <금사(金史)>를 쓸 당시의 발음은 ‘카고라이’, 곧 오늘날의 ‘고구려’[지나어 ‘까오구리’, 일본어 ‘코고라이’]이다. 이는 표음 문자인 페르시아어 및 투르크어 사서 <집사> 등에서는 ‘콩그라-트’, 곧 ‘큰고려(고구려)-씨’ 지파 성씨로 적혔다. [원말 메르키드(말갈) 족은 곧 발해 제15대 마지막 왕 대인선의 가문이고, 그 집안 출신이었던 몽골식 이름 ‘탈탈(脫脫, 타타르=대대로)’의 우리 식 성명은 ‘대용(大用)’인데, 곧 그는 “대(大)씨 집안의 이름 용(用)”이다. 그런 점에서 <금사(金史)>는 “중국사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쓴 사서다.]

 

<투르크의 계보>에 따르면 아고래(阿古迺), 즉 ‘추를룩 메르겐’에게는 ‘콩그라트(큰고려=고구려)’라고 불리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의 이름을 따서 그 후손의 지파는 협의의 “콩그라트”씨라고 한 것이다.

아고래(阿古迺)의 후손이 고유한 의미에서는 독자적으로 ‘콩그라트(고구려씨)’로 불렸지만, 그의 두 아우인 함보(函普)와 보활리(保活里)의 후손 지파인 ‘예키라스(역라씨)’와 ‘코르라스(고려나씨)’도 넓은 의미에서 ‘콩그라-트’로 불렸다.

 

 

<집사>도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달리 말해 <고려사> ‘금행(金幸)’의 세 아들의 후손은 모두 합쳐서 “콩그라트” 씨고 좁은 의미에서는 그의 큰 아들 아고래(阿古迺)의 후손을 이 이름으로 불렀다. 다만 그 두 아우의 후손을 별도로 부를 경우 그 둘을 특히 ‘예키라스’와 ‘코르라스’ 씨라고도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이중 ‘코르라스’ 가문이 칭기즈칸의 선조 가문이다.

 

또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따르면 함보(函普)가 갔다는 그 ‘완안부(完顏部) 복간수(僕幹水)’는 우리 땅 함북 ‘길주(吉州) 이북’이고, 보활리(保活里)가 갔다는 ‘야래(耶懶)’는 오늘날 함남 함흥이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의 직계 선조인 보활리(保活里) 형제는 태생으로도 분명히 우리 땅 사람이다.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집사>에 따르면, 키얀 일행이 ‘아르가나쿤’으로 들어간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자손들이 불어나 여러 지파가 생겼는데, 그 어느 때 그중의 한 지파인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몽골종족 지파와 사전 상의도 없이 급작스레 그곳을 뛰쳐나와 대장정을 했다. 왜 아르가나쿤을 빠져나왔으며, 그것은 대체 무슨 일이었던가?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금행이 발해 제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와 족보에 따르면 8촌 형제, 또는 <구당서> 등에 따르면 9촌 조카 관계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금행이 자기 직계의 8촌 형제 또는 9촌 조카의 대 신라 남진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자신의 아들 3형제와 ‘발해서경 압록강나군’을 뛰쳐나와 “타타르와 몽골 종족의 대전쟁” 때 잃어버린 남쪽 주군들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新羅)를 쳤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금행의 가문과 그 일행은 북쪽의 압록강나군에서 남하하여 오늘날 황해도 평산인 평주(平州)와 개성, 한강 유역까지 되찾았다. 그 덕택에 발해 제10대왕이자 대야발 가문에서 첫 왕-곧 발해 제2왕조의 첫 임금이 된 선왕(宣王) 대인수의 발해는 <구당서> 및 그 외 사서들이 말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선왕(宣王)과 콩그라트족이 이룩한 ‘해동성국의 광영’

 

적군과 혈투를 벌이는 몽고 기병들. 몽고제국의 시황(始皇) 칭기즈칸은 당대 유라시아 대륙을 평정하며 세계를 제패했다. [사진캡처·위키피디아]

 

앞서 본 <집사>의 이야기는 콩그라트 종족이 선왕의 이러한 실지회복 작전을 밀지(密旨)로 통보받고 이에 적극 동조하여 “[도리행 종족 등] 다른 사람[말갈 종족]들에 앞서서 상의도 하지 않고 밖으로 창졸간에 [곧 급작스레] [전쟁준비를 위해] 다른 종족들의 노지(爐地)[곧 무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 땅]를 발로[짓] 밟[고] [여기 저기서 널린 무기를 거두어 전투 채비를 갖추고]”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다.

 

곧 그들은 <요사>에 기록된 ‘발해서경 압록군’, 곧 오늘날 평안북도와 함경북도를 중심으로 백두산을 끼고 길림골(길림성)을 포함하는 그 땅을 뛰쳐나와 그의 선조인 일하(壹夏,일 한)와 간(澗, 곧 키얀) 시대에 발해-당-신라 전쟁에서 잃어버린 발해의 남쪽 주군을 되찾기 위해 일어서서 그 일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외의 고구려 시대의 변경 마을이던 말갈칠부(靺鞨七部)도 회복하여, 마침내 해동성국이라는 이름을 얻게된 것이다.

 

금행은 ‘아르가나쿤’, 곧 발해 ‘압록강나군’에서 뛰쳐나와 신라에 대한 영토 수복에 성공했다. 이에 그는 <집사>에서 콩그라트 시조 ‘황금항아리’, 곧 <칭기스의 서> ‘황금의 칸’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는 왕건(王建)의 외증조부로서 ‘서해용왕(西海龍王)’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되찾은 땅의 중심인 평주(平州)를 다스렸다. 이는 곧 ‘발해-고려군왕(渤海-高麗郡王)’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집사>는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을 두고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던 것이다. 발해 다음 가는 지방군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쪽에서 바라본 압록강. ‘금행-황금항아리’는 발해의 ‘압록강나군’, 즉 ‘아르가나쿤’에서 뛰쳐나와 신라에 대한

실지 수복에 성공했다. [사진·중앙포토]

 

바로 이 업적을 이룬 ‘금행(金幸)’, 즉 ‘황금의 칸’은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의 장인으로 ‘서해용왕[西海龍王]’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그 뜻은 곧 발해(渤海=서해)-고려(용=고렝이=高麗) 군왕(郡王)이다. 그의 딸인 용녀(龍女, 고렝이 기집=고려여인)가 왕건의 할머니다.

 

왕건을 기준으로 하면 ‘금행(金幸)’은 왕건의 외증조부다. ‘신라 개성호족’으로 잘못 알려진 왕건이 국호를 ‘고려(高麗)’로 택한 이유는 그가 바로 ‘발해-고려의 왕’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신라에 대한 영토 수복의 기쁨은 한 세대를 가지 못했다. ‘황금의 칸’, ‘금행(金幸)’, 곧 서해용왕(西海龍王)의 아들 3형제 시대에 발해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금사>에 따르면 완안부(完顔部), 곧 조션(女眞) 시기(926~1115년) 이전의 발해(渤海) 시기(698~926년)의 반안군(盤安郡)에서는 두 종족 간에 다툼이 일어나 싸우는 일이 발생했고, ‘금행(金幸)’, 곧 서해용왕이 회복하여 그 아들 대까지 통치하였던 발해 남쪽 주군도 다시금 신라에게서 뺏고 빼앗기는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 ‘해동지도’에 나와 있는 압록강 상류의 사군 지도. 당시 세종은 ‘조종의 강역은 양보할 수 없다’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발해와 신라가 대치를 하던 이른바 &#39;남북국시대’에서도 압록강 일대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격전지였다. [사진·중앙포토]

 

이 사실은 우리 역사학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915년에 정식으로 선포되어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요(遼)나라는 200 몇십 년간 대륙의 태반을 지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7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발해 반안군(盤安郡)’이라는 말은 1126년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백성과 땅을 접수한 금(金)나라 때에도 기록되지 못했으며, 14세기 원말 조션(女眞) 시기에 쓰던 지명을 적은 ‘완안군(完顔部)’이라는 형태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지명의 역사에서 다시 정치사로 돌아가자. 바로 그 ‘완안군(完顔部)’, 곧 사실은 ‘발해(渤海) 반안군(盤安郡)’에서 일어난 내분 때문에 앞서 인용한 <금사> <본기 세기>의 이야기처럼, ‘금행(金幸)’의 세 아들 중 장남 아고래(阿古迺)는 발해의 남쪽 땅인 평주(평산)에 남고, 그 아우 둘째 함보(函普), 그리고 막내 보활리(保活里) 2형제는 발해(渤海) 시대의 복간수(오늘날 함북 길주)와 야래(함남 함흥)로 그 두 종족간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떠나갔다. 그 내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함보와 보활리는 각 지역의 지방장관이 되었다.

 

그 후 약 두 세대 간 북쪽의 발해, 남쪽의 신라가 대치하면서도 안정된 형세를 유지했다. 이른바 ‘남북국시대’다. 발해에서 내란이 수습된 지 2세대가 될 즈음, 이번에는 골품제도가 변질되고 과거 고구려와 백제 백성에 대해 차별을 일삼던 신라 내부에서 대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KBS 대하사극 <태조왕건>에서 왕건 역을 맡은 배우 최수종(왼쪽)과 궁예 역을 맡은 김영철 씨. ‘후(後)고구려정권’을 수립한 궁예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폭군으로 변한다. 궁예의 학정을 타도하고자 왕건은 심복 신숭겸 등을 동원해 918년 궁정혁명을 일으키고 고려왕조를 개국했다. [사진·중앙포토]

 

원래 고구려 보장왕(이름 ‘高藏’)의 아들로 신라에 귀부한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의 후손인 궁파(弓巴) 장보고(張保皐)의 딸 궁씨녀(弓氏女)에게서 아들로 태어난 궁예(弓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대란이 일어났다.

 

그의 이러한 계보는 몽골어 사서 <알탄톱치(황금사강)>에 비밀코드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설명은 생략한다. 이러한 배경의 계보를 지닌 궁예의 모계 궁씨녀의 선조는 고구려 보장왕임에도 불구하고 궁예 자신은 남국 신라왕을 아버지로 둔 인물이었다.

 

그는 신라 조정이 자신을 포함한 고구려계 인사에 대한 차별 때문에 갓난아기 시절에 죽임을 당할 뻔하다 다행히 죽지는 않고 애꾸눈이 된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불만을 품고 신라에 대한 혁명을 일으킨다. 그는 자기 부왕의 나라를 ‘멸도(망할 놈의 나라)’라 부르고, 자기 부왕의 초상화를 칼로 자르고는 강원도 철원 땅에서 모계의 계보를 따라 나라 이름을 ‘[후(後)]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칭했다.

 

바로 이때였다. 앞서 반안군(=완안부) 복간수(함북 길주)로 떠났던 함보(函普)와 야래(함남 함흥)로 갔던 그의 아우 보활리(保活里) 각각의 손자인 ‘칼지다이’와 ‘바르가 바아타르’도 이 기회에 남하하여 [후(後)] 고구려의 왕, 궁예의 정권에 참여했다.

 

그들은 함보(函普)와 보활리(保活里)의 아버지인 ‘금행(金幸)’의 증손자들에 해당한다. 이 중 한 명은 우즈베키스탄 ‘콩그라트 왕조’ 공식 역사서인 <행운의 정원>에 ‘칼지다이 칸(Qaljiday Khan)’으로 기록되었고, <고려사(高麗史)>에는 아지태(阿之泰)로 기록되었다. 이 ‘아지태(阿之泰)’의 당시 소리는 ‘카지타이(커씨씨=乞氏씨족)’로 우리말로는 ‘칼지다이(클씨씨족=대씨씨족) 칸(족장)’과 같다.

 

태조왕건(太祖王建)은 ‘황금 칸-금행’의 외증손자

 

또 하나의 인물인 ‘금행(金幸)’의 아들 보활리(保活里)의 손자는 부랴트 구비역사서 <부랴트 역사의 글(Buryaaday Tuukhe besheguud) 제2권>에 ‘바르가 바아타르(Barga Baatar)’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말로 ‘발해 막하돌(莫賀咄)’, 곧 ‘발해 말갈 추장’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인물이고, <집사>에서는 ‘미샤르 울룩’-[보활리의 손자]이다. 바로 이 인물도 자기 집안의 종형제 ‘칼지다이(칸)’와 함께 궁예의 [후(後)] 고구려(高句麗) 정권에 참여하였다.

