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은 대조영의 19대손이다” / 세계의 정복자 징기스칸은 발해왕족의 후예 (전원철 박사 발제) / 대조영의 종19세손인 칭기스칸 The World Conqueror Ghenghiz Khanthe 19th Generation ..

2023. 2. 16. 23:27역사의 연구/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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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은 대조영의 19대손이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9.07.01 10:52
북방민족사학자 전원철 박사가 찾아낸 ‘한민족의 뿌리’
 
<게티이미지뱅크>
 

이 장에서는 한민족과 북방민족의 연결고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북방민족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 내용을 함께 소개하고 자 한다. 전 박사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아이오와대JD, 뉴욕주립대LLM에서 수학한 미국 변호사로 UN난민판무관실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으로 일했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도 근무했다. 그는 29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발군의 언어 능력으로 수많은 고대 및 중세 사서들을 해독하여 한민족과 북방민족과의 관계를 밝히는 데 기여했다. 2015년 6월에 그는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 1, 2>을 출간했다.

그는 1240년경에 출간된 현존하는 최고의 몽골역사서 <몽골비사>, 몽골 제국의 칸국인 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1310년경 저술한 <집사集史>, 몽골 제국의 후예 티무르 제국의 4대 칸 ‘울룩벡’이 15세기 전반에 저술한 <사국사四國史>, 히바 칸국의 ‘아불가 지 바하디르칸’이 17세기에 지은 <투르크의 계보>, 그리고 동양 사서 등 수많은 기록들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대몽골 제국의 창시자 칭기즈칸을 비롯한 몽골 제국 후예들이 건설한 나라들의 왕가 계보를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돌궐이 몽골 고원에서 물러나 서진하면서 건설한 수많은 투르크 국가의 왕가 계보, 여진이 세운 발해의 후예 금나라와 청나라의 왕가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밝혀냈다. 그는 서방 사서에 기록된 칭기즈칸 선조의 ‘계보’를 동방 및 우리 사서들과 교차 체크하고 그 인물들의 이름 소리, 그들이 살았던 곳의 지명, 활동 시기와 연도, 행적, 족보상의 계보까지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사서에서 확인하여 칭기즈칸의 계보를 추적했다. 그 결과 사서들의 내용이 서로 정확히 일치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그동안 필자가 연구해온 ‘흉노-선비-돌궐-몽골-여진’ 등 2500년간 세계사를 써온 북방 기마군단이 고조선과 연결되고 고조선의 후예인 한민족과도 깊은 관계에 있다는 내용에 대한 문헌학적인 고증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칭기스칸은 고구려-발해의 후손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을 쓴 전원철 박사는 
역사를 민족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비봉출판사>

현재 전원철 박사는 울룩벡이 쓴 <사국사>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필자가 출간을 지원하고 있다. 이 사서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쓰였고 그 원본은 하버드대와 옥스퍼드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994년에 세계 최초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우즈벡어로 번역된 바 있다. 현재 하버드대 도서관으로부터 받은 페르시아어 원본과 우즈벡어 본을 대조하면서 번역을 진행 중이다. 다음은 앞서 언급한 사서들을 통해 전원철 박사가 밝혀낸 사실을 필자가 종합한 내용이다.

기원전 1세기에서 시작하여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 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했다.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직계 가족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이때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의 ‘말-고을’, 즉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통치자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현재 차오양)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거란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 틈을 타 대조영 일가는 동쪽으로 탈출했고 698년 동모산에서 진국고려震國高麗(후에 발해)를 세웠다. 대조영은 고구려 왕족의 후예인데 서자 가문이기 때문에 고씨高氏(커씨) 대신 걸씨乞氏(클씨), 곧 대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건국한 지 채 30년이 못 되어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자 당 현종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흑수말갈(오늘날 아무르강 저편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주)을 발해로부터 분리시켜 당이 직접 통치하려 하였다. 이에 발해 무왕(대무예)은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으나 친당파인 대문예는 전쟁에 반대하다가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후 대무예의 맏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대도리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등으로 두 나라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드디어 732년 9월 발해 무왕 대무예는 당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고 선제공격에 나섰다.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한 발해군은 장문휴의 지휘하에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전사시켰다. 이듬해인 733년 당 현종은 당나라로 귀부한 대문예를 앞세워 발해 본토를 공격하게 하고 신라로 하여금 발해 남쪽 국경을 공격하게 하는 등 대반격에 나섰다. 개소문의 증손자인 개복순이 이끄는 당-신라의 연합군과 무왕 대무예의 사촌 대일하(일한)가 이끄는 발해군이 발해의 남쪽 접경 지역에서 맞서게 되는데 전세의 반전으로 대일하가 전사하고 말갈군(발해군)도 전투에서 대패하여 ‘일한(일하)’ 일족이 전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키안(간)’과 ‘네쿠즈(님금)’ 두 사람이 살아남아 ‘아르가나 쿤(압록강의 군, “발해서경 압록군”)’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키얀과 네쿠즈의 자손이 불어나자 아르가나 쿤에서 빠져 나와 모골(몰골, 말갈, 후에 몽골)의 고향으로 돌아가 칭기즈칸 선조의 부락이 되었다 한다. 이때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큰고려씨)’ 종족이 먼저 아르가나 쿤에서 나왔고 이어 나머지 모골(몽골) 종족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페르시아어로는 ‘황금 항아리’라는 인물인데 투르크어로는 ‘알툰 칸(황금 칸)’이고, 그는 바로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금행金幸’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금행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아고래’ ‘함보’ ‘보활리’이다. 이 세 아들이 <고려사>에 나오는 금행의 세 아들이자, <금사>에 나오는 금金나라 시조 삼형제다.

맏아들 아고래(하고라이, 고구려)는 콩그라트 종족의 시조가 되었고 가장 먼저 ‘아르가나 쿤’을 나온 콩그라트 종족은 발해의 남쪽 국토 회복을 위해 발해가 신라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참여했다. 칭기즈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부여 대 부인’의 몽골식 소리)도 이 종족 출신이다.

둘째 아들 함보는 예키라스 종족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는데 바로 이 함보의 7대손이 후일 금나라를 세우는 ‘완안 아골타’ 이다.

