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3. 20:26ㆍ역사의 연구/한국역사
KBS 역사스페셜 – 2010 탐사보고, 동명루트를 찾아서
https://youtu.be/P6zBlykWQuk
(대 고구려 1-2부는 광개토대왕 편에서 보실 수 있음)
KBS 역사스페셜 – 대 고구려 1부, 광개토대왕 정복루트를 가다 염수의 비밀 / KBS 20000101 방송
KBS 역사스페셜 – 대고구려 2부 광개토대왕 정복루트를 가다, 미지의 장벽
대흥안령 산맥 / KBS 20000108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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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 대고구려 3부, 고구려 철갑기병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
KBS 20000122 방송
◼︎ 고구려의 장엄한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 군사력의 실체를 살펴본다.
안악 3호분의 군사 대행렬도를 컴퓨터그래픽으로 복원해 고구려 철갑부대의 무기와 무장, 용도, 기초적인 전투방법을 추측해본다. 아차산 고구려 유적지 화살의 성분을 분석하고 제작해 고구려 활의 관통능력과 사정거리를 실험해본다. 역사스페셜 54회 – 밀레니엄 특집 4회 연속기획, 대고구려 3부 고구려 철갑기병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2000.1.22.방송)
KBS 역사스페셜 – 대고구려 4부, 고구려인의 재산목록 1호는 수레였다 /
KBS 20000129 방송
◼︎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추정해본다. 고구려 주택의 구조를 컴퓨터그래픽으로 복원해 당시 온돌의 규모와 입식생활 형태를 파악하고 고구려인의 재산목록 1호로 생활필수품이었던 수레의 종류와 용도를 알아본다.
역사스페셜 55회 – 밀레니엄 특집 4회 연속기획 대고구려 4부, 고구려인의 재산목록 1호는 수레였다 (2000.1.29.방송) http://history.kbs.co.kr/
KBS HD역사스페셜 – 위성으로 본 국내성, 그곳에 고구려가 있다/
KBS 20050610 방송
- 위성카메라가 포착한 고구려유적, 스튜디오에서 입체화 최근 제작된 0.6m급 초정밀 위성사진을 입수, 중국 집안지역에 넓게 분포한 고구려 유적 태왕릉,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환도산성, 산성하고분군 등의 자취를 한눈에 살펴본다. 여기에 그래픽 작업을 가미, 실물 크기로 입체화된 고구려 유적에서 1,500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건재한 고구려의 힘을 느낀다.
- 환도산성 최초 본격 취재! 수도(왕궁)는 왜 두 개인가? 수도인 국내성 근방 환도산성에서 왕궁터로 추정되는 대규모 건물지가 발견됐다. 평소엔 평지성에, 유사시엔 산성에 올라갔던 고구려인들, 고구려는 왜 동시에 두 개의 도성을 유지했나? 발굴 결과 공격용 무기수만 456점이 나오는 등 당시 중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시사하는데... 이런 고구려를 과연 중국 지방정권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고구려인은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했다? 초기 고구려 땅이었던 곳에서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적석묘. 거대한 돌을 쌓아올린 이 무덤 양식은 국내성, 현 지안(집안) 곳곳에 무려 12,000기나 남아있다. 규모를 보면 작다는 것도 집채만 하며, 가장 큰 것은 한 변 85미터, 높이 15미터에 달한다. 특히 당시 주변국은 토광묘계 묘제가 대세인데 비해, 고구려만 유독 적석묘라는 독특한 묘제를 발전시켰다는데... 고구려인들이 남긴 세계최대 무덤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중국학자들을 당혹케 한 고구려인들의 발명품, 국내성의 어긋문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무렇게나 방치됐던 국내성은 중국정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이제 말끔하게 개축, 단장돼 있다. 그런데 발굴 중에 국내성 서남문벽이 두 개 벽으로 나뉜 이유를 찾지 못해 중국학자들을 당혹케 했다. 이는 어긋문으로 일종의 옹성 형태였다. 웬만해선 적이 문으로 접근하기 어렵게 고구려인들이 고안한 것이다. 현지답사와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고구려의 독창적인 성벽 구조를 밝힌다.
