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4. 01:33ㆍ역사의 연구/한국역사
고구려의부활 / 1부 고구려 수도 평양, 2부 고구려벽화 세상에 나오다
* 고구려의 부활 1, 2부 영상은 마지막으로 정리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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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6, 2019
- 4차례의 고구려 원정! 세계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병력 동원!! 수나라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고구려원정을 감행했는가? 수양제는 고구려 출정을 위해 5년간을 철저하게 준비한다. 군수품을 운송하기 위해 양자강과 북경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확장공사를 마무리하고 612년 100만 대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여기에 보급부대가 200만 명, 군량 실은 배만 천 여리에 달했다고 하니 세계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그들이 고구려에 패배하고 돌아간다. 불가사의한 고구려의 승리!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수나라는 이렇듯 엄청난 물량을 동원해 고구려를 수차례나 제압하려 했던 것일까?
- 고구려 승리의 전략! 수나라 양곡수송로를 차단하라! 고구려는 어떻게 100만 대군 수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킬 수 있었을까? 당시 수나라군의 가장 큰 문제는 북경지역인 탁군에서 요동벌판까지 무려 2,000리에 이르는 군량미 수송이었다. ‘자치통감’과 ‘신당서’에는 고구려군대가 북경의 북쪽, 거란지역인 내몽고 자치주 적봉지역에 주둔했음을 드러내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적봉지역에 주둔한 고구려군이 북경을 향해 내려와 양곡수송로를 차단한다면 요동평야에 있던 수나라대군의 아사는 불을 보듯 뻔한일! 불가사의한 고구려 승리의 비책은 바로 거란과의 연합작전에 의한 수나라 양곡수송로차단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어떻게 수천 리를 돌아 수나라의 양곡수송로를 공격했던 것일까?
HD역사스페셜 21회 –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1편, 수나라 백만 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2005.9.30.방송)
KBS HD역사스페셜 – 고구려 고분벽화, 세계를 그리다 /
KBS 2005.7.15. 방송
May 12, 2021-
최고 인기공연 서커스, 그 발원지를 추적하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인들의 다양한 놀이문화가 묘사돼 있다. 그중에서도 곡예, 즉 서커스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공던지기, 곤봉던지기, 바퀴던지기를 하는 재주꾼의 묘기는 물론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커스는 멀리 페르시아에서 기원해 중국을 거쳐 전해졌는데 이를 고구려인들은 더욱 발전시켜 가장 인기 있는 놀이로 만든 것이다. 이런 곡예를 스튜디오에서 직접 재현, 벽화에 묘사된 곡예와 비교해 봤다.
- 세계의 악기로 풍악을 울리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악기와 연주회 장면도 묘사돼 있다. 분석 결과 대부분의 악기를 중앙아시아로부터 멀리는 인도에서까지 수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벽화를 통해 고구려악기의 다양한 종류를 확인하고 고구려시대 악기 ‘요고’를 최초 복원, 실제 연주해 봤다. 또한 당시 고구려의 음악 수준은 당나라 장안에서 열린 세계음악회에 동북아시아 대표로 참가할 정도였다. 음악의 교류에서 엿보이는 고구려인들의 개방성에 주목했다.
- 고구려벽화 속에 왜 인도춤을 추는 사람이 있을까? 안악 3호분 벽화에는 독무춤을 추고 있는 남자가 있다. 두 다리를 꼬는, 아주 독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춤사위가 아니었다. 발을 꼰 자세는 인도의 전통춤 ‘카탁’의 기본자세이다. 실제 인도춤 전문가의 공연을 보며, 고구려 전통춤과 인도춤의 차이를 확인한다. 또한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찬탄했다는 고구려의 호선무도 살펴봤다.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 특징인 이 춤은 고구려가 내세우는 대표종목이었다. 이 춤 역시 멀리 우즈베기스탄에서 기원했다. 춤의 교류를 살펴본다.
- 고구려복식의 족보를 찾아라 무용총, 각저총 등에 묘사된 의상을 토대로 고구려 복식 형태를 분석했다. 고구려인들은 옷을 만들 때 수렵에 유리하도록 활동성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특징은 북방기마민족의 옷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남방계인 중국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중앙아시아 벽화에 그려진 서역의 의상과 고구려 벽화에 묘사된 옷을 비교, 복식의 전파 경로를 짚어본다. 또한 고구려 복식이 서역과 공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점무늬 염색법을 활용, 옛 고구려의 옷도 복원해 봤다.
