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 사진
지난 1월 15일 KBS는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을 방영했다. 그의 일대기(一代記)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격론(激論)을 불러일으켰다. KBS 부장급 이상 간부들의 노조인 ‘공영노동조합’은 다음 날 성명을 통해 “이 정율성의, 실체(實體)가 불분명한 항일행적과 인간적인 면(面)만을 장황하게 나열해 미화(美化)했다”며 “(제작진은) KBS를 속히 떠나 재야(在野) 운동가로 나서라”고 했다. 보수단체 ‘국민행동본부’도 일간지에 “공산주의자 정율성을 미화한 방송 책임자를 파면하라”는 광고를 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프로그램 제작진 중 한 명인 박건 PD는 《미디어오늘》에 〈항일(抗日)운동가 정율성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란 글을 기고하고 “험난한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선 인물에게 이념공세를 앵무새처럼 떠벌리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中國에선 위대한 음악가이자 抗日운동가”
말년의 정율성. 그의 고향은 광주지만, 활동영역은 중국과 북한이다.
정율성(鄭律成)은 현(現) 광주(光州)광역시 태생의 중국(中國) 작곡가로 중국 인민해방군 공식 군가(軍歌)인 <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延安頌)> 등 360여 곡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중국 국가(國歌) <의용군 행진곡>의 녜얼(?耳), <황허(黃河)대합창>을 작곡한 선싱하이(詵星海)와 함께 중국 3대 현대 음악가로 꼽힌다. 2009년 9월에는 중국공산당을 창당한 리다자이(李大釗), 작가 루쉰(魯迅), 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킨 장쉐량(張學良)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중국 국민이 선정한 ‘신(新)중국 창건영웅 100인’에 선정됐다. 에서 박선정(朴善正·54)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율성이) 중국에서는 위대한 음악가이자 항일민족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고향인 우리나라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죠. 그 이유는 지난 세월 이념과 냉전(冷戰)의 장벽 속에 갇혀서 정율성 선생의 실체(實體)가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정율성 다큐멘터리’는 지난해 8·15 특집으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여당 추천 KBS 이사들이 정율성의 공산주의 활동전력을 이유로 방영을 제지한 프로다. 이에 제작진 14명은 〈2011년 8월, KBS를 떠도는 매카시의 유령〉이란 제하의 성명을 통해 “정율성은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독립투사이자 음악가”라며 “공영방송의 이사들과 경영진의 역사의식이 용도폐기된 이념의 굴레에 갇혀 있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항의했었다.
6·25전쟁에 불법(不法) 개입한 중공군을 대표하는 군가가 정율성의 <팔로군 행진곡>인 건 맞다. 그러나 이는 중·일(中日)전쟁 기간에 만들어진 노래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은 작자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여당 추천 이사들이 이 점만 가지고 방송을 반대했을까. 도대체 ‘정율성’ 이름 석 자만 나오면 이념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 유일 정율성 평전인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음악이 나의 무기다》와 정율성 관련 논문을 통해 그의 생(生)을 뒤쫓았다.
정율성은 1914년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부친의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부은(富恩)이었다. 정부은은 숭일학교를 거쳐 전주(全州) 신흥중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31년에 아버지를 여읜다. 이후 1933년 5월 그는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간부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 입교생을 모집하러 국내에 잠입한 셋째형 의은(義恩)을 따라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정부은의 큰형 효룡(일명 정남근)은 국내에서 선전부 조직을 결성하다 검거됐고, 둘째형 충룡(일명 정인제)은 청년독립단 대표로 활동하면서 무장투쟁에 앞장섰다가 사망했다. 부은의 누이 봉은은 이미 이전에 의은을 따라 중국에 간 상태였다.
24세에 연안송(延安頌)으로 음악적 재능 인정받아
1933년 9월 의열단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 정부은은 정신, 정치, 군사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동기 55명과 함께 졸업한다. 《정율성 평전》에 따르면 의열단간부학교 교육을 수료한 2기생들은 대부분 국내 공작 임무를 맡았다. 정부은은 여기서 빠진다. 그는 난징 고루(鼓樓)전화국에 침투해 일본인 전화 도청(盜聽) 임무를 받았다. 그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는 첫 ‘항일’ 행적이지만, 《정율성 평전》은 이에 대해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으로 짧게 언급하는 수준에 그친다. 도 1분 정도로 간단하게 전한다. 취재 결과 그가 도청 임무 수행을 통해 어떤 성과를 올렸는지 보여주는 자료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 관한 논문이나 중국 기록을 봐도 마찬가지다.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부은은 상하이국립음악전과학교 크리노바 교수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성악 지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아름다운 선율로 인민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며 이름을 ‘율성(律成)’으로 바꾼다. 정율성은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크리노바 교수로부터 “타고난 성악가”라는 극찬을 받았다. 크리노바 교수는 “이탈리아 유학을 가면 동방의 카루소가 될 것”이라며 그에게 유학을 권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정율성은 음악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포기해야 했다.