셋째 아들 보활리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함흥으로 들어갔다. 보활리의 3대손이 ‘코를라스(고려나씨)’인데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족으로 불리게 된다. 이 코를라스 지파에서 ‘모든 몽골인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몽골인의 조상 ‘알란고와’가 나왔는데 코를라스의 딸이다. 바로 이 알란고와의 10대손이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이다. 그러므로 칭기즈칸은 대조영의 19대손이 되며 고구려-발해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발해·고려·金·蒙·淸은 한 가계

<이민자 그래픽팀장>

전원철 박사에 의하면 몽골이 고구려-발해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이름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몽골은 칭기즈칸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즉 ‘말 고을’의 옛 소리인 ‘몰-고을’, 곧 ‘말馬-고을邑, 城’에서 생긴 말이다. 고구려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과 ‘일곱 개의 말골(말갈)’로 이 루어져 커진高 나라 ‘커구려(고구려)’였고 결국 ‘말갈’, 곧 옛 소리로 ‘몰골’이 몽골의 어원이라 한다. 전 박사는 “칭기즈칸은 당시까지 돌궐-투르키스탄으로 불리던 땅의 여러 종족들을 통일한 뒤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고구려-말갈’ 가운데 후자를 선택하여 ‘말골(몽골, 모골)’ 이라고 했다”며 “그 이유는 자신의 선조가 바로 말갈(발해) 왕족이었고, 또 그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 동쪽에서는 자신과 같은 선조에서 나와 혈통을 나누는 왕건의 ‘고려(고구려)’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라는 국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몰골(말갈)’의 전음인 ‘몽골’을 자기 국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몽골 제국이 사라진 후 몽골 제국의 재건을 기치로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제국을 세운 ‘티무르’와 인도에서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 또 한 칭기즈칸의 가계이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3대조 ‘카불칸’의 형제인 ‘카촐리 바하두르’의 8대손이다. 따라서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방계 5대손이 된다. 바부르는 티무르의 직계 5대손이며 바부르의 모계 또한 칭기즈칸 가문이다. 이렇게 고구려-발해 왕가는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으로 이어진다.

고려 또한 고구려-발해의 가문이다. 금행에는 금시조 함보 등 세 아들 외에 ‘용녀’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작제건’과 결혼했고 그 손자가 고구려를 건국한 왕건이다. 따라서 왕건 또한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다. 그래서 왕건은 “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라고 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북방의 강력한 신흥마군단 세력인 거란이 보낸 사신을 귀양 보내고 공물로 보내온 낙타는 만부교 다리 아래 묶어 굶겨 죽이면서까지 거란과의 통교를 거부했다. 그는 거란과 통교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훈요십조에도 포함시켰다. 망명해 온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자신의 왕씨 족보에 올린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금나라를 건국한 함보의 7대손 ‘아골타’ 뿐 아니라 후금(후에 청나라)을 건국한 ‘아이 신교로 愛新覺羅 누르하치’도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다. 누르하치는 아골타 가문의 약 20세손이 된다.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곧 고려말로 왕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하고 있는데 이는 금의 건국자 아골타가 발해 후손이며 동시에 누르하치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골타의 7대조 함보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가 신라 왕족이라 하는데 함보와 그 부친 금행은 대야발의 5대손 및 4대손으로 신라가 멸망할 시점인 936년대 인물이 아니며 발해가 존재할 당시인 840~850년대의 발해 왕족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석을 종합하면 동아시아에서 나라를 세운 ‘고구려-발해’ ‘고려’ ‘금나라’ ‘대몽골 제국(원나라를 포함하여 4칸 국)’ 그리고 ‘청나라’가 모두 한 가계에서 나왔다는 의미가 된다.

고구려-발해 후손, 이슬람 역사 뒤흔들다

한편 고구려-발해의 후손들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여러 제국을 건설했다. 돌궐 제국은 서쪽으로 이동해가면서 수많은 투르크 국가들을 건설했는데 이들 중 고구려-발해 가계가 리더가 되어 왕조를 세운 나라가 다수 있다. 대조영, 대야발의 4대조는 ‘오구즈칸’이라는 인물인데 그의 사촌 형제들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위구르 제국’이다. 그리고 오구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투르크인들을 지휘하여 서진하면서 세운 나라들이 ‘카를룩’ ‘셀주크 제국’ ‘호리즘샤 제국’ ‘카라한 제국’ ‘가즈나 제국’ ‘맘루크 왕조’ ‘악 코윤루’ ‘카라 코윤루‘ 그리고 ’오스만 제국‘ 등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셀주크 제국은 960년경 ‘셀주크 베이’가 오구즈족 일파를 지휘하여 중앙아시아 일대로 진출했고 ‘토그릴’이 중동 지역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1037년 대셀주크 제국을 출범시켰다. 셀주크는 오구즈칸의 손자인 크닉의 후손이며 토그릴은 셀주크의 손자이다. 이렇게 셀주크 제국은 고구려-투르크계 기마유목민 세력이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지배한 수니파 무슬림 왕조라 한다.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에 맘루크국을 세워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약 270년간 지배했다. 맘루크국은 흔히 노예 왕조라고 불리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싸움을 잘하고 용맹한 투르크 군인을 왕가의 노예로 사서 쓰는 관행이 있었다. 이들이 왕조까지 세운 사례가 이집트 이전에도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 제국 (977~1186년), 인도의 노예 왕조(1206~1290년) 등에도 있었다.

전투력을 자랑하는 아시아 기마군단 투르크가 서진하면서 이집트에 서는 왕실을 경호하는 군인 용병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맘루크 군단의 ‘아이벡’이 이집트 술탄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다. 투르크 노예 출신이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자 끊임없는 저항이 뒤따랐으나 맘루크 군이 공포의 몽골군단의 침략을 막아내자 왕조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졌다.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일 칸국의 초대 칸인 훌라구는 이라크를 굴복시키고 연이어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1260년 최강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남하해 왔다. 당시 몽골 제국 입장에서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는 것은 세계 정복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방으로 간 고구려-발해 왕가 일부가 투르크화한 가문인 호라즘샤 제국을 만든 후 몽골군에 망하자, 그 가문의 일원인 맘루크의 술탄 쿠투즈는 오히려 몽골군을 ‘아인 잘루트’로 유인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이슬람 세계는 몽골 제국의 파괴로부터 구원받았고 유럽에서 닥쳐온 십자군 전쟁도 끝내 카이로는 바그다드를 대신해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1299년에는 일 칸국의 카잔칸이 다시 맘루크국 정복에 나서지만 ‘나세르 무함마드’가 몽골의 침략을 다시 막아냈다. 전 박사가 분석한 이 왕가들의 ‘샤자라(족보)’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구려-발해 가문의 후예인 칭기즈칸이 대몽골 제국을 건설했고 이들 몽골군단이 이집트에까지 진출하려 했으나 또다른 고구려 가문의 후예인 맘 루크가 이를 막아냈던 것이다. 지금도 이집트 최대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가면 지중해 해변에 ‘카이트 베이’라는 맘루크 왕조 시대에 세운 기념비적인 성채가 지중해의 파도를 막아내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2018년 5월 국빈 자격으로 내한한 에르도안 터키공화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청와대 홈페이지>

뿐만 아니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부터 1922년에 이르기까지 600년 이상 지속된 최강의 투르크 국가였다. 오스만 제국의 시조 오스만 1세는 오구즈칸의 아들 ‘카이’의 후손으로 오스만 제국 역시 고구려 후예인 오구즈 가문의 나라이다. 오스만 제국은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칭기즈칸의 후예 티무르에게 패배한 이후 약 50년간 극심한 침체기를 겪었으나 1453년 무하마드 2세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했고, 이후 1517년에는 메카를 점령하여 칼리프의 지위에 올랐다. 술레이만 1세 때 세계 제국을 건설했지만, 18세기 말 이후 쇠락하면서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오스만 제국의 막이 내린다. 바로 이 오스만 제국의 후예가 1923년 건국된 오늘날의 터키이며 터키인들이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인식하는 것도 이와 같은 DNA의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제국들과 왕국들의 역사에서 놀라운 한국인 DNA 역사가 발견되는 것이다.

