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고구려(리), 대륙백제, 대륙신라 강역도 그리고 고려 땅(II) - 우리 고대사 되찾은 독립운동가 신채호 / 민족의 뿌리, 상고사를 말하다 /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 "모든 역사학자들 입..

2023. 5. 11. 02:44역사의 연구/고대역사

고조선과 고구려(리), 대륙백제, 대륙신라 강역도 그리고 고려 땅(II)

KBS 역사스페셜 – 역사만이 희망이다, 단재 신채호 /

KBS 2001.3.10 방송

https://youtu.be/ELpQbNNB3vg

 
Nov 30, 2020
 
-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1 대사건,
 
묘청의 난 1125년 주신관계를 원하는 금나라에 화친하려는 당시 고려 문벌귀족에 대해 승려 묘청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킨다.
 
그것이 유명한 묘청의 난이다. 후에 금나라의 전쟁보다 화친을 주장했던 문벌귀족의 대표적 인물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는데....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1의 대사건으로 보고 있다. 또한 사대와 보수를 전복시킨 독립적 진취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단재는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압록강 이서에 위치한 발해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그 후 역사관을 제한 축소시켜 인식하게 했으며 사대주의에 젖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또한 진취적이며 개혁적이고 화랑의 전통을 이어받은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으로써 천년을 이어오는 우리 역사는 진취성도 개혁성도 독립성도 모두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
 
- 신채호는 행동하는 무장투쟁가였다
 
“우리의 생존은 우리의 생존을 빼앗는 우리의 적을 없애버리는 데서 찾을 것이다” 때로는 테러리스트라고 불려지던 의열단에게 단재는 1923년 의열단의 행동목적 및 지침서를 만들었다.
조선혁명선언은 독립투사들에게 투쟁의 교본이 됐다. 이후 단재는 독립운동을 홍보하고 폭탄공장을 만들기 위한 자금 마련에 직접 나서게 된다. 일본을 거쳐 대만에서 그 뜻을 이루려는 순간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옥고 중 살 수 있는 기회도 일제 앞잡이의 도움이라는 이유로 받기를 거절했다. 결국 단재는 1936년 2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신채호는 역사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기록이라며 역사를 투쟁으로 쟁취한 결과물로 보고 있다. 단재 신채호에게 있어 일제 식민지에서 나라를 되찾는 길은 타협이 아니라 투쟁이었다.
 
- 역사를 바로잡는 일 = 독립, 역사만이 희망이다 신채호는 한말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애국심이며. 애국심의 원천은 역사라 했다. 당시 국사 교과서는 일제 식민주의에 의해 왜곡돼 있었고 그런 식민사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이고 강대했던 역사 찾기에 몰두한다. 우리 고대사의 체계는 단군으로부터 부여,고구려, 발해로 계승된다는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 신채호의 주장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것이었다.
우리 고대사는 단군에서 기자, 위만으로 계승된다는 종래 사학자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만이 희망이라며 역사연구를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던 단재. 그는 애국심을 기르고 고취시키는 방편은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는 것이라 여겼다. 그것을 곧 독립으로 가는 길이라 여겼으며 지금이 아니라 후대일지라도 제대로 된 역사를 통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열쇠가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역사스페셜 105회 – 역사만이 희망이다,
 
단재 신채호 (2001.3.10.방송) http://history.kbs.co.kr/

 

삼한(三韓)과 삼조선(三朝鮮)

https://youtu.be/4XpX5dWq4E4

 
Jun 26, 2021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삼한이 단군조선과 다른 별개의 세력이 아니라 본래 단군조선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단군조선이 삼한, 즉 세 개의 조선으로 이루어진 연맹체였다는 것입니다.
 