37년 7월 일본이 일으킨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10월 정율성은 연안으로 들어가 11월 싼베이공학(陝北工學)에 입학했다. 이듬해 1월 싼베이공학을 1기로 졸업한 그는 그해 3월 루쉰예술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했다. 루쉰예술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산비탈에 오른 정율성은 석양빛에 물드는 연안을 내려다봤다. 그는 옆에 있던 동기생 모예(莫耶)에게 노을과 함께 혁명 열기로 뜨거운 연안을 묘사하는 가사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모예로부터 받은 가사에 곡을 붙인 정율성은 며칠 후 여가수 탕룽메이(唐榮枚)와 함께 무대에 올라 자신의 노래를 불렀다. 정율성의 대표작 <연안송>이다.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오르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어치고/ 산과 산 철벽을 이뤘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대한 도시!/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아, 연안! (이하 생략)>
객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당(黨) 지도부도 있었다. 이내 정율성의 악보는 인쇄됐고, 전선으로 퍼져 나갔다. 이 노래를 들은 중국 청년들은 끓어 오르는 혁명열기를 느끼며 연안으로 향했다고 한다. 당 지도부에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정율성은 1938년 8월 루쉰예술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 음악지도원으로 배치됐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 시절 그는 같이 근무하던 궁무(公木)의 가사에 곡을 붙여 <팔로군 행진곡>을 만들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라며 시작하는 이 노래는 후일 중국인민해방군가가 됐다. 이 밖에도 정율성은 연안에 머물면서 <유격전을 발동하자> <부녀전투가> <항일돌격운동가> <백단대전행진곡> <연수요> 등을 작곡했다.
팔로군(八路軍) 산하 조선의용군에 배치돼 조선혁명군정학교 살림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중앙청 앞에서 춤추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정율성도 ‘항미원조’를 위해 이들과 함께 내려왔다.
정율성은 항일군정대학 시절에 딩쉐쑹(丁雪松)을 만났다. 그녀는 저우언라이의 양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에서 촉망받는 청년당원이었다. 두 사람은 1941년 결혼했다. 이듬해 8월 중국공산당은 정율성에게 조선의용군과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있는 타이항산(太行山)으로 갈 것을 지시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팔로군 포병 사령관 출신 무정(武亭)이었고, 정율성은 교무장을 맡았다.
서울시립대 염인호(廉仁鎬·55) 국사학과 교수의 논문 <조선의용군>에 따르면 조선의용군은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이 1938년 10월 우한(武漢)에서 결성한 조선의용대에서 분파된 부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탄생한 조선인 부대로 중국의 항일전쟁을 돕는 국제부대였다. 일본군이 우한을 점령하자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를 따라 충칭(重慶)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조선의용대 내부에서는 팔로군과 손잡을 수 있는 화북(華北)에 진출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최창익(崔昌益)이 이끄는 조선청년전위동맹 계열은 김원봉의 친(親)국민당 노선에 맞서 북상(北上)을 시도했다. 1941년 1월 남방(南邦)이나 충칭에서 올라온 의용대원들이 뤄양(洛陽)에 집결했을 때 타이항산 무정(武亭)의 포병(砲兵)연대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화청련)가 결성됐다. 뤄양의 의용대는 같은 해 봄에 황허를 건너 팔로군 근거지로 들어갔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됐다.
