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월 맹호부대 안케패스 대 전투 승리(I, II)-안케패스 전투의 시작 638고지로 침투 / 제50주년 안케패스 대혈전 전투 전사 영령 173위 추모식 / 안케패스의 영웅 김영두 저자에게 듣는다 / 눈물로 "눈물로 부르는 전우의 영혼 {진혼가] 월남 안케패스 전투 전사자들을 위한 전승가 전승 51주년 추념식에서"
◯ 전투지역 : 퀴논 항 북서쪽 약 55 Km 월남 중부 고원지대. 638고지 퀴논 ~ 플레이크 간 19번 보급로 일대
◯ 통제부대 : 맹호부대(수도사단)
◯ 전투부대 : 기갑연대 예하 1.2.3 대대. 연대수색중대, 전투지원중대
◯ 배속부대 : 1연대 수색중대, 8중대, 26연대 2중대, 사단 공병대대 1,3중대, 사단 장갑중대.
◯ 지원부대 : 제61,62 포병대대, 미 7 전술공군, 미 129,180 헬기중대 미 환자 후송 중대.
월맹군(적군)
◯ 3사단 12연대,4,5,6 대대
◯ 제95 B연대 63대대
◯ 제12연대 특공중대
◯ 제 450 특공대대
◯ VC E-210 대대, D-26 중대
전 과 : 사살 750명, 개인화기 66정, 공용화기 13정 피 해 : 전사 173명, 부상 : 400여명.
1972년 10월 1일 박정희 대통령 친서 (당시 맹호사단장 정득만 장군에게 보낸 친서)
친애하는 정득만 장군에게
안케 패스 일대의 공산 적을 격멸하고 19번 도로를 개통하기 위한 지난 15일간의 격전에서 우리맹호 사단의 용사들이 정장군의 훌륭한 지휘 하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데 대하여 온 국민과 더불어 충심으로 축하를 보내는 바입니다. 그동안 전투상황은 이세호 사령관으로부터 보내오는 매일 매일의 상보와 합참본부의 종합적인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들도 금반 전투는 종전과는 달리 적의 정규군에 의한 기갑과 화력의 기동력에 있어서 적의 최정예로 자랑하는 부대로써 대항하는 적인만큼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전투를 주시하고 있었던 만큼 이 전투에서 우리의 장병들이 또 다시 전 세계에 그 용맹 을 떨치고 상승의 위용을 자랑한 것은 대한민국의 국위를 다시 한 번 드높이고 온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하는데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확신합니다.
특히 638고지의 치열한 혈전은 길이 전사에 기록될 만한 전투로서 우리 장병들이 이 전투에서 얼마나 고투를 하였고 끈질긴 투지와 뛰어난 용맹성은 군이 하나의 귀감이 되리라고 믿어 마지않습니다. 탁월한 지휘, 왕성한 투지, 예리한 훈련, 양호한 보급지원이 승리의 관건이란 것은 전술교리서나 전투교범에서 언제나 강조하는 하나의 교조이지만 이번 전투에서도 이러한 원리 원칙을 그대로 전장에서 실전에서 적용하고 발휘한 산 교훈 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요건 중에서도 전승의 가장 으뜸가는 요소는 역시 지휘관의 탁월한 지휘능력 이라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 전투에서 장군의 탁월한 지휘를 다시 한 번 치하하고 아울러 장군의 휘하 각급 지휘관과 참모 그리고 모든 장병들의 철석같은 단결심과 투지가 혼연일체가 되어 이런 결과를 가져 왔 다고 봐야 할 것으로 믿고 장병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빛나는 전과 이면에는 아까운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 할 때 우리 모두 겸허한 마음으로 머리 숙여 전우들의 영령에 감사를 드리고 명복을 기원할 따름입니다. 또한 부상을 입은 장병들에게도 하루속히 쾌유하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적의 예봉은 일단 꺾였으나 집요한 적은 언제 또다시 반격을 시도할지 예측키 어려우니 전 장병은 이기고 다시 갑옷의 끈을 조인다는 옛말처럼 더욱 분발하여 차기 전투에 만전의 대비를 갖추어 줄 것을 당부하며 장군과 장군의 휘하 전 장병들에게 더욱 무운장구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1972년 4월 28일 대통령 박정희 안케패스 전투 성과
출처:파월 33년사,안케패스 대혈전(김영두 著)
◯ 맹호부대 제1기갑연대는 사단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안케패스 일대에 침투한 월맹 정규군 3사단 12연대를 격퇴하고 19번 주요 보급로를 개통시킴으로서
◯ 퀴논 항으로부터 크메르 국경에 이르는 19번 도로를 15일 만에 정상 운영케 함으로서 콘돔 ~ 플레이크 지역에서 작전 중인 월남군 제2군단 에 대한 군수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 질 수 있게됨.
