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5. 15:45ㆍ역사의 연구/한국역사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리승만 대통령과 건국 이야기
그리고 제2건국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우리의 기억
"독립운동가 이승만 연설 육성 (1942년 6월 13일)"
대한민국이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3년전인 1942년 6월 13일, 당시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Voice of America 라디오 방송에서 하신 연설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연설을 한 시점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약 6개월 후 이며, 핵물리학자 엔리꼬 페르미가 시카고에서 최초의 원자폭탄실험을 하기 6개월 전 입니다.
분단은 외세 탓? 우리 책임은 없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국 이야기]
펜앤드마이크TV
https://www.youtube.com/live/KURQiigjAvU?feature=share
Sep 9, 2021
이승만의 초라한 귀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국 이야기]
https://www.youtube.com/live/A-VGQa6C30g?feature=share
Aug 12, 2021
성대한 귀환 vs 초라한 귀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국 이야기]
https://www.youtube.com/live/x730JEsbexU?feature=share
Aug 19, 2021
리승만은 건국 돌진, 김구는 건국 방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국 이야기]
Sep 23, 2021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 문무일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추석특집]
Sep 21, 2021
[대선특집1] 1대 대통령-1948년 이승만 당선(1)
[대선특집2] 1대 대통령-1948년 이승만 당선(2)
KBS 한국사전 – 이승만 제2부 / KBS 2008.9.6. 방송
Mar 26, 2021
미국의 선택인가, 이승만의 선택인가? 혼란스러운 해방정국.
71세 나이로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 그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로 남았나!
- 맥아더 기념관에 남아있는 이승만의 흔적 미국 버지니아에 위치한 맥아더 기념관. 세계 2차 대전 전후 시기, 맥아더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승만의 편지와 전보,맥아더가 이승만을 한국의 임시 대통령이라고 표기한 메모까지 소장하고 있다. 이승만은 어떻게 맥아더를 만날 수 있었나? 맥아더와 이승만이 만나 함께 그린 한국의 미래는 무엇일까?
- 상해임시정부에 불어 닥친 대통령 논란 1919년 임시정부 국무총리직과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에 임명된 이승만은 국무총리나 집정관 총재가 미국식으로 해석하면 'president'라고 주장하고 이 호칭을 사용한다. 이에 임정 지도자들은 반발해 경고 전보를 보낸다.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그는 왜 탄핵되었나? 1919년 9월6일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그러나 1923년 대통령직에서 탄핵된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상해를 떠난다면 대통령직에서 탄핵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이승만은 상해를 떠난다. 임시정부 대통령의 의무를 저버리면서까지 미국으로 향하는 이승만. 그가 미국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 같은 꿈 다른 길,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노선 차이 1908년 샌프란시스코. 한반도 일본통치에 동조한 미국인 스티븐슨이 장인환에 의해 숨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인들은 이승만에게 장인환의 법정통역을 부탁하지만 이승만은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이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열 투쟁 때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던 이승만. 그는 이런 행위는 ‘무법한 개인행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 혼란한 해방정국, 고국으로 향하는 이승만의 행보 미국에서 교육과 외교활동을 펼쳤던 이승만은 그의 나이 71세에 조국 해방을 맞이한다. 미군정의 대대적인 이승만 환영식이 있던 날, 미군 중장 하지는 이승만이 연설하는 내내 부동자세로 서서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임정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던 때 미군의 환대를 받으며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 그는 어떻게 미군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 이후 이승만의 행보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한국사전 55회– 이승만 제2부 (2008.9.6.방송)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순간 포착한 사진 공개
Apr 22, 2015
이승만 대통령 암살시도 순간 포착한 사진 공개 [앵커] 지난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시도 사건이 있었는데요.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 미국에서 공개됐습니다. 워싱턴에서 김범현 특파원입니다.