삼조선 분립과 삼한이동설에 대한 신채호 선생의 이론을 살펴봤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과 판단도 들어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단재신채호1부 - 일편단생, 오직 독립을 위하여 / KBS대전 20190814 방송

https://youtu.be/dY_vMBl9IkQ

 
KBS대전 특별기획 2부작 단재 신채호
 
1부 - 일편단생, 오직 독립을 위하여
 
신채호의 호는 알려진 대로 단재. 또 다른 호는 일편단생. 마음 속에 품었던 한 조각 붉은 마음은 '오직 독립을 위하여' 쓰여졌다.
 
중국 뤼순의 차가운 감옥 안에서 숨을 거둔 외롭지만, 의로웠던 혁명가! 우리에게도 기리고 배울 영웅들이 있다며 힘차게 웅변했던 민족의 사학자! 곧은 붓끝으로 일제를 서늘하게 떨게 했던 직필의 언론인!
 
오랫동안 미뤄왔던... 신채호의 삶과 사상을 만나본다.
 
 
 

단재 신채호 2부 - 조선혁명선언의 탄생 / KBS대전 20190821 방송

https://youtu.be/DxMhTO1nZmQ

 
KBS대전 특별기획 2부작 단재 신채호 2부 - 조선혁명선언의 탄생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ㅣ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ㅣ

박덕규 교육위원 대한사랑 역사특강

2019.04.28

https://youtu.be/Pj2lnwMDRr8

 

 
 

 

[한국사 과학 探] 민족의 뿌리, 상고사를 말하다|YTN dmb

https://youtu.be/HzxBoVxVH8o

 
Nov 17, 2014
 
 
[YTN dmb 기사원문] http://www.ytndmb.co.kr/mytn/program_...

 

 
우리의 역사가 시작된 나라 고조선.그러나 우리의 기록 속에서 고조선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주변국의 이익에 의해 우리의 상고사는 점점 얼룩져왔다.이제 민족의 뿌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단군이 새운 나라.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고조선을 다룬 가장 오래된 사료는 삼국유사 뿐이다.비록 기록되지 못...
 
 
 
 
 

[이덕일의 한국통사]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로 본 고조선 강역과 한사군 위치는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중국 역사서를 근거로 확인할..

https://youtu.be/us9g14OnjvY

 
Mar 25, 2020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로 본 고조선 강역과 한사군 위치는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중국 역사서를 근거로 확인할 수 있다
 
수년간 동북3성 일대 답사를 가는 곳마다 나오는 고조선 표지 유물인 비파형동검은 수도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에 고조선과 고조선 제후국들의 강역 위치를 보면 한사군이 지금의 북한인 평양지역에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765쪽에 달하는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러시아 유엠부틴과 중국 고힐강에게 끼친 영향

https://youtu.be/nenFUJFeTzw

 
Apr 16, 2020 
 
러시아 유엠부틴은 리지린의 고조선사를 읽고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게 됐습니다.
 
중국을 대표하는 고사변 학파의 고힐강도 북한에서 온 이름모를 학자가 연구한 고조선사와 맞서느라 중국 사료의 95%를 봤다고 할 정도로 중화중심적인 사관을 버려야 했습니다.
 
고사변 학파는 중국 고대사가 대부분 조작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자살한 사람이 생길 정도라고 합니다.
 
리지린의 고조선사 연구는 765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사료로 일반인이 읽기 힘들었는데 얼마전 번역을 해서 도서출판 말 에서 리지린의 고조선사연구로 출간 했습니다
 
북한 고대사 연구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백연 김두봉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이라고 고백을 했고 제가 추측하건데 광개토태왕릉비 비문의 주어를 고구려로 해석한 위당 정인보 선생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남한 강단 사학은 조선총독부 사관을 금과옥조로 떠받들어 북한의 리지린 학자나 윤내현 교수가 펴낸 책과 비교해 보면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합니다
 
일본은 한국 역사 박멸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조작한 것이 대부분인데 해방 70년이 넘도록 달라지지 않고 분단에 기생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분단사학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 사관을 극복하고 남북한의 통일사관을 복원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든지 간에 남북한이 하나의 같은 민족으로서 동질성을 회복하는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방안이라고 보겠습니다.
 