- 현장추적,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떠난 수 만리 여정 고구려가 서역과 문물을 교류한 통로는 중국을 거치는 실크로드(비단길), 그리고 몽골을 지나는 초원의 길이 있었다. 그런데 수·당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압박해 오자 고구려는 그에 맞설 동맹군을 찾아야 했다. 고구려 사신은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기나긴 여정에 오른 것이다. 몽골 초원 한가운데 퀼테긴 비, 아프랍시아 벽화에 남은 고구려 사신은 당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1,500년 전 고구려 사신이 지난 행로를 따라 현장을 추적했다.
HD역사스페셜 11회 – 고구려 고분벽화, 세계를 그리다 (2005.7.15.방송)
Nov 4, 2022
■ 고구려인들이 남기고 간 수수께끼, 그 해답은 무엇인가? 전해지는 문헌의 부족으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늘 갈증을 느끼던 학계에 1949년 안악3호분의 발굴이 시작되면서 단비가 내렸다. 거대한 벽에 빼곡이 들어찬 벽화들...주인공 부부의 모습을 비롯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고구려인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구려군 행렬도 등 그들은 자신들의 화려하고 풍족했던 삶의 단면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풀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수수께끼 하나도 남겨놓고 있었다.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미궁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고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연구자들의 주장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를 알아본다.
■ 중국인 망명객 ‘동수의 묘’ 인가? 발굴 당시 보통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는 흔하지 않은 묵서명이 발견됐다. 묵서명에 나타난 동수. 안악 3호분이 동수의 묘임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국에서는 묘지문을 작성할 때 성명, 죽은 날짜, 그 사람 관직을 적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로 이제까지 어느 나라에서도 무덤의 주인공 이외에 묘지를 무덤에 적는 예는 없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고구려 왕릉일까? ‘동수묘설’과 대립되는 ‘고구려 왕릉설’은 바로 주인공을 밝혀주는 것이라는 묵서명에서 시작하고 있다. 짙은 눈썹과 콧수염 그리고 머리에 백라관을 쓰고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주인공. 묵서명은 이 주인공의 근처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방의 바깥쪽 장하독이라는 인물의 머리 위에 써있다. 또한 묵서명의 내용 중에서 "69세 훙관", "훙"만으로 69세에 죽었다는 문장이 끝나는데 "관"까지 붙어 있어 "69세에 죽은 관리 장하독"으로 해석되어 이 묵서명은 수문장격인 장하독을 가르키는 것이고 무덤의 주인은 바로 고구려왕을 지낸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 고구려 왕이라면? 미천왕이냐, 고국원왕이냐 묵서명의 영화13년은 바로 357년. 이 해를 전후하여 죽은 고구려의 왕은 미천왕(300∼331)과 고국원왕(331∼371) 두 사람이다. 고국원왕 12년인 342년. 전연과 맞서 싸운 고국원왕은 전략의 실패로 어머니와 왕비가 포로 5만과 함께 전연에 잡혀가고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까지 탈취당한다. 고구려사 최대의 치욕을 겪은 고국원왕은 부왕의 시신을 찾은 해,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안악 3호분을 황해도에 조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국원왕이 전사한 곳이 평양이라면 현재 안악3호분이 있는 곳은 적진쪽의 땅이 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00년 11월 일본에서 열렸던 남북한 역사학자들의 심포지움에서 북한은 황해도 신원군 일대에서 고구려의 제2의 수도였던 남평양 유적지를 발견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새롭게 조명될 전망이다.
■ 안악 3호분의 주인공 논쟁,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누구인가가 왜 중요한가? 그것은 바로 묵서명에 써 있는 "영화 13년 즉 357년"이라는 때문이다. 4세기경 황해도 일대인 낙랑, 대방지역을 고구려가 직접적으로 지배를 했는지 아니면 멸망한 낙랑, 대방의 잔존세력들이 그대로 남아 자치적인 통치세력을 형성했는지에 대한 여부가 불투명한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속하는 무덤인 안악 3호분의 주인이 규명된다면 이 시기의 역사를 해석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불교의 도입연원과 벽화무덤의 기원문제 등 4세기경 한국사 해석의 열쇠는 바로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쥐고 있다.