 

 

세계의 정복자 징기스칸은 발해왕족의 후예 (전원철 박사 발제)

Feb 17, 2017

 

(사)고구리역사문화보전회 주최로 2016년 12월 12일(월) 구리시에서열린 제8회 한국·몽골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에서 북방민족사 연구가 전원철 법학 박사의 발제 동영상 (제목 : 세계의 정복군주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

 

 

 

 

https://economy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10/2015091000001.html#:~:text=%2D%20%EC%A0%84%EC%9B%90%EC%B2%A0%20%EB%B0%95%EC%82%AC%EB%8A%94%20%EC%97%AD%EC%82%AC,%EC%A0%9C%2019%EB%8C%80%EC%86%90%EC%9E%84%EC%9D%84%20%EB%B0%9D%ED%98%80%EB%83%88%EB%8B%A4

 

“칭기스 칸의 선조는 고구려 주몽의 후손인 발해 왕족입니다”

“칭기스 칸은 어린 시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와 전 세계를 통일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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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발해인 칭기스 칸> 저자 전원철 박사

“칭기스 칸의 선조는 고구려 주몽의 후손인 발해 왕족입니다”

Economics Chosun 131호 2015.09.10 18:14
   
- 전원철 박사는 역사의 기록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발해의 초대왕이자 진국왕(震國王)인 대조영의 가계 출신이며, 그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제 19대손임을 밝혀냈다.
 

“칭기스 칸은 어린 시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와 전 세계를 통일했습니다. 그런 칭기스 칸은 고구려와 발해인의 후예였습니다. 그는 당시 대국이었던 금나라 황제에게도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으로 ‘몽골의 칸(황제)’의 자세를 보여줬습니다. 제가 칭기스 칸의 뿌리를 밝히는 데 매진한 이유는 칭기스 칸처럼 한국도 ‘중국·일본·미국은 대국이니까 우리가 접고 들어가야지’하는 이런 사대주의적이고 소국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전 세계를 우리가 활동할 무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입니다. 전쟁을 해서 세계를 뺏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통해서든 무역을 통해서든 과학을 통해서든 우리는 칭기스 칸처럼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민족입니다.”

중앙아시아·북방민족 사학가이자 고구려 발해학회 회원인 전원철 박사(법학박사)는 지난 6월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 2권을 출간했다. 전원철(全原徹) 박사는 군 제대 후, 한·몽 수교 당시 몽골어를 공부하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몽골비사>에서 “칭기스 칸의 뿌리는 높은 하늘이 점지하여 태어난 부르테 치노(蒼狼·잿빛 푸른 이리)”라는 내용을 접했다. 그는 틈틈이 몽골비사를 읽으며 몽골어 공부를 하면서도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의 선조가 잿빛 푸른 이리와 흰 암사슴(부르테 치노의 아내 코아이 마랄을 풀이한 것)이라는 사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전 박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발해의 초대왕이자 진국왕(震國王)인 대조영의 가계 출신이며, 그 아우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의 제 19대손임을 밝혀냈다.

전 박사는 이를 위해 지난 1995년부터 사료 수집에 매진했다. 특히 칭기스 칸 일가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에 관해 남긴 <황금의 책(Altan Daftar)>을 기준으로 분석했다. 이 책은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들을 기록하고 있다. 전 박사는 <황금의 책>에 나온 계보를 기반으로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등 동방사서들과 대조를 통해 순서와 시대 및 연도, 그들의 행적을 파악했다.

“놀랍게도 칭기스 칸의 선조로 기록된 인물들은 <삼국사기> 등 우리 사서와 <홍사>, <황금사강> 등 티베트계 몽골 사서에 나오는 인물과 정확히 부합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를 위해 600권 이상의 책을 봤습니다. 제 나름대로 교차 확인을 통해 검증 작업을 한 것이죠. 이 중 제 책에 인용된 것만 150권 가까이 됩니다. 어떤 역사서의 경우엔 사본 하나를 얻는 데 6개월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한 권에 200만원인 책도 있었는데 구하기가 어려워 대안 사서를 보기도 했습니다. 외교관 동료 등을 통해 다행히도 핵심 사서들은 모두 구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전 박사는 대학 때부터 외교사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외국어를 섭렵했다. 티베트어, 만주어, 한어, 아랍어 등 10여개의 민족어를 기본적으로 할 수 있었던 전 작가는 이번 연구를 하면서 미국 변호사 시절 잊고 지냈던 언어들을 다시 공부했다. 칭기스 칸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 <몽골비사>, <집사>, <사국사>, <칭기스의 서>,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29개 언어로 된 사서를 분석했다. 업무차 방문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는 관련 사서란 사서는 모두 입수하기도 했다.

전 박사는 주위의 회의적인 시선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기존 역사학자들의 경우, 자신들의 입장과 전혀 다른 내용에 불만 또는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제가 레퍼런스로 참고한 것이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몽골어 등으로 된, 기존 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자료다보니 ‘증명이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미국, 러시아 학자들이 제 얘기를 듣고는 책이 나오면 ‘세계사의 엄청난 재발견이 될 것’이라며 응원해줬습니다. 제 뜻을 지지해주는 몇몇 사람들 덕분에 힘을 내서 연구를 할 수 있었어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설은 전 박사가 이 책에 소개한 것만 해도 9가지가 된다. 전 박사는 이 책에서 각 주장이 왜 사실이 아닌지를 하나하나 반박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카자흐스탄의 한 역사가는 칭기스 칸이 카자흐-투르크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장의 근거는 칭기스 칸의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알려진 10대 여성 선조 ‘알란 고아’가 ‘코랄라스’ 종족이고, 오늘날 카자흐에는 ‘둘라트’ 종족에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코랄라스씨가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카자흐스탄에서 둘라트 종족은 투르크 종족의 하나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원래 투르크가 아니었던 코랄라스씨가 칭기스 칸의 시대보다 나중에 그를 따라 와서 투르크 종족의 일부로 가입한 것을 고려하면 이 역사가의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앞뒤가 바뀐 논리죠. 칭기스 칸 시대 이후 많은 종족들이 드넓은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습니다.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그들이 어디서 왔느냐를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전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 왕가는 태조 왕건의 고려와 금나라, 오늘날 우리가 ‘몽골제국’으로 알고 있는 나라, 그리고 청나라로 이어졌다. 몽골제국은 오늘날의 몽골과 중국,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등 중앙아시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시아는 물론, 이집트를 제외하고 이라크,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등 거의 대부분의 이슬람세계, 헝가리, 러시아 등 동구 전체와 오스트리아, 독일 변경까지 뻗어나간 방대한 세계제국이었다.