 

‘황금의 칸’ ‘금행(金幸)’의 증손들인 이 두 인물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 바로 ‘금행(金幸)’ 외증손자 왕건(王建)이다. 왕건(王建)은 ‘금행(金幸)’의 외증손자이자, 자기 아버지인 용건(龍建)의 천거로 궁예의 정권에 참여하여 ‘칼지다이 칸(Qaljiday Khan)’, 즉 <고려사(高麗史)>의 아지태(阿之泰)와 종형제 ‘바르가 바아타르(Barga Baatar)’와 함께 궁예의 정권에 봉사하고 있었다.

 

외화(外畫) <징기즈칸>의 한 장면. 당대 세계의 대륙을 정복했던 몽고 기마군들이 위용과 기상을 자랑하며 진격 중이다. 필자는 지금껏 이민족의 역사로만 여겨졌던 몽고의 비사(秘史)에 우리 조상 대발해 왕가(王家)의 혈맥이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사진·중앙포토]

 

단, 초기의 반(反)신라 혁명에 성공한 궁예는 십수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른바 학정을 하면서 국명도 마진(摩震)-태봉(泰封)으로 개칭하였다. 나아가 왕건의 외가 출신으로 궁예 자신의 정부인인 강씨 부인과 그녀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 청광과 신광도 죽였다. 그러자, 이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왕건은 주군 궁예를 제거하기 위해 심복 신숭겸 등을 동원하여 918년 궁예에 대해 궁정혁명을 일으키고 그를 죽였다. 그는 나아가 마진-태봉으로 바뀐 후(後) ‘고구려(高句麗)’의 이름을 원래의 고구려를 말하는 ‘고려(高麗)’로 되돌려 놓는다. 그가 “고려 태조 왕건”이다.

 

이때 자신의 주군인 궁예(弓裔) 편에 서서 싸운, 그러면서도 왕건에게는 외왕고종 형제들인 아지태 곧 <행운의 정원>에 기록된 [아고래의 손자] ‘칼지다이(Qaljiday)’와 [보활리의 손자] ‘바르가 바아타르’는 결국 왕건과는 반대편에서 싸웠다.

 

그러나 궁예가 왕건의 휘하 신숭겸 등의 무리에 의해 쫓기다가 결국 백성에게 잡혀 죽자, 두 사람은 궁예의 시신을 안고 궁예가 신임했던 한 무리의 승려들 속에 끼어 북쪽 발해로 향했다. 당시의 발해 남경 용원부의 남쪽 고을인 등주(登州), 곧 오늘날 함남 안변에 궁예의 시신을 묻고 발해의 북쪽 지방으로 떠나간 것이다.

 

이 일행 중의 하나였던 발해 막하돌(莫賀咄), 곧 부랴트-몽골 방언으로 “바르가(발해) 바아타르(막하돌)”이라고 기록된 보활리의 손자에 관해 <부랴트 역사의 글(Buryaaday Tuukhe besheguud) 제2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르가 바아타르(Barga baatar)는 카라 호수(Khara dalay, *고려 바다=발해=서해)의 기슭에 있었다. 그곳에서 커다란 전쟁[*왕건과 궁예 사이의 궁정혁명]이 벌어졌다. 그 곳에 토고온 투메르(관칭 ‘서해용왕’, 실명 ‘두은점 각간’, 곧 왕건의 외증조부이자, 바르가 바아타르의 증조부) 카안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때 거기서 빠져 나왔다. 바르가 바아타르는 그 전쟁에서 자기의 세 아들을 데리고 아내와 딸과 함께 도망쳐 나왔다. 모든 물건, 가축도 그곳에 버려두고 빠져나왔다. 그곳에 정변이 나서 큰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이 원정에서 가고 있던 사람들은 토고온 투메르 카안의 황금자리를 카라 호숫가에 두고 떠났다고 한다.”

 

세계제국에 흐르는 대발해 왕가의 혈맥(血脈)

 

이 ‘토고온 투메르 카안’은 바로 <고려사(高麗史)>의 서문격인 <고려세계(高麗世系)>가 ‘발해-고려왕’이라는 뜻을 가진 직관 칭호인 “서해용왕(西海龍王)”이자 달리 “금행”의 실명 ‘두은점 각간(豆恩店 角干)’이다. 왕건의 외증조부인 것이다. 곧 <집사>의 ‘황금항아리’이자, <칭기스의 서>의 ‘알툰 칸(황금의 칸)’이다.

 

궁예와 왕건 사이의 이 전쟁 때문에 그 서해용왕(西海龍王) ‘두은점 각간’의 증손자 ‘바르가 바아타르(Barga baatar)’, 곧 우리말로 “발해(渤海) 막하돌(莫賀咄)”[발해-말갈군왕]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

 

“카안[궁예]의 막내아들 부르테-쇼노(Bu’rte-Shono)를 데리고 가서 여러 가람을 건너고 여러 산고개를 넘어서 마침내 바이갈(바이칼 호수, *곧 ‘부여-고려’호)이라는 호수 앞 들에 머물렀다. 거기에 처음부터 살던 베데(bede, 곧 한문사서의 발해-말갈인)라는 백성들과 만났다.”

 

이 ‘바르가 바아타르’는 <코리-부랴트 11선조의 뿌리에 관한 족보 이야기> 속에서는 ‘바르가 바아타르 타이상 노욘(Barga baatar Taisan noyon)’으로도 기록되었다. 이는 우리 발해(渤海)-(후) 고구려(高句麗) 관칭으로 ‘발해(渤海) 막하돌(莫賀咄) 대상랑(大相郞)’이라는 말의 부랴트-몽골어 음변이다.

 

‘바르가 바아타르’는 그곳에 살면서 그 후 ‘세 아들’을 낳았다. 이 세 아들은 각각 에히레드 부랴트(약라[고구려]씨 부려씨), 볼라가드 부랴트(부여[강원도 부양] 부여씨), 그리고 코리-부랴트(고려-부여씨)의 선조가 된다. 그 가운데 코리-부랴트(고려-부여씨)의 시조가 된 막내 ‘코리 메르겐(*고려-말갈)’은 1240년경 완성된 <몽골비사>에 따르면 그 지역의 군장인 바르구다이 메르겐(발해씨 말갈)의 딸 ‘바르가잔 고아(발해진 걸가)’와 혼인하였다. 이 여인에게서 난 외동딸이 ‘모든 몽골인의 전설적인 어머니’라는 ‘알란 고아(Alan-Goa)’다. 이 전설적인 ‘알란 고아’가 바로 칭기즈칸의 10대 조모다. <코리-부랴트 11선조의 뿌리에 관한 족보 이야기>는 바로 이 전설적인 여인의 10대 후손이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칭기즈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세계정복자 몽골(몰골/말갈)인 ‘테무진(대무신)’, ‘칭기즈칸(진국왕)’은 분명히 우리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는 한강(漢江) 이북, 곧 강북지방부터 시작되었던 고구려 영토를 이어 받은 발해의 왕족 출신이다. 이 땅을 떠난 이 가문은, 이 땅 밖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유라시아 대륙 및 아랍반도에 세계제국을 세웠다.

 

그렇다면 시진핑 주석이 말한 바 ‘코레아는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과는 거꾸로, 이른바 ‘중국’이 사실은 세계제국을 건설한 우리 고구려·말갈·몽골제국 4칸국 중의 한 칸국이었던, 원나라의 식민지였다는 게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전원철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체첸전쟁 때 전장에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했다. 우리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세계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가 한민족에 있음을 밝힌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몽골 제국의 기원> 1, 2권을 출간했고,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다수의 역사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異人열전]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후예’ 주장하는 전원철 변호사

“칭기즈 칸의 조상은 추마나 콘, 곧 고주몽”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 “몽골-튀르크계 통칭하는 ‘타타르’는 고구려 ‘대대로’에서 나온 말”
⊙ “터키인의 조상 오구즈 칸은 고구려의 후예”
⊙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 몽골·만주·튀르크·아랍어 등 29개국어 해독…, UNHCR 주재관으로 체첸에서 근무

전원철
1963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美 아이오와대 로스쿨 법학박사(JD), 뉴욕주립대 법학박사 후 과정 / 외무부 유엔국제인권사회과 유네스코 자문관, 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 /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 출간
 
 
 
〈고구려 고(高)씨 왕가의 방계(傍系)인 대(大)씨가 세운 발해는 732년 당(唐)-신라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일한, 즉 발해 무왕 대무예의 사촌형 대일하(대조영의 동생 야발의 아들)가 이끌던 발해(말갈/모굴/모골)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다. 그 결과 발해는 대동강 이남에서 한강 이북에 이르는 땅을 신라에 빼앗긴다. 일한은 전사하고 그의 아들 키얀(칸)과 그의 7촌 조카 네쿠즈(니쿠즈·임금)는 아르카나 쿤(에르게네 쿤·압록군)이라고 하는 오지(奧地)로 들어간다.
 
  훗날 ‘황금항아리’라고 불리는 영웅이 일족(콩크라트족)을 이끌고 아르카나 쿤에서 탈출, 신라군을 물리치고 평주(平州)에 정착한다. ‘황금항아리’는 바로 《고려사절요》에 나타나는 금(金)나라를 개창한 완안아골타의 선조 함보의 아버지 금행(金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이라고 하는 ‘서해용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후일 율두즈 콘(바르카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랑)이라는 손자를 두게 되는데, 그가 아버지는 신라왕, 어머니는 고구려계 여인인 궁예다. 궁예와 왕건은 같은 핏줄인 셈이다.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죽은 후, 그의 셋째 아들이 아르카나 쿤으로 들어가 발해의 지파(支派)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캐)와 합류한다. 발해가 멸망한 후 이들은 오늘날의 내몽고를 거쳐 러시아 땅 부랴티아로 떠난다. 발해가 멸망한 지 235년 후 이들의 후예들 가운데서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한다. 그가 바로 칭기즈 칸이다.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의 후예이자, 궁예의 후예인 것이다.
 
  칭기즈 칸과 그의 아들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다. 그중 한 갈래가 지금의 이란을 비롯한 중동 지역을 침공해 일한국을 건국한다. 일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들의 조상인 대일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일한국의 가잔 칸은 재상 라시드 웃딘에게 몽골제국의 역사를 기록하게 한다. 그 책이 《집사》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칭기즈 칸 일족의 역사는 《집사》 외에도 《몽골비사》, 티무르 왕조의 《사국사(四國史)》 등의 사서에 비밀 코드의 형태로 숨어 있다. 서양에서 몽골-튀르크계 종족을 일컫는 말인 ‘타타르’라는 말은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몽골-튀르크계 민족이 세운 왕조는 몽골제국, 일한국(이란), 테무르제국(중앙아시아), 무갈제국(인도), 맘루크 왕조(이집트),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20여 개에 달한다.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의 후예”
 
전원철 변호사의 서재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튀르크어·몽골어 등으로 되어 있는 다양한 사서들이 있다.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1·2)》(비봉출판사 펴냄)이라는 책을 낸 전원철(全原徹·53) 변호사의 주장이다. 기분 좋은 얘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지는 않는다. 이런 소리 하면 “국뽕 맞았다”거나 “당신 ‘환빠’냐?”는 얘길 듣기 십상이다. ‘국뽕’이니 ‘환빠’니 하는 얘기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류의 주장을 하는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이력이 흥미롭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미(美) 아이오와대 법학박사(JD),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근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 주재관…. 아주 ‘글로벌’한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다니….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을 펴낸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이 작년 봄 “29개국어를 하는 언어의 천재”라고 한 것도 흥미를 돋웠다. ‘1980년대 이래 《국부론》 《도덕감정론》 《자본론》 등 묵직한 책들을 펴낸 출판계의 원로가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 원고를 청탁했다.
 
  《월간조선》 작년 6월호에 ‘역사탐험/한 고대사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다’가 실렸다. 이때 그는 주몽예(朱蒙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글자 그대로 ‘고주몽의 후예’라는 의미였다. ‘칭기즈 칸’과 ‘고구려-발해’가 만났기 때문일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선pub(pub.chosun.com)에 실린 이 기사의 조회 수는 6만8967회였다. 이후 조선pub에 나간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즈 칸 가계의 비밀’이라는 기사의 조회 수는 15만9261회. 총 5번에 걸쳐 나간 글은 모두 합쳐 28만4943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조선pub의 기사로서는 기록적인 수치였다. 그의 글이 《월간조선》에 나간 후 어떤 지인(知人)이 물었다.
 