이덕일 해역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
 

 

"모든 역사학자들 입 다물게 만든 책! (중국본토 신라,백제,왜, 해석의 교과서)" 

https://youtu.be/Pb0FkKjQOlk

 
May 4, 2023 
 
오재성님 연락처 010 8913 3592 계좌 : KB은행 043010671701, 오재성 (배송비포함 책가격 5만5천원)

 

 

교과서가 외면하는 삼한의 진짜 위치?

https://youtu.be/dqvgyRN_XoQ

 
Feb 9, 2022

 

[식민사관 완전정복] 고려땅 1700리 팔아먹은 국사 교과서

https://youtu.be/IW3pMqnQH2o

 
Sep 15, 2021

 

"고려사 원문 ㅣ 고려초 북경근처 건국 기록 !" 

https://youtu.be/T1TrmNvMF34

 
Mar 7, 2023
 
책보고 대형지도 구매 https://smartstore.naver.com/booksbogo
 

도서정보
제목 : 북역 고려사
번역 : 북한고전연구실
출판 : 한국 신서원
출간 : 1991년

 

10분 책요약, #규원사화, 조선때 출간된 단군왕조와 고대기록.

https://youtu.be/KLhu8fkBta4

 
Sep 8, 2021
 
 

 

 

서양의 옛 지도가 말하는 조선의 영토, 그리고 간도

https://youtu.be/8paQBpmIgUU

 
Aug 6, 2020
 
간도협약 체결로 간도 땅이 중국으로 넘어가기까지 수많은 서양 고지도에는 간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기됐었습니다.
 
근대적인 지도가 만들어지던 18세기의 서양 고지도를 살펴보면, 모든 고지도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존재합니다.
 
서양 고지도를 보면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선이 아닙니다. 간도가 그려진 옛 지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민족 고대사 서술 

단재 신채호와 리지린의 역사관에서 배워야

                                                            이일걸 필진페이지 +입력 2021-04-15 17:17:16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최근 한국고대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학회에서 발간한 책에서 조인성은 자신들은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항변하면서 이미 조선시대 실학파 학자들이 평양 중심의 낙랑군설을 주장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더구나 조인성 국사교과서(고등학교)의 본문 및 연표에 고조선의 건국이 서기전 2333년을 서술한 것을 “황국사관에 따른 일본의 ‘국사’교육을 떠올리게 한다”면서 고조선의 건국기원의 부정으로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심지어 강단사학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고조선(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단계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단재 신채호도 ‘기자동래설’을 주장했다는 등 단재의 역사관까지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 강단사학자들이 주장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비판이 필요하다.
 
조인성 외에도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우리학계의 주류인 그들이 주장하는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그들만의 주장이 아닌 ‘조선시대 실학파 학자들’들도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을 이미 주장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곤 하였다. 즉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주장보다 4세기 앞선 16세기에 먼저 조선시대에 나타났기 때문에, 주류사학계의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식민사학의 영양을 받지 않았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스승인 이병도, 신석호의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병도의 제자인 노태돈, 송호정의 ‘평양 중심 낙랑군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땅위에서 솟은 것인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노태돈, 송호정의 제자들 역시 대를 이어 ‘평양 중심 낙랑군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날조된 ‘평양 중심 낙랑군설’과 관련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박사학위 주제가 조작된 허위이니 박사학위 역시 가짜인 셈이다. 이병도의 허위에 가득한 ‘평양 중심 낙랑군설’로 인해 젊은 청년 학도마저 가짜 박사에 평생토록 허위에 가득찬 인생을 살아갈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따라서 조인성 등의 논리는 가히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지식인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양 중심 낙랑군설’을 주장한 실학파 학자들’ 중의 시작은 한백겸이 지은 『동국지리설』이다. 『동국지리설』을 신채호는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삼한과 조선의 공개적인 분리론은 범엽(范曄)의 ‘동이열전’의 지리 설명으로 족하나, 조선 고대 3천년 간의 지리를 단정하여 「東國自古漢江以南爲三韓 漢 江以北爲朝鮮 : 동국은 옛날부터 한강 이남을 삼한으로 삼고 한강 이북을 조선으로 여겼다」이란 결론은 너무 ‘소경이 지팡이를 잃었듯이 맹장(猛杖)적’이고 무단적인 독단으로 한백겸이 ‘발조선, 발숙신, 부여조선, 예맥조선, 진국(辰國), 진국(震國), 진번조선, 진한(辰韓) 등의 동음이역(同音異譯)됨을 모르고 내린 대착오라 하였다. 