- 전원철 박사는 “지금이 바로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다시 찾고 돌아보면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시점”이라고 말했다.

중국을 지배하고 다스린 오랑캐들은 조선민족
전 박사가 외교사 중에서도 ‘우리 역사’와 ‘중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부 때 ‘동아시아 국제관계론’ 강의를 들었을 때다. 당시 수업 내용 중 일본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전된 ‘화이체계론(華夷體系論)’은 조공무역(朝貢貿易)을 근거로 조선과 중국을 속국과 종주국의 관계로 봤다.

전 박사는 “중공(중화인민공화국)학자들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논리를 발전시켰고, 2000년대 초반부터 동북아역사공정을 추진했다”며 “소위 말하는 중국을 건설한 청태조·명태조·원태조(칭기스 칸)들을 보니 전부 동방의 오랑캐들이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중국을 다스린 종족이 조선민족의 피를 받은 오랑캐 종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 박사는 인터뷰 내내 ‘중국’을 언급할 때마다 앞에 ‘소위’ 또는 ‘이른바’라는 말을 붙였다. ‘중국(The Middle Kingdom)’이라는 말을 쓰자마자 대한민국이나 조선인민공화국, 혹은 미국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의미가 돼버린다는 생각에서다.

전 박사는 “근본부터 틀린 이론인 동북공정은 대응할 필요도 없는 의미없는 일”이었다며 “소위 말하는 중국 땅만이 아닌 중앙아시아, 이란, 유럽,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진정한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박사가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 칸을 통해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보고 우리의 미래를 보자는 것이다.

“함경도 땅으로 들어간 우리 형제들이 중원을 정복했고, 그들과 일족의 선조를 가진 칭기스 칸 3대가 전 세계를 통치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역사도 우리 민족사의 일부입니다. 그 당시 국경이 어디 있었습니까. 우리 역사를 이 한반도, 조선반도 내의 역사로 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세계사 속에서 우리 민족사를 봐야합니다.”

전 박사는 이 책에 기대하는 점에 대해서도 말했다.

“사실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책이 대중적으로 호소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역사와 몽골·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관심 있게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나름대로 쉽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전 박사는 역사학자들에게 바라는 바도 덧붙였다.

“자신들의 관점과 다르다는 이유로 애써 외면하려 하지 말고 제가 틀린 게 있다면 지적하고 더 정확한 역사적 진실을 입증했으면 합니다. 중국사나 일본사, 몽골사라고 하는 이런 ‘근대국가’라는 틀, 곧 국가사(史)적 입장에서만 과거를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과거 속에 들어가 그 시대의 언어와 눈으로 주변과 전 세계를 봐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미국의 어느 학자가, 러시아의 어느 학자가 이렇게 말했으니 나는 거기에 따른다’는 식이 아니라 새로운 그 시대의 진실이 보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법학박사(JD)를 취득하고 미국 로펌에서 변호사로 오랫동안 근무한 그는 법조인이기보다는 한 사람의 사학자에 더 가까워보였다. 많은 현대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몰두하는 시대에 과거로, 더 이전의 과거로 향하는 그가 생각하는 ‘역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입니다. 내일의 나 역시,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예요. 내일의 내가 되려고 하는 것, 미래의 내가 추구하는 것은 그게 돈이든 명예든 오늘 내가 그것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전부 이뤄질 순 없어도 결국은 때가 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뤄집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민족이나 국가, 전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비전을 제시하는 게 바로 역사라는 거죠.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 박사는 다시 한 번 역사적 진실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오늘날 형체도 없는 K팝(K-Pop)의 인기,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s·한류)를 자랑삼아 떠들면서도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는 방향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해냈다면 미래에도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아니 ‘전 세계’를 다스린 종족의 정체가 우리 핏줄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다시 찾고 돌아보면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시점입니다.”

저자가 말했듯 이 책에도 분명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역사엔 다분히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이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29개 언어로 된 사서를 분석하는 초인적 노력으로 우리 민족, 국가, 전 세계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고민해보자는 논의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일 것이다. 

 

▒ 전원철 박사는…
서울대 외교학과 졸, 2001년 아이오와대 로스쿨 법학박사(JD), 2004년 뉴욕주립대 법학박사후과정(LLM), 96~97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 2004~2008년 미국로펌 근무, 현재 미국변호사, 중앙아시아·북방민족 사학가, 고구려발해학회 회원.

 

 

 

대조영의 종19세손인 칭기스칸 The World Conqueror Ghenghiz Khan

the 19th Generation Descendant of a Korean King

May 26, 2020

 

프랑스기자 다니엘과의 영어 인터뷰 Interview with a French Reporter Daniel

 

 

 

[異論의 역사(6)] ‘칭기즈칸’은 ‘진국왕(震國王)’의 옛소리?

“11세기 <송본광운>에 따른 한자음은 ‘팅궤트칸’, 자음접변 거쳐 ‘텡기즈칸’으로… 팍스 몽골리카(Pax Monglica) 창출한 몽골제국의 기원은 발해 왕가임을 밝히는 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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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호 (2017.05.17) [290]목차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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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論의 역사(6)] ‘칭기즈칸’은 ‘진국왕(震國王)’의 옛소리? 

“11세기 <송본광운>에 따른 한자음은 ‘팅궤트칸’, 자음접변 거쳐 ‘텡기즈칸’으로… 팍스 몽골리카(Pax Monglica) 창출한 몽골제국의 기원은 발해 왕가임을 밝히는 한 증거” 

글·사진 전원철 미국변호사, 법학박사
 
 
최근 중공(국)의 시진핑 주석이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동서의 사서를 꼼꼼히 뒤져 찾아낸 역사의 진실은 정반대다. 심지어 칭기즈칸마저 한민족의 핏줄이라면? 2회에 걸쳐 ‘조선(한)민족에서 나온 몽골제국의 비밀스러운 뿌리’를 파헤친다.
 