  “그 주몽예라는 사람, 혹시 본명이 전원철 아니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 다닐 때에도 몽골어·터키어 공부한다고 하던 인간이야. 한여름에도 외투 입고 다니던 괴짜….”
 
 
  체첸 갈 때도 《몽골비사》 챙겨
 
체첸 현장 주재관 시절 오세티야의 이슬람 사원 앞에서.
 
지난 2월 전원철 변호사가 원고를 보내왔다. 이번에 보내온 글은 〈투르크족의 선조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이라는 제목이었다. 터키인들이 자신들의 선조(先祖)로 여기고 있는 《집사》 속의 인물 오구즈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예라는 내용이었다. 문득 ‘전원철’이라는 인간에 대해 궁금해졌다.
 
  “역사 얘기는 책을 보면 되는 거고, 당신 살아온 인생 얘기나 들어보자”고 했다. 그의 집 문을 열었을 때, 묘한 냄새가 확 풍겼다. 바나나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냄새였다. 베란다에서는 뭔가 퍼덕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꿩이었다. “웬 꿩이냐?”고 묻자, “잡아먹을까 하다가 그냥 기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17평짜리 아파트 거실에는 요가 깔려 있고, 한쪽에는 아랍어·영어·몽골어 책들이 쌓여 있었다. 작은 방에 있는 책장에도 다양한 외국어 책들이 꽂혀 있었다. 전 변호사가 말했다. “이 책들은 페르시아어, 이 책들은 몽골어, 이건 튀르크어, 이건 우즈벡어…” 전 변호사는 책을 펼쳐들면서 설명을 했지만, 기자가 보기에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 이력을 보니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일했다.
 
  “1993년 3월 유엔국제공무원시험 정무관(사무관)급 시험에 합격했다. 임용을 기다리는 동안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국제협력관, 외무부 인권사회과 유네스코담당관 겸 자문관을 지냈다.”
 
  —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체첸 주재관도 지냈다.
 
  “1996년 3월 UNHCR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다짜고짜 ‘미스터 원철 전이냐’고 묻더니 ‘선불 비행기 티켓을 준비해 놓았으니, 내일 제네바로 오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불타고 있다’고 했다. 어디냐고 했더니, ‘체체냐(체첸)’라고 했다. 준비할 게 뭐냐고 물었더니 ‘롱부츠와 여권’이라고 했다. 《몽골비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제네바에서 계약서와 유언장을 쓰고 체첸 인근 다게스탄으로 갔다. 체첸에 도착해 보니, 온통 진흙탕이었다. 왜 롱부츠를 준비하라고 했는지 알겠더라.”
 
  — 무슨 일을 했나?
 
  “전쟁으로 집과 일자리를 잃은 난민들에게 의약품과 식량, 천막, 구호물자 등을 지원해 주는 일을 했다.”
 
 
  “체첸어 익힌 덕에 위기 모면”
 
체첸어를 익힌 덕분에 현지인들과 격의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 유엔기구에서 나갔다고 해도, 러시아군이나 체첸반군의 위협에서 자유로웠을 것 같지는 않다.
 
  “밤 12시면 미사일이 날아가고,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조수인 샤미르와 함께 무전기와 보드카,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챙겨서 차를 타고 들판으로 달려갔다. 현장 사무소로 포탄이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 들으면서 새벽 4시경까지 있다 보면 상황이 끝나고, 그러고 나면 아침부터 난민들이 사무실로 몰려들었다.”
 
  —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카프카스 산악 지역 마을들에 구호물자를 배급하러 갈 때였다. 유엔 표식이 달린 차량을 타고 가는 데도, ‘전투행위자들’이 유엔 차량이라는 걸 알면서도 총격을 가해왔다. 헬기나 초소에서 총격을 가한 일도 있었다. 적십자사 간호원 5명이 사살된 적도 있다. UNHCR 직원도 나를 제외하고는 한 번씩은 납치당하는 경험을 했다.”
 
  전 변호사는 “나는 체첸어를 익힌 덕에 그런 위험은 겪지 않았다”고 말했다.
 
  “체첸어로 현지 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자, 현지인들이 나를 자기들 편이라고 여기게 됐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주민들이 먼저 알려줬다.”
 
  — 체첸 사람들은 어떠했나?
 
  “친절했다. 손님을 환대하는 풍속이 있다. 한번은 해발 3000미터쯤 되는 산길에서 차가 고장 나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됐다. 갑자기 군복을 입은 체첸전사(아팔첸시·향토수호자라는 뜻)들이 나타났다. 누구냐고 묻기에 ‘유엔이다’라고 했더니, ‘아시아에서 온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총을 내렸다. 동료에게 내 차를 고쳐주라고 하더니, 양떼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저중에서 어떤 양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라고 하기에 ‘고동색에 검은 점이 박힌 양’이라고 했더니 그 양을 잡아주었다. 동네 남자 10여 명과 함께 보드카를 마시며 밤을 보냈다.”
 
  — 체첸 그 지역도 칭기즈 칸의 서방 원정로와 관련이 있지 않나?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 아무르 티무르의 원정 루트다. 체첸인은 유럽인도, 동양인도 아닌 모습을 하고 있다. 체첸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먼 옛날에 동쪽에서 온 눈이 찢어진 남자와 아랍 여인이 카프카스산에서 만나 결혼, 체첸인들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이 조선의 속국이었다”
 
  체첸에서 근무를 마친 전원철 변호사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이오와대학 로스쿨에서 인도법(人道法)·전쟁범죄법 등 국제법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대로 나갔으면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길이 달라졌다. 왜일까? “아이오와대학에는 중국계 학생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 우리 조공국(朝貢國)에서 왔구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애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우리가 왜 너희 속국(屬國)이냐?’고 하면 ‘당(唐)나라 이래 원(元)·명(明)·청(淸) 등을 거치면서 내내 조공을 바치지 않았느냐?’고 했다.”
 
  — 그래서 뭐라고 했나?
 
  “‘너희가 우리의 속국이었다’고 했다.”
 
  — 무슨 논리인가?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6대조 멍케티무르(孟可帖木兒)는 이성계의 지방장관이었다. 너희는 우리 함경도 사람에게 지배를 당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 ‘자금성을 지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어머니는 고려 여인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인 후예의 정권이었다’고 했다.”
 
  —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나 명나라를 조선의 속국이라고 하는 건, 역사를 과도하게 소급(遡及)하는 것 아닌가?
 
  “맞다. 하지만 나는 중국인들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리를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다. 중국인들은 ‘조선은 기자·위만 등 중국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의 고지(故地)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언젠가는 지금의 한국 땅도 되찾아야 할 중국의 영역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내 주장은 ‘역(逆)동북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일부 한국인의 선조가 중국에 건너가서 피가 섞였다고 해서 그걸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나?
 
  “일본도 마찬가지 아닌가? 일본 황족에게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피가 섞였다는 건, 일본인들도 인정하고 있지 않나?”
 
  — 설사 그렇다고 해도 한국, 중국, 일본은 이미 수백,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중국, 일본의 역사까지 우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나? 몽골인들이 이란에 가서 일한국을, 이집트에서 맘루크 왕조를, 인도에서 무갈제국을 세웠다고 해서, 그 역사가 몽골의 역사가 되나?
 
  “국가, 땅을 중심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피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얘기가 다르다. 맘루크 왕조는 땅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이집트라는 나라의 역사이지만, 몽골 사람이 이집트로 들어가서 현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만든 몽골 종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화 속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여”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국사》. 티무르제국의 황제 미르조 올룩벡이 서술한 사서이다.
  — 칭기즈 칸이 고구려-발해인의 후예라는 건, 무슨 근거에서 하는 얘기인가?
 
  “《몽골비사》를 수없이 읽으면서 나는 칭기즈 칸의 선조인 부르테 치노(푸른 이리·蒼狼)와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慘白色鹿)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들 신화(神話)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것이 실존인물이며, 고구려-말갈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다가 티무르 왕조의 역사책인 《사국사》에서 칭기즈 칸의 10대모(代母)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코와(알란 고와)의 아버지 이름이 추마나 콘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추마나 콘은 곧 주몽 칸(朱夢 可汗)이다. 추마나 콘의 형은 이름이 위마나 콘, 즉 위만 칸(衛滿 可汗)이다. 주몽과 위만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이 우리 민족 말고 누가 있겠나?”
 
  — 그것만으로 고주몽이 칭기즈 칸의 선조라는 건 약하지 않나?
 
  “《몽골비사》에 보면, 알란 코와의 아버지가 ‘코리투마드’ 부족의 부족장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이라고 나온다. ‘코리’는 말갈어로 《요사(遼史)》 속의 ‘고리(稿離)’ 즉 ‘고려(高麗)’라는 말이고, ‘투마드’는 ‘투만-씨’, 곧 ‘도모(都牟)-씨’ ‘동명(東明)-씨’ ‘주몽-씨’라는 말과 같다. 결국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과 추마나 콘은 같은 사람인 것이다.
 
  《사국사》에 의하면, 알란 코와는 4촌 오빠인 도분(디븐) 바얀(도본 메르겐·위마나 콘의 아들)과 결혼한다. 하지만 도분 바얀은 결혼 3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알란 코와는 빛 속의 신비의 인물을 통해 ‘보잔자르 콘(《몽골비사》의 보돈자르)’을 낳는데, 이가 곧 칭기즈 칸의 9대조다.”
 
  — 신화를 역사로 보는 건 무리 아닌가?
 
  “고대 우리 민족은 역사를 비밀 코드로 썼다. 그 코드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신화라고 하는 것이다.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인다.”
 
 
  “타타르족은 대대로 연개소문의 후예”
 
  전원철 변호사는 칭기즈 칸 이전에 몽골(모굴)족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오늘날 서양에서 몽골이나 튀르크계 민족을 통칭하는 표현인 타타르(Tatar)족은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타타르 종족의 시조 타타르 칸과 몽골 종족의 시조 모골 칸은 알무잔나 칸의 두 쌍둥이 아들이다. 《사국사》와 《투르크의 계보》에 기록된 ‘타타르 칸’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자유(淵子遊)이다. 타타르는 곧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온 것이다.
 
  히바 칸국(1511~1920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 걸쳐 있던 몽골계 나라)의 칸이자 역사학자인 아불가지 칸은 ‘타타르라는 말은 원래 인명으로 쓰였으나, 나중에는 종족 칭호의 형태를 띠게 됐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대대로 연개소문 가문’을 지칭하다가 나중에 이 가문이 이끄는 백성과 속민을 일컫는 말이 되어 타타르로 변화한 것이다.”
 
  — 그것만으로 타타르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는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 ‘달단(韃靼·타타르)은 말갈의 남은 씨앗(遺種)이다’라고 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말갈은 곧 고구려이다. 이 책에 의하면 〈원래 해(奚), 거란의 동북에 있었다. 나중에 거란에 공격당해 부족이 나뉘어 흩어졌다. 어떤 것은 거란에 속하고 어떤 것은 발해에 속했는데, 갈린 부락이 음산에 흩어져 살면서 스스로 부르기를 달단이라고 했다. 당나라 끝 무렵에 그 이름을 가지고 중국에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 역사책에 나타나는 단어들을 교묘하게 꿰맞추는 건 아닌가? 다른 증거는 없나?
 
  “옛 돌궐(튀르크) 지역인 카자흐스탄 서쪽 러시아 땅에는 하카스공화국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타다르(Tadar)족, 혹은 코오라이, 콩구레이라고 한다. 이들은 우리 민족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수레, 순대 만들기, 보쌈과 같은 약탈혼 풍속 등도 흡사하다. 귀틀집과 같은 집을 입(Yip)이라고 한다. 아마 이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돌궐족의 땅에 들어간 고구려의 후예일 것이다. ‘코오라이’는 ‘고려’, ‘콩구레이’는 ‘큰 고려’라는 의미다.”
 
  전원철 변호사는 “터키인들도 고구려의 후예”라고 말한다.
 
