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공산당원, 김일성 앞장이 정율성 동상과 역사공원 건립 추진, 화순.광주는 중공땅 직활시인가-[추적] ‘6·25 남침’ 때 ‘中·北 군가 작곡자’를 추앙하는 光州 / '6·25 때 중공군' 정율성 ..

2023. 8. 24. 02:09아시아 소식/대한민국

중공 공산당원, 김일성 앞장이 정율성 동상과 역사공원 건립 추진,

신성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땅 화순.광주가 중공땅 직활시인가? 

한국전쟁때 북한군과 중공군이 남침하면서 부른 ‘조선인민군행진곡’과

‘중국인민해방군가’를 각각 작곡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멸망을 선동한

반역행위자 정율성을 기념하는 광주광역시

편집자 주=아래는 <對南赤化 선동한 작곡가 기념하는 ‘民主·平和 도시’ 光州>라는 제목의 월간조선 2022년 8월호 기사 전문이다. 문재인전 대통령은 과거 중국방문때 한국에는 정율성이 있다며 침이 마르도록 그의 행적을 칭찬했다. (사진 편집 =서옥식 전 연합뉴스 북한부장-편집국장)

 

<아래>

⊙ 지난 1월 정율성(鄭律成) 다큐멘터리 방영 문제로 내분(內紛) 일어난 KBS

⊙ 정율성, <영광은 스탈린에게> <마오쩌둥 주석께서 우리를 인도하다> 등으로 공산독재자 찬양

⊙ “정율성음악제는 국정원 자료 내고 허가 받은 것”

 

△정율성이 1948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포상장.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8년 9월 9일 수립된 북한 김일성정권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전신이다

△정율성이 작곡한 북조선인민군행진곡.이 곡은 뒤에 조선인민군가로 사용됐다. 6.25때 인민군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서울로 진격했다. 이런 자를 광주광역시는 그의 음악성이 위대하다며 기념거리와 동상을 만들고 노무현정권때인 2005년 이후 거의 매년 기념음악회를 개최해오고있다

△정율성이 마오쩌둥을 위해 작곡한 연안찬양곡 연안송(延安頌)

△정율성이 만든 군가 부르며 남침한 북한군

△2005년부터 광주에서 열리는 정율성축제

△2006년 9월 광주 동구 불로동 히딩크관광호텔 앞에서 열린 정율성 탄생지비 제막식

전남 화순 능주초교는 2008년 10월 개교 100주년을 맞아 정율성 흉상을 세웠다

2009년 1월 광주광역시 남구가 약 1억원을 들여 양림동에 조성한 ‘정율성로’

중국 하얼빈의 정율성 기념관

△정율성 사진

지난 1월 15일 KBS는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을 방영했다. 그의 일대기(一代記)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격론(激論)을 불러일으켰다. KBS 부장급 이상 간부들의 노조인 ‘공영노동조합’은 다음 날 성명을 통해 “이 정율성의, 실체(實體)가 불분명한 항일행적과 인간적인 면(面)만을 장황하게 나열해 미화(美化)했다”며 “(제작진은) KBS를 속히 떠나 재야(在野) 운동가로 나서라”고 했다. 보수단체 ‘국민행동본부’도 일간지에 “공산주의자 정율성을 미화한 방송 책임자를 파면하라”는 광고를 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프로그램 제작진 중 한 명인 박건 PD는 《미디어오늘》에 〈항일(抗日)운동가 정율성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란 글을 기고하고 “험난한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선 인물에게 이념공세를 앵무새처럼 떠벌리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中國에선 위대한 음악가이자 抗日운동가”

 

말년의 정율성. 그의 고향은 광주지만, 활동영역은 중국과 북한이다.

정율성(鄭律成)은 현(現) 광주(光州)광역시 태생의 중국(中國) 작곡가로 중국 인민해방군 공식 군가(軍歌)인 <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延安頌)> 등 360여 곡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중국 국가(國歌) <의용군 행진곡>의 녜얼(?耳), <황허(黃河)대합창>을 작곡한 선싱하이(詵星海)와 함께 중국 3대 현대 음악가로 꼽힌다. 2009년 9월에는 중국공산당을 창당한 리다자이(李大釗), 작가 루쉰(魯迅), 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킨 장쉐량(張學良)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중국 국민이 선정한 ‘신(新)중국 창건영웅 100인’에 선정됐다. 에서 박선정(朴善正·54)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율성이) 중국에서는 위대한 음악가이자 항일민족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고향인 우리나라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죠. 그 이유는 지난 세월 이념과 냉전(冷戰)의 장벽 속에 갇혀서 정율성 선생의 실체(實體)가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정율성 다큐멘터리’는 지난해 8·15 특집으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여당 추천 KBS 이사들이 정율성의 공산주의 활동전력을 이유로 방영을 제지한 프로다. 이에 제작진 14명은 〈2011년 8월, KBS를 떠도는 매카시의 유령〉이란 제하의 성명을 통해 “정율성은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독립투사이자 음악가”라며 “공영방송의 이사들과 경영진의 역사의식이 용도폐기된 이념의 굴레에 갇혀 있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항의했었다.

6·25전쟁에 불법(不法) 개입한 중공군을 대표하는 군가가 정율성의 <팔로군 행진곡>인 건 맞다. 그러나 이는 중·일(中日)전쟁 기간에 만들어진 노래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은 작자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여당 추천 이사들이 이 점만 가지고 방송을 반대했을까. 도대체 ‘정율성’ 이름 석 자만 나오면 이념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 유일 정율성 평전인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음악이 나의 무기다》와 정율성 관련 논문을 통해 그의 생(生)을 뒤쫓았다.

정율성은 1914년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부친의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부은(富恩)이었다. 정부은은 숭일학교를 거쳐 전주(全州) 신흥중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31년에 아버지를 여읜다. 이후 1933년 5월 그는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간부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 입교생을 모집하러 국내에 잠입한 셋째형 의은(義恩)을 따라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정부은의 큰형 효룡(일명 정남근)은 국내에서 선전부 조직을 결성하다 검거됐고, 둘째형 충룡(일명 정인제)은 청년독립단 대표로 활동하면서 무장투쟁에 앞장섰다가 사망했다. 부은의 누이 봉은은 이미 이전에 의은을 따라 중국에 간 상태였다.

24세에 연안송(延安頌)으로 음악적 재능 인정받아

1933년 9월 의열단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 정부은은 정신, 정치, 군사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동기 55명과 함께 졸업한다. 《정율성 평전》에 따르면 의열단간부학교 교육을 수료한 2기생들은 대부분 국내 공작 임무를 맡았다. 정부은은 여기서 빠진다. 그는 난징 고루(鼓樓)전화국에 침투해 일본인 전화 도청(盜聽) 임무를 받았다. 그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는 첫 ‘항일’ 행적이지만, 《정율성 평전》은 이에 대해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으로 짧게 언급하는 수준에 그친다. 도 1분 정도로 간단하게 전한다. 취재 결과 그가 도청 임무 수행을 통해 어떤 성과를 올렸는지 보여주는 자료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 관한 논문이나 중국 기록을 봐도 마찬가지다.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부은은 상하이국립음악전과학교 크리노바 교수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성악 지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아름다운 선율로 인민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며 이름을 ‘율성(律成)’으로 바꾼다. 정율성은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크리노바 교수로부터 “타고난 성악가”라는 극찬을 받았다. 크리노바 교수는 “이탈리아 유학을 가면 동방의 카루소가 될 것”이라며 그에게 유학을 권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정율성은 음악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포기해야 했다.

37년 7월 일본이 일으킨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10월 정율성은 연안으로 들어가 11월 싼베이공학(陝北工學)에 입학했다. 이듬해 1월 싼베이공학을 1기로 졸업한 그는 그해 3월 루쉰예술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했다. 루쉰예술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 산비탈에 오른 정율성은 석양빛에 물드는 연안을 내려다봤다. 그는 옆에 있던 동기생 모예(莫耶)에게 노을과 함께 혁명 열기로 뜨거운 연안을 묘사하는 가사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모예로부터 받은 가사에 곡을 붙인 정율성은 며칠 후 여가수 탕룽메이(唐榮枚)와 함께 무대에 올라 자신의 노래를 불렀다. 정율성의 대표작 <연안송>이다.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오르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어치고/ 산과 산 철벽을 이뤘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대한 도시!/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아, 연안! (이하 생략)>

객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당(黨) 지도부도 있었다. 이내 정율성의 악보는 인쇄됐고, 전선으로 퍼져 나갔다. 이 노래를 들은 중국 청년들은 끓어 오르는 혁명열기를 느끼며 연안으로 향했다고 한다. 당 지도부에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정율성은 1938년 8월 루쉰예술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 음악지도원으로 배치됐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 시절 그는 같이 근무하던 궁무(公木)의 가사에 곡을 붙여 <팔로군 행진곡>을 만들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라며 시작하는 이 노래는 후일 중국인민해방군가가 됐다. 이 밖에도 정율성은 연안에 머물면서 <유격전을 발동하자> <부녀전투가> <항일돌격운동가> <백단대전행진곡> <연수요> 등을 작곡했다.

팔로군(八路軍) 산하 조선의용군에 배치돼 조선혁명군정학교 살림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중앙청 앞에서 춤추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정율성도 ‘항미원조’를 위해 이들과 함께 내려왔다.

정율성은 항일군정대학 시절에 딩쉐쑹(丁雪松)을 만났다. 그녀는 저우언라이의 양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에서 촉망받는 청년당원이었다. 두 사람은 1941년 결혼했다. 이듬해 8월 중국공산당은 정율성에게 조선의용군과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있는 타이항산(太行山)으로 갈 것을 지시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팔로군 포병 사령관 출신 무정(武亭)이었고, 정율성은 교무장을 맡았다.

서울시립대 염인호(廉仁鎬·55) 국사학과 교수의 논문 <조선의용군>에 따르면 조선의용군은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이 1938년 10월 우한(武漢)에서 결성한 조선의용대에서 분파된 부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탄생한 조선인 부대로 중국의 항일전쟁을 돕는 국제부대였다. 일본군이 우한을 점령하자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를 따라 충칭(重慶)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조선의용대 내부에서는 팔로군과 손잡을 수 있는 화북(華北)에 진출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최창익(崔昌益)이 이끄는 조선청년전위동맹 계열은 김원봉의 친(親)국민당 노선에 맞서 북상(北上)을 시도했다. 1941년 1월 남방(南邦)이나 충칭에서 올라온 의용대원들이 뤄양(洛陽)에 집결했을 때 타이항산 무정(武亭)의 포병(砲兵)연대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화청련)가 결성됐다. 뤄양의 의용대는 같은 해 봄에 황허를 건너 팔로군 근거지로 들어갔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됐다.