HD역사스페셜 6회– 위성으로 본 국내성, 그곳에 고구려가 있다 (2005.6.10.방송)
KBS 스페셜 – 남북공동제작 고구려의 부활 1부, 고구려 수도 평양성 /
KBS 20040710 방송
◼︎ 고구려 역사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맞춰, 남북 역사학자의 고구려 유적 공동답사를 통해 고구려 역사, 문화의 역동성과 계승의 문제를 조명한다.
1편 고구려 수도 평양 - 평양성, 고구려는 살아있다 - 고구려는 절반이 산성이고 절반이 무덤이라는 말이 있다. 평양성은 산성의 나라 고구려가 만든 철옹성으로,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다. 평양성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개보수를 했지만 전성기 고구려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다. 평양성의 역사는 성돌이 말한다. 평양성의 강냉이 모양, 혹은 이빨 모양의 성돌들은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법을 그대로 보여주며, 1500년 세월을 굳건히 지켜 온 비결이 담겨있다.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법인 들여쌓기, 6합 쌓기, 옹성과 치의 구조 등을 산성 전문가인 서길수 교수, 여호규 교수, 북측의 리기웅 박사가 소개한다. 을밀대, 칠성문 등 평양성 주요 방어시설과 외성을 답사하고, 평양성의 글자 새긴 돌과 발굴성과를 토대로 평양성의 전모를 밝힌다.
- 427년 장수왕이 평양 천도 후 축조한 안학궁의 남문 터와 왕궁의 주춧돌을 토대로 안학궁을 영상복원하고, 왕성과 산성의 이원적 방어체계를 잘 보여주는 대성산성의 남문과 소문봉 등을 답사한다. 평양성의 서남쪽 방어를 위해 축조한 황해남도 신원군의 황룡산성을 최초로 공개한다. 산을 둘러싼 6.6km에 이르는 성벽이 잘 남아있고, 남문에는 옹성과 치가 고구려의 빼어난 축성법과 부침의 역사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 고구려가 산성의 왕국이라고 불렸지만 실제 연구는 만주지역과 평양 일부에 그쳤던 한계를 넘어, 최초로 평양 이남의 산성 등까지 공개해 고구려 산성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대부분 고구려의 전성기를 집안지역을 수도로 하고 있던 때로 생각하지만, 진정 독자적인 천하관을 확립해 제국의 기틀을 잡고, 가장 고구려적인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한 곳이 평양임을 현장답사를 통해 확인시킨다.
KBS스페셜 – 남북공동제작 고구려의 부활 1부, 고구려 수도 평양성 (2004.7.10.방송)
KBS 스페셜 – 남북공동제작 고구려의 부활 2부, 고구려벽화세계와 만나다 / KBS 20040711 방송
고구려 역사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맞춰, 남북 역사학자의 고구려 유적 공동답사를 통해 고구려 역사, 문화의 역동성과 계승의 문제를 조명한다. 2편 고구려 벽화, 세계와 만나다
◼︎ 벽화, 1,500년 전 고구려인을 만난다 기록은 왜곡이 될 수 있지만 그림은 거짓없이 1,500년 전을 증언한다. 중국은 세계문화유산 신청에서 대규모 왕성 정비에 집중했고, 북한은 벽화 중심으로 신청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고분은 중국 집안권이 30기, 평양권은 73기로 중국이 다수일 것이라는 예측을 뒤집는다. 평양지역에서 벽화고분이 집중 출현하는 것은 평양천도 후 고구려 문화의 전성기와 관련돼 있고, 그림의 주제와 표현에서도 한층 성숙한 면모를 보인다. 세계에 많은 벽화가 있지만 '고구려'벽화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만큼 독자적인 문화가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 최초 촬영, 수산리 벽화 1,500년 전 화려한 나들이 순간의 고구려인을 만난다. 주름치마를 입고 얼굴에 곤지를 바른 귀부인과 박쥐모양의 우산을 들고 따라가는 시중들의 모습에는 고구려인의 얼굴 표정, 복식 등이 그대로 살아 있다. 지하궁전이라고 불리는 안악 3호분은 봉분이 30m가 넘고 무덤 기둥이 장엄하다. 고구려 사람들은 현세의 삶이 내세에서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아 생전의 공간을 지하무덤에 그대로 재연했는데, 안악 3호분에는 1,500년 전의 부엌 살림살이와 외양간 등을 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의 주제는 인물풍속도
-장식무늬-사신도로 변화된다. 진파리 1호분에서는 바람에 휘날리는 연꽃의 향내를 맡고, 북벽에서 현무와 함께 무덤을 지키는 소나무의 고고한 자태를 볼 수 있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의 발굴 전 모습을 영상복원하고, 사신도로 유명한 강서대묘를 답사한다. 현장에서 확인한 벽화의 보존상태는 도록보다는 훨씬 생생했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로 벽화 밑부분에 탄산칼슘층이 두껍게 형성되고,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지고 있는 상태여서 보존을 위한 과제가 시급함을 확인한다. '고구려'벽화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통해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벽화고분의 우수성 뿐 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숭고한 의식과 승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와 감동이 담겨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KBS스페셜 – 남북공동제작 고구려의 부활 2부, 고구려벽화 세계와 만나다
KBS 역사스페셜 –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의 수수께끼 /
KBS 19990508 방송
Nov 28, 2022
◼︎ 고구려 장군총의 건축공법과 건축과정, 무덤의 원형과 무덤의 주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장수왕 시대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과 외교력, 무역활동 등을 유추해 고구려의 힘을 확인해본다.