  “칭기즈 칸의 조상인 모골 칸에게는 카라(高麗) 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튀르크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하는 오구즈 칸이다. 오구즈 튀르크인들은 서방의 튀르크 지역으로 간 고구려 백성의 무리이다. 그들 중에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코로 호자라는 사람인데, ‘코로’란 ‘고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흔히 6·25 때 터키군이 참전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터키는 이렇게 혈연적으로 고구려와 형제국이다.”
 
 
  “오롱키(오랑캐)어도 공부”
 
전원철 변호사가 칭기즈 칸의 계보를 밝히는 데 활용한 역사서들. 왼쪽부터 《몽골비사》 《승리의 서》 《집사》 《행운의 정원》.
  전원철 변호사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몽골비사》나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요사》 《금사(金史)》처럼 이름만 들어본 중국 역사책(전원철 변호사는 ‘동방사서’라고 함)에서부터 일한국의 《집사》, 티무르제국의 《사국사》 《승리의 서(書)》(티무르에 대한 기록), 우즈베키스탄 콩그라트 왕조에서 나온 튀르크어 역사서 《행운의 정원》 등(전원철 변호사는 ‘서방사서’라고 함)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역사서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의 책장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몽골어·튀르크어·러시아어·스페인어 등으로 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설사 그의 주장이 ‘말장난’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다양한 언어로 된 책들을 넘나들면서 그런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 박기봉 비봉출판사 사장이 ‘언어의 천재’라고 하던데, 몇 개 국어나 하나?
 
  “영어는 기본이고, 고교 때 2외국어로 일본어를 했다. 언젠가는 소련과 관계 개선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1 때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독어는 대학교 다닐 때 마르크스와 헤겔을 읽기 위해 공부했고, 카뮈와 콩트를 읽기 위해 불어를, 《군주론》을 읽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세네카의 《성서》를 읽으려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스페인어도 했고… 그러다가 ‘서구(西歐)문명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에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알아야겠다’고 반성하게 되면서 동양어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면서 전 변호사가 꼽은 언어들은 이랬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몽골어, 중세 튀르크어, 터키어, 우즈벡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오롱키어(오랑캐어), 어웡키어, 중국어, 티베트어, 만주어, 다와르어, 거란어, 부랴트어, 타타르어…. 모두 29개다.
 
  — 만주어, 몽골어 같은 것은 어떻게 공부하게 됐나?
 
  “우리 역사로 관심을 돌리면서 전씨 집안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 전씨의 조상은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고구려를 떠날 때 데리고 온 10명의 신하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만주어, 몽골어는 기본으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졸업할 무렵에는 중국어도 배웠다.”
 
  — 몽골어 같은 건 어디서 배웠나?
 
  “대학교 도서관에서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대출해 간 적이 없는 독일어로 된 몽골어 문법서 한 권을 발견했다. 우리말과 몽골어 문법이 매우 비슷해서 기본 문법 공부는 2~3주 내에 마쳤다. 마침 우연히 알게 된 몽골인 친구가 몽골에 간다기에 《몽골비사》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 책을 독본 삼아서 몽골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 만주어 같은 건 지금도 쓰는 사람이 있나?
 
  “책으로 공부했는데, 지금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 나도 만주어로 대화할 사람이 없는 게 아쉽다. 만주어의 먼 방언인 시보(錫伯)어를 쓰는 사람이 한 10만명 정도 된다.”
 
  — 한 가지 언어를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됐나?
 
  “대학 시절에는 한 학기 이상 안 걸렸다.”
 
 
  “우리 역사 바로 알려면 중국사서(史書) 외에 다른 사서도 보아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찔러보았다.
 
  — 아무래도 말장난 같다.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계보를 기반으로 그것을 ‘동방사서’의 기록들과 철저히 대조했다. ‘서방사서’에 나오는 사람들이 ‘동방사서’에 그대로 나온다. 그 계보의 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방 이름의 뜻과 그 위치를 역사언어학적 및 지리학적으로 밝혔다. 문헌사, 역사언어학, 역사지리학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자신만만했다.
 
  — 역사학자들이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이겠나?
 
  “주류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 내 주장에 관심이 없다. 나도 그들과 토론하고 싶다. 중국 사료(史料)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튀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되어 있는 사서들도 보아야 한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 주장대로라면, 한국은 물론, 중국, 몽골, 터키 등 유라시아의 역사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게 된다. 지나친 국수주의 아닌가?
 
  “터키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오늘날 터키공화국 영토 내에서 있었던 역사만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중국 역사서에 유연(柔然), 돌궐부터 오구즈 튀르크,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아시아 대륙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활동했던 튀르크계 종족들의 역사를 모두 자기들의 역사로 기술(記述)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발해의 역사마저 말갈족의 역사라면서 우리 역사에서 배제하고 있다. 이제는 한반도 밖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아닌 걸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 않나? 나라 밖에서 행해진 우리 민족의 행위는 우리 역사가 아닌가?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한다.”

 

 

얼(뿌리를 찾아서)/국학원 국민강

[제166회 국민강좌] - 고구려-발해인 징기스칸(전원철 박사/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변호사)

 
海天(해천) 2018. 2. 2. 15:08

< 강의요약 >

-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은 발해-고려 진국공 대조영의 아우 반안군왕 대야발의 제19대손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청나라는 한 가문 주몽의 후손

-몽골제국-티무르제국-무갈제국은 조선민족의 방계선조의 제국들

-조선민족의 미래는 무엇인

 

<강의목차>

I. 서문:

기존의 고구려-발해말갈-몽골에 관한 견해

 

II. 본론:

1. 칭기스 칸 선조가 나온 에르게네 콘 이야기

2. 두 사람의 생존자 키얀과 네쿠즈, 곧 일하(壹夏)의 아들 '()'과 도리행(都利行)의 아들 '님금'

3. ‘키야트 ()’ ,  ()’씨라는 뜻

4. “텡기즈 콘 진국공 대야발

5.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은 사실은 당-신라 대 발해 사이의 대전쟁

6. 발해 씨는 퉁구스족이 아니라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7.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과 발해에 대한 배신행위

8. 기존 학계의 관점과 다른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9. 모든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고향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바로 발해 서경(西京) ‘압록강-()-

10. 원태조 칭기스 칸과 금 태조 아골타의 공통 선조 대야발 4세손 금행(今幸)

11.“황금항아리” “금행의 발해 실지(失地) 회복

 

III. 결론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우리가 할 일

....... 

아래는 6.하반부 에서 결론까지 간추린 내용임

 

6. ....................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참고로 “고구려”는 “고-구려”로 성(城)을 말하는 “구려(구루)”와 군(郡)을 말하는 “말 골(말키우는 고을)”로 이루어져, 구려, 구려, 구려, 수 많은 구려와 말 고을, 말 고을 그리고 7개 말 고을 이 합쳐져 크게 된 “커-구려”라는 순수한 우리 말의 한자 이두식 표기국명이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년(현종의 개원 13년), 곧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7.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과 발해에 대한 배신행위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 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 부분을 《사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 콘 통치 시에 그의 둘째 아들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와 튀르키스탄(Turkistan) 땅으로 떠났다. 그는…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며 살지 않고, 튀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실은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투르키스탄’은 당시의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내몽골·당나라 때 만주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편집자 주)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년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禮)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그로부터 4년5개월이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이,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년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발해가 당나라 등주(登州)정벌을 한 길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년(무왕 15년)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이 이를 기록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가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은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집사》에 실린 몽골족의 전쟁 모습

 


 8. 기존 학계의 관점과 다른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이때 《자치통감》 및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10만명은 당시로 보아 대단한 수의 병력이므로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앞서 본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대무예는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로 옮겼다. 현주는 오늘날 길림골(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북고성촌(北古城村)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년(무왕 19년, 개원 25년) 무예가 세상을 떠났다. 당에서 죽은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 흠무(欽茂)가 뒤를 이었다.
 
 발해-당나라 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파악한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사국사》에서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 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 한이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키얀, 간)과 누쿠즈(도리행 아들 님금, 링쿰)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갓 혼인한 그들의 아내들과 몇 명의 시종만 데리고 밤의 어스름을 틈타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고대(中古代) 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청말(淸末)의 역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하)·渤海國記(下)》에는 “당 현종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以南) 땅을 신라에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 전선에서는 발해가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발해가 상실한 이 땅은 바로 《요사(遼史)》가 전하는 ‘발해 서경(渤海 西京) 압록군(鴨綠軍=鴨綠郡)’ 이남 지역이다. 압록군은 바로 ‘대전쟁’에 패한 후 살아남은 키얀(乞澗)과 네쿠즈(님금)가 적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아르카나 콘(Arkanakun=Arqanaqun·《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다.
 
9. 모든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고향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바로 발해 서경(西京) ‘압록강-나(의)-군’
 
 앞서 본 <집사>와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등 서방사서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  오늘날 터키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 민족들을 비롯하여 몽골 민족은 “에르게네 콘”을 “모든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방은 어디인가?

 

몽골학자 빌렉트(L. Bilegt)는 “[키얀과 네쿠즈] 그들이 가서 목숨을 구한 곳은 에르군 콘(Ergun Kun)인데, 이 지방이 어디에 있는가에 관해 많은 학자들이 다른 생각을 내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보는 것은 오늘날 아르군(Argun’) 또는 에르구네 물(Ergu’ne mo’ro’n)에 가까운 땅, 특히 자세히 말한다면 오늘날 러시아연방공화국의 땅에 있는 아르곤 산맥이었다(3)고 한다.

 

이를 본 받은 부랴트(고려에서 간 말갈족 후예들이 세운 러시아의 한 공화국) 학자 조릭투예프(B. Zoriktuyev)도 같은 의견을 표명햇다. 또 자신보다 오래 앞서 이러한 견해를 밝힌 이들 학자를 인용도 하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의 독창적 학설이라도 되는 양 우리 학자 김호동 서울대 교수도 자기 번역서의 각주에서 같은 의견을 밝힌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페르시아어 본 《집사》가 ‘아르카나 콘’으로 기록한 것을 ‘에르게네 쿤(Ergenekun)’으로 읽는다.
 
 그러나 《집사》가 말하는 ‘아르카나 콘(Arqanaqun)’은 오늘날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 아르군(Argun’)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서경(渤海西京) 압록군(鴨綠軍)’으로 적힌 지역이다. 곧 말갈(발해) 구어(口語)로 ‘압록강(鴨綠江)나/네(의) 군(郡)’이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에 ‘아-ㅇ(ㅂ)-로군’으로 소리 났을 ‘압록군(鴨綠軍/鴨綠郡)’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 보면, 이는 ‘아우로군(鴨綠郡)네(의) 군’ 또는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필자 등 몽골어·투르크어 등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투르크어화하면서 그 소리가 ‘아로간나 쿤’을 거쳐 ‘아르카나 콘’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그 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특히 《집사》와 《사국사》가 말한 그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일 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 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걸간), 그의 양자 네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
 
 또 종족 이름인 ‘모굴’은 말갈-발해어(靺鞨-渤海語) ‘몰골(馬忽)’, 곧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의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인 키얀(澗)과 무왕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인 ‘님금’이 발해-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그 ‘아르카나 콘’은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문어(文語)로는 《요사》의 ‘발해서경 압록군’이고 말갈 구어로는 바로 ‘압록강나/네(의) 군’이다.

칭기스 칸의 10대 여선조 “알란 고와”는 <원사>에 “아란 과화(阿蘭 果火)”라고 기록되었는데, “아란 (阿蘭)”은 바로 압록강네 군내의 한 지역, 곧 오늘날 함경북도 아란(阿蘭)이다.

 

 


혜산진과 백두산사이 압록강원(鴨綠江源)과 건너 울라계(烏喇界) 곧 쿨라(Qula) 강


아르카나 콘과 길주 僕幹水, 삼수와 갑산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가 ‘에르게네 콘’ 계곡으로 들어간 뒤 세월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불어나, ‘키야트’와, 또 원래는 몽골이 아니었던, 우량카트(우리 사서의 吾良哈=오랑캐) 등 및 몇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왔다. 이어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사》가 말한 그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라는 인물이다. 《집사》는 그를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가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그는 타타르어 사서인 《칭기스의 서》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었다.
 
