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의 거인 박정희 대통령 과업-1961년 5월 16일 혁명의 아침 / 최초 해외파병 베트남전] / "새마을 운동의 시초? / 경부고속도로 비하인드 스토리 / 세계가 놀란 '산..

2023. 7. 29. 13:36역사의 연구/한국역사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의 거인 박정희 대통령 과업

"[박정희 아카데미 특강] 역사의 거인, 인간 박정희"

https://youtu.be/OHLlAfIgJcU

Feb 7, 2023 
 
 
 
 
 

국민교육헌장 박정희대통령의 카랑카랑한 육성낭독

https://youtu.be/Kdd9vcZEYTs

 
 
Mar 4, 2023

 

 

"국민교육헌장_영문버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國民敎育憲章, 영어: National Chart of Education

https://youtu.be/3Syifru8BR8

 
Dec 27, 2019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회원님 한분 한분이 보내주시는 소중한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환히 웃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꾸며 많은 분들이 함께 손잡고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을 이어가는 일에 동참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 기념관 홈페이지 http://www.presidentparkchunghee.org/

 

 

1961년 5월 16일 혁명의 아침 [제59주년 5·16혁명 특집 : 대한민국의 건설]

 https://youtu.be/VkTPxlmNfa4

 
May 17, 2020
 

 

5.16 군사혁명(1961년 5월 16일)

https://youtu.be/wKJbQgU8b10 

 
May 19, 2019

 

5.16 군사혁명 공약

https://youtu.be/q22DvxfDVck

 

 

5.16 혁명을 지지하는 육군 사관 학교 생도 시가행진 1961년 5월 18일

https://youtu.be/0Wt2C893Sc0

 
May 15, 2023
 

 

대한뉴스 제 314호-5.16

https://youtu.be/XSFgb1mUAVI

 
Oct 20, 2016
 
5.16.
-5월 16일, 부패와 무능으로 국민의 신망을 잃어버린 민주당 정권을 물리치고 보다 더 힘차고 복된 새나라를 위해서 국군들은 궐기함. -장도영 중장을 일당으로 한 군사 혁명 위원회는 입법, 행정, 사법등을 장악. -군대의 궐기에 대한 성명발표.
 
-부패와 무능한 현정권과 기성정치인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길수 없음.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실질적인 반공체계의 재정비와 우리사회의 부패·부악을 일소. -이 나라를 부흥시켜 공산주의와 대결할수 있는 실력을 배양, 5.16과업이 완수되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한다는 내용.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민주당 정권을 인수할 것을 선언, 국회를 해산시킴. -기념식을 가진후의 사관생도, 국군장병들.
 
-5.16을 지지하는 힘찬 구호를 외치며 서울 거리에서의 시가행진.
 
-사관생도 시가행진시 발표내용. -우리들이 궐기한것은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며 오늘의 5.16은 군대 단독의 의사가 아니라 4월 19일 피흘려 쟁취한 혁명의 연장임. -헐벗고 굶주리고 공산주의자의 위험이 날로 증가하는 현실, 국민의 진의를 망각한 무리들의 무기력한 행위의 시정요구 됨.

 

 

대한뉴스 제 323호-박정희 의장 취임 후 첫 기자회견

https://youtu.be/N9GwqIe-OLY

 
Oct 20, 2016

 

 

1961년 5.16 군사혁명 당시 모습 [1961]

https://youtu.be/wQeXlRERDHI

 
 Aug 31, 2016 

 

 

 

"최초의 해외파병 베트남전! '월남특수' 10억 달러 '여기'에 썼다?!

(KBS 20130525 방송)"

https://youtu.be/snCXbh3-E_k

https://youtube.com/watch?v=snCXbh3-E_k&feature=share9

 

 
■ 베트남전의 영웅, 기억과의 전쟁을 시작하다 월남파병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1972년의 안케전투. 그 격전 속에서 6일간 고립되어 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정태경 대령. 당시 중대장이었던 그는 이때의 전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전쟁영웅이 됐다. 여기까지라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영광 뒤에는 그만큼 큰 상흔이 남았다. 고립된 6일간 펼쳐진 지옥 같았던 전투와 그 안에서 죽어갔던 전우들의 모습은 41년 동안 그를 괴롭혀 왔다. 안케전투를 잠깐이라도 떠올리면 일주일간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정 대령. 가족들에게도 그 전투에 대해서만은 함구해왔다. 그렇게 기억을 차단한 채, 41년이 흘렀다. 그 사이 베트남에 갈 기회가 여럿 있었지만, 그는 한사코 거부해 왔다. 다시 악몽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3년 4월, 칠순을 앞둔 그는 베트남행을 결심했다. 외면해 왔던 전쟁의 기억과 맞서기로 한 것이다. 41년의 망설임 끝에 당시 전투현장을 찾은 정대령. 과연 그는 전쟁의 기억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제작진은 그의 특별한 여정을 함께하며 참전용사의 눈으로 본 월남파병의 역사와 그 의미를 담았다.
 