역사스페셜 27회 – 고구려기획 2편,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의 수수께끼
KBS역사스페셜 – 고구려 남부전선 최후의 증언, 임진강 철갑옷
Aug 10, 2020
- 최초 발굴! 고구려 철갑 1,300년 잠에서 깨어나다 2011년 5월 18일, 임진강변 무등리 2보루 발굴 현장에서 고구려 철갑옷이 발굴돼 학계를 놀라게 했다. 작은 철편 조각을 가죽 끈으로 엮어 만든 찰갑, 지난 2009년 경주 쪽샘 지구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 장수의 옷으로 밝혀졌다. 때문에 고구려 철갑옷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최초다. 이번 발굴을 통해 그동안 부분적으로 발견된 철갑옷 조각이나 고구려 벽화의 그림을 통해서만 추정돼왔던 고구려 철갑옷이 온전한 형태를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무등리 고구려 철갑옷, 주인은 누구일까? 해발 93미터 강 건너편의 움직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무등리 2보루. 이곳은 아직까지 발굴된 유물의 양이 많지는 않으나 철갑옷을 비롯하여 같이 출토된 항아리, 상당량의 탄화미와 곡식 등으로 보아 많은 군사들이 주둔했던 고구려 군사시설로 보여진다. 최근 조사를 마친 또 다른 고구려 보루인 아차산 4보루의 경우 약 100명의 병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와 비슷한 규모의 무등리 2보루 역시 약 100명 정도의 병사와 지휘관이 주둔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과연 누가 이 철갑옷의 주인일까?
- 임진강변에 남은 고구려의 흔적 무등리 2보루에서는 목책으로 사용된 불탄 나무 기둥 하나가 발견됐다. 이 유물은 목책성의 흔적으로 이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확장되어 내려가는 시기에 지역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 유역에는 무등리 2보루 뿐만 아니라 삼각형 모양의 독특한 모양의 호로고루성을 비롯하여 많은 보루들이 발견됐다. 임진강은 한강 유역의 아차산 보루군이 폐기된 다음 고구려 남부의 최전선이자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선으로 자리 잡았다. - 고구려, 최후의 날을 맞이하다 무등리 2보루에서 최초로 발굴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철갑옷 한 벌은 언제, 왜 이곳에 묻히게 된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수년의 보존처리와 분석이 끝나야만 알 수 있겠지만 몇 가지 단서로 볼 때 뭔가 급박한 최후의 상황을 맞이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00년 전 임진강을 주축으로 한 고구려 방어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 통째로 묻힌 채 발견된 철갑옷은 무등리 보루 최후의 날을 증명하는 흔적이 아닐까? 신
역사스페셜 76회 – 고구려 남부전선 최후의 증언, 임진강 철갑옷 (2011.7.14.방송)
KBS 역사스페셜 – 바보 온달, 그는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었다
Mar 20, 2020
지난 2001년 충북 단양 인근에서 발굴된 고구려 적석총은 그 규모와 인근에 온달산성이 위치한 관계로 고구려 장군 온달의 묘로 추정되었다. 삼국사기 열전편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온달은 왕권이 불안정한 시기에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은 신진 무인세력의 일원으로 판단된다. 뛰어난 무예실력을 바탕으로 목숨을 바쳐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일원을 수복하고 고구려의 국민적 영웅으로 남은 온달 장군의 참모습에 대해 알아본다.