<조선의용군>에 따르면 화북지대는 전선에서 주로 선전공작을 했다. 1941년 12월 김세광이 이끌던 1대 20여 명은 호가장(胡家莊)이란 곳에서 숙영(宿營)하다가 일본군(日軍)의 습격을 받았다. 사망 4명, 부상 1명, 포로 1명 등 큰 손실을 봤다. 이듬해 5월 일본군은 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근거지 타이항산 소탕에 나섰다. 의용대도 반(反)소탕전을 펼쳤지만, 석정(石正)과 진광화(陳光華)가 전사(戰死)했다. 두 달 뒤 화청련은 2차 대회를 열어 조직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했다. 의용대는 독립동맹에 가입하고서 조선의용군으로 재편(再編)됐다. 이는 정율성이 타이항산으로 오기 전의 일이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 연구관의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에 의하면 이때만 하더라도 조선의용군은 나름의 독자성을 지닌 ‘민족운동단체’였다. 중공(中共)의 지도와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독립돼 있었다. 그러나 1943년 1월 이후 의용군은 팔로군의 일개 무장정치선전대가 됐다. 당시 최창익 등은 “의용군이 독립동맹 산하 무력단체여야 한다”며 독자성을 지킬 것을 주장했지만, 중공을 대변하는 무정은 최창익 등 북상파의 주장을 ‘협애한 민족주의’라고 공격한 다음 조선의용군을 장악했다. 이후 조선의용군은 1년 동안 적후(敵後)공작을 하다가 연안으로 이동했다. 타이항산에 대한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중공이 연안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가기 전까지 정율성은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에는 교무장으로서 학교 살림을 맡았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정율성 평전>에서는 “때로는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고 후방공작에 종사하기도 하였다”고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없다.

 

2009년 1월 광주 남구가 약 1억원을 들여 양림동에 조성한 ‘정율성로’.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이동하고 약 1년 후, 45년 8월 11일 자정을 기해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는 6호 명령을 내렸다.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벌이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 박일우에게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해 팔로군 및 원동북군 각 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해 적과 괴뢰군을 소멸시키는 한편, 동북의 조선 인민을 조직해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하도록 명령한다.”

그해 12월 부인 딩쉐쑹, 딸 정샤오티(鄭小提)와 함께 압록강을 건넌 정율성은 평양으로 가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황해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배치됐고, 1947년에는 평양으로 가 조선보안대 구락부 부장을 맡았다. 그는 곧바로 협주단을 만들어 2년여에 걸쳐 북한 전역 순회공연에 나섰다. 북한 당국은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모범 근로자’ 칭호를 내렸다.

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기간 그가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 있었다. 북한군을 위한 군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정율성은 월북(越北)시인 박세영(朴世永)의 시에 곡을 붙여 훗날 ‘조선인민해방군가’가 된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만들었다.

〈우리는 강철 같은 조선인민군/ 평화와 정의 위에 싸우는 전사/ 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 인민의 자유행복 생명을 삼고/ 규율과 훈련으로 다진 몸이니/ 승리의 민주대열 조선의 인민군/ 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자!〉

얼마 뒤 북한군은 이 노래를 부르며 남침(南侵)했다. 그의 노래에 나오는 ‘원쑤’가 대한민국 정부, 국군, 국민, 유엔(UN)군이 된 것이다. 그의 부인 딩쉐쑹은 신화통신 평양분사 책임자로 북한군과 함께 서울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정율성 가족은 이내 중국으로 귀환했다. 세간에는 저우언라이가 양녀 딩쉐쑹이 전장(戰場)에 있는 걸 걱정해 김일성에게 ‘귀환시켜 달라’는 편지를 썼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이 시기 북한에서 정율성과 같이 생활한 김학철의 《최후의 분대장》에는 귀환 이유가 정율성의 외도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정율성이 인민군협주단장 시절 청상과부 소프라노 한정금과 바람이 났었는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한참 뒤 우리말을 모르는 딩쉐쑹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갔다. 그녀는 바로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鄧穎超)에게 편지를 썼고, 곧 정율성 가족은 중국으로 소환된다.

중국에 간 정율성은 중국공산당 당적을 회복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해 12월 정율성은 ‘정뤼청’으로 중국인민지원군창작조와 함께 북한으로 들어와 전선(戰線)에 투입됐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하(南下)하는 중공군을 따라 1월에는 서울까지 내려왔다. 은 이에 대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를 상대로 싸웠던 그였지만, 결국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고 말았다. 결국 정율성은 북한에 파견된 지 4개월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군이나 연합군에 사형당해도 억울할 것 없어”

하지만 그에게 6·25는 비극(悲劇)이 아니라 조국해방전쟁,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중국 서남(西南)과학기술대학 예술학원 송서평 교수는 <정율성의 음악창작 탐구>에서 “조선전쟁은 정율성의 창작 격정(激情)을 불러일으켰다”며 그의 창작물을 열거했다. 정율성은 중공군으로 참전하는 4개월 동안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士氣) 고취를 위해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전사의 선언> <지원군10찬(讚)> 등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적화(赤化)통일을 위해 매진했다는 얘기다. 그가 만든 노래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를 높이는 대신 국군과 UN군에게는 장송곡(葬送曲)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연산 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은 《인터넷 료녕신문》에 기고한 <태양의 아들>에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은 정률성이 조선과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군과 연합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지은 것임은 변명할 여지도 없다.

가정해서 조선전쟁 당시 정률성이 한국군이나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한다 해도 억울할 것이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유연산은 2004년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다》란 책을 통해 “박정희(朴正熙)는 1939년 말 ‘간도 조선인 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조선인 독립군 토벌에 공을 세우고 그 공으로 이듬해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추천을 받아 들어갔다”며 허위 주장을 한 인물이다. 그가 쓴 <태양의 아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정율성에 대해 호의적(好意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정율성은 1951년 4월 돌연 중국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보호막이었던 무정이 1950년 12월 패전 등을 이유로 숙청돼 북한에 오래 머무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기 때문이다. 이에 부인 딩쉐쑹이 저우언라이에게 남편의 귀국을 부탁해 돌아오게 했다는 말이 있다. 결국 그의 귀환 사유는 동족상잔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신변의 위협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대해 에 출연한 전(前) 국정원장 이종찬(李鍾贊·76)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1951년에 벌써 숙청바람이 불기 시작하니까 이분이 사실은 더는 여기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해서 중국으로 가려고 그랬는데, 김일성이 놔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부인 정설송이 주은래한테 편지를 보내서 내 남편하고 같이 중국에서 살고 싶다 이렇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주은래가 김일성에게 직접 요청을 해서 정율성 선생은 중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중국으로 가서도 마음으로는 못마땅하지만, 그런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으로 돌아간 정율성은 1966년 소위 문화혁명(文化革命)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의 농촌, 공장, 병영, 소수민족 등을 소재로 창작활동을 했다. <흥안령(興安領)에 눈 내리네> <채벌가(採伐歌)> <해상어가(海上漁歌)>, 오페라 <망부운(亡婦雲)> 등이 이 시기에 그가 만든 곡들이다. 마오쩌둥이 지은 시사(詩詞)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이후 문화혁명 기간 정율성은 주로 천렵(川獵)과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976년 12월 사망(死亡)했다.

 

정율성의 북한 관련 행적이 총 방송분량의 3.4%

이처럼 음악가 정율성의 작곡인생은 ▲중국공산당의 연안(8년) ▲김일성의 북한(6년) ▲마오쩌둥의 중국(25년)으로 나뉜다. 하지만 에서 정율성이 북한에서 활동했던 시절은 총 방영시간 59분20초 중 3분55초다. 여기서 이종찬씨 출연분을 빼면 2분 남짓으로 줄어든다. 현재 정율성에 대한 책이나 논문들도 그의 북한 활동 이력은 축소 혹은 은폐하면서 그의 항일 활동만 부각하려는 편향성을 보인다. 그러나 항일 활동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항일민족운동으로 볼 수 없다. 중국공산당원이 혁명을 위해 일본에 항거한 것일 뿐이다.

현재 정율성의 의열단간부학교 입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물이 있다.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노기욱(55) 박사가 쓴 <정율성 음악의 사상적 지향>이 그것이다. 7년 동안 정율성연구를 했다는 노 박사는 《월간조선》과의 통화에서 “북한에 가서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율성의 이력을 보면 광주가 열광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인데, 왜 지금 광주 사람들이 정율성을 가지고 저러는지 학자로서 지적하고 싶어 논문을 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정율성은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한 적이 없다”며 “2기생으로 입교한 사람은 그의 형 정의은”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1934년 8월 13일 경기도 경찰부장이 경무국장에게 발송한 ‘의열단원 검거의 건’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온 정의은이 경기도 고등경찰에 체포돼 진술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노 박사에 따르면 당시 정의은은 정부은(정율성의 본명)과 유대진(정율성의 가명으로 알려져 있음), 정대성 등을 가명으로 썼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다음은 논문의 내용이다.

<정율성이 자필로 작성해 중국국립중앙악단에 제출한 ‘정율성정치경력서’에도 (그가)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한 기록은 없다. 이는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에 관심이 없었으며, 결론적으로는 입학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 출신이라고 기존의 연구자들이 인용하게 된 것은 한상도의 글에 기인하고 있다. 한상도는 정부은이라는 가명이 의열단간부학교 2기생 명단에 있다는 이유로 정율성이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 2기생이라고 단정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즉 정의은이 의열단간부학교에 입학할 때 동생 본명을 자신의 가명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의열단간부학교 2기생이면서 조선의용대, 광복군 활동을 했던 김승곤이 “정부은은 의열단간부학교 동기”라고 했지만 실제 그가 만난 건 정의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노 박사만의 추정일 뿐이다.

이에 대해 건국대 인문학부 한상도(57) 교수는 “누가 아니래요? 틀렸으면 그쪽한테 밝히라고 하세요. 나는 정부은이 정율성이 맞고, 가족들도 만났는데. 공부나 열심히들 하라고 해요”라고 말했다.

