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 디아스포라 시리즈 1-3부 - 1. 티베트, 실크로드 등 유라시아 여러 오지로 끌려간 고구려인 /- 2. 몽골초원, 실크로드 사막, 토번의 청해성등 지방 등으로 끌려간 20여만명의.../ -3. - 유..

2023. 5. 7. 14:52역사의 연구/고대역사

고구려인 디아스포라 시리즈 1

-티베트, 실크로드 등 유라시아 여러 오지로 끌려간 고구려인

https://youtu.be/4vKiOHkLDA0

 
윤명철교수의역사대학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군대가 전투에서 패하고, 정부가 괴멸하고, 지배계급이 파멸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단순히 삶이 비참해지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파멸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선조들처럼 명예를 간직한 채 역사에 남았고, 자의든 타의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유민(流民)’이라는 신분으로 살육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또 자발적으로 망명하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부활에 성공했다. 한민족의 슬픈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다.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고구려 백제 유민이야기”, 2006).
 
백제 유민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660년 8월, 실정과 오만으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항복한 의자왕과 대신들 그리고 죄없는 병사들 1만2800명은 배에 실려 당(唐)으로 끌려갔다. 의자왕과 왕자들, 일부 대신은 당나라의 벼슬을 받았으나, 복국군의 임금으로 고구려로 망명했던 부여풍은 붙잡혀 영남(廣東·廣西지방)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산둥지역에 버려졌던 백성들은 다시 요동으로 이주당했다. 한편 주류성 전투와 백강(백촌강)해전에서 대패한 복국군은 “어찌할 수 없도다. 백제의 이름은 이제 끊어졌고, (조상)묘소에도 갈 수가 없구나…”("일본서기")라고 절규하며 음력 9월 25일에 왜(倭)의 병선을 타고 거친 북서풍을 맞으며 대한해협을 건넜다. 뒤따라 백성들과 지방세력도 전라도 해안 등에서 출항해 ‘보트피플’로 떠돌다가 일본열도의 곳곳에 닿았다. 그리고 665년 2월, 400여 명이 오우미(近江) 지역에 분산된 것처럼 여러 곳에서 개척자로 변신했다.
 
윤명철 ‘한민족 역사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의미와 성격’ “역사활동과 사관의 이해”, (윤명철 해양논문선집 .제 6권) 참조.

 

 

 

'고구려유민 디아스포라' 시리즈 2

- 몽골초원, 실크로드 사막, 토번의 청해성, 사천성, 운남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요서지방 등으로 끌려간 20여만명의...

https://youtu.be/eTx8F3mo4og

 
May 2, 2020 
 
윤명철교수의역사대학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서도 많은 포로들이 잡혀갔다. 반면에 구나라 병사들도 고구려에 포로로 잡혔다. 영양왕은 당시 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최초의 사찰인 아스까사가 창건되고, 불상이 완공될때 황금 300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고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포로 2명과 낙타 등을 왜국에 보낸 적이 있었다. 그 후 당나라의 태종이 파견한 직방낭중인 진대덕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을때 수나라의 포로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후에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수나라의 포로들과 그들의 시신을 묻고 세운 기념물인 경관을 철거해줄 것을 요구했었다.
 
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에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 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고구려 백제 유민이야기”, 2006). (윤명철, "고구려 해양사 연구", 2003).

 

 

 

 "'고구려유민 디아스포라' 3

- 유라시아 오지로 끌려다니며 적국의 군인으로,

적군의 여인으로, 황무지 개척한 노예로 살았던 고구려 유민들"

https://youtu.be/5LHCStRDXJ0

 
윤명철교수의역사대학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에서도 많은 포로들이 잡혀갔다.
반면에 수나라 병사들도 고구려에 포로로 잡혔다. 영양왕은 당시 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최초의 사찰인 아스까사가 창건되고, 불상이 완공될때 황금 300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고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포로 2명과 낙타 등을 왜국에 보낸 적이 있었다. 그 후 당나라의 태종이 파견한 직방낭중인 진대덕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을때 수나라의 포로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후에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수나라의 포로들과 그들의 시신을 묻고 세운 기념물인 경관을 철거해줄 것을 요구했었다.
 
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에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 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고구려 백제 유민이야기”, 2006).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현장을 답사하면서도, 또 이번에는 유투브를 제작하면서도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도대체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아주 어릴때 인상깊게 본 영화가 스파르타쿠스 였다. 그때 포로와 노예의 삶, 그리고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 고구려를 공부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자주 떠올랐다. 1995년에 안시서에 올라갔을 때 떠올린 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라, 고구려인들의 불가시의함이었다. 요동벌의 바람에 나풀거리는 남보라색 도리지꽃을 보면서 애뜻함과 서러움이복받쳐 올랐고, 불현듯 떠오른 말이 '기적'과 '자유'였다. 자유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승리였다. 그토록 자유의지와 자존심이 강한 고구려인들이 사슬과 줄에 묶여 끌려가는 광경, 살아남은 사람들이 흙먼지, 모랫바람,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과 들, 사막에서 당나라 군대의 옷을 입고, 또다른 이민족을 바라보는 눈길을 떠올리면서 다녔다. 모든 것은 존재이유가 있고, 존재가치가 있는데, 그들의 역사는 더더욱 가치가 있다. 조금 만이라도 그 들을 떠올린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망각된, 존재마져 지워진 고구려 유민들---
 
(윤명철, "고구려 해양사 연구", 2003). (윤명철,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외. "고구려의 꿈" 등 고구려 시집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인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만주 벌판을 누비던

고구려인들의 삶

 

https://youtu.be/lwpcyWcVI6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