역사스페셜 138회 – 바보 온달, 그는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었다 (2001.11.24.방송)
Dec 16, 2019
- 4차례의 고구려 원정! 세계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병력 동원!! 수나라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고구려원정을 감행했는가? 수양제는 고구려 출정을 위해 5년간을 철저하게 준비한다. 군수품을 운송하기 위해 양자강과 북경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확장공사를 마무리하고 612년 100만 대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여기에 보급부대가 200만 명, 군량 실은 배만 천 여리에 달했다고 하니 세계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그들이 고구려에 패배하고 돌아간다. 불가사의한 고구려의 승리!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수나라는 이렇듯 엄청난 물량을 동원해 고구려를 수차례나 제압하려 했던 것일까?
- 고구려 승리의 전략! 수나라 양곡수송로를 차단하라! 고구려는 어떻게 100만 대군 수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킬 수 있었을까? 당시 수나라군의 가장 큰 문제는 북경지역인 탁군에서 요동벌판까지 무려 2,000리에 이르는 군량미 수송이었다. ‘자치통감’과 ‘신당서’에는 고구려군대가 북경의 북쪽, 거란지역인 내몽고 자치주 적봉지역에 주둔했음을 드러내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적봉지역에 주둔한 고구려군이 북경을 향해 내려와 양곡수송로를 차단한다면 요동평야에 있던 수나라대군의 아사는 불을 보듯 뻔한일! 불가사의한 고구려 승리의 비책은 바로 거란과의 연합작전에 의한 수나라 양곡수송로차단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어떻게 수천 리를 돌아 수나라의 양곡수송로를 공격했던 것일까?
HD역사스페셜 21회 –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1편, 수나라 백만 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2005.9.30.방송)
KBS HD역사스페셜 – 고구려 고분벽화, 세계를 그리다 / KBS 2005.7.15. 방송
May 12, 2021-
최고 인기공연 서커스, 그 발원지를 추적하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인들의 다양한 놀이문화가 묘사돼 있다. 그중에서도 곡예, 즉 서커스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공던지기, 곤봉던지기, 바퀴던지기를 하는 재주꾼의 묘기는 물론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커스는 멀리 페르시아에서 기원해 중국을 거쳐 전해졌는데 이를 고구려인들은 더욱 발전시켜 가장 인기 있는 놀이로 만든 것이다. 이런 곡예를 스튜디오에서 직접 재현, 벽화에 묘사된 곡예와 비교해 봤다.
- 세계의 악기로 풍악을 울리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악기와 연주회 장면도 묘사돼 있다. 분석 결과 대부분의 악기를 중앙아시아로부터 멀리는 인도에서까지 수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벽화를 통해 고구려악기의 다양한 종류를 확인하고 고구려시대 악기 ‘요고’를 최초 복원, 실제 연주해 봤다. 또한 당시 고구려의 음악 수준은 당나라 장안에서 열린 세계음악회에 동북아시아 대표로 참가할 정도였다. 음악의 교류에서 엿보이는 고구려인들의 개방성에 주목했다.
- 고구려벽화 속에 왜 인도춤을 추는 사람이 있을까? 안악 3호분 벽화에는 독무춤을 추고 있는 남자가 있다. 두 다리를 꼬는, 아주 독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춤사위가 아니었다. 발을 꼰 자세는 인도의 전통춤 ‘카탁’의 기본자세이다. 실제 인도춤 전문가의 공연을 보며, 고구려 전통춤과 인도춤의 차이를 확인한다. 또한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찬탄했다는 고구려의 호선무도 살펴봤다.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 특징인 이 춤은 고구려가 내세우는 대표종목이었다. 이 춤 역시 멀리 우즈베기스탄에서 기원했다. 춤의 교류를 살펴본다.
- 고구려복식의 족보를 찾아라 무용총, 각저총 등에 묘사된 의상을 토대로 고구려 복식 형태를 분석했다. 고구려인들은 옷을 만들 때 수렵에 유리하도록 활동성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특징은 북방기마민족의 옷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남방계인 중국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중앙아시아 벽화에 그려진 서역의 의상과 고구려 벽화에 묘사된 옷을 비교, 복식의 전파 경로를 짚어본다. 또한 고구려 복식이 서역과 공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점무늬 염색법을 활용, 옛 고구려의 옷도 복원해 봤다.