■ 한국 최초의 해외파병, 정부는 왜 파병을 선택했는가 1964년 9월,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병을 시작으로 1973년 3월까지 8년 동안 이어진 월남 파병. 이는 한국 최초의 해외파병이자 연인원 32만이라는 장병을 보낸 대규모 파병이었다. 아직 한국이 국방을 온전히 책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파병을 선택했던 것일까? 당시 정부는 참전의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에 대한 보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자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웠다. 또한,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한 압박 역시 한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파병을 먼저 제안한 것은 한국 정부라는데... 1961년 한국의 파병제안부터 1966년 브라운각서를 통해 미국의 경제 및 군사지원을 얻어내기까지의 과정에서 파병의 진짜 이유를 추적해 본다.
 
■ 전쟁이 준 기회, 월남특수 한국은 베트남 파병에서 약 10억 달러에 이르는 소위 월남특수를 얻었고 이는 경제성장의 디딤돌이 되었다. 미국의 원조와 파월병사들이 송금해온 월급,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초자금이 되었다. 또한, 국내 건설업, 해외운송업, 군수물자 산업은 베트남 진출을 통해 수출길을 열었고, 훗날 중동 붐으로 이어지는 기술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참전 경험을 통해 이뤄낸 한국군의 현대화 역시 큰 소득이었다.
 
■ 월남 붐과 한국사회 열대의 뜨거운 볕 아래서 장병들이 전투를 치르고 있던 때에 한국에서는 파월장병을 응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사업들이 펼쳐졌다.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거행됐던 파월장병 환송식부터 위문편지 보내기, 당대 인기 연예인들을 동원한 위문공연까지 전 국민이 베트남으로 응원을 보냈다. 소위 월남 붐이 형성된 것이다. 대중문화 역시 베트남전에 관련된 노래며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당시를 살았던 시민들과 베트남전 내내 가장 많은 위문공연을 다녀온 가수김세레나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살펴본다.
 
■ 잊혀진 전쟁, 그러나 끝나지 않은 전쟁 2013년, 베트남 철수 이후 40년이 흘렀다. 참전용사들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고, 한국사회에서 베트남 파병은 경제성장의 주춧돌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잊혀가고 있다. 그러나 잊어버리기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와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각 개인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이 영상은 2013년 5월 25일 방영된 [다큐극장 - 최초 해외파병 베트남전] 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대건설 정주영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경부고속도로 비하인드 스토리 대공개~ (KBS 20130713 방송)"

https://youtube.com/watch?v=fQ72dGQKCTU&feature=share9

■ ‘888일의 기적, 경부고속도로’ 1970년 7월 7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우리나라는 물류 혁명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농업사회에서 공업 사회, 더 나아가 중화학 공업 사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기술도 자원도 자본도 없는 가난한 변방국이었다. 어떻게 세계 유례없는, 2년 5개월 만에 최저비용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할 수 있었을까?
 
■ ‘길에서 찾다 - 아우토반 위의 박정희’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아우토반의 모습에 사로잡혔다. 경제발전을 위해서 국가의 대동맥이 될 만한 고속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대규모 토목건설을 할 수 있는 기술도 비용도 없었다. 서독 방문 후, 4년 동안 조용하고 치밀하게 고속도로 건설을 준비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을까? 당시 증언과 함께 경부고속도로와 관련된 박정희의 친필 메모와 설계도 등이 공개된다.
 
■ ‘경부고속도로의 작은 영웅들’ 1968년 2월 1일, 야권과 언론 등에서 쏟아지는 많은 우려를 뒤로 한 채, 드디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첫 삽을 뜨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은 말 그대로 전투현장을 방불케 했다. 정해진 공기 내 완공될 수 있도록 현장은 밤낮없이 돌아가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당시 열악한 공사 환경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초석이 된 그들의 희생을 당시 건설 현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 ‘경부고속도로의 숨겨진 이야기’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을 자극한 서독, 에르하르트 수상의 한마디, 당시 두 정상 사이에는 무슨 말이 오고 갔을까? 당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에 필요한 토지를 어떻게 순식간에 사들였을까? 경부고속도로의 시작인 한남대교는 왜 4년에 거쳐 만들었을까? 현대건설 측에 수지에 맞지 않는 장사가 돼 버린 경부고속도로 건설,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고속도로 건설을 둘러싼 뒷이야기가 공개된다.
 