 10. 원태조 칭기스 칸과 금 태조 아골타의 공통 선조 대야발 4세손 금행(今幸)
 
 이 ‘황금의 칸’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금행(金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황금’이고, ‘행(幸)’은 앞에서 ‘도리행’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옛날 한자음은 ‘캉’, 즉 ‘칸(汗=군주)’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의 조상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이다. 19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은 ‘황금의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곧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라는 이야기이다.
 
 일부 김운회, 윤명수, 김위현 등 우리 학자들은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을 잘못 이해해 이 금행의 아들 함보를 ‘신라인(新羅人) 김함보’로 보고 완안부를 신라인 유민으로 보고있다. 심지어 동양대학교 교수 김운회는 “금은 신라인이 건국했다. 금사에 ‘우리 선조는 고려에 살던 신라인 김함보(金函普)’라고 써 있다”고 까지 하여 <금사세기> 자체에도 없는 새로운 텍스트를 그 사서에 써 넣고 있다. 게을러서 <금사>의 첫 장도 읽어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지식이 뛰어나서 <금사> 본문에 없는 글자도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이들 가운데 재야사학자 윤명수는 조선 시대 김세렴의 잘못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함보의 아버지 ‘금행’을 ‘신라인 김행’, 곧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이라고 하기도 한다.
 
 심지어 우리 국민의 세금이나 다름없는 시청료를 모아 운영하는 공영방송 KBS도 전 명지대 교수 김위현,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등을 포함하여 이러한 잘못 된 학자들의 견해를  모아 KBS1 ‘역사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방영했다. 상업방송도 아니고, 공영방송이 그 학설의 옳고 그름도 따져보지 않고 이 분야 연구를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이른 바 “교수”들- 국책연구기관인 이른 바 “한국학중앙연구원”관련 교수들을 모아두고 그들의 어줍잖은 잘못된 연구를 바탕으로 한 당치도 않은 거짓 역사지식을 우리 국민들에게 퍼뜨리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은 칭기즈 칸과 그의 부인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우진의 선조가 된 《집사》의 ‘황금항아리(=황금의 칸=알툰 칸)’이고, 대야발의 4세손이다.
   

 

<金史> <大金國志, 卷一> <고려사> <고려사> 비고
금행(今幸, 金幸, <고려사>)   작제건 아버지(발해시대, ?~*819?)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 금행=서해용왕
함보=큰바=큰가(函普) 감복(龕福)
(작제건 아내 용녀의 형제/작제건의 처남/ 용건 외삼촌)
작제건 (발해시대, ?~*849?) 용녀(작제건 아내) 아들(1) 세대
오로(烏魯) 胡來
(용건 외사촌 형제)
용건(고려 세조 왕륭, 王隆, ? ~ 879 5)-후삼국시대 *궁예 세대 손자(2) 세대
발해(跋海)


신라인 김행(金幸) 세대
(왕건 외6촌 형제)


918년 왕건의 고려 성립, 926년 발해 멸망
왕건(발해와 궁예의 고구려-마진-태봉 시대)


(고려 태조, 877~943, 재위: 918~943)
궁예 아들 세대 증손(3) 세대
수가(綏可)


경순왕(909?~979) 세대
(안종 외8촌 형제)


“[*발해가 망해] 거란을 섬기다(臣伏契丹)”<삼조북맹회편>


-발해가 거란 치하에 들어간 시대
-왕건의 맏아들인 고려 제2대 혜종(惠宗, 912~945 재위: 943~945) 세대
-[*셋째 아들] 3대왕 정종(定宗, 923~949 재위: 945~949)
-[넷째 아들] 4대왕 광종(光宗) [925(태조 8)975(광종 26)/ 재위 949975/ 고려 제4대 왕]
-안종(安宗, ? ~996)
  4대 후손
석로(石魯),
아내 고려여인 후비의 아들이 호실답(胡失答)


마의태자 세대
(현종 외10)


북국 여진의 남국 고려에서 취한 아내
현종(顯宗, 992~1031년 고려 제8대 왕, 재위: 1009~1031)
-안종(安宗, ? ~996) 아들 세대
  5대 후손
오고래(烏古乃, ? ~1074, 재위 1021~1074) 호래(胡來)
(문종 외12)
문종(文宗, 1019~1083, 고려 제11대 왕, 재위1046~1083   6대 후손
핵리발(劾里鉢, 1039~1092, 오고래 둘째 아들)
파랄숙(頗剌淑), 영가(盈歌) 형제
양할(楊割)
(숙종 외14)
*,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숙종(肅宗, 1054~1105, 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   7대 후손
아골타(阿骨打) 1068~1123,


핵리발 둘째 아들)
(예종 외16)
楊割生三子長曰阿骨打 *,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예종(睿宗, 1079~1122.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   8대 후손

발해 왕가의 대야발의 4대손 금행과 그 둘째 아들 함보가 왕건 때 고려에 귀부한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나 왕건의 동시대인 김행(권행)이 아님을 보여주는 계보, 세대 도표

 

《집사》에 따르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추를룩 메르겐(조선 말갈)’ ‘쿠바이시레(커가씨네=흘석렬·紇石烈)’, 그리고 ‘투스부다우(대씨부 대왕)’가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고려사》 ‘금행’의 세 아들, 곧 《금사》에 나오는 금 시조 삼형제, 곧 카고라이(阿古?=아고래=고구려), 함보(=큰보=큰가), 그리고 보코리(보활리·保活里=무구리=고구려) 삼형제와 같은 인물들이다.
 
 두 그룹으로 대조되는 이들의 이름은 얼핏 보면 매우 낯선 이름들이다. 그렇지만, 두 가지 각각 서로 다른 이름들은 다 위의 괄호 속 이름 풀이에서 보듯이, 우리말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추를룩 메르겐)와 말갈어(쿠바이시레), 그리고 한자(투스부다우)로 된 칭호이다.
 
 11.“황금항아리” “금행”의 발해 실지(失地) 회복
 
《집사》가 말하는 그 콩그라트의 에르게네 콘 탈출이야기를 우리 사서와 대조하여 그 이야기 속의 역사적 진실을 찾아보면, 발표자의 저서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과 2>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그 이야기는 그 콩그라트 종족의 수령인 황금항아리(=금행)의 일족이 그들의 8촌 형제인 발해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발해서경 압록강네 군’을 뛰쳐나온 것을 말한다. 선왕이 90여 년 전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흑수말갈 등 북방 영토와 남국(南國)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집사>에 나오는 그림으로 콩그라트 종족이 아르카나 콘에서 나오는 장면
 
 

물론 황금항아리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때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모골(말갈) 종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골 종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급히 전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는 발해 남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것이 《집사》에 나오는 ‘콩그라트 종족의 에르게네 콘 대이탈-대장정’ 이야기이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터키인이 그린 에르게네 콘 이야기에는 “투르크인들이 에르게네 콘에서 나오는 장면”이라고 적혀있다)

 

그 결과 황금항아리 일행은 신라와의 싸움에 이겨, 평주(平州), 곧 오늘날 황해도 평산 이남까지 회복했다. 어쩌면 경기도 개성은 물론,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황금항아리 금행은 그 공으로 평주에 눌러앉아 군왕(郡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집사》는 그를 ‘군주(왕)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예종 조 본문은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는 비밀코드로 그를 기록했다.
 
 《투르크의 계보》에 의하면, 황금항아리(=금칸=금행)의 큰아들인 아고래(=카고라이=고구려)에게는 ‘콩그라트(Konkirat)’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집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이 이 종족 출신이다. ‘콩그라트’는 ‘큰고려씨’, 곧 ‘고구려씨’라는 말이다.

 

 

 


발해왕족 황금항아리-황금 칸-금행과 칭기스 칸의 계보도

 

 

황금항아리의 둘째 아들 함보는 당시의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발해 “반안군왕”이 되었다. 《금사》에서 함보가 “여진(女眞)”“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가 “완안부인(完顔部人)”[혹은 다른 사서에서 완안부장(完顔部長)]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이 사실이 후대에 <고려사> 예종조와 <금사> “세기” 편에서 각각 부분적으로만 기록함에 따라 이를 제대로 연구하지도 않고 부정확한 자신들의 공부결과를 저서와 논문, 인터넷 신문, KBS1방송 등을 통해 앞 다투어 발표한 이른 바 “학자”들이 잘못 파악한 사실이다. 위의 도표가 보여주듯이, 그의 생시에는 이른바 “여진(女眞)”은 없었고, ‘발해’만이 있었기때문이다.

  함보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금사>에 나오는 코로(烏魯·오로=胡來·코라이=高麗·호래)이다. 이 코로의 6세대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 카고리다(阿骨打·아골타)이다. 이 가계는 《집사》가 말하는 “예키라스 종족”이다.

 

                                                                                완안아골타 초상화
 
 

조선시대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놀랍게도 이 종족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역라씨)’라고 기록했다. 이 가계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12. ‘모든 몽골의 어머니’ 알란 고와의 코를라스(고려나씨), 금나라 예키라스(역라씨), 부르테 우진의 콩그라트(큰고려)씨
  
함보의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야라(耶懶·오늘날 함흥)로 들어갔다. 이 보활리의 3대손이 바로 《집사》의 투스부다우의 3세손 코를라스다.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 종족’으로 불린다.
 
 ‘코를라스 종족’은 《원사(元史)》와 우리 사서가 말하는 ‘카라로스/합란로씨(合蘭路氏)’다. 청대(淸代)에 나온 《황조통지(皇朝通志)》는 이들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이 가계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고려나라씨 말갈)의 코리-투마드(고려-주몽) 부’라고 한다. 부랴트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의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이라고 한다.
 
 이 지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코를라스의 딸이자, 칭기즈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고와(함경도 阿蘭지방의 乞哥, 곧 걸씨 부인)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 태조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命)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그런데 우리 학자들은 <금사>와 <흠정만주원류고>, <삼조북맹회편>등도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송나라 사신이 쓴 <송막기문> 따위의  견문록이나, 조선시대 1636년 김세렴(金世濂)이 일본으로 사행 가는 배안에서 자신의 신라 김씨 종족에 관한 헛된 자부심과 상상에서 쓴 역사 왜곡적 글을 마치 역사의 진리라도 되는 양 잘 못 해석하고 풀이하고 과장하여 자기네들 이론을 저서와 방송에서 펼쳤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이와는 다르다.

 이제 이러한 잘못된 관점을 극복하고 발표자가 밝힌 역사적 진실의 결과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고구려와 한 가문에서 나온 말갈의 발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고려,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그리고 몽골제국, 아미르 티무르의 제국, 그리고 무갈제국, 그리고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땅에서 지난 세기에 망한 콩그라트 왕조 등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구려 왕가 서자가문 대조영 가계에서 나온 발해-고려(외손)-금나라-원나라와 4칸국-청나라와 콩그라트 왕조(그외 아미르 티무르제국 및 무갈제국 등등이 있다.)

 

 

 

III. 결론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커부려 칸=고구려 칸)’의 시대에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Il Milione)》에서 ‘칭기즈 칸’을 ‘친기 칸(Cinghi Kane)’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친구이 칸’이라고 발음하던 ‘진국왕(震國王=발해왕)’이라는 의미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쇠(터머르/데미르)를 다루는 대장장이’ 또는 ‘철인(鐵人)’이라고 해석했지만, 사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 뜻이다. 이 이름에 대해 《원사》 ‘태조기(太祖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太祖)…의 휘(諱)는 테무진이고,성(姓)은 키얀씨(奇渥溫氏, 기옥온씨=키야트 칸씨)이고, 몽골부인(蒙古部人)이다. … 처음에 열조(烈祖·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부를 쳤을 적에 그 부장(部長) 테무진을 사로잡았다. … 열조는 … 이로 말미암아 사로잡은 테무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名之),그 뜻(志)은 무공(武功)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듯 ‘테무진’은 ‘위대한 무공(武功)의 신(神)’이라는 뜻인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라는 말이다.

 

                                                                   <집사>에 나오는 칭기스 칸과 네 아들들
 

 

테무진은 자기 시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없던 땅에서 태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 사가 모스투피 카즈비니(Mostufi Qazvini·1281~1349)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e Gojide)》가 말하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이름을 ‘몽골(=말갈)’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우리 조선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진국왕(=발해왕)’을 뜻하는 ‘칭기즈 칸’을 자신의 왕호로 택했다. 결론적으로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는 오늘날에도 우리 남-북 코레아로 이어져 오고 있고, 몽골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내가 밝히려고 수 백 권의 여러 언어로 된 고대. 중세 사서를 읽으며 수많은 밤들을 지세우며 밝히려 했던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고구려 발해의 역사에서 사라져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알려고 조차 해보지 않았던 그 부분을 밝힘을 통해 미래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고 그 방향을 제시해 보려고 한 것이다.
 