[기자] 1952년 6월25일, 부산에서 열린 6·25 2주기 행사를 담은 흑백 사진. 연단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고를 보며 연설에 열중하고 있고, 그 오른편에는 소총을 어깨에 맨 헌병이 부동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단 뒤쪽, 이승만 대통령과 불과 몇 m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밝은색 양복 차림의 한 남성이 왼손으로 이 대통령을 가르키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이 남성은 일제 감정기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유시태로, 이승만 체제에 불만을 품고 권총으로 이 대통령을 겨냥하는 장면이 포착된 겁니다. 사진 밑에는 "예순두살의 유시태가 이 대통령을 저격하려 하고 있다.
암살 시도는 김시현 의원이 이끄는 12명의 반정부 조직이 선동했다"는 영어 설명이 적혀있습니다. 이 사진은 당시 김창룡 육군 특무대장이 만든 사진첩에 수록된 것으로 이 사진첩은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에 넘겨진데 이어 2년전부터 김태진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대표가 소장해 왔습니다.
[김태진 / 국제지도수집가협회 한국대표] "2013년 여름경에 아는 영국 (고서적) 딜러로부터 연락이 와서 한국 정보국 관련해서 자료가 있다고 해서…자료를 검토한 뒤 구입했습니다." 당시 암살 시도는 권총 불발로 무위에 그쳤습니다. 이 일로 유시태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4·19 혁명 이후 석방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암살 시도 장면이 담긴 사진을 포함한 사진첩은 한국에서 경매에 부쳐질 예정입니다.
워싱턴에서 연합뉴스TV 김범현입니다. 연합뉴스TV 제보:02-398-4409, yjebo@yna.co.kr (끝)
“나는 지금 워싱턴에서..” 1942년 이승만 전 대통령 육성 최초 공개,
전세계에서 수집한 현대사 아카이브 프로젝트ㅣ
KBS 다큐인사이트 230210 방송
1921년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국제회의가 열리는 워싱턴으로 향한다.
하지만 KBS가 발굴한 영상 속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워싱턴이 아닌 샌프란시스코의 한 건물 앞에 서 있다. 왜 워싱턴이 아닌 샌프란시스코에서 영상에 담겼을까? 영상의 수집 과정과 함께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본다. 또한 KBS는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귀중한 오디오 자료를 찾아냈다.
바로 1940년대 ‘미국의 소리’ 전파를 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육성이다. 독립을 갈망한 국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던 희귀 자료를 최초 공개한다. 1930년대 일본에서는 식민지 개발의 성과를 과시, 선전하려는 의도로 백무선, 남만주, 목포 등의 지역을 배경으로 영상을 만들었다.
당시 고향을 잃고 한반도 북쪽의 국경 마을과 만주로 떠난 이주민의 모습을 최초로 공개하며 1930년대의 서울, 금강산 등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항공샷을 소개한다. 해방 후에서야 우리는 우리가 찍은 공식적인 영상 기록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전진대한보’라는 기록 영상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총 54편 중 확보된 영상은 20여 편. 제작진은 해외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 일부로 추정되는 영상을 발굴했다. 나머지 부분을 찾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당위성을 살펴본다. 한국전쟁기 전후에도 일상은 계속됐다. 어린이날 행사, 6.25 전쟁기 춘천에서 열린 결혼식 장면 등의 일상을 담은 영상과 함께 1957년 한국의 농촌을 지원하기 위해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가 취재한 영상을 공개한다.
또한 미 공보원에서는 이른바 ‘문화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를 제작했다. ‘교육제도’와 같은 문화영화의 제작 배경과 숨은 의의를 알아본다.
영상50_1954년 7월 28일 이승만 미국의회 연설
Jan 12, 2018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7월 28일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하고 있다.
미국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연설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의 눈에 그는 국부로 추앙받아 마땅했다.
KBS 역사저널 그날]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권고한 시민대표를 만나다ㅣ
KBS 200414 방송
[연설] 이승만 전 대통령 하야 연설 (한글 자막)
1960년 4.19 혁명 기념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 하야 연설 영상을 작업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열사의 사망으로 대한민국 국민 10만명이 나서 시위를 일으켰다. 이 시위로 인해 158명이 사망하고 1500명이 부상당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하와이로 망명한다.
그리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고국을 밟지 못한채 1965년, 이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4.19와 5.16 진실을 말한다 1부_이승만, 누가 하야시켰나? 하이라이트
Apr 22, 2021
"대한뉴스 제 529호-이승만 박사 서거"
제작일: 1965-07-17 이승만 박사 서거.