 

2006년 7월 칭기즈칸의 기마부대를 재현한 몽골군 병사들이 초원을 달리고 있다. 당시 몽골군은 하루에 200㎞까지 진격하며 영토를 넓혀갔다.(사진)

 
 
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칭기즈칸은 몽골제국의 건국자다. 칭기즈칸은 당대에 이미 만주 동부에서 중국 북부와 카스피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는 이후 몽골제국이 오늘날 서구와 북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유라시아대륙을 정복하고 ‘팍스 몽골리카(Pax Monglica)’를 구가하는 기틀이 됐다.


이 같은 업적을 높이 사 13세기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바이니(Ata-Malek Juvayni, 1226~83)는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를 통해 칭기즈칸에게 유사 이래 그 어떤 제왕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세계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세계정복자’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불리는 몽골제국의 건국자 칭기즈칸은 당대에 만주 동부에서 중국 북부와 카스피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령해 세계제국 몽골의 기틀을 놓았다. 칭기즈칸의 초상.

 
 
004년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칭기즈칸 관련 책을 내면서 <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칸(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1995년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했다.


그런데 이처럼 위대한 칭기즈칸의 뿌리가 우리 조선민족이라면 과연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놀랍게도 칭기즈칸은 발해(渤海, 698~926)를 세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 반안군왕 대야발(大野勃, 발해 제2왕계의 시조)의 19대손이다. 이번 호에서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240년경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에는 칭기즈칸의 선조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족보가 실려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칭기즈칸에서 10대(代) 위에는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알룬 고와에서 다시 10대 위로 올라가면 몽골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로 여기는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지금도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푸른 늑대’다.

그런데 칭기즈칸과 그 조상의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에는 왜 ‘비밀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비(秘)’ 자가 들어 있을까? 그 이유를 보여줄 작은 단서를 하나 제시한다. 우선, 칭기즈칸이 자란 나라를 당(唐)대에는 ‘돌궐(突厥)’, 송(宋)-요(遼)-금(金)대에는 ‘조복(阻)’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칭기즈칸은 자신이 건설한 나라에 처음으로 ‘몽골(蒙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그의 백성들은 그에게 ‘칭기즈칸’이라는 왕호를 바쳤다. 이들 나라 이름, 칭기즈칸의 이름, 그에게 부여된 칭호는 모두 몽골 말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몽골제국의 최대 판도.

 
 
런 전제 아래 다시 이들 이름을 살펴보자. 그리고 이들과 연관되는 우리 역사상의 이름들을 생각해보자. 즉 몽골이라는 나라 이름은 ‘말갈(靺鞨)’에서 왔다. 그의 이름 테무진은 고구려의 3대 왕인 ‘대무신(大武神) 왕(王)’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칭기즈칸(成吉思汗)이라는 왕호는 발해 즉, ‘진국(震國) 왕(王)’이라는 뜻이다. 어떤가? 쉬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한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 주는 사서들이 있다. 칭기즈칸의 족보, 곧 아랍-투르크어로 ‘샤자라(Shajara)’다. 이 족보는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세운 일칸국(Il Khanate)의 가잔칸(Ghazan Khan)이 1310년경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에게 자신의 족보인 <황금의 책(Altan Daftar)>을 페르시아어로 다시 쓰게 한 <역사 모음(集史)>과 티무르제국의 4대 칸 울룩 벡(Ulugh Beg, 1394~1449)이 역시 페르시아어로 쓴 <사국사(Tarikh-i Arba’ Ulus)>다. 이 계보는 그 후 17세기 우즈베키스탄의 히바칸국 황제인 아불 가지칸이 쓴 <투르크의 계보(Shejere-i Atrok)>에도 나온다.

몽골 왕가의 족보를 실은 <역사모음>과 <사국사>



▎<역사모음(集史)>에 실려 있는 칭기즈칸의 오논강가에서의 대관식 그림. <역사모음>은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가 세운 일칸국의 가잔(Ghazan) 칸이 1310년경 대신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에게 자신의 족보를 페르시아어로 다시 쓰게 한 책이다.

 
 
그런데 이들 사서의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발해 왕가의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요사> <금사> <대씨대동보> 등 여러 동방의 사서와 대조 연구한 결과다. 그 한 예로 이들 사서에 등장하는 칭기즈칸과 몽골의 선조 ‘키얀(Kiyan)’과 ‘니쿠즈(Nikuz)’의 정체를 밝혀보자.(사진)


몽골의 일한(Il Han) 시대에 ‘몽골과 타타르 종족 간의 대 전쟁’(<사국사>)이라고 부르는 큰 전쟁이 벌어졌다. <역사모음>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키르기즈와 타타르 동맹군과 몽골 사이에 벌어진 이 싸움에서 몽골은 대패했다. 일한도전사하고 오직 두 사람, 키얀과 니쿠즈만 살아남았다. 두 사람은 아내와 몇 명의 시종을 데리고 적을 피해 ‘아르카나쿤’이라는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세월이 지나 이 둘의 후손이 불어나 그들이 몽골족과 칭기즈칸의 선조가 되었다. 우선 <역사모음>의 기록을 보자.

<역사모음>에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는 ‘아르가나쿤(Arganakun)’ 이야기와 함께 ‘투르크와 모골(몽골의 투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해두었다.



▎몽골 수도에서 250㎞가량 떨어진 아우라가에서 발견된 칭기즈칸의 사당 유적.

 
 
"옛날 몽골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거의 2000년 전(이는 <역사모음>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로 보이는데, <역사모음>의 다른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필자 주) 다른 투르크 종족들과 대립해 전쟁으로 비화했다.(사진)


믿을 만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남자 두 명과 여자 두 명을 제외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이 두 가족은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다. 그곳의 이름이 아르가나쿤이었다. (…)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이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해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를 비롯하여 오늘날 동서양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보통 ‘에르게네쿤(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했다.

“오래전 일칸(El 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bi n Faridun)은 타타르칸(Totor Khoni)인 세빈치칸(Sevinch Khon)과 동맹해 모골 종족을 공격했다. 일칸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일칸의 아들 카욘(Kayon)과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이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쿤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다른 부분은 <역사모음>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따르면 그 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불렀다. 이들이 바로 <역사모음>에서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다. 눈여겨볼 점은 <역사모음>은 일칸을 언급하지 않고, 키얀과 니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칸의 선조인지 밝히지 않은 데 비해,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씨가 칭기즈칸의 선조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한’ ‘키얀’ ‘니쿠즈’ 등은 과연 누구인가? ‘아르카나쿤’은 어디인가? 또 이 전쟁은 어느 전쟁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역사모음>의 키야트씨, 곧 <사국사>의 키요트씨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키요트는 놀랍게도 ‘걸(乞)’씨의 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 자전은 이 글자를 ‘去(거)-訖(흘)’ 반절(反切), 곧 우리말 소리로 ‘걸’이라고 적었다. 당시 남송인들은 ‘걸(乞)’을 ‘키요트(khiot/qiot)’ 라고 발음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이 ‘걸(乞)’을 성으로 쓴 인물이 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대조영의 선조들은 고구려-말갈어, 곧 우리말 ‘클(大)’씨를 한자의 소리만 빌려 ‘걸(乞)’씨라고 했고, 이를 대조영이 같은 뜻의 한자인 ‘대(大)’씨로 바꿔 쓴 것이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성은 ‘걸씨(乞氏)’, 곧 ‘클씨’라는 말이다.