역사스페셜 102회 – 고대사 수수께끼 안악3호분, 그 주인공은 누구인가? (2001.2.10.방송)
KBS 역사스페셜 – 북한문화유산시리즈 1편, 고구려 평양성/
KBS 20011006 방송
Jul 13, 2022
◼︎ 2001년 여름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20여 일 동안 북한을 방문해 북한에 남아있는 중요한 우리 역사유적들을 촬영했다. 특히 평양은 1,500년 전 고구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이 남긴 여러 가지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북한도 국보유적 제1호로 지정할 만큼 중요한 문화유산이 바로 고구려 평양성이다.평양성은 둘레 16km, 총길이 23km로 6합쌓기로 성돌을 쌓고 내성과 외성을 잘 정비하는 등 적의 침입을 막고 수도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게 체계적으로 축조된 건축물이었다.
역사스페셜 130회 – 북한문화유산시리즈 1편, 고구려 평양성 (2001.10.6.방송)
KBS 역사스페셜 – 기토라고분, 고구려 하늘을 품다 / KBS 20100320 방송
일본 나라현 아스카.
그곳에서 발견된 두 개의 작은 고분, 기토라와 다카마쓰총. 이곳에서 전세계가 주목하는 고구려풍의 벽화와 천문도가 발견된다. 도대체 누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이며, 이곳엔 어떤 이가 잠들어 있는 것일까? 아스카의 고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추적해본다.
신역사스페셜 30회 – 기토라고분, 고구려 하늘을 품다 (2010.3.20.방송)
KBS 역사스페셜–무사시노의 개척자, 약광과 1799인의 고구려인 /
KBS 2010.6.12 방송
![](https://blog.kakaocdn.net/dn/bjDfRd/btrW0P8mnl7/5etKyD4EoTo72jM9Fh1wKK/img.jpg)
-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 ‘약광’ 낯선 이름이다. 약광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의 아들이다. 그는 666년 일본에 건너가 668년 고구려 멸망 소식을 듣고 일본 사이타마현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고구려를 건립하는데.. 1,300년을 이어온 고구려의 숨결, 그동안의 약광(若光)의 흔적을 따라 제작진은 직접 사이타마현으로 향한다. - 일본 속 ‘고구려’의 탄생 666년 일본에 건너간 약광은 716년 일본 무사시국 주변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던 1,799명의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고려(고구려)군’을 건립했다. 그들은 세공, 직물, 철제 등 기술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철제 농기구를 도입해 농작물 수확을 극대화시켰다. 고구려인들은 철제 도입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종이제조기술까지 전파했다.
- 고려(고구려)씨의 역사와 관동지역 무사계급 탄생 관동지방으로 건너간 고구려인들을 중심으로 무사집단이 형성됐다. 이것이 일본 무사집단의 시초이다. 무사집단의 형성이유는 고구려인의 철제기술과 말이었다. 장군산고분에서는 동완, 장식대도, 철제마주, 철제무기 등 많은 뛰어난 유물이 출토됐다. 이 유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들은 철갑기마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동지역에 터를 잡은 고구려인들은 말을 길러냈고 이곳은 준마의 명산지가 됐다. 훗날 발견되는 말등자, 철제마주, 고구려벽화에 등장하는 말의 깃대 등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 1,300년을 이어온 고구려의 후예 고려악은 고구려음악으로 550년에 일본으로 전해졌다. 고려악은 중국의 당음악과 함께 일본 아악의 축이다. 30년 동안 일본 궁내청에서 활동하던 연주자 ‘시바 스케야스’ 씨는 최근에 자신이 고구려 제22대 왕인 안장왕의 후손임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의 직계후손 ‘고려 게이코’ 씨는 NPO(민간 비영리 단체)를 조직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고구려를 품고 살아온 그는 고구려 전설에 대한 콘서트를 전 세계적으로 열고 있다. ‘고려(고구려) 게이코’ 씨는 고구려가 자신의 운명이자 인생 자체라고 말한다. 고려(고구려)사진공방의 대표 ‘아타라시 다스야’. 그도 고구려의 후손이다. 조상 때부터 1,300년을 고려(고구려)에 거주한 후손인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공방의 이름도 ‘고려사진공방’ 이라고 짓고 고려(고구려)를 지키고 있다. 그에게 고구려는 소중한 자신의 뿌리이자 자긍심이다.
신역사스페셜 37회– 무사시노의 개척자, 약광과 1799인의 고구려인 (2010.6.12.방송)
남북공동제작 고구려의부활 / 1부 고구려 수도 평양 [역사실험]
KBS 2004.07.10 방송
Nov 23, 2021
남북공동제작 고구려의 부활 / 2부 고구려벽화 세상에 나오다 [역사실험]
KBS 2004.07.11 방송
Nov 24,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