-하와이에서 향년 90세로 별세.
-이승만 박사 유해 환국(오후 3시).
-이승만 대통령 유해실은 미 공군 수송기 김포공항 도착(한국을 떠난지 5년 1개월 24일만에).
-박정희 대통령,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조상호, 홍종철, 박종규, 허정, 최덕신, 김정렬, 정일권 국무총리 등의 애도속에 유해를 맞이함.
-21발의 조포 발사, 애도속에 3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
-봉영식에서 박치순 목사의 기도(육성). -태극기로 덮인 유해.
-이후락, 정일권, 이효상, 밴 플리트 장군, 브라운 미 대사 모습.
-세종로 거쳐 이화장으로 가는 유해, 거리의 수많은 시민들 애도.
-이화장 빈소에 안치, 수많은 정부인사와 시민들 문상.
-故 이승만 박사의 생전 육성 및 활동.
-하야하고 이화장으로 돌아온 모습 등.
"대한뉴스 제 1262-3호-박정희 대통령 서거"
제작일: 1979-10-30 박정희 대통령 서거 전, 마지막 공식 일정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충남 당진 신평 운정리) -다목적 방조제 국내 최장 길이 10리, 8400만톤 저수량인 제일의 인공 담수호
-삽천지구 대단위 농업조합 개발사업 중 가장 큰 규모, 중추적 역할 담당할 담수호 완성 -당진, 아산, 예산, 홍성 등의 평야는 향후 산수해와 위험 모르는 전천후 농토로 전환
-주변농지 2만5천정보에 대한 관계용수의 원천으로서 식량증산과 농촌소득에 이바지, 일 4만톤의 공업용수와 생활용수 공급
-국토 종합개발 계획의 일환인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과 4대강 유역 다목적 개발사업 이행
-4대강 유역 다목적 개발사업으로 수해 극복, 매 해 농작물 풍작 거두어 수급자급 효과
-삽교천지구 종합개발사업 완공후 농촌의 한해, 수해 없는 근대적 과학영농, 토지 이용률 확대로 식량증산 및 농가소득 증대
-날로 탈바꿈하고 있는 농촌, 편익한 문화생활의 보금자리로 변모 기대 -박정희 대통령, 삽교천 제방공사 유공자 표창 -삽교천 준공 테이프 컷팅, 기념탑 제막식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서거(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50분, 향년 62세) -비탄에 빠진 국민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특별담화 `국민들, 애국심과 단합으로 국가 비상시국 대처해 나갈것` 호소
-노재현 국방부장관, 합참 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의 공동결의문 발표
-`국군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중심으로 일치 단결해서 북괴의 도발을 즉각 분쇄토록 만반의 태세를 갖출 것`
-故박정희 대통령 국장, 11월 3일에 9일장으로 결정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 조의를 표하는 전문 전송
-청와대 빈소에서 대통령 영애 박근혜, 박정희 대통령 영정에 분향
-최규하 총리 분향, 김영삼 의원 분향, 공화당, 신민당 의원들 조문
-주한 외교사절 분향, 불교신자와 스님들 애도 -중앙청 광장에 마련된 분향소
-수많은 조객들 빈소에서 분향과 오열, 통곡
대한뉴스 제 1264-5호-故 박정희 대통령 국장
이승만 대통령 미국 의회 연설 (한글 번역)
Jan 1, 2019
이승만 대통령은 1954 년 7 월 28일, 미국 의회 합동 연설에서 대한민국을 군사적 재정적 지원으로 전쟁의 파괴로부터 구하여 준 미국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연설의 전반부는 한국전쟁에서 도움을 준 미국인들께 감사하는 내용이며, 후반부는 아시아에서 자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 본토를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연설 전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친구. 대통령님과 존경하는 상하원 의원님들,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미국의 저명한 시민들의 위엄있는 모임에서 연설 할 수있는 기회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 역사적인 의사당에 모여 주셔서 저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저는 제가 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 즉 저의 머리와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직하게 말함으로써으로 보답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 민주주의와 자유 정부의 위대한 전통의 일부이며, 또 제가 반세기가 넘도록 믿어 온 전통입니다.