과연 이제 우리는 장차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우리의 역사도 잊고 이 조그마한 우리 조선 반도에서 두 개의 조국 남북으로 갈려 싸우고, 나아가 남한이나, 북한 내부에서 조차 지방과, 정파, 파벌로 싸움이나 하고 있다. 이러한 어두운 오늘날의 우리 그림자를 극복하고 우리가 알지도 못했던 우리 핏줄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다시 설계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 

오늘날의 우리를 잠시 보자. 

 

그 어려운 시절 다 잘 이겨내고 우리도 이 정도면 잘 사는 것 아니냐고 우리는 자주 말한다.  동시에 지금 우리보다 못한 약소국과 그 나라사람들은 깔보면서도 미국,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사대자소(事大字小)하는 알량하고 노예적 태도로 그들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려는 무리들이 있다. 그러면서 우리 K-Pop이 세계를 주름잡고 있지 않느냐는 정도의 한심한 자만심으로 말이다. 과연 우리가 미래에도 이들처럼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비록 전쟁에 지고 사라져야 했던 선조의 역사이나마 결코 그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려고 하지 않고 고이고이 간직하며 미래의 승리를 꿈꾸며 마침내는 분열된 “말골(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하고 마침내 전세계 말 발꿉이 닿는 그 끝까지 말 달리며 세계정복자가 되었던 그러한 잊어버린 우리 핏줄의 역사를 거울로 두려움 없는 진취적 자세로 전세계로 뻗어나가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에 과연 어떤 역사를 되풀이해야 할 것인가?   

                                                                                  -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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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사료총서: “Монголын тvvхэн сурвалж бичгийн цуврал”(MUIS)
37.  Монголын нууц товчоо, 1240 (1228 он)

 

논문 및 인터넷 게재물
38.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무엇인가(Ergenekon Destanı nedir?) 글쓴이(Yazar): 하산 아르칸(Hasan Arıkan)
39. Woon-hoi Kim(Prof. Dong Yang University), The Origin of the Mongols and the Koreans- Discovering Their Common Root(2009년으로 추정)
40.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주공격 [登州攻擊]
41. 고동영(옮김), 반안군왕(盤安郡王) 야발(野勃), 檀奇古史(역사원전자료실)

 

 

참고지도:

혜산진과 백두산사이 압록강원(鴨綠江源)과 건너 울라계(烏喇界) 곧 쿨라(Qula) 강

 

아르카나 콘과 길주 僕幹水, 삼수와 갑산

 

발해가 당나라 등주(登州)정벌을 한 길

 

징기스칸 선조들이 한반도를 떠나게 된 고려의 여진정발

 

징기스칸 선조들의 이주로

 

 

 

 

인류사 바꾼 징기스칸 선조 알고 보니 한반도 함경도 출신

징기스(진국=단군한국 중심국-진한) 칸(한)은 대진국 발해 세운 대조영 왕가

윤복현
기사입력 2015-09-18

 
징기즈칸의 몽골족이 자신들의 뿌리나라로써 무지개 나라(솔롱고스)라고 부른 고대 동방 한국은 지구촌 문명과 세계권력의 뿌리다.

분열된 초원을 통일하고 징기즈칸에 즉위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며, 동-서 무역공동체를 실현하여 인류문명발전에 공헌한 대무진 징기즈칸은 친부가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 발해의 기반이 되었던 말갈(메르키르)족장이였고,

친모는 코리아(고구려)족이고, 양부는 코리아(고구려)족장 예수게이였으며, 징기즈칸이 가장 사랑한 여자는 말갈족장의 딸이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몽골역사에서 기본적인 내용이다. 그러니까 징기즈칸은 고구려(대진국 발해)의 후손이였다.

그런데, 징기즈칸의 선조의 뿌리족보사를 상세히 밝혀 주목을 받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중앙아시아·북방민족 사학가이자 고구려 발해학회 회원인 전원철 박사(법학박사)다.

 


전원철 박사는 역사의 기록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발해의 초대왕이자 진국왕(震國王)인 대조영의 가계 출신이며, 그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제 19대손임을 밝혀냈다.

“《집사》는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가 다스린 일칸국(곧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자기 황제의 엄명을 받고 1310년경에 지은 역사책입니다. 가잔 칸이 그에게 ‘나의 선조인 칭기스 칸의 선조에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쓰라’라고 엄명을 내린 겁니다.

라시드 웃딘은 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당시 4칸국의 종주국이던 원(元)나라에서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와 역사에 관해 정통한 원로대신 볼라드 칭상(승상)과 여러 학자들, 그리고 《황금의 책》이라고 라시드가 부르는 책, 곧 ‘족보’를 비롯하여 막대한 분량의 기록물을 수레에 싣고 오도록 하여 그들의 설명과 해석 아래 그 사서를 집필했습니다.”

전원철 박사는 “이 사서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모골(몽골) 종족의 기원 이야기’로 칭기스 칸의 선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뒤에 쓰였으나, 라시드가 말한 그 《황금의 책》을 더욱 충실히 반영한 《사국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준다고 한다.

《사국사》에 대한 전 박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국사》는 티무르 왕조의 4대 칸이자, 역시 칭기스 칸의 후손이었던 울룩벡(1394~1449)이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집사》속의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보다 훨씬 앞선 칭키스칸의 선조 계보로 《집사》가 생략한 부분까지 적고 있다.

울룩벡은 제2의 칭기스 칸으로 전 유럽과 아랍지역을 덜덜 떨게 했던 아미르 티무르(1336~1405)가 세운 왕조의 칸인데, 그의 할아버지인 아무르 티무르 역시 부계의 모계로 칭기스 칸의 후손이면서 부계가 칭기스 칸의 선조대에서 갈라져 나온 몽골 바를라스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인 《황금의 책》 자체는 오늘날에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 박사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그 자신도 이것을 꼼꼼히 참조하고 글을 썼고, 그 족보의 골자는 방금 말한 다른 사서들에도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중세 서방의 사서와 함께 《몽골비사》등 동방의 책을 비교 대조하며 이면에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만 칭기스 칸 선조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설명이다. 

“칭기스 칸은 어린 시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와 전 세계를 통일했습니다. 그런 칭기스 칸은 고구려와 발해인의 후예였습니다. 그는 당시 대국이었던 금나라 황제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으로 ‘몽골의 칸(황제)’의 자세를 보여줬습니다. 제가 칭기스 칸의 뿌리를 밝히는 데 매진한 이유는 칭기스 칸처럼 한국도 ‘중국·일본·미국은 대국이니까 우리가 접고 들어가야지’하는 이런 사대주의적이고 소국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전 세계를 우리가 활동할 무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입니다. 전쟁을 해서 세계를 뺏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통해서든 무역을 통해서든 과학을 통해서든 우리는 칭기스 칸처럼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민족입니다.”

지난 6월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 2권을 출간했다. 전원철(全原徹) 박사는 군 제대 후, 한·몽 수교 당시 몽골어를 공부하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몽골비사>에서 “칭기스 칸의 뿌리는 높은 하늘이 점지하여 태어난 부르테 치노(蒼狼·잿빛 푸른 이리)”라는 내용을 접했다. 그는 틈틈이 몽골비사를 읽으며 몽골어 공부를 하면서도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의 선조가 잿빛 푸른 이리와 흰 암사슴(부르테 치노의 아내 코아이 마랄을 풀이한 것)이라는 사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전 박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발해의 초대왕이자 진국왕(震國王)인 대조영의 가계 출신이며, 그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제 19대손임을 밝혀냈다.

전 박사는 이를 위해 지난 1995년부터 사료 수집에 매진했다. 특히 칭기스 칸 일가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에 관해 남긴 <황금의 책(Altan Daftar)>을 기준으로 분석했다. 이 책은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들을 기록하고 있다. 전 박사는 <황금의 책>에 나온 계보를 기반으로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등 동방사서들과 대조를 통해 순서와 시대 및 연도, 그들의 행적을 파악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전 박사는 대학 때부터 외교사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외국어를 섭렵했다. 티베트어, 만주어, 한어, 아랍어 등 10여개의 민족어를 기본적으로 할 수 있었던 전 작가는 이번 연구를 하면서 미국 변호사 시절 잊고 지냈던 언어들을 다시 공부했다. 칭기스 칸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 <몽골비사>, <집사>, <사국사>, <칭기스의 서>,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29개 언어로 된 사서를 분석했다. 업무차 방문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는 관련 사서란 사서는 모두 입수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칭기스 칸의 선조로 기록된 인물들은 <삼국사기> 등 우리 사서와 <홍사>, <황금사강> 등 티베트계 몽골 사서에 나오는 인물과 정확히 부합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를 위해 600권 이상의 책을 봤습니다. 제 나름대로 교차 확인을 통해 검증 작업을 한 것이죠. 이 중 제 책에 인용된 것만 150권 가까이 됩니다. 어떤 역사서의 경우엔 사본 하나를 얻는 데 6개월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한 권에 200만원인 책도 있었는데 구하기가 어려워 대안 사서를 보기도 했습니다. 외교관 동료 등을 통해 다행히도 핵심 사서들은 모두 구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 왕가는 태조 왕건의 고려와 금나라, 오늘날 우리가 ‘몽골제국’으로 알고 있는 나라, 그리고 청나라로 이어졌다. 몽골제국은 오늘날의 몽골과 중국,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등 중앙아시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시아는 물론, 이집트를 제외하고 이라크,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등 거의 대부분의 이슬람세계, 헝가리, 러시아 등 동구 전체와 오스트리아, 독일 변경까지 뻗어나간 방대한 세계제국이었다.

전 박사가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 칸을 통해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보고 우리의 미래를 보자는 것이다.

“함경도 땅으로 들어간 우리 형제들이 중원을 정복했고, 그들과 일족의 선조를 가진 칭기스 칸 3대가 전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역사도 우리 민족사의 일부입니다. 그 당시 국경이 어디 있었습니까. 우리 역사를 이 한반도, 조선반도 내의 역사로 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세계사 속에서 우리 민족사를 봐야합니다.”

전 박사는 다시 한 번 역사적 진실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오늘날 형체도 없는 K팝(K-Pop)의 인기,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s·한류)를 자랑삼아 떠들면서도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는 방향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해냈다면 미래에도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아니 ‘전 세계’를 다스린 종족의 정체가 우리 핏줄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다시 찾고 돌아보면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시점입니다.”
 
이런 역사소재는 대한민국의 한류 영화소재로 충분하다!

칭기스칸의 선조, 영원히 이 땅 한반도(함경도)을 떠나다!

전원철 박사의 연구내용과 주장을 토대로 정리해 본다.

오늘날에도 터키인들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이곳을 자기네들 모든 투르크 종족의 선조와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동방아시아의 그 어느 곳이라고 막연히는 알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다고들 말하곤 한다. 터키에서는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의 전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에 전원철 박사는 ‘에르게네 쿤’은 예전 《집사》에서는 ‘아르카나 쿤’, 《사국사》는 ‘아르카나 콘’으로 쓰는데 이는 발해서경(渤海西京)이라는 별칭을 가진 발해의 수도급 행정구인 대야발이 왕으로 다스린 ‘압록강네 郡(군)’(압록강 나의 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발해어 행정구 이름이 734년경에서 《집사》가 편찬되는 1310년경까지 근 58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 또 고구려/말갈어(발해어)→몽골어→투르크어→페르시아어를 거치면서 ‘압록강 나의 군’→아로강나 군→아르가나 콘이라는 투르크/몽골어로 음가 변화를 거쳤다는 것이다.

고구려 자주주권을 확립한 고구려 3대 태왕이 대무신왕 고무휼이다!대진국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선조는 바로 시호 대무신에서 따온 성씨로 고무휼의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조영 왕가의 후손이 징기즈칸이다.

징기즈칸의 이름이 대무신이라는 이유를 그냥 알 수 있고, 징기스 한도 대조영의 국호인 대진국과 관련되며, 단군한국의 중심국가였던 진국(진한)의 단군천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진국왕(진한 단군천왕)=징기스(진국) 한(칸=왕)이다.