◯ 월남 전역에 대한 월맹군 춘계 대공세로 말미암아 안케패스 지역에서도 초기에는 정보 미숙으로 초기 대응에서 피해가 많았음.
◯ 그러나 안케패스 전투에서 맹호부대가 15여일 만에 적 연대 오피인 638고지를 점령하고, 차단된 19번 보급로를 개통함으로써 (대한일보 ‘72.5.1일자) (미 폴스코트 기자 논평)
◯ 주월 한국군은 춘계 대공세를 감행한 월맹군의 공격의지를 책임지역 내에서 저지함으로서,
▶ 월남군이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 월남 2군단의 병참선 확보로 전투지원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 빈딩성장 요청에 의거 26연대 1개 중대를 퀴논시내에 배치함으로써 퀴논 시민의 동요를 저지하였으며,
▶ 당시 상황 하에서 연합군 중에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임을 확신함.
▶ 한국군의 투지와 용맹성과 불굴의 정신은 계속 계승되어야하며, 자유와 평화의 수호신으로 장렬히 산화하신 전우들의 영령 앞에 엄숙히 추모 합니다.
1972년 미국-베트남 평화협상이 한창이고 미국과 한국이 점진적 철수를 하고 있을때,월맹군은 남 베트남에 대대적인 춘계 공세를 시작합니다.
이때 남베트남 중부지대의 평야를 이어주는 안케 도로를 월맹군이 차단하고 내부에 고립된 월남군이 관할지역의 부대인 맹호부대에 지원요청을 합니다.
전투에 나서는 맹호부대원들은 이전까지 허약한 베트콩만 상대하다 북베트남 정규군이자 정예부대에 맞서 엄청난 희생을 치루는데요.
저자이자참전 소총병은 부대가 이 도로를 다시 차지하는 과정 중 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맹호부대 병사들의 고지전을 실감나게 그렸습니다.
주 내용은 적이 차지한638고지와 한국군이 차지한600고지간의 쟁탈전인데요.적은600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어마어마
한 포격과 돌격을 하지만 모두 격퇴됩니다.그리고 한국군도638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포격과 돌격을 하지만...성공합니다.
이 몇일간의 전투에서250명이 전사합니다.
400여명이 부상을 당하구요.
사병은 물론이고 무수한 소대장들,중대장,포병관측장교도 전사합니다.
내용은 심플하고 강력합니다만...
한 전투를 여러명의 증언들을 통하여 밝히다 보니 중복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다른 곳에 연재된것을 옮기셨는지 앞선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것도 많구요.같은 사진도 다른 설명으로 여러번 나오고..무엇보다 문장이 난해합니다.주어가 생략되거나 주어와 동사가 일치되지 않아 불분명하네요.
우리는 얼마전 백선엽 장군 생존 시부터 현충원의 묏자리 문제로 상당한 논쟁을 겪었습니다. 일부에서 백선엽 장군을 현재 수용 공간이 없는 서울의 장군 묘역에 특별 묘역을 조성하거나 또는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부터 였습니다. 많은 논쟁을 거듭하였습니다만 금년 7월 백선엽 장군이 작고하신 후 대전현충원의 장군2묘역에 안장하면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런데 8평으로 시신 안장을 허용하는 장군묘역과 화장 후 유골 안장하는 일반 장병묘역 1평의 차등 논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건군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이면서 최대규모, 최장기간의 전투부대 파병이었던 베트남 파병에서 채명신 사령관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채명신 장군이 주월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대단했다. 일부에서는 그의 인기가 너무 높아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견제하기 위해 조기 귀국시킨 후 전역 시켰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채명신#베트남#한국군사령관
안케패스대혈전 전승 전우회 에서는 수도사단 창립 70주년 기념행사에 초빙 받아 관람을 하였읍니다 자유대한민국 군은 아직 살아있다 최대 국가 위기에 정치판 주사파 붉은 무리들이 집권하여 북한을 주적이 아니다 하고 군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적화된 청와대와 입번 사법 행정 모든 상부계층을 잡고 있는 반역에 세력들 과연 전방 사단 장병들에 생각은 어떠 할까 하고 반의심하며 최정예 수도권 기계화사단을 초청받아 방문하여 보았다
창립 70주년 기념행사에 연병장에서 의장대 사열과 행사 열병식과 함께 장병들과 잠시나마 어울릴수 있었다 특이한것은 전차부대 전차장이 여군 중위로 탱크를 지휘하고 있고 애국심에 불타있다 장병들은 혼연일체 씩씩한 모습으로 활기찬 군생활을 하고 있다 식당에서 선임하사에게 훈련은 어떠하냐 물어보니 끈질기게 승부욕을 갖고 끝까지 하면 된다 하는 신념으로 강인한 군인정신 을 육성중이다 한다 탱크를 몰고 야전 훈련나가면 그러나 주민들이 생업에 지장이 있다 하고 훈련을 못하게 저지하는것이 애로이다 한다