■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부산에서!’ - 경부고속도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다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우리나라는 새로운 문화가 시작된다. 바로 일일생활권 문화이다.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부산에서 먹을 수 있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적인 효과뿐 아니라 레저문화라는 것이 처음 생겨났다. 또 여러 가지 볼 수 없었던 것들도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고속버스이다. 그 중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버스였던 그레이하운드! 그레이하운드의 운전기사와 버스 승무원은 모두의 선망 직종이었다. 미스코리아 출신 버스 승무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버스 기사와 승무원 등, 7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상징하던 사람들을 만난다.
 
■ ‘더 큰 세상을 향한 길,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이동 시간을 줄인 지리적 효과와 더불어 국토 어디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생각의 반경이 넓어졌고 자신의 가능성 및 꿈을 더 크게 꿀 수 있게 되었다.
 
※ 이 영상은 2013년 7월 13일 방영된 [다큐극장 - 428km의 땀과 눈물, 경부고속도로] 입니다.

 

 

"1970.07.07 경부고속도로 개통" 

https://youtu.be/5GOQZHAzPEI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회원님 한분 한분이 보내주시는 소중한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환히 웃을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꾸며 많은 분들이 함께 손잡고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을 이어가는 일에 동참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새마을 운동의 시초?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마을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것'

[KBS 20130817 방송]"

https://youtube.com/watch?v=qzMaMHVBOu4&feature=share9

■ 이미 예정된 새마을운동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수해 현황을 시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한 마을을 발견한다.
이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경제 성장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만큼 벌어지고 있던 노동격차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한 마을의 온 주민들이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수해 복구를 하는 모습. 이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은 민·관이 함께 주도하는 새마을운동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 요원의 불길, 새마을운동 1971년 전국의 3만 3천여 개의 마을에 335포대의 시멘트가 지급된다. 그리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 질문이 한국 농촌 역사를 새롭게 쓰게 한다. 시멘트를 잘 사용한 마을만 새로운 자재를 지급하게 되면서 마을 간에 경쟁은 결국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진다. 새 지붕이 올라가고, 마을 안길은 넓어지고 고립된 산골마을에 길이 뚫리는 등 인프라 구축이 끝난 마을은 본격적인 소득증대를 위해 과실수를 심고 공동 축사를 세운다. 이 같이 농촌이 극적인 새 얼굴을 갖기까지는 10년이라는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 농촌 개혁의 영웅들 우수한 마을에는 우수한 지도자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인정할 정도로 지도자의 역할을 컸다. 청장년의 지도자들은 마을을 위해 무보수였지만 밤낮없이 마을 주민들의 우려와 반대 속에서도 묵묵히 일해 나갔다. 비닐하우스 재배를 보편화하는데 앞장 서 농가 소득을 올리는데 일조하고, 10대의 어린 나이부터 보리 밀알을 모아 마을을 일으킨 지도자들.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 새마을 운동의 성공 요인, 그리고 뒤안길 새마을운동은 세계 현대사에 유례없는 성공신화를 써내려갔다. 그 안에는 자발적인 주민참여와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이루어낸 앙상블이 있었다. 새마을운동을 주도하는 주무 부서를 두지 않은 덕에 관료화를 피할 수 있었고, 주민들은 정부의 그런 지원 아래 자조적인 사업들을 활발히 펼쳐갈 수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완전한 민간화를 표방한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발족된다. 이후 새마을운동은 비리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얻고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 새마을운동의 현재 얼굴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도, 동남아의 라오스, 미얀마 같은 개도국들에도 우리의 친숙한 새마을운동 기가 펄럭인다. 뿐만 아니라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그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재되었다. 덩샤오핑이 중국 문호 개방을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우리나라만의 근대화 전략은 이미 국제화 되어 있었다.
 
※ 이 영상은 2013년 8월 17일에 방영된 [다큐극장 - 잘 살아보세, 새마을 운동] 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국토의 65%를 나무로 덮었을까?

세계가 놀란 '산림녹화' 비하인드 스토리! (KBS 20130803 방송)" 

https://youtu.be/QCXrmsmEIoM

 
Mar 21,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