<조선의용군>에 따르면 화북지대는 전선에서 주로 선전공작을 했다. 1941년 12월 김세광이 이끌던 1대 20여 명은 호가장(胡家莊)이란 곳에서 숙영(宿營)하다가 일본군(日軍)의 습격을 받았다. 사망 4명, 부상 1명, 포로 1명 등 큰 손실을 봤다. 이듬해 5월 일본군은 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근거지 타이항산 소탕에 나섰다. 의용대도 반(反)소탕전을 펼쳤지만, 석정(石正)과 진광화(陳光華)가 전사(戰死)했다. 두 달 뒤 화청련은 2차 대회를 열어 조직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했다. 의용대는 독립동맹에 가입하고서 조선의용군으로 재편(再編)됐다. 이는 정율성이 타이항산으로 오기 전의 일이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 연구관의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에 의하면 이때만 하더라도 조선의용군은 나름의 독자성을 지닌 ‘민족운동단체’였다. 중공(中共)의 지도와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독립돼 있었다. 그러나 1943년 1월 이후 의용군은 팔로군의 일개 무장정치선전대가 됐다. 당시 최창익 등은 “의용군이 독립동맹 산하 무력단체여야 한다”며 독자성을 지킬 것을 주장했지만, 중공을 대변하는 무정은 최창익 등 북상파의 주장을 ‘협애한 민족주의’라고 공격한 다음 조선의용군을 장악했다. 이후 조선의용군은 1년 동안 적후(敵後)공작을 하다가 연안으로 이동했다. 타이항산에 대한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중공이 연안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가기 전까지 정율성은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에는 교무장으로서 학교 살림을 맡았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정율성 평전>에서는 “때로는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고 후방공작에 종사하기도 하였다”고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없다.
2009년 1월 광주 남구가 약 1억원을 들여 양림동에 조성한 ‘정율성로’.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이동하고 약 1년 후, 45년 8월 11일 자정을 기해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는 6호 명령을 내렸다.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벌이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 박일우에게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해 팔로군 및 원동북군 각 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해 적과 괴뢰군을 소멸시키는 한편, 동북의 조선 인민을 조직해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하도록 명령한다.”
그해 12월 부인 딩쉐쑹, 딸 정샤오티(鄭小提)와 함께 압록강을 건넌 정율성은 평양으로 가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황해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배치됐고, 1947년에는 평양으로 가 조선보안대 구락부 부장을 맡았다. 그는 곧바로 협주단을 만들어 2년여에 걸쳐 북한 전역 순회공연에 나섰다. 북한 당국은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모범 근로자’ 칭호를 내렸다.
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기간 그가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 있었다. 북한군을 위한 군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정율성은 월북(越北)시인 박세영(朴世永)의 시에 곡을 붙여 훗날 ‘조선인민해방군가’가 된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만들었다.
〈우리는 강철 같은 조선인민군/ 평화와 정의 위에 싸우는 전사/ 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 인민의 자유행복 생명을 삼고/ 규율과 훈련으로 다진 몸이니/ 승리의 민주대열 조선의 인민군/ 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자!〉
얼마 뒤 북한군은 이 노래를 부르며 남침(南侵)했다. 그의 노래에 나오는 ‘원쑤’가 대한민국 정부, 국군, 국민, 유엔(UN)군이 된 것이다. 그의 부인 딩쉐쑹은 신화통신 평양분사 책임자로 북한군과 함께 서울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정율성 가족은 이내 중국으로 귀환했다. 세간에는 저우언라이가 양녀 딩쉐쑹이 전장(戰場)에 있는 걸 걱정해 김일성에게 ‘귀환시켜 달라’는 편지를 썼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이 시기 북한에서 정율성과 같이 생활한 김학철의 《최후의 분대장》에는 귀환 이유가 정율성의 외도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정율성이 인민군협주단장 시절 청상과부 소프라노 한정금과 바람이 났었는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한참 뒤 우리말을 모르는 딩쉐쑹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갔다. 그녀는 바로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鄧穎超)에게 편지를 썼고, 곧 정율성 가족은 중국으로 소환된다.
중국에 간 정율성은 중국공산당 당적을 회복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해 12월 정율성은 ‘정뤼청’으로 중국인민지원군창작조와 함께 북한으로 들어와 전선(戰線)에 투입됐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하(南下)하는 중공군을 따라 1월에는 서울까지 내려왔다. 은 이에 대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를 상대로 싸웠던 그였지만, 결국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고 말았다. 결국 정율성은 북한에 파견된 지 4개월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군이나 연합군에 사형당해도 억울할 것 없어”
하지만 그에게 6·25는 비극(悲劇)이 아니라 조국해방전쟁,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중국 서남(西南)과학기술대학 예술학원 송서평 교수는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에서 “조선전쟁은 정율성의 창작 격정(激情)을 불러일으켰다”며 그의 창작물을 열거했다. 정율성은 중공군으로 참전하는 4개월 동안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士氣) 고취를 위해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전사의 선언> <지원군10찬(讚)> 등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적화(赤化)통일을 위해 매진했다는 얘기다. 그가 만든 노래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를 높이는 대신 국군과 UN군에게는 장송곡(葬送曲)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연산 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은 《인터넷 료녕신문》에 기고한 <태양의 아들>에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은 정률성이 조선과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군과 연합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지은 것임은 변명할 여지도 없다.