그러면 키얀의 아버지는 일칸은 누구인가? <구당서>와 <대씨대동보> 등은 걸씨 가문 대조영의 아우 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둘 가운데 일하가 바로 일칸이다. ‘일칸’과 ‘일하’는 비슷한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걸(乞)’씨 성을 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



▎<사국사>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가계인 ‘키요트’씨가 칭기즈칸의 선조라고 밝혔다. <사국사>는 티무르제국의 4대 칸 ‘울룩 벡’이 페르시아어로 쓴 역사책이다. 온전한 모습으로 현존하는 두 개의 발해 유적 중 하나인 장백시의 영광탑.

 
 
우리나라의 <대씨대동보>와 사서는 ‘키얀’에 해당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키얀은 오늘날 대씨와 태씨의 직계선조가 아니라 방계선조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직계 선조는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후손인 발해 제2왕가다.(대야발의 후손들은 발해 10대 선왕 대인수부터 15대 마지막 왕인 대인선까지 왕위를 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사 서의 기록에도 없는 ‘키얀’은 과연 누구인가? (사진)


<역사모음>은 키얀을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의 몽골말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몽골어에는 같은 뜻을 가진 낱말이나 같은 소리를 가진 낱말이 없다. 왜냐하면 라시드가 말한 ‘몽골어’는 제3의 언어, ‘말갈어’였기 때문이다.

한자에 ‘(세차게 흐르는) 산골 물 간(澗)’ 자가 있다. ‘간’자의 뜻은 정확히 <역사모음>의 키얀이라는 말의 설명과 일치한다. 이 간 자의 고구려-말갈어 발음이 바로 키얀이다. 라시드가 말한 ‘몽골어’는 사실 말갈어, 곧 고구려어였던 것이다. 결국 키야트, 곧 걸씨 성을 쓰는 키얀이라는 이름의 인물은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다.


 
다음은 키얀과 함께 아르카나콘으로 피신했다는 ‘일칸(일하/壹夏)’의 양자 ‘니쿠즈’에 대해 알아본다.

놀랍게도 그는 발해 2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죽은 ‘도리행(都利行)’의 아들 ‘님금’이다. 즉, 대무예의 적손인 셈이다. 도리행(都利行)의 일은 <구당서> 등에 적혀 있으나, 그 아들 이야기는 동방사서나 족보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모음>과 <사국사> 등은 니쿠즈에 대해서도 기록해두었다.

<역사모음>과 <사국사>는 니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도리행과 같은 소리다. <송본광운>을 보면 도리행의 8~9세기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行)’은 ‘항렬(行列)’의 경우처럼 ‘항’으로도 읽는데, ‘항’의 8~9세기 발음은 ‘캉(khang)’이다.

결국 “‘니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한다”는 기록은 니쿠즈가 자신에서 비롯된 가계를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도리행이 대무예의 맏아들로, 당나라에서 독살당하지 않았다면 차기 발해 왕이 되었을 인물인 만큼 도리행을 가계의 시조로 받드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아가 왕이 되지 못한 왕가의 적손이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도리행의 아들로 생소한 이름을 가진 니쿠즈는 누구인가? 니쿠즈는 우리말로 ‘님금’이다. 16세기에 씌어진 <시바니의 書(Shibani-name)>는 칭기즈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이 책은 니쿠즈를 ‘데르리긴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데르리긴한은 <역사모음>과 <사국사>에 등장하는 ‘다를라킨 한’이고, 발해식으로는 ‘도리행 가한(可汗)’이다.

또 <몽골비사> 등에 따르면 니쿠즈와 같은 이름을 쓰는 후손들도 있어 ‘네군(捏昆/날군)’ 또는 ‘링쿠(領忽/령홀)’라고 도 한다. 이들 이름은 과연 무슨 뜻인가? <역사모음>은 ‘네군’ 또는 ‘링쿠’와 같은 말을 두고 “링쿰(lıngqum)이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 평민들은 ‘링쿰’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적었다.

이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몽골 평민들과 달리 황가의 성원이나 귀족들만 링쿰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왕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랍에 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즉, 아미르=링쿰=‘군주(임금)’라는 의미다.

또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원나라 때는 양자강 이북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지나를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바로 키타이에서 나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한인(漢人)’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자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거란 남쪽사람)’, 곧 ‘남인(南人)지역’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이때 ‘키타이(거란)’는 이미 사라졌고, 그 땅에는 발해를 이은 조션(女眞)과 고려가 있었다. 따라서 <역사모음>이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어가 아니라, 마르코 폴로 시대에 가까운 고려-여진어를 말한다. 고려-여진어로 ‘군주’를 뜻하는 말이 ‘님금/링쿰’이고, 니쿠즈는 말갈어(곧 우리말) ‘님금’의 몽골-페르시아어다.

정리하자면 <사국사>에 등장하는 ‘일칸의 양자 니쿠즈’는 우리 말로 ‘님금’이라는 사람이고, 발해 무왕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한)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대씨 왕가의 계보도를 그릴 수 있다.

<사국사>가 일칸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칸(Tengiz Khon)은 또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텡기즈칸’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이 쓴 ‘진국 공’이라는 칭호다. 그렇다면 텡기즈칸은 ‘진국왕(震國王)’ 혹은 ‘진국공(震國公)’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사국사>는 일한, 곧 우리나라 대씨 족보의 일하(壹夏)에 해당하는 인물의 아버지가 ‘텡기즈칸’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때의 텡기즈 칸은 대조영이 아니라, 그의 아우 반안군왕 대야발을 말한다. <신당서> <구당서> <대씨대동보> 등의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에서 보면 일한, 곧 일하(壹夏)의 아버지는 분명 대야발이기 때문이다.

11세기 <송본광운>에 따르면 ‘진국왕(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칸’인데, 300년 후인 14~15세기에 기록된 <사국사>에 적힌 ‘텡기즈칸’은 자음접변을 거친 말이다. 이것이 ‘칭기즈칸’으로 바뀐 것이다.

고구려의 잔얼(殘孽) 대조영



▎중국 허난성에 있는 몽골 후손 정착촌에서 이 마을 사람들이 가족의 계보를 담은 길이 3m, 폭 2.5m짜리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조사 결과 이들은 칭기즈칸의 후손임이 확인됐다. 2007년도 사진이다.