“실체 불분명한 항일행적과 인간적인 면(面)만 나열”

그렇다면 정율성의 항일 행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안 시절(타이항산 포함)을 돌이켜 봐야 한다. 이 시기 그는 40여 곡을 작곡했다. 작품목록을 보면 우리 민족의 독립과 상관성을 갖는 제목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연안 시절 그의 창작 활동이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혁명을 위해 항일을 한 것인지, ‘독립운동’의 방편이었는지 불분명하다는 얘기도 가능하다.

《정율성 평전》에서 연안 시절 분량은 120쪽이지만, 정율성의 우국지정(憂國之情)을 느낄 수 있는 사례를 보기 어렵다. 항일의 목적을 알기 어렵다는 얘기다. 1941년 화청련 섬감녕(陝甘寧) 변구 분회장에 취임했다는 내용이 있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알려진 유명 작곡가라는 점과 보이지 않는 무정의 배려가 분회장 자리에 오른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타이항산 시절 정율성이 중국공산당원 신분으로 중공의 지침을 따라야 했을 테지만 조선혁명군정학교 교무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에 공(功)이 있다고 해도 훗날 반(反)국가행위 혹은 민족반역행위를 한다면 그 공적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KBS공영노조는 <추악한 프로그램 정율성, 더 추악한 제작자와 간부들>이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조선인민군가> 등을 지은 공산군가 전문 작곡자로서의 핵심을 철저히 숨기고 실체가 불분명한 항일 행적과 인간적인 면만을 장황하게 나열하며 미화하기에 급급했다”고 제작진을 비판한 것이다.

정율성은 6년 동안 북한을 위해 활동했고, 대한민국을 ‘원쑤’처럼 생각하며 김일성의 적화통일을 위해 작곡한 사람이다. 시대적 상황에 떠밀려 그랬을까. 유연산의 <태양의 아들>에는 “정률성은 1970년대 초에도 ‘아직도 남조선 인민들은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나하고 유격전을 하러 남조선으로 가자’고 제기하기도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평생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적대시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혹자는 “예술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고 할 수 있지만, 정율성은 1963년 《북경만보》에 ‘노래는 오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무기이며, 혁명의 무기’라고 썼다. 그 스스로 음악을 이념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에게 음악은 중국 공산혁명과 대남(對南)적화를 위한 무기였다. 그런데도 이종찬씨는 에서 다음과 같이 정율성에 대해 말했다.

“김일성은 그 연안파를 자기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해서 숙청을 해 버렸습니다. 숙청해서 소련으로 망명한 분도 있고, 중국으로 망명한 분도 있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거기 있다가 전부 불행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완전히 묻혀 버렸습니다. 그러면 북한에서도 그 역사를 묻어 버리고 우리는 그분들이 공산당 활동을 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백안시하게 된다면 그분들의 귀중한 삶, 투쟁했던 기록, 이것이 역사에 한 페이지도 안 남는다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율성 논란’은 공산주의자들의 항일활동을 ‘백안시(白眼視)’해서 생긴 게 아니라, 정율성의 대남(對南) 적대 활동을 축소·은폐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정율성 거리전시관 정비해 韓中관계 공고히 하는 매개로 삼을 것”

 

방송 말미에 항상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 여러분의 소중한 수신료로 제작됐습니다’라는 문구를 넣는 KBS가 정율성 다큐멘터리 제작에 들인 돈은 7000만원 가량이다. 정율성을 기념하기 위해 억대의 돈을 쓰는 곳도 있다. 광주광역시는 2005년부터 연평균 4억6000만원을 들여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광주는 이 행사를 2008년부터 중국 난창(南昌)시와 상·하반기로 나눠 연 2회 개최한다. 광주시는 “광주가 낳은 중국의 3대 음악가인 정율성을 매개로 한중(韓中) 문화교류 및 관광 활성화와 공연문화 발전 도모”를 ‘정율성 음악제’ 개최 동기로 밝혔다.

원래 이 행사는 광주 남구(南區)가 시(市) 교부금 5억원을 받아 시작했다. 그러다 예산 부족으로 난항(難航)을 겪자, 시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주관했다. 작년부턴 문화예술진흥위 문예진흥기금 50억원과 광주시 출연금 50억원 등 총 100억원 규모의 기금으로 설립된 광주문화재단이 행사를 맡고 있다.

2005년 광주 남구에서 정율성 기념행사를 기획할 때 그의 전력(前歷)에 대한 얘기가 오갔는지 알기 위해 구(區)의회 회의록을 보려 했지만, 온라인으로는 2008년도 회의록부터 열람할 수 있었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남구 의회에서 정율성에 대해 논의한 사항은 ▲생가(生家) 논란 ▲흉상(胸像) 설치 ▲정율성로(路) 조성 등으로 정율성 기념사업 진행과 관련된 문제들뿐이었다. 그중 신인용(申仁勇·57) 구의원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정율성 선생이 우리 학교 선배 돼요.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 ‘학교를 빛낸 숭일인상’해서 제가 드리자고 했는데, 누구를 줄 것인가 선정이 안되어 버린 거예요.” (2009년 1월 16일 제154회 임시회)

현재 남구 양림동에는 2009년 1월 조성한 길이 233m의 ‘정율성로’가 있다. 길 왼쪽 벽면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연안송> 악보 동판(銅板), 관련 기록물,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정율성 흉상도 설치돼 있다. 심지어 중국인민해방군가를 들을 수도 있다. 최영호(崔榮鎬·47) 남구청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우리 사회 안팎에 시대착오적인 이념 몰이 흐름이 있다고 해서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인 인물까지 함께 잃어버리는 것은 역사적인 손실”이라며 “정율성 거리전시관에 더욱 입체적이면서도 알찬 내용을 담아 정비해서 한중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매개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 정율성 기념물은 각각 정율성 생가라고 일컬어지던 광주 동구와 화순에 있다. 정율성기념사업회가 생가라고 주장하는 동구 불로동 163번지 히딩크관광호텔 앞에는 ‘정율성 선생 생가복원 추진위원회’가 세운 높이 4.5m 비석이 있다. 2006년 9월 세워진 이 비석에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 탄생지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 정율성이 숭일학교로 전학 가기 전 2년 동안 다닌 기록이 있는 화순 능주초등학교에도 그의 흉상이 있다. 이 학교가 2008년 10월 개교 100주년을 맞아 세웠다고 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흉상 기단(基壇)에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건립취지문이 적혀 있다.

<아시아에 희망을 선사한 혁명가인 선생의 뜨거운 조국애와 열정적인 예술혼을 기리며 그 호연지기의 기상을 후배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한다>

정율성路 조성에 약 1억원 들여

정율성 기념사업 추진 경위를 알기 위해 광주 남구청 정모 주무관과 통화했다. 그는 정율성음악제의 최초 기안자다.

―정율성을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2002년 한 일간지 기자가 ‘양림동이 정율성이란 분의 고향인데 아느냐’고 전화로 물었는데, 몰라서 그 부분을 알아봤거든요. 마침 그때 시(市)에서도 월드컵 때 중국인들에게 관광수단으로 괜찮을 것으로 생각해 조사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관련 내용을 찾다가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이후 중국인 교수와 알게 돼서 정율성에 대해 얘기했더니 그가 ‘(정율성이) 중국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얘기하면서 그 가족들과 소개를 해 줬습니다. 그렇게 해서 더 알게 됐죠.”

―정율성이 북한에 가서 활동한 내역과 중공군으로 참전(參戰)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 군가가 만들어진 게 1937~38년이잖아요?”

―그때는 <연안송>이나 <팔로군대합창>이죠.

“그러니까요. 그걸 그대로 쓴 거예요. 새로 만든 게 아니라고요.”

―북한에 가서 만든 건 <조선인민군 행진곡> ….

“여보세요! 그렇게 따지려고 저한테 전화하셨습니까. 제가 곧 회의라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하셨으면 하는데요.”

―사업 추진 당시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습니까.

“당시 안기부(국정원)에서 오라고 해서 가서 자료를 냈어요. 거기서 일단 한번 해 보라고 해서 했던 건데요. 안기부도 조사를 많이 했더라고요.”

―2006년 이후 남구에서 정율성 기념사업을 추진한 사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율성로 조성은 남구에서 한 것 아닙니까.

“정율성로는 도로명 개선사업 할 때 양림동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이름을 정한 거예요.”

―정율성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거리전시관 아닌가요.

“(정율성) 생가 매입도 못한 상황에서 주민들이 와 봐야 볼 게 없어서 거리에 정율성 선생과 관계된 자료들을 전시했습니다.”

―조성비용이 얼마나 들었습니까.

“1억원이 좀 못 됐나, 그랬을 겁니다.”

―생가 매입 계획은요.

“예전에는 집주인이 너무 높은 가격을 부르고, 구(區)도 재정난을 겪고 있던 때라 사질 못했는데요. 지금도 그 가격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光州, “鄭律成음악제 계속 개최하겠다”

 

‘갱도요새’에서 노래 부르며 휴식을 취하는 중공군. 정율성은 6ㆍ25전쟁에 참전해 중공군 사기 고취를 위한 군가를 작곡했다.

현재 정율성 음악제는 광주문화재단에서 주관하지만, 그래도 최종결정권은 시(市)가 갖고 있다. 향후 음악제 개최 계획 등을 묻기 위해 광주광역시에 전화했다. 대변인실은 “담당부서에 물어보라”며 소관 부서로 넘겼다. 다음은 문화수도예술과 담당자와의 문답이다.

―광주시에서 행사를 주관하게 됐을 때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까.

“제가 작년 8월에 업무를 맡아서 예전 서류에서 관련 내용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논의를 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데요.”

―정율성이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까.

“KBS 다큐멘터리로 시끄러울 때 언론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 시민들에게 소개를 한 적이 있습니까.

“업무를 맡은 지 1년밖에 안돼 이념적인 부분을 소개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에서 이름을 걸고 특정인을 기념하는 음악제라면 그 사람이 기념할 만한 인물인지 알 수 있게 시민에게 객관적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지 않나요.

“그건 초창기에 해야 할 사항인 것 같네요. 지금은 음악제를 시작한 지 꽤 돼서 시민들에게 그걸 새삼스레 알리는 것보다는 ‘공연이 있다’는 형식으로만 알리는 게 맞다고 보는데요. 이 음악제는 시민들에게 사상이나 이념을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광주 출신 작곡가 정율성을 매개로 클래식축제를 하는 겁니다.”