- 현장추적,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떠난 수 만리 여정 고구려가 서역과 문물을 교류한 통로는 중국을 거치는 실크로드(비단길), 그리고 몽골을 지나는 초원의 길이 있었다. 그런데 수·당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압박해 오자 고구려는 그에 맞설 동맹군을 찾아야 했다. 고구려 사신은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기나긴 여정에 오른 것이다. 몽골 초원 한가운데 퀼테긴 비, 아프랍시아 벽화에 남은 고구려 사신은 당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1,500년 전 고구려 사신이 지난 행로를 따라 현장을 추적했다.
HD역사스페셜 11회 – 고구려 고분벽화, 세계를 그리다 (2005.7.15.방송)
Nov 4, 2022
■ 고구려인들이 남기고 간 수수께끼, 그 해답은 무엇인가? 전해지는 문헌의 부족으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늘 갈증을 느끼던 학계에 1949년 안악3호분의 발굴이 시작되면서 단비가 내렸다. 거대한 벽에 빼곡이 들어찬 벽화들...주인공 부부의 모습을 비롯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고구려인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구려군 행렬도 등 그들은 자신들의 화려하고 풍족했던 삶의 단면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풀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수수께끼 하나도 남겨놓고 있었다.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미궁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고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연구자들의 주장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를 알아본다.
■ 중국인 망명객 ‘동수의 묘’ 인가? 발굴 당시 보통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는 흔하지 않은 묵서명이 발견됐다. 묵서명에 나타난 동수. 안악 3호분이 동수의 묘임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국에서는 묘지문을 작성할 때 성명, 죽은 날짜, 그 사람 관직을 적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로 이제까지 어느 나라에서도 무덤의 주인공 이외에 묘지를 무덤에 적는 예는 없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고구려 왕릉일까? ‘동수묘설’과 대립되는 ‘고구려 왕릉설’은 바로 주인공을 밝혀주는 것이라는 묵서명에서 시작하고 있다. 짙은 눈썹과 콧수염 그리고 머리에 백라관을 쓰고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주인공. 묵서명은 이 주인공의 근처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방의 바깥쪽 장하독이라는 인물의 머리 위에 써있다. 또한 묵서명의 내용 중에서 "69세 훙관", "훙"만으로 69세에 죽었다는 문장이 끝나는데 "관"까지 붙어 있어 "69세에 죽은 관리 장하독"으로 해석되어 이 묵서명은 수문장격인 장하독을 가르키는 것이고 무덤의 주인은 바로 고구려왕을 지낸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 고구려 왕이라면? 미천왕이냐, 고국원왕이냐 묵서명의 영화13년은 바로 357년. 이 해를 전후하여 죽은 고구려의 왕은 미천왕(300∼331)과 고국원왕(331∼371) 두 사람이다. 고국원왕 12년인 342년. 전연과 맞서 싸운 고국원왕은 전략의 실패로 어머니와 왕비가 포로 5만과 함께 전연에 잡혀가고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까지 탈취당한다. 고구려사 최대의 치욕을 겪은 고국원왕은 부왕의 시신을 찾은 해,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안악 3호분을 황해도에 조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국원왕이 전사한 곳이 평양이라면 현재 안악3호분이 있는 곳은 적진쪽의 땅이 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00년 11월 일본에서 열렸던 남북한 역사학자들의 심포지움에서 북한은 황해도 신원군 일대에서 고구려의 제2의 수도였던 남평양 유적지를 발견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새롭게 조명될 전망이다.
■ 안악 3호분의 주인공 논쟁,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누구인가가 왜 중요한가? 그것은 바로 묵서명에 써 있는 "영화 13년 즉 357년"이라는 때문이다. 4세기경 황해도 일대인 낙랑, 대방지역을 고구려가 직접적으로 지배를 했는지 아니면 멸망한 낙랑, 대방의 잔존세력들이 그대로 남아 자치적인 통치세력을 형성했는지에 대한 여부가 불투명한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속하는 무덤인 안악 3호분의 주인이 규명된다면 이 시기의 역사를 해석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불교의 도입연원과 벽화무덤의 기원문제 등 4세기경 한국사 해석의 열쇠는 바로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쥐고 있다.