군부대 똥별들 국뻥장관과 지휘부는 붉게 물드러 간첩선이 삼척까지 들어올때까지 몰랐다는 오리발 로 심각한 안보위기 상황이다 그러나 군을 지키고 있는 대부분 중간 지휘관들과 초급장교 하사관 병들 모두는 아직 자유대한민국을 굳건히 지키고 있고 흔들리지 않고 있다 특이한것은 여군 장교들이 엄청 많이 남군들과 함께 씩씩하게 군대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이 아직 우리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조금은 안심을 한다 더이상 이들마저도 좌경화 되지 않도록 교육과 애국심고취를 할수있는 동기부여 붉은 무리들에 침투를 막아야 할것 같다
월남파병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1972년의 안케전투. 그 격전 속에서 6일간 고립되어 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정태경 대령. 당시 중대장이었던 그는 이때의 전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전쟁영웅이 됐다. 여기까지라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영광 뒤에는 그만큼 큰 상흔이 남았다. 고립된 6일간 펼쳐진 지옥 같았던 전투와 그 안에서 죽어갔던 전우들의 모습은 41년 동안 그를 괴롭혀 왔다. 안케전투를 잠깐이라도 떠올리면 일주일간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정 대령. 가족들에게도 그 전투에 대해서만은 함구해왔다. 그렇게 기억을 차단한 채, 41년이 흘렀다. 그 사이 베트남에 갈 기회가 여럿 있었지만, 그는 한사코 거부해 왔다. 다시 악몽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3년 4월, 칠순을 앞둔 그는 베트남행을 결심했다. 외면해 왔던 전쟁의 기억과 맞서기로 한 것이다. 41년의 망설임 끝에 당시 전투현장을 찾은 정대령. 과연 그는 전쟁의 기억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제작진은 그의 특별한 여정을 함께하며 참전용사의 눈으로 본 월남파병의 역사와 그 의미를 담았다.
■ 한국 최초의 해외파병, 정부는 왜 파병을 선택했는가
1964년 9월,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병을 시작으로 1973년 3월까지 8년 동안 이어진 월남 파병. 이는 한국 최초의 해외파병이자 연인원 32만이라는 장병을 보낸 대규모 파병이었다. 아직 한국이 국방을 온전히 책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파병을 선택했던 것일까? 당시 정부는 참전의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에 대한 보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자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웠다. 또한,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한 압박 역시 한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파병을 먼저 제안한 것은 한국 정부라는데... 1961년 한국의 파병제안부터 1966년 브라운각서를 통해 미국의 경제 및 군사지원을 얻어내기까지의 과정에서 파병의 진짜 이유를 추적해 본다.
■ 전쟁이 준 기회,
월남특수 한국은 베트남 파병에서 약 10억 달러에 이르는 소위 월남특수를 얻었고 이는 경제성장의 디딤돌이 되었다. 미국의 원조와 파월병사들이 송금해온 월급,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초자금이 되었다. 또한, 국내 건설업, 해외운송업, 군수물자 산업은 베트남 진출을 통해 수출길을 열었고, 훗날 중동 붐으로 이어지는 기술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참전 경험을 통해 이뤄낸 한국군의 현대화 역시 큰 소득이었다.
■ 월남 붐과 한국사회 열대의 뜨거운 볕 아래서 장병들이 전투를 치르고 있던 때에 한국에서는 파월장병을 응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사업들이 펼쳐졌다.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거행됐던 파월장병 환송식부터 위문편지 보내기, 당대 인기 연예인들을 동원한 위문공연까지 전 국민이 베트남으로 응원을 보냈다. 소위 월남 붐이 형성된 것이다. 대중문화 역시 베트남전에 관련된 노래며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당시를 살았던 시민들과 베트남전 내내 가장 많은 위문공연을 다녀온 가수김세레나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살펴본다.
■ 잊혀진 전쟁, 그러나 끝나지 않은 전쟁 2013년, 베트남 철수 이후 40년이 흘렀다.
참전용사들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고, 한국사회에서 베트남 파병은 경제성장의 주춧돌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잊혀가고 있다. 그러나 잊어버리기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와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각 개인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이 영상은 2013년 5월 25일 방영된 [다큐극장 - 최초 해외파병 베트남전] 입니다.