―클래식축제를 하는 거라면, 굳이 정율성이란 간판을 달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냥 클래식음악회는 많잖아요. 광주클래식음악회라고 하면 …. 광주에 임방울 국악제가 있는데, 그냥 광주판소리대회라고 하는 것보다는 임방울 선생님이 광주 출신이고 판소리를 했기 때문에 그분을 매개로 하면 활성화가 된다는 계획에서 했을 거예요.”

―그건 임방울 선생을 광주의 브랜드로 내세우는 것 아닙니까.

“뭐 ….”

―마찬가지로 ‘정율성’도 광주의 브랜드가 된 거네요.

“광주 출신이고 중국에서 추앙받는 작곡가니까 ….”

―정율성 기념관 건립 등 사업 확대 계획도 있습니까.

“검토된 적이 없습니다. 클래식음악회 위주로 하려고 합니다.”

―정율성 음악제를 계속 개최할 계획인가요.

“예, 그럴 계획입니다.”

광주가 내세우는 정체성(正體性)은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다. ‘민주 도시’는 공산 독재자를 찬양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중국 옌볜대학 예술학원 김성준 교수의 논문 <정율성의 음악 활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정율성은 <영광은 스탈린에게(1950)> <모(毛) 주석께서 우리를 인도하다(1959)> <모 주석의 장엄한 성명은 방향을 가리킨다(1970)> 등을 지었다. 또 ‘평화 도시’는 중공군의 불법개입에 참여해 전쟁을 독려한 선동가와도 연결이 안된다. 그 사람이 어느 나라에서 무슨 일을 했든, 유명하고 ‘우리 고장 사람’이기만 하면, 광주의 정체성과 맞지 않아도 기릴 수 있단 것인가.

 

                2022년 8월호

 

20[추적] ‘6·25 남침’ 때 ‘中·北 군가 작곡자’를 추앙하는 光州

민주·평화·인권 도시’가 ▲남침 독려 ▲독재자 찬양 인사 기리는 ‘모순’

/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 시진핑과 문재인이 ‘한중 우호’ 상징으로 내세웠던 ‘중국인’ 정율성
⊙ 6·25 때 북한·중공군 독려 군가 다수 작곡… ‘적화통일’ 선동한 ‘적군’
⊙ ‘김일성 상장 영상’ 상영, ‘항미원조 운운 사진첩’ 전시된 화순군 소재 ‘정율성 고향집’
⊙ 정율성 관련 시설물을 ‘주요 볼거리’로 내세우는 광주광역시
⊙ 동구에는 ‘정율성 역사공원’… 남구에는 ‘정율성 기념관’ 조성 예정
⊙ ▲성악 콩쿠르 ▲정율성 동요제에 세금 지원… 정율성 음악제에 연평균 3억2540만원 써
 
사진=월간조선
2017년 12월 15일, 중국을 국빈(國賓) 방문한 문재인(文在寅) 당시 대통령은 베이징대(北京大)에서 ‘한중 청년의 힘찬 악수, 함께 만드는 번영의 미래’를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연설 도중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강조하기 위해 “광주(光州)시에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의 음악가 정율성(鄭律成)을 기념하는 ‘정율성로’가 있다. 지금도 많은 중국인이 ‘정율성로’에 있는 그의 생가를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역시 2014년 7월 방한 당시 서울대 강연에서 정율성을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치켜세운 바 있다.
 
  일반에는 생소한 정율성이란 인물은 광주광역시 태생의 중국인 작곡가다. 정율성은 중국인이므로, 현행 중국어 표기법상 ‘정뤼청’이라고 해야 하지만 편의상 정율성이라고 지칭한다. 정율성은 1914년 당시 전남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다. 이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담해 소위 ‘혁명음악’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군가를 짓고, 6·25 때는 북한군으로 참전했다. 민족반역자·전쟁범죄자 김일성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동족상잔을 격려하는 북한군가를 다수 작곡했다. 이후에도 ‘중국공산당’에 적(籍)을 두고 북한에 남아 이른바 ‘창작 활동’을 했다. 그 후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죽을 때까지 음악을 ‘공산혁명’의 수단으로 여기다가 눈을 감았다.
 
  그 일생을 보면, 정율성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반국가단체’ 북한 정권 입장에서 대한민국에 대항한 ‘적(敵)’이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을 살상하고, 재산을 파괴한 ‘북한군’의 일원이었다. 우리의 자유통일을 저지하고, 민족적 비극인 ‘분단’을 고착화한 ‘중공군’ 소속이기도 했다. 이런 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랑스레 내세우거나 우호선린의 상징 또는 매개체로 내세울 만한 인사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문 전 대통령 입에서 그 이름이 거리낌 없이 호명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찌감치 대한민국 안에서 국민 세금으로 ‘정율성 포장·미화·찬양 작업’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율성의 의열단 활동 입증하는 근거는?
 
광주광역시 산하 광주문화재단은 정율성을 주제로 한 대중(對中) 교류 명목으로 취안저우(泉州) 방문 공연(2018년) 등을 진행했다. 사진=뉴시스
  정율성은 중국공산당에 가담해 지금의 중국 인민해방군 공식 군가(軍歌)인 ‘인민해방군가(팔로군 행진곡)’를 작곡했다. 1934년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당시 중국 국민당군의 토벌을 피해 패주를 거듭한 끝에 중국 산시성(陕西省) 옌안(延安)에 자리하는데, 이를 기린다는 명목으로 ‘옌안송(延安頌)’을 짓기도 했다. 중국 안에서는 이른바 ‘혁명음악의 대부’로 불리며, 중국의 국가 ‘의용군 행진곡’의 작곡가 녜얼(聂耳)과 ‘황허(黃河) 대합창’을 만든 선싱하이(詵星海)와 함께 소위 ‘중국 3대 현대 음악가’로 꼽힌다. 2009년 9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신(新)중국 창건영웅 100인’에 선정됐다.
 
  정율성은 1914년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부친 정해업(鄭海業)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부은(富恩)이었다. 《정율성 평전》과 이를 참조한 국내 정율성 관련 연구물을 보면, 정율성은 1933년 5월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의열단 간부학교 입교생을 모집하러 국내에 잠입한 셋째 형 의은(義恩)을 따라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그해 9월 의열단 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 정율성은 정신·정치·군사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동기 55명과 함께 졸업했다. 그 후 정율성은 난징 고루(鼓樓)전화국에 침투해 일본인 전화를 도청(盜聽)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이게 바로 정율성의 생애 중 유일한 ‘항일(抗日)’ 행적인데,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이는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이 1992년에 펴낸 《작곡가 정율성》에 기술된 주장에서 비롯됐는데, 이를 인용한 관련 저작물을 보면 대체 왜 정율성을 ‘항일 독립운동가’라고 치켜세우고, 그를 기려야 하는지 공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항상 “비밀공작을 수행했다”는 식의 기술만 있을 뿐이다.
 
 
  ‘중공 찬가’ 만든 게 ‘항일 독립운동’?
 
  정율성이 정말 항일 독립운동을 했고, 그 목적으로 ‘비밀공작’에 참여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현재 국내의 정율성 옹호론자들이나 정율성을 관광자원으로 삼아 중국 관광객 돈을 만져보려고 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은 ‘독립운동가 정율성’이란 주장을 지속적으로 유포하고 있다. 정율성에 관한 여러 논문과 중국 측 기록을 살펴봐도 ‘의열단원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 알 길이 없다. 백번 양보해서 정율성이 실제 의열단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그 기간은 60년 넘는 그의 일생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정율성이 정말 ‘의열단원’이었다고 해도 그가 마오쩌둥과 김일성 또는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에 충성하며 대한민국 적화(赤化)를 기도한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일부 인사들은 정율성이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타이항산(太行山)에 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살림을 책임진 교무장을 맡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항일 독립운동가’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선혁명군정학교는 무정(武亭·본명은 박병희. 6·25 때 북한군 2군단장으로 남침)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산하 조직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 팔로군 산하의 일개 무장 정치 선전대에 불과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던 ‘항일 독립군’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당시 정율성을 포함한 조선의용군은 ‘항일’보다는 자신들의 세력 확대와 국민당 정부 축출을 꿈꾸던 중국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혹여 내심으로는 ‘조국 독립’의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그들의 행적을 보면 ‘항일 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 자체를 찾기 어렵다. 한마디로 중국공산당에 가담했다고 해서 이를 ‘항일 독립운동’이라고 칭송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셈이다.
 
  당시 팔로군은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치르지 않고, 후방에서 형식적인 소규모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중국 일반 주민과 국민당 정부군 장병을 대상으로 한 선전·세뇌 작업에 열중했다.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동안 세력 확장에 집중한 것이다. 소위 ‘제2차 국공합작’ 와중에도 국민당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군에 각종 기밀을 넘기기도 했다는 게 최신 연구 결과다.
 
 
  북한군·중공군가 작곡에 진력
 
  정율성은 평생을 중국과 북한을 위해 살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면서 팔로군을 위한 군가를 짓고, 소위 ‘혁명 의식’을 고취하는 음악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1945년 12월, 정율성은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 황해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1947년에는 평양에서 조선보안대 구락부 부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곧바로 협주단을 만들어 2년여에 걸쳐 북한 전역 순회공연에 나섰다. 북한 당국은 그의 노고를 위로하며 ‘모범 근로자’ 칭호를 내렸다. 1949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기간 그는 북한군가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6·25 남침 당시 북한군이 불렀던 노래, 월북(越北)시인 박세영(朴世永)의 시에 곡을 붙여 훗날 ‘조선인민해방군가’가 된 ‘조선인민군행진곡’이 바로 정율성의 곡이다.
 
  1950년 9월, 중국으로 돌아간 정율성은 다시 중국공산당 당적(黨籍)을 회복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했다. 완전한 ‘중국인’이 된 정율성은 그해 12월, 소위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다시 참전했다. 그는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중공군과 함께 서울까지 내려왔다. 중공군으로 참전한 그는 약 4개월 동안, 북한이 주장하는 조국해방전쟁, 중국이 강변하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을 수행했다. 이 기간, 그는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士氣)를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인민유격대 전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등을 만들었다.
 