가정해서 조선전쟁 당시 정률성이 한국군이나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한다 해도 억울할 것이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유연산은 2004년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다》란 책을 통해 “박정희(朴正熙)는 1939년 말 ‘간도 조선인 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조선인 독립군 토벌에 공을 세우고 그 공으로 이듬해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추천을 받아 들어갔다”며 허위 주장을 한 인물이다. 그가 쓴 <태양의 아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정율성에 대해 호의적(好意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정율성은 1951년 4월 돌연 중국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보호막이었던 무정이 1950년 12월 패전 등을 이유로 숙청돼 북한에 오래 머무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기 때문이다. 이에 부인 딩쉐쑹이 저우언라이에게 남편의 귀국을 부탁해 돌아오게 했다는 말이 있다. 결국 그의 귀환 사유는 동족상잔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신변의 위협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대해 에 출연한 전(前) 국정원장 이종찬(李鍾贊·76)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1951년에 벌써 숙청바람이 불기 시작하니까 이분이 사실은 더는 여기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해서 중국으로 가려고 그랬는데, 김일성이 놔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부인 정설송이 주은래한테 편지를 보내서 내 남편하고 같이 중국에서 살고 싶다 이렇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주은래가 김일성에게 직접 요청을 해서 정율성 선생은 중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중국으로 가서도 마음으로는 못마땅하지만, 그런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으로 돌아간 정율성은 1966년 소위 문화혁명(文化革命)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의 농촌, 공장, 병영, 소수민족 등을 소재로 창작활동을 했다. <흥안령(興安領)에 눈 내리네> <채벌가(採伐歌)> <해상어가(海上漁歌)>, 오페라 <망부운(亡婦雲)> 등이 이 시기에 그가 만든 곡들이다. 마오쩌둥이 지은 시사(詩詞)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이후 문화혁명 기간 정율성은 주로 천렵(川獵)과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976년 12월 사망(死亡)했다.
정율성의 북한 관련 행적이 총 방송분량의 3.4%
이처럼 음악가 정율성의 작곡인생은 ▲중국공산당의 연안(8년) ▲김일성의 북한(6년) ▲마오쩌둥의 중국(25년)으로 나뉜다. 하지만 에서 정율성이 북한에서 활동했던 시절은 총 방영시간 59분20초 중 3분55초다. 여기서 이종찬씨 출연분을 빼면 2분 남짓으로 줄어든다. 현재 정율성에 대한 책이나 논문들도 그의 북한 활동 이력은 축소 혹은 은폐하면서 그의 항일 활동만 부각하려는 편향성을 보인다. 그러나 항일 활동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항일민족운동으로 볼 수 없다. 중국공산당원이 혁명을 위해 일본에 항거한 것일 뿐이다.
현재 정율성의 의열단간부학교 입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물이 있다.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노기욱(55) 박사가 쓴 <정율성 음악의 사상적 지향>이 그것이다. 7년 동안 정율성연구를 했다는 노 박사는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북한에 가서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율성의 이력을 보면 광주가 열광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인데, 왜 지금 광주 사람들이 정율성을 가지고 저러는지 학자로서 지적하고 싶어 논문을 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정율성은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적이 없다”며 “2기생으로 입교한 사람은 그의 형 정의은”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1934년 8월 13일 경기도 경찰부장이 경무국장에게 발송한 ‘의열단원 검거의 건’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온 정의은이 경기도 고등경찰에 체포돼 진술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노 박사에 따르면 당시 정의은은 정부은(정율성의 본명)과 유대진(정율성의 가명으로 알려져 있음), 정대성 등을 가명으로 썼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다음은 논문의 내용이다.