 

그리고 정약용, 한진서, 안정복의 강역론과 그 외의 조선 역사·지리를 논했던 이들 역시 한백겸의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안정복, 유득공, 이종휘, 한치윤이 지은 각 저서와 서거정 등이 지은 『동국통감』의 장단점을 비평하면서 대개가 정치사들이고 문화사에 상당한 저서는 볼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들의 정치사도 왕조의 흥망전말로 글의 수미(首尾)로 삼았으며, 공구(孔丘)의 ’춘추(春秋)‘를 역사의 최고의 법으로 알고 흉내 내어 임금을 존중하고 신하를 억누르기(존군억신;尊 君抑臣)을 주장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었다. 

 

또한 화하(華夏)족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려다(숭화양이:崇華攘夷)가 자국(自國)의 주권조차 거슬리는 올바르지 못한 논란이 있었으며, 외인(外人)들에게 아첨하기 위해 자국의 조그마한 강토마저 할양하려다 결국엔 建國의 도읍지까지 모르게 만들었으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단재는 ‘역사를 아(我:주관적 위치에 선 자)와 비아(非我:주관적 위치에 서지 않은 자)의 투쟁이라 하였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본질은 아(我:주관적 위치에 선 자)의 역사가 아닌 비아(非我)인 일제의 관점에서 본 역사이기에 당연히 비판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단재는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짓다가 ’내란의 빈번함과 외구(外寇)의 출몰이 동국(東國)의 古史를 탕잔(蕩殘)케 하였음을 분개하여 비탄하였다. 그러나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外寇)의 병화(兵火)에서 보다. 조선사를 저술하던 사림들의 손에서 더 탕잔(蕩殘)되었다고 신채호는 주장하였다.
 
단재는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요, 환언하지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부 또는 변경하거나 고치려는(變改) 것이 아니다. 역사이래로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다면 그것은 수긍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허구의 기자조선의 실체를 믿는 강단사학자들은 신채호가 기자동래를 믿었다고 기술하면서 자신의 기자동래설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과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서술한 ‘기자의 동래’ 부분을 어떻게 서술하였기에 이들의 주장이 엉뚱한 비약을 초래하였는지 분석해보자. 신채호는 “은(殷)의 왕자 기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니, 『상서』의 ‘홍범’이 곧 그것이라고 하였다. 신채호는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고 하였다. ‘기자조선’을 세워 왕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신채호는 “전사(前史)에는 단군왕검 1220년 후에 「箕子의 王朝鮮」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 됨이 아니요, 서기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나니, 이제 사실(史實)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하노라”라고 하였다. 또한 역사이래로 각 역사책에는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분 아니라, 「三朝鮮」이란 명사까지도 ‘단군·기자·위만’의 3 왕대(王代)로 억해(臆解)하였다. 즉 「三朝鮮」은 「신(眞)조선 · 말(莫)조선 · 불(番)조선」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신채호가 기자의 조선 도망을 인정했지만 기자조선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三韓」은 「三朝鮮」을 분리 통치한 「三大王」이며, 三大 지방은 물론이며 三都의 위치와 강역의 범위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신조선의 도읍지인 「아스라」는 지금 할얼빈(哈爾濱)이며, 범위는 길림성과 흑룡강섬 및 연해주 남단이다. 불조선의 도읍지인 「아리티」는 개평현 동북, 안시고허(安市古墟 )이며, 범위는 요동반도(開原 이남, 興京 이서)이다. 말조선의 도읍지인 「펴라」는 지금 평양이며, 범위는 압록강 이남이라고 신채호는 주장하였다.
 