역사스페셜 102회 – 고대사 수수께끼 안악3호분, 그 주인공은 누구인가? (2001.2.10.방송)
KBS 역사스페셜 – 북한문화유산시리즈 1편, 고구려 평양성/
KBS 20011006 방송
Jul 13, 2022
◼︎ 2001년 여름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20여 일 동안 북한을 방문해 북한에 남아있는 중요한 우리 역사유적들을 촬영했다. 특히 평양은 1,500년 전 고구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이 남긴 여러 가지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북한도 국보유적 제1호로 지정할 만큼 중요한 문화유산이 바로 고구려 평양성이다.평양성은 둘레 16km, 총길이 23km로 6합쌓기로 성돌을 쌓고 내성과 외성을 잘 정비하는 등 적의 침입을 막고 수도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게 체계적으로 축조된 건축물이었다.
역사스페셜 130회 – 북한문화유산시리즈 1편, 고구려 평양성 (2001.10.6.방송)
KBS 역사스페셜 – 기토라고분, 고구려 하늘을 품다 / KBS 20100320 방송
일본 나라현 아스카.
그곳에서 발견된 두 개의 작은 고분, 기토라와 다카마쓰총. 이곳에서 전세계가 주목하는 고구려풍의 벽화와 천문도가 발견된다. 도대체 누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이며, 이곳엔 어떤 이가 잠들어 있는 것일까? 아스카의 고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추적해본다.
신역사스페셜 30회 – 기토라고분, 고구려 하늘을 품다 (2010.3.20.방송)
KBS 역사스페셜–무사시노의 개척자, 약광과 1799인의 고구려인 / KBS 2010.6.12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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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 ‘약광’ 낯선 이름이다. 약광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의 아들이다. 그는 666년 일본에 건너가 668년 고구려 멸망 소식을 듣고 일본 사이타마현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고구려를 건립하는데.. 1,300년을 이어온 고구려의 숨결, 그동안의 약광(若光)의 흔적을 따라 제작진은 직접 사이타마현으로 향한다. - 일본 속 ‘고구려’의 탄생 666년 일본에 건너간 약광은 716년 일본 무사시국 주변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던 1,799명의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고려(고구려)군’을 건립했다. 그들은 세공, 직물, 철제 등 기술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철제 농기구를 도입해 농작물 수확을 극대화시켰다. 고구려인들은 철제 도입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종이제조기술까지 전파했다.
- 고려(고구려)씨의 역사와 관동지역 무사계급 탄생 관동지방으로 건너간 고구려인들을 중심으로 무사집단이 형성됐다. 이것이 일본 무사집단의 시초이다. 무사집단의 형성이유는 고구려인의 철제기술과 말이었다. 장군산고분에서는 동완, 장식대도, 철제마주, 철제무기 등 많은 뛰어난 유물이 출토됐다. 이 유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들은 철갑기마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동지역에 터를 잡은 고구려인들은 말을 길러냈고 이곳은 준마의 명산지가 됐다. 훗날 발견되는 말등자, 철제마주, 고구려벽화에 등장하는 말의 깃대 등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 1,300년을 이어온 고구려의 후예 고려악은 고구려음악으로 550년에 일본으로 전해졌다. 고려악은 중국의 당음악과 함께 일본 아악의 축이다. 30년 동안 일본 궁내청에서 활동하던 연주자 ‘시바 스케야스’ 씨는 최근에 자신이 고구려 제22대 왕인 안장왕의 후손임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의 직계후손 ‘고려 게이코’ 씨는 NPO(민간 비영리 단체)를 조직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고구려를 품고 살아온 그는 고구려 전설에 대한 콘서트를 전 세계적으로 열고 있다. ‘고려(고구려) 게이코’ 씨는 고구려가 자신의 운명이자 인생 자체라고 말한다. 고려(고구려)사진공방의 대표 ‘아타라시 다스야’. 그도 고구려의 후손이다. 조상 때부터 1,300년을 고려(고구려)에 거주한 후손인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공방의 이름도 ‘고려사진공방’ 이라고 짓고 고려(고구려)를 지키고 있다. 그에게 고구려는 소중한 자신의 뿌리이자 자긍심이다.
신역사스페셜 37회– 무사시노의 개척자, 약광과 1799인의 고구려인 (2010.6.12.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