<정율성이 자필로 작성해 중국국립중앙악단에 제출한 ‘정율성정치경력서’에도 (그가)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한 기록은 없다. 이는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에 관심이 없었으며, 결론적으로는 입학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 출신이라고 기존의 연구자들이 인용하게 된 것은 한상도의 글에 기인하고 있다. 한상도는 정부은이라는 가명이 의열단간부학교 2기생 명단에 있다는 이유로 정율성이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 2기생이라고 단정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즉 정의은이 의열단간부학교에 입학할 때 동생 본명을 자신의 가명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의열단간부학교 2기생이면서 조선의용대, 광복군 활동을 했던 김승곤이 “정부은은 의열단간부학교 동기”라고 했지만 실제 그가 만난 건 정의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노 박사만의 추정일 뿐이다.
이에 대해 건국대 인문학부 한상도(57) 교수는 “누가 아니래요? 틀렸으면 그쪽한테 밝히라고 하세요. 나는 정부은이 정율성이 맞고, 가족들도 만났는데. 공부나 열심히들 하라고 해요”라고 말했다.
“실체 불분명한 항일행적과 인간적인 면(面)만 나열”
그렇다면 정율성의 항일 행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안 시절(타이항산 포함)을 돌이켜 봐야 한다. 이 시기 그는 40여 곡을 작곡했다. 작품목록을 보면 우리 민족의 독립과 상관성을 갖는 제목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연안 시절 그의 창작 활동이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혁명을 위해 항일을 한 것인지, ‘독립운동’의 방편이었는지 불분명하다는 얘기도 가능하다.
《정율성 평전》에서 연안 시절 분량은 120쪽이지만, 정율성의 우국지정(憂國之情)을 느낄 수 있는 사례를 보기 어렵다. 항일의 목적을 알기 어렵다는 얘기다. 1941년 화청련 섬감녕(陝甘寧) 변구 분회장에 취임했다는 내용이 있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알려진 유명 작곡가라는 점과 보이지 않는 무정의 배려가 분회장 자리에 오른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타이항산 시절 정율성이 중국공산당원 신분으로 중공의 지침을 따라야 했을 테지만 조선혁명군정학교 교무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에 공(功)이 있다고 해도 훗날 반(反)국가행위 혹은 민족반역행위를 한다면 그 공적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KBS공영노조는 <추악한 프로그램 정율성, 더 추악한 제작자와 간부들>이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조선인민군가> 등을 지은 공산군가 전문 작곡자로서의 핵심을 철저히 숨기고 실체가 불분명한 항일 행적과 인간적인 면만을 장황하게 나열하며 미화하기에 급급했다”고 제작진을 비판한 것이다.
정율성은 6년 동안 북한을 위해 활동했고, 대한민국을 ‘원쑤’처럼 생각하며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위해 작곡한 사람이다. 시대적 상황에 떠밀려 그랬을까. 유연산의 <태양의 아들>에는 “정률성은 1970년대 초에도 ‘아직도 남조선 인민들은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나하고 유격전을 하러 남조선으로 가자’고 제기하기도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평생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적대시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혹자는 “예술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고 할 수 있지만, 정율성은 1963년 《북경만보》에 ‘노래는 오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무기이며, 혁명의 무기’라고 썼다. 그 스스로 음악을 이념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에게 음악은 중국 공산혁명과 대남(對南)적화를 위한 무기였다. 그런데도 이종찬씨는 에서 다음과 같이 정율성에 대해 말했다.
“김일성은 그 연안파를 자기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해서 숙청을 해 버렸습니다. 숙청해서 소련으로 망명한 분도 있고, 중국으로 망명한 분도 있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거기 있다가 전부 불행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완전히 묻혀 버렸습니다. 그러면 북한에서도 그 역사를 묻어 버리고 우리는 그분들이 공산당 활동을 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백안시하게 된다면 그분들의 귀중한 삶, 투쟁했던 기록, 이것이 역사에 한 페이지도 안 남는다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율성 논란’은 공산주의자들의 항일활동을 ‘백안시(白眼視)’해서 생긴 게 아니라, 정율성의 대남(對南) 적대 활동을 축소·은폐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정율성 거리전시관 정비해 韓中관계 공고히 하는 매개로 삼을 것”
방송 말미에 항상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 여러분의 소중한 수신료로 제작됐습니다’라는 문구를 넣는 KBS가 정율성 다큐멘터리 제작에 들인 돈은 7000만원 가량이다. 정율성을 기념하기 위해 억대의 돈을 쓰는 곳도 있다. 광주광역시는 2005년부터 연평균 4억6000만원을 들여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광주는 이 행사를 2008년부터 중국 난창(南昌)시와 상·하반기로 나눠 연 2회 개최한다. 광주시는 “광주가 낳은 중국의 3대 음악가인 정율성을 매개로 한중(韓中) 문화교류 및 관광 활성화와 공연문화 발전 도모”를 ‘정율성 음악제’ 개최 동기로 밝혔다.