#안케패스#맹호부대#월남전 안케패스 대혈전 전승 전우회 에서 월남 안케전투가 시작된 4월24일을 기하여 매년 추모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올래 51주년 행사는 안케패스에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임동춘 중위를 배출한 육군 보병학교장과 귀빈들을 모시고 성대하게 추모행사를 갖이었습니다
엄숙하게 거행된 추모행사는 현충탑 참배 후에 월남 전사자들이 ;가장 안식을 많이하고있는 제3묘역으로 이동하여 전투중 전사한 영혼들에게 진혼곡으로 그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내빈추모사 와 안케전투 전승비문 낭독 격려사 이어서 안케패스 대혈전 전승 전우회 회장님이 직접 목격하고 5박6일 진지사수 하며 갈증을 오줌과 커피로 타 마시며 사투를 하여 지켜내신 중대장으로 안타깝게 전사한 중대원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먹이시며 적진지에 항공사격유도와 포사격을 유도하여 638고지에 남아서 저항하는 잔적들을 궤멸시키고 드럼퉁을 굴리며 공격하게 만들며 사수하신 영웅 중대장 입니다 또한 참전 하여 전우들의 죽음을 수없이 목격한 애국가수 정연후님의 전우의 영혼을 눈물을 흘리며 부르고 다같이 맹호부대가와 생사를 같이 하였던 전우야 군가를 부르고 행사를 맞치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베트공이 아닌 월맹 정규군이 남침을 하여 온 정규군 이었읍니다 당시 월남 사회는 공산주의자들이 곳곳에 침투하여 낮에는 정부에게 협조하고 있다가 밤만 되면 공산당원에게 쇠뇌 당하여 공산 베트공으로 활동하며 월남 정부를 괴롭혀 오고 있었읍니다 점점 베트공들은 기세가 등등 하여지며 사회를 혼란시키고 무질서하게 정부를 공격하고 북부 월맹 호지명의 지령을 따라 베트남 사회를 혼란 시켜 오던중 북위17도 위에 월맹 정규군이 험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안케패스 19번 도로 교통 요지 고지인 638고지 주변을 포위하며 여기에 주둔중인 맹호 기갑연대 1중대 전술기지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중 수색정찰 활동하고 있던 아군과 조우 전투가 시작되었읍니다 자세한 전투 승전보 • 월남전선 - 안케패스전투 월남 안케패스 전사한 전우들 추모 3부 진혼곡 애사 나팔소리 조총발사 울며부르는 전우가와 가야금소리로 혼령을 추모 https://studio.youtube.com/video/dkYp...
2부 00;32~ 08;14 안케영웅들 이야기 임동춘중위 중대장 김용강대위와 전령이야기 전쟁포로로 잡혔다 귀환한 유종철일병이야기 첩보대장 박순유 중령이야기
3부 08;15~ 09;30 638고지를 지키는 전승비 이야기 0931~10;30 638고지에 대혈전이 벌어진장소에 거대한 비목을 맹호가 기념으로 보관하다 철수시 귀국시켜 육사교장에서 다시 살아나 후배 장교들에게 산교육물이 되다
4부 10;31~11;47 638고지 탈환작전은 대규모 월맹정규군과 교전이 이루어진 사단급 대규모 대작전이었다
5부 11;48~ 12;59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두 소대장 영웅 고 임동춘중위와 이무표중위 이야기
6부 13;00~14;36 첩보대장 박순유 중령 적진깊숙히 침투 첩보 작전활동하다가 전사 14;37~15;44 첩보대장 박순유 중령에 강인한 군인 가족 모친과 부인이야기 15;45~16;32 박순유 중령 아들 박민식 국가 보훈처장으로 임명 최고의 보훈처장으로 활동중
7부 16;33~17;21 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
맹호 안케패스 작전에 참여한 부대원들은 국가에 충성 월남전 최대전투 안케패스 작전에서 적들을 용감하게 무찌르고 살아 돌아온 전우들은 전사한 전우들 173위 추모행사를 매년 엄숙히 추모식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월맹군이 기습 점령중인 638고지 공격하다 전사한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임동춘 대위와 이무표 대위 이야기 총각 중대장 김용강대위 와 같이 전투를 하다 중대장 전사에 전령 김익환이 이를 못잊어 국립묘지 묘비앞에서 자결하여 중대장곁으로 간 애닯은 이야기 안케패스의 역사를 갖고 묵묵히 지키는 거대한 비목 육사교육장에 영원히 세워져 후배장교들에게 월남전 교육표상이 되고있다
전쟁포로후 330일만에 귀환 유종철 이야기 맹호 첩보대장 박순유 중령의 학창시절 애국활동과 첩보대 활동중 적지에서 전사한 이야기와 그의 아들 박민식이 훌륭히 자라 국회의원을 하였고 보훈처장이 되어 국가에 헌신하고 있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