북한의 리지인도 가장 오랜 지리 서적인 『산해경』은 고조선의 위치를 조선반도 내에서 찾을 수 없으며, 발해 연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근거를 제공해준다고 하였다. 또한 리지린은 기자조선 전설을 비판하고 있다. 즉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기자조선 전설은 중국의 대국주의자들의 ‘조선은 서주 왕실의 한 후국이라’는 관념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전설은 고조선의 일부가 그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이후에 날조되었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기자의 봉지(封地)가 조선이라는 근거는 매우 박약하다. 따라서 기자와 고조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리지린은 “중국 사가들이 ‘기자전설’에 근거하여 중국 사가들은 고조선을 서기전 12세기에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리지린은 ‘기자전설’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였으며, 여러 가지 자료에 근거하여 고조선의 국가형성시기를 서기전 12세기(西周 초 시기)로 논단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기전 3세기 초까지 요동·요서지역에 걸쳐있었고 서변은 우북평 지역까지 이르렀다가 연(燕)에게 패전한 후 대릉하(패수) 이동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조선에 대한 저서로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이 1931년 이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으며, 『조선상고사』는 1948년에 발간되었다. 신채호는 ‘지명이동설’과 함께 ‘단군-기자-위만조선’으로 연결되는 한반도 중심의 우리 고대사의 인식체계를 ‘단군-부여-고구려’로 연결되는 만주-요동반도 중심의 역사체계로 전환시켰다. 북한 리지린은 『고조선연구』를 1960년대 초에 완성한 것으로 방대하게 집약된 기념비적인 저작이었다. 1962년에 『고조선연구』의 머리말을 쓰고, 1963년에 ‘과학원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고조선연구’에 대하여 신채호와 리지린의 저서가 선진연구로서의 자리를 매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주류사학계는철저하게 외면한 채 오직 이병도의 왜곡된 이론만을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구성하는 3대 원소는 시간, 장소, 사람 즉 「時 · 地 · 人 」을 들고 있으며, 조선구사(朝鮮舊史)의 결점을 논하면서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어라”고 하였다. 역사 이외의 딴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갈파하였다.
 
리지린도 고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하여, 중국 사가들의 왜곡되고 말살되어 남은 것이 보잘 것 없는 사료가 있을 뿐이며, 중국 사가들은 한족을 월등시하고 인접 종족들을 멸시하는 편협한 종족주의 사상을 가지고 한족(漢族)과 이족(夷 族)의 차별을 강조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기록할 때도 우리 민족의 고대사회가 그들의 한족의 고대사회보다 ‘열등’함을 논증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서슴치않고 왜곡 말살하였으며 ‘정사(正史 )일수록 그 정도는 심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현재 우리 역사의 주류 고대사학계는 식민사학에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승의 잘못된 허구의 이론을 고수하기 위해 우리 고대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평양 중심 낙랑군설’이라는 허구의 이론을 제시한 이병도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노태돈과 노태돈의 제자인 송호정이 주장하고 있는 평양 중심 낙랑군설’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문헌이 ‘역도원’이 오류를 범한 『水經註』의 「浿水條」의 기사이다.
 
『水經註』의 「浿水條」의 오류가 젊은 신진 학자들까지 오염시켜 ‘평양 중심 낙랑군설’이 재탄생되고 있는 현상이 씁쓸하기만 하다. 심지어 노태돈은 「浿 水條」의 원문마저 변경시키며 자신의 논리인 ‘낙랑군이 평양 일대’임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며 거짓 논증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제 허위에 가득한 식민사학에 물든 주류사학계는 70여 년 동안의 잘못을 고백하는 양심선언을 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