 
 
제 <역사모음>과 <사국사>가 언급한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에 대해 살펴보자.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칸의 선조인 키얀과 니쿠즈가 ‘모든 투르크와 몽골 종족의 고향’으로 알려진 ‘아르카나쿤’으로 숨어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전쟁은 바로 ‘발해의 당나라 등주(登州) 침공 전쟁’이다. 발해-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무시무시한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먼저 이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보자. 기원전 1세기 시조 주몽(朱蒙) 이래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高句麗)는 중앙아시아와 인도-페르시아, 동로마제국 등 서방세계에는 ‘코라이(Koorai)’ 범어로는 ‘무구리(畝俱理)’ 그리스어로는 ‘무크리(Mukr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남북한을 지칭할 때 쓰는 ‘코리아(Korea)’의 어원이 된 이름이기도 하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했다.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이때 고구려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 곧 말갈(靺鞨)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였던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끌려가 당나라 영주(營州), 오늘날의 조양(朝陽)에서 29년간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다.

698년경 거란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를 틈타 말골 수령(군왕) 출신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두 아들 걸조영과 야발도 영주를 빠져나와 동으로 말을 달렸다. 이들은 자기네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으로 돌아와 말골(말갈)과 구려(고려) 백성을 규합해 698년에 ‘진국(震國)’을 세웠다. 그로부터 약 15년 뒤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로 바꾸었다. 그런데 <일본서기> 등 일본 사서는 3대왕 대흠무가 일본 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高麗) 국왕’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했다. 이는 발해 왕조가 스스로 고구려를 이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를 비롯하여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견해다.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다.

그 근거가 있다. 발해가 망한 지 약 30년 뒤 쓰인 <무경총요(武經總要)>는 대조영 가문이 ‘부여별류(夫餘別類)’, 곧 부여(夫餘)에서 갈라진 무리(別類)라고 기록했다. 이는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을 ‘부여별종(夫餘別種)’이라고 한 말과 같은 뜻이다. 또 대조영 가문이 주몽의 후손임을 말한다. <구당서> 등도 발해 왕가를 ‘고려별종(高麗別種)’, 곧 ‘고려(高麗)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別種)’이라고 했다. 대조영 가문이 고구려 왕족의 가닥족속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다만 이들은 서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같은 뜻의 한자인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대조영 때 같은 뜻의 한자 대(大)씨로 바꾼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최치원(崔致遠)전이나 <당문습유(唐文拾遺)>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도 대조영의 가문을 가리키며 “고구려 잔얼(高句麗 殘孽)[대조영]이 무리를 모아(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적었다. ‘고구려 잔얼(高句麗 殘孽)’이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이라는 뜻이다. <고려사>도 그가 ‘고구려인(高句麗人)’, 곧 오늘날의 말로는 ‘고구려 왕족’이라고 했다. 이 기록들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국인(國人: *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마을이던 말골(靺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그러자 당 현종(玄宗)은 사라진 고구려가 다시 태어나는 악몽을 지켜보는 듯했다. 그는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725년 경 오늘날의 흑룡강골 하르빈(忽汗) 건너에 자리 잡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현종은 이를 위해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해 황실의 성까지 주겠다고 꾀어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흑수부(黑水府)로 삼아 직접통치를 도모했다.

발해의 당 등주(登州) 진공 전투



▎몽골 올란바토르 교외에 세워진 칭기즈칸 동상. 칭기즈칸이라는 왕호는 발해 즉, ‘진국(震國) 왕(王)’이라는 뜻이다.

 
 
러한 당의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당에 항의했으나 당 현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의 태도에 화가 난 무왕은 726년 우선 아우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지당파(知唐派)였던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이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 달라”고 거듭 청했다. 이에 대무예는 크게 노하여 즉시 대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사촌형 대-일하(壹夏), 곧 <사국사>에 등장하는 ‘일한’을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해버렸다. 이에 대해 <사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일칸 통치 시 그의 둘째아들[사실은 둘째 사촌아우]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대문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 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흑수]와 튀르키스탄(Turkistan)[오늘날 내몽골] 땅으로 떠났다. (…)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러 살지 않고 투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투르키스탄’은 당 태종 이세민이 돌궐(突厥) 카간(Kaghan)을 겸칭한 이래 오늘날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당시의 돌궐(突厥: 오늘날 몽골리아, 카자흐스탄 등)과 만주·내몽골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인 실위(室韋)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 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大) 도리행(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도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리행은 장안에서 숙위(宿衛)를 강요당하다 728년 4월 갑자기 급사했다. 도리행이 사망하자 당은 예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그로부터 4년여가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압록강 하구에서 수군을 출발시켜 산동(山東)반도의 등주(登州)를 치게 했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이 <사국사>에 등장하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막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 집결한 뒤 바다를 건너 등주에 상륙했다.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개복순은 <사국사>에 ‘타타르 수윤지칸’으로 등장하는데, 당나라로 망명한 개소문(蓋蘇文)의 아들 남생의 후손이다.

당의 반격작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개복순 군대의 반격에 궤멸했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 후 이들의 행방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 해 733년 봄 당 현종은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당 현종은 <사국사>에 ‘키르기즈칸’으로 등장한다. 지나의 사서도 당 왕조 이씨는 원래 키르기즈 출신이라고 한 바 있다.

당 현종은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에 따르면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사국사>가 “타타르[대대로]의 수윤지칸[개복순]과 동맹해 모골 종족에 전쟁을 걸어왔다”고 기록한 일칸의 둘째아들[사실은 둘째사촌동생] ‘파리둔의 아들 투르’[파리땅(勃利州, 부여 땅) 통치자 ‘일하’의 아들]가 바로 대문예다.

동시에 발해 남쪽에서는 <자치통감>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했다. 오늘날의 100만 대군에 필적하는 대병력 10만 명을 동원했다고 하니,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사서에 남아 있지 않다. 동방의 사서들은 “신라군이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고만 기록했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 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타타르 종족’은 곧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귀부해 발해 침공에 협조한 대대로 가문을 말한다.

궤멸당한 발해군



▎698년경 거란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당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를 틈타 말골 수령(군왕) 출신 걸걸중상과 두 아들 조영·야발은 영주를 빠져나와 동으로 말을 달려 동모산(東牟山)에 말골과 구려 백성을 규합해 ‘진국(震國)’을 세웠다. 대조영이 성을 쌓았다는 동모산.

 

<사국사>는 분명히 “모골 종족이 대패했다”고 진실을 기록했지만, 동방의 사서들은 그 결과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라 연합군과 전쟁이 끝난 후 발해 무왕은 수도를 동모산에서 오늘날 길림(吉林)성 화룡(和龍)현 서성(西城)진 북고성(北古城)촌이라는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로 옮겼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무왕은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년 세상을 떠나고,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인 흠무(欽茂)가 3대 왕으로 뒤를 이었다.