여러분들 처럼, 저도 워싱턴, 제퍼슨, 링컨에 의하여 영감을 받았습니다. 우선 저는 여러분과 미국 국민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한 일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의지할 곳이 없는 나라를 멸망으로부터 구하였고, 그 순간 진실된 집단 안보의 횃불은 전례없이 밝게 불타 올랐습니다. 재정적으로, 군사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전선을 방어하는데 당신들이 우리에게 준 도움, 또 피난민과 다른 고통받는 한국인을 구호하는데 준 도움은 갚을 수 없는 감사의 빚 입니다.
우리는 트루먼 전 대통령과 그 후임으로 선출된 현재는 행정부 수장인 아이젠 하워 장군에게도 많은 빚이 있습니다. 적의 위험에 대한 그들의 도움과 지식 때문입니다. 차기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 하워)는40 년 동안 잔인한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한국에 왔습니다. 우리의 땅에온 외국 친구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역사상 처음으로, 오직 당신 군대의 힘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되찾았고, 훌륭한 당신은 대통령으로 선택되어 찾아 왔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여야 한국인을 도울 수 있는지 보러왔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미국의 전쟁 어머니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미국의 육군, 해군, 공군과 해병대의 아들, 남편, 형제들을 한국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곡과 산에서 미국과 한국 군인들의 영혼이 함께 하나님께로 올라 갔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그들의 기억을 소중히 하오니, 그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의회의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의 고귀한 동포인 이분들은 훌륭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 딘 장군, 워커 장군, 아몬드, 리지 웨이, 클락, 헐 장군, 테일러 장군… 그리고 1951년 반 프맅 장군이 8 군을 지휘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한국 젊은이들의 군인 정신과 그들의 가정과 나라를 위해 싸울 소총에 대한 열렬한 열망을 발견 한 것은 바로 그 분이였습니다. 그는 큰 소란없이, 그들을 제주도, 광주, 논산 등 여러 곳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거의 밤낮으로 훈련시키기위해, 한국군 자문단을 파견했습니다. 몇 주 안에 그들은 최전선에 파견되어 놀라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오늘날 이 군대는 전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반 공산주의 군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수].
이 부대는 전체 전선의 3 분의 2 이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반 프맅 장군은, 미군들이 단단한 바위라고 부르는 한국 육군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미국이, 공군 및 해군력과 함께 적절한 비율로, 이 군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한국의 액션 극장에서 미국 군인은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박수 갈채.]
그러나 많은 미국인들이 선한 일에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들이 죽음을 다해 이기려하였던 전투는 아직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 폭정 세력은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선에서, 총은 잠시 침묵하고 있으며, 적이 힘을 쌓기 위해 이용하는 현명하지 않은 휴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잠잠해져 있습니다. 예상대로 제네바 회의는 아무런 결과없이 종료되었으므로 휴전이 끝낳음을 선언하는 것은 상당히 적절합니다. 우리 나라의 북쪽 절반은 소련의 노예인 백만 명의 중국인에 의해 점령되어 지배받고 있습니다. 군대로 가득 찬 공산주의 참호는 우리 수도에서 40 마일 이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휴전 조건을 위반하며 새로 건설한 공산주의 비행장은 제트 폭격기로 비치되어있으며, 우리의 국회에서 10 분 이내에 있습니다.
그러나 크렘린 공모자들의 주요 목표가 미국의 파괴 이기 때문에, 워싱턴이 서울보다 죽음에서 결코 멀리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련의 수소 폭탄은 우리의 흩어져있는 마을에 떨어지기 전에 미국의 대도시에 먼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세계 정복을 위한 소비에트 전략의 본질은, 소련이 기습 공격으로 미국의 비행장과 생산 센터를 분쇄하기에 충분한 수소 폭탄과 대륙간 폭격기를 보유 할 때까지, 평화를 말함으로써 죽음의 잠으로 빠져들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국제 도덕 표준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길한 칭찬입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정부는, 보복할 수 있는 미국의 힘을 제거 할 수 있다고 확신 할만큼 소멸의 무기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있는 정치인으로서, 우리는 소비에트 정부가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을 때 그 무기를 감히 사용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소련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6 년의 경험은 공산주의자들은 조약을 깨는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결코 조약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도덕적 망설임이나, 인도 주의적 원칙이나 또는 종교적 제재에 의해 구속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계 정복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수단도 동원합니다. 심지어 가장 악질적인, 심지어 고문과 대량 살인까지 헌신적으로 동원합니다. 소련은 자신의 의지로 중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련은 중지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국과 동맹국들이 지금 소비에트 공장에 폭탄을 투하해야함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도축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송아지처럼 서있어야 함을 의미 합니까?