"징기즈칸의 선조인 대진국 대조영 혈족인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사국사》에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이 전쟁은 우리에게 보통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략’으로 알려진 싸움이 시발이 된 발해와 당나라 간의 전쟁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래 약 한 세대 29년 뒤인 69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는데, 이는 곧 고구려를 재건한 겁니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를 재건 한 지 34년 만에 또다시 대전쟁이 터졌습니다. 당나라가 다시 일어선 고구려, 곧 발해를 보면서 과거의 고구려가 다시 나타난 악몽에 겁을 먹고 발해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부립니다.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떼어 내려고 획책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개략적으로만 적은 것이 《사국사》가 말하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 간의 대전쟁’입니다.

여기서 ‘모골’은 곧 ‘말갈’, 곧 ‘발해’입니다.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말갈, 곧 발해가 패하면서 칭기스 칸 선조들은 그들이 원래 살던 터전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고, 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 박사는 이후 이야기를 《집사》의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모골(말갈) 군이 전멸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이름이 ‘키얀’과 ‘네쿠즈’다. 이 둘은 마침 갓 혼인한 그들 각자의 아내들, 그리고 몇 명의 시종과 함께 마침 전쟁에서 주인을 잃는 말들을 잡아타고 야간의 어스름을 이용하여 포위를 뚫고 심심산골의 계곡 속으로 도망쳤다.

그 계곡은 오직 한 필의 말과 한 명의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험준한 곳으로 거기를 넘자 마치 하늘이 만든 천국 같은 벌판과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쿤’이다.

전 박사는 바로 ‘반안군(盤安郡)’이 곧 칭기스 칸의 19대 조부인 대야발(大野勃)의 영지라고 말했다.

“대야발 자신이 ‘돌궐’ 땅, 곧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카자흐스탄 땅에까지 가서 사서를 구해 지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저자서문에는 자신의 칭호를 분명히 반안군왕(盤安郡王)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요사》 등에는 분명히 발해의 한 행정구를 ‘반안군(盤安郡)’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전 박사는 “그 전설적인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한 두 가계에서 나중에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무리의 숫자가 불어나서 그들이 여러 종족, 곧 지파로 갈라졌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그 계곡이 좁아져 거기를 빠져나와 더 넓은 터전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과정이 700년 전 쓴 《집사》에 ‘아르가나 콘 탈출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칭기스 칸 선조가 우리 역사에서 분파하게 된 계기와 연관성에 대하여 전원철 박사는

“문제는 918년의 궁정혁명이 났을 때입니다. 금행의 후손인 발해대상랑이 하필이면 패자인 자기 군주 궁예 편에 섰다는 겁니다. 궁예는 왕건의 궁정혁명군에 밀려 자기의 궁성인 철원에서 머지않은 강원도 부양으로 도망했다가 미복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곡식 이삭을 따다가 백성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죠.

이때 죽은 궁예의 시신을 수많은 승려가 호위하여, 고려를 떠나 오늘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서 장사 지낼 때 발해대상랑도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장례가 끝나고 그의 일행은 다시 그들 자신의 선조 간(키얀)과 님금(니쿠즈)이 들어갔던 전설적인 그 땅 발해서경인 아르카나 콘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쫓겨왔지만, 다행히 거기서 동족을 모으고 도리행 후손 지파의 하나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케) 종족과 합칩니다.”

전 박사는 “또 《금사》에서 아골타가 발해인 양복을 통해 발해 유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라고 했다”며 “그가 ‘여진인과 신라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여진인 아골타 자신과 발해 왕족은 같은 집안이니, 발해인들은 발해왕족 출신인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말이지요. 아골타가 신라인 김행(金幸), 곧 권행(權幸)의 후손이었다면 그는 북국 발해의 ‘적국’인 남국 신라인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을 듣고 적국의 왕손에게 발해 유민이 들러붙겠습니까?”

“금행의 맏아들인 아고래, 곧 ‘카고라이’(고구려)의 손자로 난 ‘아지태(阿志泰)’ 와 역시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로 태어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 때에 와서 궁예가 신라를 치고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이 때 ‘아지태(阿志泰)’와 ‘발해 대상 랑’도 남하하여 궁예의 정권에 참가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합니다.”

“《대금국지(大金國志)》나 《송막기문》 등에는 그가 ‘신라인(新羅人)’이라고 적어두었고, 《금사》에서는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이 때 나이는 이미 60 몇 살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그가 신라 사람이거나 왕건의 고려 사람이라고 잘못된 풀이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오해한 우리 학계나 재야 사학자들의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전 박사는 “함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과 동시대인이라며 이는 곧 발해와 신라가 남북국으로 대치하던 시대(함보 출생년도 대략 ?~849년)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함보의 아버지인 《고려사》의 금행은 <고려사 고려세계>가 비밀코드로 기록한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의 장인이므로 곧 금행은 작제건의 아버지뻘이고, 그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그 금행에게 8대 외손이 되는 이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1079~1122년)인데, 아골타와 예종은 동시대 사람이고, 왕건과 그 외증조부 금행의 가계와 친족 계보 상 같은 항렬입니다.

결국 왕건의 할아버지 항렬이 함보이고 증조부 항렬이 금행입니다. 왕건시대 사람일 수가 없죠. 더구나 금행과 함보의 시대에 북에는 ‘발해’, 남에는 ‘신라’, 그 사이에는 궁예의 ‘(후)고구려’, 또 서남쪽에는 ‘(후)백제’가 엄연히 병존하던 시대입니다.”

영원히 이 땅을 떠난 칭기스 칸의 선조

전 박사는 “하지만 그 뒤 몇 대 후손의 시절, 그러니까 918년과 926년에서 완안 아골타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의 시절입니다. 그들이 영원히 이 땅을 떠나게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은 바로 지난 세기의 1950년대에 우리 땅에서 일어난 남북한 전쟁을 방불케하는 전쟁이 북쪽의 조신(女眞)과 남쪽의 고려 사이에 일어 난 것입니다.바로 고려 윤관 장군이 무려 17~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신(女眞)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동원된 숫자는 엄청난 수의 군사입니다. 그로부터 약 490년 후인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에도 조선은 단 10만의 군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인구가 약 열 배는 늘어난 오늘날로 치자면 20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에서 북의 함경도로 쳐들어간 전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측 고려가 북측 조신(女眞)으로 쳐들어간 전쟁이죠.”

“네, 그 때가 시기적으로는 아골타의 청년시대였습니다. 이 때 함경도에 살던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와 그의 숙부 ‘나친’, 곧 제가 볼 때 오늘날 함북 나진(羅津)을 관향이자 자기 이름으로 쓰던 이들의 시대에 그들은 이 땅 함경도를 떠납니다. 그들은 옛 발해 수도 동모산을 지나는 속말수(송화강)의 지류를 따라 흑수(흑룡강)의 윗물줄기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오늘날 남(내)몽골의 훌룬-부이르호를 거쳐서 더 서북으로 나아가 오늘날 몽골리아 동북부 러시아령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칼’은 몽골어로 ‘바이-갈’이라고 합니다. 이 못 이름의 뜻은 제가 보기에 이는 원래 말갈어로 ‘부여-골리(부여-고려)’ 호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 전쟁의 여파로 잘라이르(야라, 곧 함흥) 종족이 쫓기다가 카이도 8형제를 참살한 사건이 있은 후 카이도와 종숙부 나친이 오늘날의 바르고진으로 갔다고 《집사》는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단, (징기즈칸 선조가 되는 대진국 발해 왕가인)황금 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전 박사는 결국 “또 다시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며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칸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몽골족이 자신들의 뿌리나라로써 무지개 나라(솔롱고스)라고 부른 고대 동방 한국은 지구촌 문명과 세계권력의 뿌리다.

분열된 초원을 통일하고 징기즈칸에 즉위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며, 동-서 무역공동체를 실현하여 인류문명발전에 공헌한 대무진 징기즈칸은 친부가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 발해의 기반이 되었던 말갈(메르키르)족장이였고,

친모는 코리아(고구려)족이고, 양부는 코리아(고구려)족장 예수게이였으며, 징기즈칸이 가장 사랑한 여자는 말갈족장의 딸이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몽골역사에서 기본적인 내용이다. 그러니까 징기즈칸은 고구려(대진국 발해)의 후손이였다.

그런데, 징기즈칸의 선조의 뿌리족보사를 상세히 밝혀 주목을 받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중앙아시아·북방민족 사학가이자 고구려 발해학회 회원인 전원철 박사(법학박사)다.
 

전원철 박사는 역사의 기록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발해의 초대왕이자 진국왕(震國王)인 대조영의 가계 출신이며, 그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제 19대손임을 밝혀냈다.

“《집사》는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가 다스린 일칸국(곧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자기 황제의 엄명을 받고 1310년경에 지은 역사책입니다. 가잔 칸이 그에게 ‘나의 선조인 칭기스 칸의 선조에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쓰라’라고 엄명을 내린 겁니다.

라시드 웃딘은 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당시 4칸국의 종주국이던 원(元)나라에서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와 역사에 관해 정통한 원로대신 볼라드 칭상(승상)과 여러 학자들, 그리고 《황금의 책》이라고 라시드가 부르는 책, 곧 ‘족보’를 비롯하여 막대한 분량의 기록물을 수레에 싣고 오도록 하여 그들의 설명과 해석 아래 그 사서를 집필했습니다.”

전원철 박사는 “이 사서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모골(몽골) 종족의 기원 이야기’로 칭기스 칸의 선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뒤에 쓰였으나, 라시드가 말한 그 《황금의 책》을 더욱 충실히 반영한 《사국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준다고 한다.

《사국사》에 대한 전 박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국사》는 티무르 왕조의 4대 칸이자, 역시 칭기스 칸의 후손이었던 울룩벡(1394~1449)이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집사》속의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보다 훨씬 앞선 칭키스칸의 선조 계보로 《집사》가 생략한 부분까지 적고 있다.

울룩벡은 제2의 칭기스 칸으로 전 유럽과 아랍지역을 덜덜 떨게 했던 아미르 티무르(1336~1405)가 세운 왕조의 칸인데, 그의 할아버지인 아무르 티무르 역시 부계의 모계로 칭기스 칸의 후손이면서 부계가 칭기스 칸의 선조대에서 갈라져 나온 몽골 바를라스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인 《황금의 책》 자체는 오늘날에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 박사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그 자신도 이것을 꼼꼼히 참조하고 글을 썼고, 그 족보의 골자는 방금 말한 다른 사서들에도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중세 서방의 사서와 함께 《몽골비사》등 동방의 책을 비교 대조하며 이면에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만 칭기스 칸 선조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설명이다. 

“칭기스 칸은 어린 시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와 전 세계를 통일했습니다. 그런 칭기스 칸은 고구려와 발해인의 후예였습니다. 그는 당시 대국이었던 금나라 황제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으로 ‘몽골의 칸(황제)’의 자세를 보여줬습니다. 제가 칭기스 칸의 뿌리를 밝히는 데 매진한 이유는 칭기스 칸처럼 한국도 ‘중국·일본·미국은 대국이니까 우리가 접고 들어가야지’하는 이런 사대주의적이고 소국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전 세계를 우리가 활동할 무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입니다. 전쟁을 해서 세계를 뺏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통해서든 무역을 통해서든 과학을 통해서든 우리는 칭기스 칸처럼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민족입니다.”

지난 6월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 2권을 출간했다. 전원철(全原徹) 박사는 군 제대 후, 한·몽 수교 당시 몽골어를 공부하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몽골비사>에서 “칭기스 칸의 뿌리는 높은 하늘이 점지하여 태어난 부르테 치노(蒼狼·잿빛 푸른 이리)”라는 내용을 접했다. 그는 틈틈이 몽골비사를 읽으며 몽골어 공부를 하면서도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의 선조가 잿빛 푸른 이리와 흰 암사슴(부르테 치노의 아내 코아이 마랄을 풀이한 것)이라는 사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전 박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발해의 초대왕이자 진국왕(震國王)인 대조영의 가계 출신이며, 그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제 19대손임을 밝혀냈다.