원래 이 행사는 광주 남구(南區)가 시(市) 교부금 5억원을 받아 시작했다. 그러다 예산 부족으로 난항(難航)을 겪자, 시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주관했다. 작년부턴 문화예술진흥위 문예진흥기금 50억원과 광주시 출연금 50억원 등 총 100억원 규모의 기금으로 설립된 광주문화재단이 행사를 맡고 있다.
2005년 광주 남구에서 정율성 기념행사를 기획할 때 그의 전력(前歷)에 대한 얘기가 오갔는지 알기 위해 구(區)의회 회의록을 보려 했지만, 온라인으로는 2008년도 회의록부터 열람할 수 있었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남구 의회에서 정율성에 대해 논의한 사항은 ▲생가(生家) 논란 ▲흉상(胸像) 설치 ▲정율성로(路) 조성 등으로 정율성 기념사업 진행과 관련된 문제들뿐이었다. 그중 신인용(申仁勇·57) 구의원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정율성 선생이 우리 학교 선배 돼요.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 ‘학교를 빛낸 숭일인상’해서 제가 드리자고 했는데, 누구를 줄 것인가 선정이 안되어 버린 거예요.” (2009년 1월 16일 제154회 임시회)
현재 남구 양림동에는 2009년 1월 조성한 길이 233m의 ‘정율성로’가 있다. 길 왼쪽 벽면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연안송> 악보 동판(銅板), 관련 기록물,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정율성 흉상도 설치돼 있다. 심지어 중국인민해방군가를 들을 수도 있다. 최영호(崔榮鎬·47) 남구청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우리 사회 안팎에 시대착오적인 이념 몰이 흐름이 있다고 해서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인물까지 함께 잃어버리는 것은 역사적인 손실”이라며 “정율성 거리전시관에 더욱 입체적이면서도 알찬 내용을 담아 정비해서 한중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매개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 정율성 기념물은 각각 정율성 생가라고 일컬어지던 광주 동구와 화순에 있다. 정율성기념사업회가 생가라고 주장하는 동구 불로동 163번지 히딩크관광호텔 앞에는 ‘정율성 선생 생가복원 추진위원회’가 세운 높이 4.5m 비석이 있다. 2006년 9월 세워진 이 비석에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 탄생지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 정율성이 숭일학교로 전학 가기 전 2년 동안 다닌 기록이 있는 화순 능주초등학교에도 그의 흉상이 있다. 이 학교가 2008년 10월 개교 100주년을 맞아 세웠다고 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흉상 기단(基壇)에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건립취지문이 적혀 있다.
<아시아에 희망을 선사한 혁명가인 선생의 뜨거운 조국애와 열정적인 예술혼을 기리며 그 호연지기의 기상을 후배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한다>
정율성路 조성에 약 1억원 들여
정율성 기념사업 추진 경위를 알기 위해 광주 남구청 정모 주무관과 통화했다. 그는 정율성음악제의 최초 기안자다.
―정율성을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2002년 한 일간지 기자가 ‘양림동이 정율성이란 분의 고향인데 아느냐’고 전화로 물었는데, 몰라서 그 부분을 알아봤거든요. 마침 그때 시(市)에서도 월드컵 때 중국인들에게 관광수단으로 괜찮을 것으로 생각해 조사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관련 내용을 찾다가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이후 중국인 교수와 알게 돼서 정율성에 대해 얘기했더니 그가 ‘(정율성이) 중국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얘기하면서 그 가족들과 소개를 해 줬습니다. 그렇게 해서 더 알게 됐죠.”
―정율성이 북한에 가서 활동한 내역과 중공군으로 참전(參戰)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 군가가 만들어진 게 1937~38년이잖아요?”
―그때는 <연안송>이나 <팔로군대합창>이죠.
“그러니까요. 그걸 그대로 쓴 거예요. 새로 만든 게 아니라고요.”
―북한에 가서 만든 건 <조선인민군 행진곡> ….
“여보세요! 그렇게 따지려고 저한테 전화하셨습니까. 제가 곧 회의라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하셨으면 하는데요.”