  이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정율성은 1966년 소위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의 농촌, 공장, 병영, 소수민족 등을 소재로 창작 활동을 했다. 오페라 〈망부운(亡婦雲)〉 등이 이 시기에 그가 만든 작품이다. 마오쩌둥이 지은 시사(詩詞)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이후 문화혁명 기간 정율성은 주로 천렵(川獵)과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976년 12월 사망했다.
 
 
  음악 재능을 중공과 북한 노동당에 바쳐
 
  정율성의 음악 인생을 반추하면 ▲중국공산당의 옌안·타이항산(8년) ▲김일성의 북한(6년) ▲마오쩌둥의 중국(25년)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국내 인사들이 주장하는 정율성의 ‘항일 독립운동’이 실재한다면, 그 시기는 중국공산당 소속으로 활동했던 초기 8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기간, 정율성이 만든 곡들을 보면 우리 민족의 독립과 상관성을 갖는 작품을 찾기 쉽지 않다. ‘조국 독립’에 대한 ‘항일열사 정율성’의 의지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과연 정율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 공산혁명을 꿈꾼 것일까, 조국 독립을 바랐던 것일까.
 
  사실상 정율성은 항일과 거리가 먼 중국공산당 활동에 주력했고, 북한의 남침을 독려하고 적화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중국 귀환 후에는 당시 우리 ‘적성국’의 국민으로 살았던 자에 불과하다. 설혹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해도, 정율성은 그 재능을 ‘중국 공산혁명’과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바쳤을 뿐이다. 혈연적으로는 한국인일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그는 철저하게 중국인이었고, 사상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원’이었다. 대한민국이 ‘독립’하는 데 일조했다고 전혀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설령 그가 조국 독립에 티끌만 한 공이 있다고 해도 훗날 반(反)국가행위 혹은 민족반역행위를 했으므로, 대한민국 땅에서 정율성을 기리는 행사가 열려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고향인 광주광역시와 유년기를 잠깐 보낸 전남 화순군은 ‘정율성’을 내세우고 관련 사업에 국민 세금을 쓰고 있다. 《월간조선》은 10년 전인 2012년부터 수차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세금 집행 실태를 고발해왔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이들 자치단체의 행태는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정율성 연고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이고, 경쟁적으로 정율성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2억원 들인 화순군의 ‘정율성 고향집’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에는 정율성이 유년기에 잠시 살았던 집터에 세금 12억원을 들여 만든 ‘정율성 고향집’이 있다. 사진=월간조선
  화순군 능주면에는 ‘정율성 고향집’이 있다. 정율성이 세 살이던 1917년에 화순군 능주면으로 이주해 1923년까지 7년 동안 거주했다고 화순군은 주장한다. 이 기간, 정율성은 능주면 소재 능주공립보통학교(현 능주초등학교)에 재학했다. 화순군은 정율성 거주 사실을 내세워 중국 관광객 등을 유치할 생각인지 그 ‘생가’를 조성했다. 능주초등학교에는 정율성 벽화와 관련 조형물, 기념 시설을 만들었다.
 
  6월 5일 오후 2시쯤, 화순군 능주면으로 진입했다. 능주면으로 들어가는 도로 초입에는 ‘정율성 선생 고향집 1.2km’란 표지판이 서 있었다. 얼마 더 이동하자, ‘정율성 선생 고향집 600m’란 안내문을 또 마주할 수 있었다. ‘정율성 고향집’ 앞 주차장에는 ‘정율성 선생 유적지 안내도’란 대형 표지판이 있었다.
 
  다시 강조하면, 정율성은 6·25동란 당시 동족상잔을 자행한 북한군의 일원으로 우리 국군을 죽이라는 내용의 여러 군가를 작곡했다. 북한군으로서 인공 치하 서울에 진주하기도 했다. 우리 국군의 북진을 방해하고, 대한민국의 자유통일을 좌절시킨 중공군의 군가 다수를 지은 자이기도 하다. 동족상잔을 응원하고, 적화통일을 독려했고, 평생 공산혁명 망상에 사로잡혔던 자를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전남 화순군은 ‘군(郡)’ 차원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선생’으로 모시는 것이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282번지, ‘정율성 고향집’에 도착했다. 화순군은 공터였던 이곳에 12억원을 투입해 초가를 모방한 건물을 짓고, 주차장과 진입로를 조성했다. 화순군이 만든 ‘정율성 고향집’의 면적은 전시관과 관리동을 합쳐 66.86㎡(20평)다.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이후 30분 동안 전시관을 찾은 이는 단 2명에 불과했다. 해당 시설 안내인에게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내인은 “저분(정율성)이 중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이라서 공자학원 사람들이 온다”고 밝혔다.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가 중국어 교육 및 중국의 사상, 체제와 문화를 전파·홍보한다는 명목으로 세계 각지에 세운 기관이다. 표면적으로는 ‘교육’ ‘대외 협력’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중국공산당의 통제·지시를 받는 선전기구, 간첩 양성소란 비판을 받는다. 이런 이유 탓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공자학원을 퇴출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버젓이 ‘김일성 포상장’ 소개하는 의도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 소재 ‘정율성 고향집’에서는 정율성이 ‘동족상잔’ ‘민족분단’의 원흉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상장’이 담긴 영상이 버젓이 상영되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화순군 능주면 소재 ‘정율성 고향집’의 방은 3개다. 그중 한 곳은 정율성 관련 사진과 각종 기록물을 영상화해 이를 반복해서 틀어주는 곳이었다. 그 영상을 쭉 보다가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했다. 북한 김일성이 정율성에게 준 포상장을 버젓이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상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상장
 
  우(右) 동지(기자 주: 정율성)는 확고한 민주사상과 애국적 열성으로 1947년경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함에 헌신참가하여 책임 있게 사업을 수행하였으므로 이를 포상함.
 
  1948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정율성 고향집’에 전시된 사진첩에는 정율성이 6ㆍ25 전장에서 곡을 짓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 설명에는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미국에 대항했던 전쟁이란 뜻의 ‘항미원조’가 명기돼 있다. 사진=월간조선
  정율성 사진첩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해당 사진첩에는 인민군 방한모를 쓴 정율성이 악보를 쳐다보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의 설명에는 “정율성이 항미원조 시절 남긴 소중한 사진으로 전쟁 중 열악한 환경에서 창작하는 정율성의 헌신과 혁명의 낭만주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고 써놨다.
 
  항미원조란, “북한을 돕기 위해 미국에 대항한 전쟁”이란 뜻을 가진 6·25의 중국식 표현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불법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각종 전쟁범죄를 자행한 김일성 세력을 격퇴하려는 우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좌절시킨 중공군의 억지 주장이 국내에서 거리낌 없이 유포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전남 화순군이 조성한 ‘정율성 고향집’은 ‘과연 이곳이 대한민국이 맞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비상식적인 전시물과 각종 주장, 표현들로 가득했다. 그 건물 마루 한쪽에 쌓인 ‘위대한 음악가 정율성 선생의 삶의 자 취’란 제목의 홍보물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율성 선생 연대기 ▲항일 독립운동가 정율성 선생 ▲정율성 선생 연표 ▲정율성 선생의 고향집 재현 ▲정율성 선생을 기리기 위한 화순의 노력과 자원들 등으로 구성된 해당 홍보물은 그야말로 정율성 찬양 일색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 행적은 지금까지 밝혀진 게 없으며, 오로지 평생을 중국공산당과 북한 독재정권을 위해 살아온 ‘한국계 중국인’에게 ‘위대한 선생’ 운운하며, 특기할 일도 많지 않은 그 생애를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칭송하는 그 행태에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위대한 음악가, 아시아에 희망 선사한 혁명가!”
 
정율성이 잠시 다녔다고 하는 화순군 능주초등학교 본관 우측 벽면에는 정율성을 그린 대형 모자이크가 있다. 사진=월간조선
  ‘정율성 고향집’을 나와서 인근에 있는 능주초등학교로 갔다. 앞서 밝혔듯, 능주초등학교는 과거 정율성이 다닌 능주공립보통학교의 후신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도 정율성 관련 기념 시설이 다수 조성됐다. 먼저 능주초등학교 본관 우측 벽면에는 정율성 모자이크(10×11m)가 있었다. 건물 한쪽 벽면 전체를 ‘정율성’으로 채웠다. 본관 뒤쪽 후문으로 가는 길에는 ‘정율성 선생상(像)’이란 흉상이 있었다. 그 뒤에는 정율성의 생몰년인 ‘1914년’과 ‘1976년’을 뜻하는 조형물을 설치해놨다. 흉상 기단에 음각된 ‘건립 취지’에는 다음과 같은 찬양문이 있었다.
 
  “동아시아 현대음악의 최고 반열에 오른 능주초등학교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 정율성 선생,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팔로군행진곡’ ‘옌안송’ 등 300여 곡의 주옥같은 선율을 남긴 작곡가요, 아시아에 희망을 선사한 혁명가인 선생의 뜨거운 조국애와 열정적인 예술을 기리며 그 호연지기의 기상을 후배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 흉상 옆에는 또 ‘항일 독립운동가 정율성 선생’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이 있었다. 이 조형물에 기술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화순이 고향인 정율성 선생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이곳 화순군 능주면에서 초등학교 등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정율성 선생은 중국의 ‘3대 혁명 음악가’이자, ‘신(新)중국 창건 100대 영웅’으로 선정되는 등 작곡가로서 중국 대륙에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정율성 선생은 음악가와 더불어 독립투사로 강고한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중략) 이제라도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선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능주초등학교에는 정율성 관련 기념물 말고는 조형물이 많지 않았다. 관찰한 바로는 여느 학교에 다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형상화한 작은 동상 2개가 전부였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능주초를 졸업한 학생과 현재 재학 중인 81명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위인’이라고 인정하는 세종대왕·이순신 장군보다 정율성이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압도적으로 그 규모가 크고, 수가 많은 정율성 기념물을 보면서 공부하고,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광주 남구 양림동의 ‘정율성로’
 
광주광역시 남구는 2009년 양림동 소재 ‘정율성 생가’ 인근의 도로변 233m를 ‘정율성로’로 단장해 개통했다. 사진=월간조선
  6월 6일, 67회 현충일 정오에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을 찾았다. 양림동은 정율성과 그 가족이 ‘정율성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광주 남구가 정율성 관련 각종 시설물을 설치한 ‘음악가 정율성로’가 있다. 총연장 233m에 달하는 ‘정율성로’는 2009년 1월 29일 개통됐다. 당시 남구청장은 문재인 정부 때 한국전력공사 상임감사위원으로 임명돼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최영호씨다.
 