전 박사는 이를 위해 지난 1995년부터 사료 수집에 매진했다. 특히 칭기스 칸 일가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에 관해 남긴 <황금의 책(Altan Daftar)>을 기준으로 분석했다. 이 책은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들을 기록하고 있다. 전 박사는 <황금의 책>에 나온 계보를 기반으로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등 동방사서들과 대조를 통해 순서와 시대 및 연도, 그들의 행적을 파악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전 박사는 대학 때부터 외교사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외국어를 섭렵했다. 티베트어, 만주어, 한어, 아랍어 등 10여개의 민족어를 기본적으로 할 수 있었던 전 작가는 이번 연구를 하면서 미국 변호사 시절 잊고 지냈던 언어들을 다시 공부했다. 칭기스 칸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 <몽골비사>, <집사>, <사국사>, <칭기스의 서>,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29개 언어로 된 사서를 분석했다. 업무차 방문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는 관련 사서란 사서는 모두 입수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칭기스 칸의 선조로 기록된 인물들은 <삼국사기> 등 우리 사서와 <홍사>, <황금사강> 등 티베트계 몽골 사서에 나오는 인물과 정확히 부합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를 위해 600권 이상의 책을 봤습니다. 제 나름대로 교차 확인을 통해 검증 작업을 한 것이죠. 이 중 제 책에 인용된 것만 150권 가까이 됩니다. 어떤 역사서의 경우엔 사본 하나를 얻는 데 6개월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한 권에 200만원인 책도 있었는데 구하기가 어려워 대안 사서를 보기도 했습니다. 외교관 동료 등을 통해 다행히도 핵심 사서들은 모두 구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 왕가는 태조 왕건의 고려와 금나라, 오늘날 우리가 ‘몽골제국’으로 알고 있는 나라, 그리고 청나라로 이어졌다. 몽골제국은 오늘날의 몽골과 중국,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등 중앙아시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시아는 물론, 이집트를 제외하고 이라크,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등 거의 대부분의 이슬람세계, 헝가리, 러시아 등 동구 전체와 오스트리아, 독일 변경까지 뻗어나간 방대한 세계제국이었다.

 
전 박사가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 칸을 통해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보고 우리의 미래를 보자는 것이다.

“함경도 땅으로 들어간 우리 형제들이 중원을 정복했고, 그들과 일족의 선조를 가진 칭기스 칸 3대가 전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역사도 우리 민족사의 일부입니다. 그 당시 국경이 어디 있었습니까. 우리 역사를 이 한반도, 조선반도 내의 역사로 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세계사 속에서 우리 민족사를 봐야합니다.”

전 박사는 다시 한 번 역사적 진실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오늘날 형체도 없는 K팝(K-Pop)의 인기,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s·한류)를 자랑삼아 떠들면서도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는 방향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해냈다면 미래에도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아니 ‘전 세계’를 다스린 종족의 정체가 우리 핏줄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다시 찾고 돌아보면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시점입니다.”



 

이런 역사소재는 대한민국의 한류 영화소재로 충분하다!

칭기스칸의 선조, 영원히 이 땅 한반도(함경도)을 떠나다!

전원철 박사의 연구내용과 주장을 토대로 정리해 본다.

오늘날에도 터키인들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이곳을 자기네들 모든 투르크 종족의 선조와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동방아시아의 그 어느 곳이라고 막연히는 알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다고들 말하곤 한다. 터키에서는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의 전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에 전원철 박사는 ‘에르게네 쿤’은 예전 《집사》에서는 ‘아르카나 쿤’, 《사국사》는 ‘아르카나 콘’으로 쓰는데 이는 발해서경(渤海西京)이라는 별칭을 가진 발해의 수도급 행정구인 대야발이 왕으로 다스린 ‘압록강네 郡(군)’(압록강 나의 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발해어 행정구 이름이 734년경에서 《집사》가 편찬되는 1310년경까지 근 58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 또 고구려/말갈어(발해어)→몽골어→투르크어→페르시아어를 거치면서 ‘압록강 나의 군’→아로강나 군→아르가나 콘이라는 투르크/몽골어로 음가 변화를 거쳤다는 것이다.

고구려 자주주권을 확립한 고구려 3대 태왕이 대무신왕 고무휼이다!대진국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선조는 바로 시호 대무신에서 따온 성씨로 고무휼의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조영 왕가의 후손이 징기즈칸이다.

징기즈칸의 이름이 대무신이라는 이유를 그냥 알 수 있고, 징기스 한도 대조영의 국호인 대진국과 관련되며, 단군한국의 중심국가였던 진국(진한)의 단군천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진국왕(진한 단군천왕)=징기스(진국) 한(칸=왕)이다.

"징기즈칸의 선조인 대진국 대조영 혈족인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사국사》에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이 전쟁은 우리에게 보통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략’으로 알려진 싸움이 시발이 된 발해와 당나라 간의 전쟁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래 약 한 세대 29년 뒤인 69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는데, 이는 곧 고구려를 재건한 겁니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를 재건 한 지 34년 만에 또다시 대전쟁이 터졌습니다. 당나라가 다시 일어선 고구려, 곧 발해를 보면서 과거의 고구려가 다시 나타난 악몽에 겁을 먹고 발해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부립니다.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떼어 내려고 획책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개략적으로만 적은 것이 《사국사》가 말하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 간의 대전쟁’입니다.

여기서 ‘모골’은 곧 ‘말갈’, 곧 ‘발해’입니다.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말갈, 곧 발해가 패하면서 칭기스 칸 선조들은 그들이 원래 살던 터전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고, 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 박사는 이후 이야기를 《집사》의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모골(말갈) 군이 전멸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이름이 ‘키얀’과 ‘네쿠즈’다. 이 둘은 마침 갓 혼인한 그들 각자의 아내들, 그리고 몇 명의 시종과 함께 마침 전쟁에서 주인을 잃는 말들을 잡아타고 야간의 어스름을 이용하여 포위를 뚫고 심심산골의 계곡 속으로 도망쳤다.

그 계곡은 오직 한 필의 말과 한 명의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험준한 곳으로 거기를 넘자 마치 하늘이 만든 천국 같은 벌판과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쿤’이다.

전 박사는 바로 ‘반안군(盤安郡)’이 곧 칭기스 칸의 19대 조부인 대야발(大野勃)의 영지라고 말했다.

“대야발 자신이 ‘돌궐’ 땅, 곧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카자흐스탄 땅에까지 가서 사서를 구해 지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저자서문에는 자신의 칭호를 분명히 반안군왕(盤安郡王)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요사》 등에는 분명히 발해의 한 행정구를 ‘반안군(盤安郡)’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전 박사는 “그 전설적인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한 두 가계에서 나중에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무리의 숫자가 불어나서 그들이 여러 종족, 곧 지파로 갈라졌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그 계곡이 좁아져 거기를 빠져나와 더 넓은 터전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과정이 700년 전 쓴 《집사》에 ‘아르가나 콘 탈출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칭기스 칸 선조가 우리 역사에서 분파하게 된 계기와 연관성에 대하여 전원철 박사는

“문제는 918년의 궁정혁명이 났을 때입니다. 금행의 후손인 발해대상랑이 하필이면 패자인 자기 군주 궁예 편에 섰다는 겁니다. 궁예는 왕건의 궁정혁명군에 밀려 자기의 궁성인 철원에서 머지않은 강원도 부양으로 도망했다가 미복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곡식 이삭을 따다가 백성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죠.

이때 죽은 궁예의 시신을 수많은 승려가 호위하여, 고려를 떠나 오늘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서 장사 지낼 때 발해대상랑도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장례가 끝나고 그의 일행은 다시 그들 자신의 선조 간(키얀)과 님금(니쿠즈)이 들어갔던 전설적인 그 땅 발해서경인 아르카나 콘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쫓겨왔지만, 다행히 거기서 동족을 모으고 도리행 후손 지파의 하나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케) 종족과 합칩니다.”

전 박사는 “또 《금사》에서 아골타가 발해인 양복을 통해 발해 유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라고 했다”며 “그가 ‘여진인과 신라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여진인 아골타 자신과 발해 왕족은 같은 집안이니, 발해인들은 발해왕족 출신인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말이지요. 아골타가 신라인 김행(金幸), 곧 권행(權幸)의 후손이었다면 그는 북국 발해의 ‘적국’인 남국 신라인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을 듣고 적국의 왕손에게 발해 유민이 들러붙겠습니까?”

“금행의 맏아들인 아고래, 곧 ‘카고라이’(고구려)의 손자로 난 ‘아지태(阿志泰)’ 와 역시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로 태어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 때에 와서 궁예가 신라를 치고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이 때 ‘아지태(阿志泰)’와 ‘발해 대상 랑’도 남하하여 궁예의 정권에 참가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합니다.”

“《대금국지(大金國志)》나 《송막기문》 등에는 그가 ‘신라인(新羅人)’이라고 적어두었고, 《금사》에서는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이 때 나이는 이미 60 몇 살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그가 신라 사람이거나 왕건의 고려 사람이라고 잘못된 풀이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오해한 우리 학계나 재야 사학자들의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전 박사는 “함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과 동시대인이라며 이는 곧 발해와 신라가 남북국으로 대치하던 시대(함보 출생년도 대략 ?~849년)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함보의 아버지인 《고려사》의 금행은 <고려사 고려세계>가 비밀코드로 기록한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의 장인이므로 곧 금행은 작제건의 아버지뻘이고, 그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그 금행에게 8대 외손이 되는 이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1079~1122년)인데, 아골타와 예종은 동시대 사람이고, 왕건과 그 외증조부 금행의 가계와 친족 계보 상 같은 항렬입니다.

결국 왕건의 할아버지 항렬이 함보이고 증조부 항렬이 금행입니다. 왕건시대 사람일 수가 없죠. 더구나 금행과 함보의 시대에 북에는 ‘발해’, 남에는 ‘신라’, 그 사이에는 궁예의 ‘(후)고구려’, 또 서남쪽에는 ‘(후)백제’가 엄연히 병존하던 시대입니다.”

영원히 이 땅을 떠난 칭기스 칸의 선조

전 박사는 “하지만 그 뒤 몇 대 후손의 시절, 그러니까 918년과 926년에서 완안 아골타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의 시절입니다. 그들이 영원히 이 땅을 떠나게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은 바로 지난 세기의 1950년대에 우리 땅에서 일어난 남북한 전쟁을 방불케하는 전쟁이 북쪽의 조신(女眞)과 남쪽의 고려 사이에 일어 난 것입니다.바로 고려 윤관 장군이 무려 17~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신(女眞)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동원된 숫자는 엄청난 수의 군사입니다. 그로부터 약 490년 후인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에도 조선은 단 10만의 군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인구가 약 열 배는 늘어난 오늘날로 치자면 20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에서 북의 함경도로 쳐들어간 전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측 고려가 북측 조신(女眞)으로 쳐들어간 전쟁이죠.”

“네, 그 때가 시기적으로는 아골타의 청년시대였습니다. 이 때 함경도에 살던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와 그의 숙부 ‘나친’, 곧 제가 볼 때 오늘날 함북 나진(羅津)을 관향이자 자기 이름으로 쓰던 이들의 시대에 그들은 이 땅 함경도를 떠납니다. 그들은 옛 발해 수도 동모산을 지나는 속말수(송화강)의 지류를 따라 흑수(흑룡강)의 윗물줄기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오늘날 남(내)몽골의 훌룬-부이르호를 거쳐서 더 서북으로 나아가 오늘날 몽골리아 동북부 러시아령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칼’은 몽골어로 ‘바이-갈’이라고 합니다. 이 못 이름의 뜻은 제가 보기에 이는 원래 말갈어로 ‘부여-골리(부여-고려)’ 호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 전쟁의 여파로 잘라이르(야라, 곧 함흥) 종족이 쫓기다가 카이도 8형제를 참살한 사건이 있은 후 카이도와 종숙부 나친이 오늘날의 바르고진으로 갔다고 《집사》는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단, (징기즈칸 선조가 되는 대진국 발해 왕가인)황금 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전 박사는 결국 “또 다시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며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칸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처음듣는 역사팩트 이야기 - 유라시아에 몽골이 세운 21개 나라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Oct 21, 2022
 

몽골제국이 유라시아에 세운 21개 나라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이후 512년 간 몽골이 세운 나라들이 지속되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도 이때 세운 나라이다.

 
 

역사팩트 - 한족은 언제부터 생겼나?

https://youtu.be/2lMS7j6u1N

 

 

과거없는 미래는 없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