발해-당-신라 전쟁 결과에 관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 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같은 전쟁을 기록한 <사국사>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한은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만 살아남아 아르카나쿤 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했다.

▎발해 절터에서 출토된 토제 불상의 머리. 칭기즈칸의 직접 선조인 대야 발의 후손들은 발해 10대 선왕 대인수 부터 15대 마지막 왕인 대인선까지 왕위를 이었다.

 
 
청(淸) 말의 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渤海國記)>도 “당 현종이 신라가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을 신라에 내려주었다”고 적었다. 이는 당과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전선에서는 발해 군대가 패한 결과 방대한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사국사>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전쟁에 패한 키얀과 니쿠즈가 숨어든 ‘모든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고향’이라는 ‘에르게네쿤’은 어디인가? 몽골 학자 빌렉트(L. Bilegt) 등은 “그들이 가서 목숨을 구한 곳은 에르군쿤(Ergun Kun)인데, 이 지방은 (…) 오늘날(…) 에르구네물(Ergu’ne mo’ro’n)과 가까운 (…) 러시아의 아르곤 산맥”이라고 주장했다. 김호동 서울대 교수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역사모음>의 아르카나쿤은 아르군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 서경(西京) 압록군(鴨綠郡)’으로 나오는, 곧 말갈 구어로 ‘압록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발해가 상실한 땅은 바로 이 압록군(鴨綠郡) 이남지역이기 때문이다. 압록군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보면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투르크어화 하면서 아로간나쿤을 거쳐 아르카나쿤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정리해 보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모음> <사국사>의 전쟁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일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간), 그의 양자 니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의 정체는 모두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또 종족 이름인 ‘모골’은 말갈-발해어로 ‘몰골(馬忽)’, 곧 고구려어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 사람 키얀과 니쿠즈가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아르카나쿤도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그 가문의 후손이자 칭기즈칸의 10대 선조 ‘알란 고와’는 <원사>에 ‘아란 과화(阿蘭果火)’로 등장한다. 이 ‘아란’이라는 관향도 바로 압록강나군(아르가나쿤)의 한 지역인 함경북도 아란(阿蘭)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역사모음>과 <사국사>의 기록과 동방 사서의 기록을 통해 칭기즈칸의 선조가 누구인지, 또 오늘날 ‘몽골 왕가와 몽골족’의 기원을 추적해보았다. 이제 글머리에서 진실을 밝혀주는 세 마디의 말, 테무진이라는 이름과 칭기즈칸이라는 왕호, 그리고 몽골이라는 나라 이름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칭기즈칸이 칸이 되기 전 그의 이름은 ‘테무진’이다. 이 이름을 두고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터무르-진’ 또는 ‘데미르-친’, 곧 ‘철인(鐵人)’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원사> ‘태조기’에는 그 이름은 “무공을 뜻한다(志武功)”고 설명했다. 곧, 테무진은 ‘큰 무공의 신’ 곧 고구려 3대 ‘대무신(大武神)’ 왕(王)에게서 비롯된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칭기즈칸’이라는 말의 어원을 ‘왕중 왕’ 또는 ‘가장 위대한, 강력한 왕’이라고 보지만, 몽골어나 투르크어에는 이와 비슷한 낱말조차 없다. 한마디로 속설에 기반한 풀이다. <송보광운>이나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Millenium)>에 근거해 보면 이는 발해 고왕 대조영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왕(震國王)’또는 ‘진국공(震國公)’의 옛 소리인 ‘텡기즈칸(Тenggiz Khon=팅기즈칸=팅궤트칸)’의 구개음화인 ‘칭기즈칸’이다.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몽골 군인들이 칭기즈칸 기마부대의 전투를 그대로 재현했다. 필자는 <집사>와 <사국사>가 언급한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은 ‘발해의 당나라 등주(登州) 침공 전쟁’이라고 해석한다.

 
 
기즈칸 손자 원 세조 쿠빌라이칸 당시 원나라를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25회나 칭기즈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처음 단 한 번을 제외한 24번은 모두 ‘칭기칸’이라고 썼다. 칭기칸은 ‘진국왕’이라는 뜻이다. 마르코 폴로 당시 원 황가와 남인(南人)들의 발음이다. 곧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세계정복자’ 칭기즈칸은 자신의 이름 ‘대무신’과 왕호 ‘진국칸’을 통해 스스로 고구려 대무신왕과 발해국왕의 후예로 자신이 새로 세운 ‘진국의 왕(震國王)’임을 자처한 것이다.

다음, 오늘날 학자들은 송(宋)나라 서정(徐霆)이 쓴 <흑달사략(黑韃事略)>에 따라 ‘몽골’이라는 국명이 ‘멍거(은/銀)’라는 몽골어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러나 페르시아어 사서 <타리히 고지데(Tarikhi Gojide, 선별된 역사)>는 ‘몽골’이라는 종족 이름이자 나라 이름을 칭기즈칸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붙였다고 기록했다. 자신의 선조가 바로 고구려-말갈어로 ‘몰골’, 곧 ‘말/몰(馬)고을’, 즉 발해-말갈(靺鞨)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테무진(대무신)·칭기칸(진국왕)·몽골(말골)이라는 단 세 마디 말로만 보아도 ‘세계정복자’인 칭기즈칸은 바로 고구려-발해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가문은 광대한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지금껏 그 누구도 지어본 적이 없는 세계제국을 세웠다. 지나 대륙은 말갈(몽골) 왕가가 지나 땅에 세운 나라인 원(元)의 통치령이었을 뿐이었다.

최근 중화인민공화국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be part of China)”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한반도가 지나의 일부이므로 남북한 문제에서 손을 떼라’는 투의 발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은 정반대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것처럼 청·명·원의 역사만 돌아보더라도 확연히 드러난다.

약 1300년 전 발해-나당전쟁 때나 오늘날 우리의 남·북한 시대나, 우리 주위의 판도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는 또다시 발해-당-신라 전쟁과 같은 꼴을 겪어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전원철 -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체첸전쟁 때 전장에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했다. 우리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세계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가 한민족에 있음을 밝힌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몽골제국의 기원> 1, 2권을 출간했고,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다수의 역사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異論의 역사(6)] ‘칭기즈칸’은 ‘진국왕(震國王)’의 옛소리?

“11세기 <송본광운>에 따른 한자음은 ‘팅궤트칸’, 자음접변 거쳐 ‘텡기즈칸’으로… 팍스 몽골리카(Pax Monglica) 창출한 몽골제국의 기원은 발해 왕가임을 밝히는 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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