  ‘정율성로’ 왼쪽, 양림동 휴먼시아 2단지 외벽은 ‘정율성 거리 전시관’으로 조성됐다. 이 보도 초입에는 작년 8월에 신규 설치한 ‘정율성 부조’가 있었다. 해당 조형물은 정율성이 바위에 걸터앉아 만리장성 너머를 바라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중국에서 왕성히 활동하신 정율성 선생님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한·중 교류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제작·설치했다”고 한다. 이어서 피아노 건반을 형상화한 구조물과 함께 ▲정율성 사진 ▲정율성 기념사업 내역 ▲중국 내 정율성 인지도 ▲정율성의 ‘옌안송’ 악보 동판 ▲정율성 기록물이 233m에 걸쳐 전시돼 있었다. 이 길 끝에는 정율성 상반신 그림과 함께 “동아시아의 예술혼, 음악가 정율성”이란 문구가 적힌 큰 표지판이 있었다. 또 길 건너편에는 북한 또는 공산권 국가들의 조각과 유사한 형태의 ‘정율성상’이 있었다. 이 동상은 중국 광저우시의 청년연합회 지부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광주 대표 볼거리가 ‘정율성 집’?
 
또 다른 ‘정율성 생가터’인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소재 벤○○호텔 주차장에는 ‘정율성 탄생지’ 비석과 ‘율성정’이 있다. 사진=월간조선
  또한 ‘정율성로’는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원의 도로명 주소로 사용되고 있다. 현장을 찾은 당일은 전술한 것처럼 현충일이라서 간혹 태극기를 게양한 집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집 대문 옆에는 ‘정율성로 ○○’이란 도로명 주소 팻말이 붙어 있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날에 태극기를 내건 ‘애국시민’의 집조차 행정적으로는 북한군가, 중공군가를 작곡하고 대남 적화를 꿈꿨던 공산주의자의 이름을 딴 주소명을 써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소위 ‘정율성로’ 인근에는 또 다른 ‘정율성 생가’가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7○번지 소재 주택이다. 정율성 가족은 이곳을 ‘생가’라고 주장했다. 현재 이곳은 민간인이 소유·거주하고 있어 관광객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대신 대문 옆에 방문 기념으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이른바 ‘투어 스탬프’ 시설이 설치돼 있다. ‘정율성 생가’를 꼭 가봐야 할 관광명소로 홍보하는 셈이다.
 
  실제 광주광역시 광주 관광 안내지도 ‘오매 광주’를 보면, 광주의 숱한 마을과 거리 중 광주 원도심 충장로 일대와 ‘양림동 역사문화마을’만 확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중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의 내용을 보면 가장 굵은 글씨로 표기한 관광지 6곳 중 3곳이 정율성 관련 시설물(정율성 생가, 정율성 거리, 정율성 흉상)이다.
 
  한편, 광주광역시에는 남구뿐 아니라 동구에도 정율성 기념물이 있다. 정율성로에서 1km 떨어진 동구 불로동 163번지 소재 벤○○호텔에도 정율성 기념 시설이 있다. 과거 히딩크관광호텔이었던, 이곳의 주차장 안쪽에는 ‘정율성 선생 생가 복원 추진위원회’가 2006년 9월에 세운 높이 4.5m 비석이 있다. 이 비석에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 탄생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석 옆에는 ‘율성정(律成井)’이란 우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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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는 2020년 5월, 이 생가터와 남구 양림동 소재 ‘정율성 생가’를 사들여 각각 ‘정율성 역사공원’과 ‘정율성 기념관’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당시 광주광역시는 양림동 생가 매입과 시설비 등으로 10억원을 책정했다. 불로동 생가터와 그 인접 부지 매입과 시설 조성에는 38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했다.
 
  광주광역시는 또 2015년 12월, 광주천변 서석교-학강교 구간 보도(1.6km)와 학강초등학교 주변 도로(420m)에 ‘정율성 노래길’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동작감지기를 설치하고, 노래길 가로등에 자동 음악 재생 기기를 달아 행인들이 자동으로 ‘정율성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현장을 찾았을 당시 정율성 음악은 흘러나오지 않았으나, 광주천변 다른 구간과 달리 서석교-학강교 구간 보도에는 음향증폭기가 설치돼 있었다.
 
  지금까지 살핀 광주광역시와 전남 화순군에 산재한 정율성 관련 시설들의 공통점은 세 가지다. 첫째, 근거 불분명한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그 누구보다 애국심이 끓어 올랐던 것처럼 정율성을 묘사한다는 점이다. 둘째, 정율성의 음악적 재능과 그의 작품들을 과도할 정도로 칭송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정율성의 6·25 당시 행적과 북한군가 작곡 이력은 도무지 얘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장황한 정율성 찬양문 중에는 정율성의 북한 관련 행적 기술이 전혀 없다.
 
 
  ‘정율성’에 목매는 광주시와 남구
 
광주문화재단은 2005년부터 매년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6년 동안 총 19억5250만원을 ‘정율성 국제음악제’에 지원했다. 사진=뉴시스
  이 밖에도 《월간조선》이 입수한 광주광역시와 남구의 자료를 보면, 이들 자치단체는 정율성 관련 시설 건립은 물론 각종 행사 개최, 민간 활동에 세금을 투입하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그 산하기관인 광주문화재단이 2005년부터 매년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광주광역시의 최근 6년 동안의 지원금은 ▲2017년 3억5500만원 ▲2018년 3억5500만원 ▲2019년 3억5500만원 ▲2020년 3억1950만원 ▲2021년 2억8400만원 ▲2022년 2억8400만원 등이다. 6년 동안 총 19억5250만원을 ‘정율성 국제음악제’에 사용한 셈이다.
 
  광주문화재단은 또 정율성을 주제로 한 대중(對中) 교류 명목으로 ▲취안저우(泉州) 방문 공연(2018년) ▲중국 저장성(浙江省) 방문 공연(2019년) ▲중국 저장성 공연단 광주 초청 공연(2019년) 등을 진행했다.
 
  광주광역시는 2007년에 4800만원을 들여 ‘정율성 국제음악제 및 선양(瀋陽)·후난성(湖南省) 노선 연계상품 개발을 위한 관광설명회’를 개최했다. 2008년에는 3580만원을 투입해 ‘정율성 국제음악제 관광설명회 및 신규 상품 판매 촉진을 위한 설명회’를 열었다. 2009년에는 2127만원을 쓰면서 ‘정율성 국제음악제 중국 공연 연계 광주 관광 상품 설명회’를 했다. 2013년에는 ‘온리 광주 도심권 관광 기반 구축을 위한 정율성 스토리텔링 개발 계획’이란 명목 아래 ‘광주시민의○○’란 단체에 용역을 줬다. 용역비는 2700만원이다. 2017년에는 양림동 정율성로 홍보 영상 모니터 보수에 2000만원, 정율성 거리 복구 사업에 5400만원을 썼다.
 
  광주광역시 남구 역시 다양한 정율성 관련 사업에 세금을 쓰고 있다. 남구 작성 자료에 따르면 2016~2022년, 1억9000만원을 썼다. 해당 기간, ‘정율성 동요제’ 홍보 방송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광주 MBC에 총 1억2000만원을 지출했다. 이 밖에 ▲정율성 사진 전시회 보조금 300만원 ▲‘정율성 책자 발간’ 300만원 ▲정율성의 항일 공훈 조사 보조금 250만원 ▲정율성 관련 유적·인물 탐방 보조금 720만원(2020~2022년) ▲다큐멘터리 〈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홍보·방송 송출 지원 3000만원 ▲‘정율성과 김원봉의 항일 이야기’ 팟캐스트 제작 지원 250만원 ▲정율성 거리 하자 보수 1850만원 등에 약 7000만원을 썼다.
 
 
  “정율성으로 광주의 ‘親中’ 이미지 형성 기대”

 
광주 도심 광주천변 곳곳에는 이처럼 정율성 관련 시설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사진=월간조선
  광주광역시와 그 산하 자치구인 남구는 왜 ‘반(反)대한민국’적 인물인 ‘정율성’을 기릴까. ‘민주화의 성지’를 자처하는 광주에서 반(反)인권적 폭압 통치 체제에 충성하며 음악 재능을 바친 자를 치켜세우는 배경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돈’, 소위 ‘차이나 머니’다.
 
  광주광역시는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일찌감치 ‘중국과 친해지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정율성’을 주요 자산으로 활용하려 했다. 이런 까닭에 평생을 중공과 북한을 위해 살았던 정율성을 ‘위대한 음악가’라고 칭송하고, 관련 시설들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공자학원’이 있는 호남대학교(광주 소재 4년제 사립대)의 산학협력단이 작성해 2016년 12월 광주광역시에 제출한 연구용역 보고서 〈제6차 광주권 관광 개발 계획(2017~202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총 362쪽인 해당 보고서에는 ‘정율성’이란 이름이 44회 등장한다. 이는 광주광역시가 ‘정율성’이란 인물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해당 보고서 연구진은 정율성 관련 시설이 있는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출생지), 남구 양림동(주 거주지), 전남 화순군(유년기 거주지) 일원에 ‘호남권 차이나 관광 벨트’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광주와 전남에 분포한 한·중 우호 인물, 중국 관련 역사유적 등 친(親)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광역권 차이나 관광 벨트와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중국 친화적 관광 매력물 개발 및 대(對)중국 광주·전남 상생협력의 거점 공간 구축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사업 기간은 2017~2021년(5년), 총사업비는 200억원(국비 100억원, 지방비 100억원)이다. 사업의 기대효과로는 ▲정율성으로 대표되는 광주의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중국인 친화 관광 이미지 형성 기대 ▲친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펑유(朋友·친구) 마케팅’ 등 대중국 관광 마케팅 플랫폼 성장 기대 등을 제시했다.
 