―사업 추진 당시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습니까.
“당시 안기부(국정원)에서 오라고 해서 가서 자료를 냈어요. 거기서 일단 한번 해 보라고 해서 했던 건데요. 안기부도 조사를 많이 했더라고요.”
―2006년 이후 남구에서 정율성 기념사업을 추진한 사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율성로 조성은 남구에서 한 것 아닙니까.
“정율성로는 도로명 개선사업 할 때 양림동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이름을 정한 거예요.”
―정율성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거리전시관 아닌가요.
“(정율성) 생가 매입도 못한 상황에서 주민들이 와 봐야 볼 게 없어서 거리에 정율성 선생과 관계된 자료들을 전시했습니다.”
―조성비용이 얼마나 들었습니까.
“1억원이 좀 못 됐나, 그랬을 겁니다.”
―생가 매입 계획은요.
“예전에는 집주인이 너무 높은 가격을 부르고, 구(區)도 재정난을 겪고 있던 때라 사질 못했는데요. 지금도 그 가격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光州, “鄭律成음악제 계속 개최하겠다”
‘갱도요새’에서 노래 부르며 휴식을 취하는 중공군. 정율성은 6ㆍ25전쟁에 참전해 중공군 사기 고취를 위한 군가를 작곡했다.
현재 정율성 음악제는 광주문화재단에서 주관하지만, 그래도 최종결정권은 시(市)가 갖고 있다. 향후 음악제 개최 계획 등을 묻기 위해 광주광역시에 전화했다. 대변인실은 “담당부서에 물어보라”며 소관 부서로 넘겼다. 다음은 문화수도예술과 담당자와의 문답이다.
―광주시에서 행사를 주관하게 됐을 때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까.
“제가 작년 8월에 업무를 맡아서 예전 서류에서 관련 내용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논의를 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데요.”
―정율성이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까.
“KBS 다큐멘터리로 시끄러울 때 언론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 시민들에게 소개를 한 적이 있습니까.
“업무를 맡은 지 1년밖에 안돼 이념적인 부분을 소개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에서 이름을 걸고 특정인을 기념하는 음악제라면 그 사람이 기념할 만한 인물인지 알 수 있게 시민에게 객관적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지 않나요.
“그건 초창기에 해야 할 사항인 것 같네요. 지금은 음악제를 시작한 지 꽤 돼서 시민들에게 그걸 새삼스레 알리는 것보다는 ‘공연이 있다’는 형식으로만 알리는 게 맞다고 보는데요. 이 음악제는 시민들에게 사상이나 이념을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광주 출신 작곡가 정율성을 매개로 클래식축제를 하는 겁니다.”
―클래식축제를 하는 거라면, 굳이 정율성이란 간판을 달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냥 클래식음악회는 많잖아요. 광주클래식음악회라고 하면 …. 광주에 임방울 국악제가 있는데, 그냥 광주판소리대회라고 하는 것보다는 임방울 선생님이 광주 출신이고 판소리를 했기 때문에 그분을 매개로 하면 활성화가 된다는 계획에서 했을 거예요.”
―그건 임방울 선생을 광주의 브랜드로 내세우는 것 아닙니까.
“뭐 ….”
―마찬가지로 ‘정율성’도 광주의 브랜드가 된 거네요.
“광주 출신이고 중국에서 추앙받는 작곡가니까 ….”
―정율성 기념관 건립 등 사업 확대 계획도 있습니까.
“검토된 적이 없습니다. 클래식음악회 위주로 하려고 합니다.”
―정율성 음악제를 계속 개최할 계획인가요.
“예, 그럴 계획입니다.”
광주가 내세우는 정체성(正體性)은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다. ‘민주 도시’는 공산 독재자를 찬양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중국 옌볜대학 예술학원 김성준 교수의 논문 <정율성의 음악 활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정율성은 <영광은 스탈린에게(1950)> <모(毛) 주석께서 우리를 인도하다(1959)> <모 주석의 장엄한 성명은 방향을 가리킨다(1970)> 등을 지었다. 또 ‘평화 도시’는 중공군의 불법개입에 참여해 전쟁을 독려한 선동가와도 연결이 안된다. 그 사람이 어느 나라에서 무슨 일을 했든, 유명하고 ‘우리 고장 사람’이기만 하면, 광주의 정체성과 맞지 않아도 기릴 수 있단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