세계의 자유시민들이 생존하는 방법은- 우리 한국인이 보는 유일한 방법은 - 평화가 없을 때 막연한 희망으로 평화를 바라는 방법이 아닙니다. 소비에트 정부가 세상을 정복하려는 엄청난 노력을 포기하도록 설득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악의 세력에 울며 매달리지 않고; 그러나 세계의 힘의 균형을 공산주의자들에 불리하게 강하게 움직이면, 그들은 소멸의 무기를 소유하고 있더라도 감히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수 갈채]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몇 년 안에 소비에트 연방은 미국을 정복 할 수단을 소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행동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극동에서 행동 할 수 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한국 전선은 우리가 승리하기 원하는, 아시아를 위한 전쟁, 세계를 위한 전쟁, 지구의 자유를 위한 전쟁의 조그만 일부분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20 개의 준비된 사단과, 또 20 개를 더 구성 할 수 있는 인력을 제안했습니다. 150만의 젊은이들이 인간의 자유와, 명예와,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합니다. [박수 갈채].
우리 병사들의 용맹은 전투에서 입증되었으며, 반 플맅 장군이 '한국 군인은 세계의 어느 군인과 동등하다'고 말한 이후, 어떤 미국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박수 갈채]
대만 정부도 63만명의 군대와 추가 예비군을 제공했습니다. 중국 본토에있는 공산주의 정권은 진흙발을 가진 괴물입니다. 대중이 그것을 증오합니다. 붉은자(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반대하는 1500만명을 살해했지만, 수천 명의 자유 중국 게릴라가 여전히 중국 내부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붉은 중국의 군대는 250만명에 이르지만, 한국에서 붙잡힌 중국공산군 포로 14,369 명이 대만으로 가고 220 명만이 붉은 중국으로 돌아 갔을 때 증명되었듯이, 그들의 충성도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박수 갈채]
또한, 붉은 중국의 경제는 매우 취약합니다. 수입의 60 %가 바다로 들어오며, 해상 해안 교통은 북에서 남으로의 주요 통신 수단입니다. 미국 해군이 중국 해안을 봉쇄하면 통신에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붉은 중국 정권에 대한 반격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 공군과 해군은 필요하겠지만, 미국의 육군은 필요하지 않음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중국 본토를 자유 세계쪽으로 전환시키면, 자동으로 한국과 인도 차이나에서의 전쟁은 승리로 끝나고, 권력의 균형이 강하게 소련에 불리하게 기울어져, 소련은 감히 미국과 전쟁하는 위험을 저지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을 되찾지 않으면 자유 세계의 궁극적인 승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정부는 자체 지상군과 공군을 중국의 전쟁에 내보내지 않겠습니까? 혹시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 세계를 위하여 좋은 일입니다. 소련 수소 폭탄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전에 미국 공군에 의하여 소련 생산 센터의 파괴를 정당화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이 어려운 교리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부드러우면 노예가되는, 딱딱한 세상, 끔찍한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의회의 신사 숙녀 여러분, 인류 문명의 운명 자체가 우리의 최고 결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다시 반 자유 반 노예로 살수없는 연합을 방어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던 위대한 해방자 아브라함 링컨이 받들었던 이상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어 일어납시다. 나의 친구들이여, 반은 공산주의 반은 민주주의 세계에서는 평화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자유가 안전한 아시아를 만들기 위해, 지금 여러분의 중대한 결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유럽과, 아프리카와, 미국에서 세계 공산주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박수 갈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