  또한 “정율성을 대중국 프로모션의 핵심적 가교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율성 생가 복원·관련 시설 정비 ▲한·중 우호교류 기념관 조성 ▲정율성 스토리텔링 개발 등을 제안했다. 이어서 ‘독립운동가·천재 음악가 정율성’의 삶과 연애사를 관광 홍보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대한민국 헌법 정신’과 ‘정율성 추앙’은 ‘상충’
 
  이 같은 광주의 ‘정율성 사랑’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과 들어맞지 않는다. 헌법이 규정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와 ▲영광은 스탈린에게(1950) ▲모(毛) 주석께서 우리를 인도하다(1959) ▲모 주석의 장엄한 성명은 방향을 가리킨다(1970) 등 대규모 학살과 정치적 숙청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 공산 독재자를 찬양한 정율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정통성과 합법성을 가진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적화를 시도한 공산 세력에 부역한 정율성을 대한민국 또는 그 산하 지방자치단체가 세금으로 기리는 것은 ‘자폭(自爆)’ ‘자해(自害)’와 같은 비상식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그저 중국 관광객을 많이 끌어들여서 돈 좀 만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우리 국가 공동체에 무슨 짓을 했든지 상관 않고 관광자원으로 내세워도 된다는 발상은 ‘황금만능주의’ ‘배금주의(拜金主義)’의 전형이다.
 
  더구나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를 자처하는 광주광역시가 ‘관광 수입 증대’를 제일 목적으로 정율성이란 자를 추앙한다면, 이는 ‘자기부정(自己否定)’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다.⊙
 

 

'6·25 때 중공군' 정율성 기념에 48억원…박민식(국가 보훈부 장관)

"누구에게 혈세 바치나"

이슬기2023-08-22 11:10:16

中 인민해방군 행진곡·조선인민군 행진곡 작곡
6·25 전쟁 때 중공군으로 참전해 위문 공연당 조직
中 귀화해 '혁명 열사 묘'에 묻힌 정율성
박민식 "공산군 응원 대장, 독립유공자 인정 안 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광주광역시가 북한의 '인민군 행진곡'을 만들고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 참전해 서울까지 내려왔던 정율성(정뤼청·1914~1976) 기념 공원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 '전면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박 장관은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48억 원을 누구에게 바친단 말입니까'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광주시의 사업을 비판했다.

박 장관은 "광주시가 올해 말까지 '정율성 기념 공원'을 짓는다고 한다. 이미 광주에는 '정율성로'도 있고 '정율성 생가'도 보존돼 있다"며 "음악제나, 고향집 복원 등에도 많은 세금을 썼는데, 안중근, 윤봉길도 못 누리는 호사를 누려야 할 만큼 그가 대단한 업적을 세웠느냐"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하늘에서 정율성 찬양 미화 작업을 지켜보고 계실 독립지사와 호국, 민주화 영령들이 얼마나 통탄할지 솔직히 부끄럽다. 정율성이 독립유공자인가"라며 정율성의 일대기에 대해 조목조목 따졌다.

광주시 출생인 정율성은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에서 음악을 공부한 그는 중국 공산당원이 된 뒤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인 '팔로군 행진곡'을 만드는 등 항일 작곡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은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쓰이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으로 귀국해 6년간 머물며 조선인민군 구락부장을 지냈고, 김일성 정권과 공산당을 찬양하는 '해방행진곡'을 만들었다. 1949년에는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박 장관은 "그가 작곡한 조선인민군 행진가는 한국전쟁 내내 북한군의 사기를 북돋웠다"고 평가했다.

정율성은 6·25 전쟁 때는 중공군으로 참전해 전쟁 위문 공연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으로 귀화한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을 위한 작품을 쓰다 1976년 중국 혁명 열사 묘에 묻히며 생애를 마쳤다.

박 장관은 정율성에 대해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조선인민군 행진가를 만들어 6.25 전쟁 남침의 나팔을 불었던 사람, 조국의 산천과 부모·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공산군 응원 대장이었던 사람이기에 그는 당연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니다"며 "중국 영웅 또는 북한 영웅인 그 사람을 위한 기념 공원이라니, 북한의 애국열사 능이라도 만들겠다는 것이냐"고 개탄했다.

그는 "그렇게도 기념할 인물이 없는가"라며 "김일성도 항일운동을 했으니 기념 공원을 짓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냐"고 꼬집었다.

이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선 그를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기념한다는 것은 5·18 묘역에 잠들어 계신 민주주의 투사들을 욕보이는 일이기도 하다"며 "더구나 48억원이라는 막대한 세금이 투입되는 일이다. 비록 광주시 차원의 시 재정이 쓰인다고 하지만 시 재정은 국민의 혈세가 아니냐"고 지적했다.

박 장관은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 자유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섰던 사람을 우리 국민 세금으로 기념하려 하는 광주시의 계획에 강한 우려를 표한다"며 "전면 철회되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
 
 

광주 (전남 화순) 출신 중국 혁명음악가 정율성 역사공원 연말 완공

송고시간2023-08-13 07:00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지

[연합뉴스 자료사진]

(광주=연합뉴스) 손상원 기자 = 광주 출신 중국 혁명음악 대부 정율성(1914∼1976) 선생을 기리는 역사공원 조성사업이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13일 광주시에 따르면 시는 동구 불로동 878㎡에 '정율성 역사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공사를 하고 있다.

역사공원에는 정율성 선생의 삶과 음악 세계를 기리는 광장, 정자, 교양·관리 시설 등이 들어선다.

광주시는 2020년 3월 이곳을 공원으로 지정하고 같은 해 5월 공원 조성계획까지 결정했지만, 보상 갈등으로 사업은 지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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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토지수용위원회, 행정 소송까지 가는 분쟁 끝에 소유권 이전을 마쳤다고 광주시는 전했다.

광주시는 토지 보상비를 포함해 모두 48억원을 들여 연말까지 공원 조성을 완료할 방침이다.

정율성 선생 생가 중 한 곳으로 거론된 주택은 자재 상태 등에 따라 완공이 다소 미뤄질 수 있다.

정율성 선생은 광주와 전남 화순에서 자라다가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오월의 노래(1936년)', '팔로군 행진곡(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1939년)' 등을 작곡했다.

지자체를 중심으로 기념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됐으나 동구 불로동, 남구 양림동, 화순군 능주면 등 생가 논란으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광주시, 광주 동구·남구, 전남 화순군은 2015년 고증을 거쳐 논란을 마무리 짓고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sangwon700@yna.co.kr

 

 
능주초, 정율성 추억이 서린 곳
김재근 객원기자의 맛담멋담   |   2023-03-16
  © 화순매일신문


정율성
, 오천만 한국인에겐 낯설지만 십삼억 중국인에겐 추앙(推仰)의 대상이다. 하얼빈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도 있다.

전진 전진 전진 / 태양을 따라서 나간다 조국의 대지를 밟으며 / 민족의 희망을 지녔다 우린 무적 필승불패 대오! / 우리는 영용한 전사 우리는 인민의 군대 / 인민 위해 민주 위해 / 윈쑤들을 모조리 쓸어 물리치고 모택동 기치 높이 날리자 / , 나팔소리 울린다 혁명의 노래 드높다 / 동무들아 발을 맞춰 싸움터로 가자 / 동무들아 발을 맞춰 국경초소로 가자 / 전진 전진 태양을 따라서 나간다 / 최후 승리 위해 전국 해방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군가인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 가사다. 조선 출신 작곡가 정율성이 곡을 썼고, 중국 시인 궁무가 노랫말을 붙였다,

 

원래 제목은 팔로군 행진곡(八路軍進行曲)’으로 1939년 가을 옌안시에서 만들어졌다. 2차 국공내전 때는 해방군 행진곡으로 불렸고, 1965년에 지금의 이름인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바꾸었다. 1988년는 중국인민해방군 정식 군가가 되었다.

 

정율성(鄭律成, 1914~1976)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양림동에서 4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명은 부은(富恩)이었다. 3세에 지금의 전남도 화순군 능주로 왔다. 8세에 능주공립 보통학교(현 능주초등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다녔다. 10세에 다시 광주로 갔다.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형들(효룡, 인제, 의은)은 물론 누이 봉은의 남편 박건웅도 항일 투쟁을 벌인 독립투사였다. 19세인 1933년에 중퇴하고 셋째 형 정의은(鄭義恩)을 따라 중국으로 갔다. 조선 의열단과 공산당에 가입한다. 옌안의 루쉰 예술학교 음악학부에서 음악을 배웠다. 이때 율성으로 개명하였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갔다. 6·25전쟁 중 중국으로 갔다. 중국 국적을 취득했고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문화혁명 때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6년 향년 62세로 베이징 근교에서 사망하였다(위키백과와 네이버 백과사전 도움을 받았다).

 

  © 화순매일신문


대표곡으로 <조선의용군 행진곡> <연안송> <팔로군 행진곡> 등이 있다. 연안송(延安頌)은 팔로군 행진곡보다 1년 전에 작곡했다. 모택동이 격찬했고 13억 중국인의 아리랑이라고 불릴 만큼 널리 사랑받았다. 항일 투쟁과 뛰어난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아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3대 인민 음악가로 선정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정서에 맞는 노래를 만들었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정율성 생가가 있다. 거주하는 곳이라 앞에 안내판만 세웠다. 정율성 기념 거리와 기념관도 있다. 매년 정율성 음악 축제가 열린다.

 

능주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지석천변 영벽정에서 낚시하며 놀았다고 한다. 전남 화순 출신의 항일 혁명 음악가로 소개하기도 하는 이유다. 화순군은 정율성을 회상하는 공간을 조성했다.

 

능주초등학교 후문으로 들어서면 정율성 흉상과 기념비와 그림이 있다. 마주 보이는 4층 건물 벽면에 커다랗게 초상화를 그렸다. 백 주년 기념관 2층엔 초등학교 시절을 재현한 교실이 있다. 운동장을 돌아 정문 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다. 학교 수업 중일 때만 볼 수 있다는 게 아쉬웠다. 한참을 서성이며 관리자에게 사정도 해 보았으나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평일에 시간을 언제 낼 수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정율성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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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고향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다. 주차창 벽면엔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어릴 적 지석천변 영벽정에서 낚시를 하는 모습이다. 주차장에서 집까지 연결된 골목길 벽면도 그림이 있어 소소한 재미가 있다.

 

집에 도착하면 ㄱ자형과 ㅡ자형 두 채의 초가가 맞이한다. 복원했다는 고향집과 화장실이다. 아담한 장독대도 보인다. 마당 한쪽 서 있는 말 동상에 한참 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왜 이것이 여기에 있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집은 초가였지만 기둥도 도리도 보도 서까래도 단정했다. 초가에 저리도 반듯한 사각 기둥이라니, 기와집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구조와 크기는 정율성 딸의 증언에 따랐을 수도 있다고 크게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기록을 더듬어 유추해보면 정율성 부친은 가세가 기울어 능주로 온 듯하다. 아무리 봐도 집이 너무 과했다. 집에 비해 전시된 물품은 너무 초라했다. 마루에 걸린 조그만 액자 하나만 기억에 남는다. 방에 축음기가 하나 더 있었던가... .

 

출발은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있는 정율성 거리였다. 동상을 보았고, 노래를 들었다. 사진을 보며 거닐었다. 가까이 있는 생가에도 들렀다. 자동차로 30분 남짓 걸리는, 능주초등학교와 영벽정과 고향집도 방문하였다.

 

보지 못한 초등학교 시절 모습도 그렇거니와, 고향집이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계속 거슬린다. 주변과 어울리지 않고 그렇다고 품격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노래비 하나 세움만 못해 보인다. 돈은 적지 않게 들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상상력이 아쉽다.

 

정율성이 아무리 그리워했을지라도 결코 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이 널려 있을 능주를 거닐어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지석천변 영벽정에서 느끼는 콧바람도 나름 상큼하다.

 

정율성을 대하는 태도는 극과 극이다. 그는 의열단으로 활동한 독립투사였다. 하지만 북한은 연안파라는, 우리는 중국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모른 체 한다. 광주에서 나고 화순에서 자란 그를 잠시라도 기억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능주초등학교 정율성 합창부 발전을 기원한다.

 

* ‘맛담멋담은 오늘을 살피어 내일을 다듬는, 화순(和順)의 산물(産物) 인물(人物) 문화(文化) 음식(飮食) 이야기[]. 네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

 

 

  중국에서 혁명음악가로 활동한 정율성의 흉상. 그가 태어난 광주광역시 남구의 양림동 휴먼시아아파트 옆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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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조국의 토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의 무적의 역량. 우리는 농민과 노동자의 자제, 우리는 인민의 무장, 두려움 없이, 굴복은 없다….'

샹치엔(向前), 샹치엔(向前), 샹치엔(向前)으로 시작되는 노래에서 일순 긴장감이 묻어난다. 그 치열함에 심장의 피가 끓는다.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현실을 박차고 어디론가 나아가야 할 것 같다.

<팔로군 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이다. 간결한 언어의 울림이지만 장엄하고 호방한 선율이 흐르고 있다. 이 노래는 중국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에 맞선 당시 인민해방군들에게 즉시 달려 나가 싸우도록 만든 진군의 나팔소리였다.

중국의 3대 혁명 음악가로 불리는 정율성(1914∼1976)이 25살 때 작곡한 노래다.

  정율성 흉상. 그가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을 보낸 전남 화순의 능주초등학교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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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군 행진곡>은 중국 역사의 큰 줄기와 함께 했다. 홍군이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할 때 불렸다. 1988년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전 국가주석 때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반포되고, 인민해방군의 공식 의전곡으로 지정됐다.

이후 중국 군대의 모든 행사와 각종 집체의식은 물론, 중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도 널리 유행하고 있다. 1990년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을 알리는 곡으로 쓰였다.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식 때 천안문 광장에서도 울려 퍼졌다.

2015년 9월 3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7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불려졌다. 중국의 건재함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13억 중국인들에게 긍지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중국 역사상 가장 거창한 열병식에서였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군악대와 합창단 2400명이 연주하고 노래한 이 음악에 맞춰서 군대를 사열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인민해방군 군가'는 국가(國歌) 다음으로 높은 위상을 갖는 노래다. 정율성이 중국에서 '군혼(軍魂)'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중국의 공식 군가를 만든 음악가라는 의미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와 '연안송'을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정율성 거리전시관. 광주시 남구 양림휴먼시아의 담장에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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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일상적으로 들어볼 수 있는 곳이 남도땅 광주에 있다. 양림동에 있는 정율성 거리 전시관이다. 거리 전시관은 양림휴먼시아의 담장 233m에 걸쳐 만들어져 있다. 정율성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이력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그가 사랑한 바이올린도 조각 작품으로 내걸려 있다.

여기에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악보가 그려져 있다. 악보 옆에 설치된 작은 버튼을 누르면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소리는 크지 않지만, 울림이 매우 강하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율성의 거리 전시관이 여기에 들어선 것은 정율성과 양림동과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정율성은 1914년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 16-7'이 그의 생가로 알려져 있다.

  정율성 거리 전시관 풍경. 정율성이 태어난 광주광역시 남구의 양림휴먼시아의 담장 233m에 걸쳐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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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율성 거리 전시관 풍경. 그의 이력이 새겨져 있고, 그가 사랑한 바이올린도 조각 작품으로 내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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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은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으로 일본에 맞선 혁명전사가 됐다. 1938년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옌안(延安)에서 <연안송>을 지었다. 연안송은 중국 100대 국민가요로 꼽힌다. 이듬해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중국정부는 정율성을 중국의 항일전쟁과 혁명에 복무한 국제주의 전사로, 혁명음악가로 칭송하고 있다. 지난 2009년 건국 60주년 때엔 그를 '신중국 창건 100대 영웅'으로 선정했다.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국가 기념시설인 정율성 기념관도 건립했다.

정율성은 중국과 북한에서 많은 가곡과 동요, 영화음악과 오페라음악을 남겼다. 모두 360여 곡에 이른다. <팔로군 행진곡>과 <연안송(延安頌)>은 대표 중의 대표곡으로 꼽힌다.

'석양의 빛은 산봉우리 탑을 비추고, 달빛은 강가의 반딧불을 비춰주네. 봄바람은 평탄한 벌판에 불어가고, 많은 산들은 견고한 장벽을 이루었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고성(古城)….'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는 <연안송>은 당시 중국 전역에서 애창됐다. 이 노래는 연안을 넘어 중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피 끓는 젊은 청년들을 옌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중국인들이 정율성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이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율성의 생가. 1914년 이곳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중국으로 건너가 혁명음악가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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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은 광주 양림동에서 정해업과 최영은의 사이에서 5남 3녀의 5남으로 태어났다. 정율성은 능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숭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학교에 입학했다. 광주학생운동을 성원하는 전주학생운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19살 때인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의 길로 나아갔다. 정율성이 중국으로 간 데에는 형제들의 영향이 컸다. 형제들이 이미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고 있었다. 큰형 효룡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둘째형 충룡은 의열단원으로, 셋째형 의은은 조선혁명간부학교의 모집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정율성은 셋째형 의은을 따라 누나 봉은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 중국으로 간 정율성은 난징(南京)에 있던 항일투쟁 간부 양성소인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다녔다. 이후 정율성은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한다. 음악공부도 이때 시작한다.

정율성은 1937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특사 자격으로 옌안으로 간다. 이름도 본명 정부은(鄭富恩)에서 '아름다운 선율(律)로 인민의 목소리를 완성(成)한다'는 뜻을 담아 정율성(鄭律成)으로 고쳤다. 이후 루쉰(魯迅)예술문학원 음악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창작에 몰두한다. 명작으로 꼽히는 <연안송>을 이때 작곡한다.

정율성은 1939년에 더 많은 곡을 만든다. <팔로군 행진곡>도 이때 나왔다. 모두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을 창작하는데, <팔로군 행진곡>은 그 중의 대표곡이다. 25살 때였다.

<팔로군 행진곡>은 1951년 2월 1일 <인민해방군 군가>로 이름을 바꾸고 1953년 5월 1일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고쳤다가 1965년에 <중국인민해방군 진행곡>으로 명명됐다. 그 즈음 1941년 정율성은 항일군정대학 음악지도원으로 배치돼 활동하던 정설송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정율성과 정설송 부부. 정율성의 초등학교 모교인 화순 능주초등학교 내에 설치된 정율성 음악교실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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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은 결혼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육장으로 항일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해방 뒤엔 북한으로 잠시 들어갔다. 그는 북한에 머물며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등을 작곡한다.

1942년 작곡한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나중에 북한의 공식 군가로 지정됐다. 한 사람이 중국과 북한의 군가를 모두 작곡한,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을 맞은 곡이 <조선인민군 행진곡>이었다.

정율성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중앙악단 등에서 활동했다. 1976년 62살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중국의 혁명열사릉인 빠바오산(八寶山)에 묻혀 있다.

  정율성 생가에 설치돼 있는 안내판. 식민지 한반도를 떠나 중국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벌인 독립투사로, 혁명음악가로 산 그의 일생이 정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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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율성 음악교실 풍경. 그가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을 보낸 전남 화순의 능주초등학교에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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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은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혁명음악가였다. 식민지 한반도를 떠나 중국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벌인 독립투사였다. 전선에서 숨겨진 재능을 발휘, 음악 창작에 몰두했다. 중국에서는 항일전쟁과 새로운 중국 건설에 투신한 국제주의 전사로, 혁명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북한에선 현대음악을 재건한 음악일꾼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의 눈에는 아직도 잊혀진 조선의용군이자 항일 민족음악가에 머물고 있다. 항일 음악전사이자 중국 3대 혁명가의 한 사람인 정율성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정율성을 중국에서 활약한 음악가로만 제한하기엔 그의 삶이 너무 크고 넓다.

광주를 중심으로 정율성 재조명 작업이 시작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정율성 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그를 추모하는 크고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정율성 흉상 제막, 정율성로(路) 개통, 생가 터 표지판 건립, 사진 전시 등도 이를 위한 걸음이다.

정율성 관련 논문이 발표되고 학술 세미나가 열리는 것도 위안이다. 광주문화재단이 2015년 정율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삶과 음악세계를 조명한 '사진으로 본 정율성'과 '정율성 가곡집'을 펴낸 것도 성과다.

그가 초등학교 1∼2학년(1922∼1923년) 시절을 보냈던 전남 화순군에서는 능주초등학교에 동상을 세우고 정율성 기념교실을 설치했다. 어린 정율성이 살았던 옛집 터를 중심으로 기념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하나 같이 의미 있는 걸음들이다.

  정율성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학생들 사진. 그의 모교인 화순 능주초등학교의 정율성 음악교실에 게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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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국 칼럼] '호남은 좌익들의 온상인가, 자유민주주의의 성지인가'

호남에게 묻습니다"

https://youtu.be/I7s97Wy9JUc?si=pmxXoS4jnFryqgCV 

Aug 23,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