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몽 연합국가 구상과 한미몽 연합전략의 동북아 미래-몽골과 한국 힘 합치면동아시아 지도 바뀔 것 / 칭기즈칸은 대조영의 후손이 정말 맞는 족보인가? / “칭기즈 칸의 조상은 추마나 콘, 곧..

2023. 6. 7. 12:26아시아 소식/아주소식

한몽 연합국가 구상과 한미몽 연합전략의 동북아 미래

“몽골 유력 정치인 긴급 방한”급박하게 돌아가는 몽골 상황 -

몽골과 한국 힘 합치면동아시아 지도 바뀔 것

https://youtu.be/3VgqwLAjk2U

 

 

 
 
 
 
 
 
 
 
 
 
 

 

 

역사팩트 - 칭기즈칸은 대조영의 후손이 정말 맞는 족보인가?

https://youtu.be/0i_IUtDFV88

 
Jan 25, 2023
과거없는 미래는 없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감사합니다.
 
 
 
 

몽골 쿠빌라이는 왜 "고려는 특별대우 하라 "고 특명을 내렸을까?

https://youtu.be/XWK7Y85mJu8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은 대조영의 19대손이다”

  •  김석동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
  •  승인 2019.07.01 10:52

'북방민족 사학자 전원철 박사가 찾아낸 한민족의 뿌리'

<게티이미지뱅크>
 

이 장에서는 한민족과 북방민족의 연결고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북방민족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 내용을 함께 소개하고 자 한다. 전 박사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아이오와대JD, 뉴욕주립대LLM에서 수학한 미국 변호사로 UN난민판무관실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으로 일했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도 근무했다. 그는 29개국의 언어를 구사하는 발군의 언어 능력으로 수많은 고대 및 중세 사서들을 해독하여 한민족과 북방민족과의 관계를 밝히는 데 기여했다. 2015년 6월에 그는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 1, 2>을 출간했다.

그는 1240년경에 출간된 현존하는 최고의 몽골역사서 <몽골비사>, 몽골 제국의 칸국인 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1310년경 저술한 <집사集史>, 몽골 제국의 후예 티무르 제국의 4대 칸 ‘울룩벡’이 15세기 전반에 저술한 <사국사四國史>, 히바 칸국의 ‘아불가 지 바하디르칸’이 17세기에 지은 <투르크의 계보>, 그리고 동양 사서 등 수많은 기록들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대몽골 제국의 창시자 칭기즈칸을 비롯한 몽골 제국 후예들이 건설한 나라들의 왕가 계보를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돌궐이 몽골 고원에서 물러나 서진하면서 건설한 수많은 투르크 국가의 왕가 계보, 여진이 세운 발해의 후예 금나라와 청나라의 왕가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밝혀냈다. 그는 서방 사서에 기록된 칭기즈칸 선조의 ‘계보’를 동방 및 우리 사서들과 교차 체크하고 그 인물들의 이름 소리, 그들이 살았던 곳의 지명, 활동 시기와 연도, 행적, 족보상의 계보까지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사서에서 확인하여 칭기즈칸의 계보를 추적했다. 그 결과 사서들의 내용이 서로 정확히 일치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그동안 필자가 연구해온 ‘흉노-선비-돌궐-몽골-여진’ 등 2500년간 세계사를 써온 북방 기마군단이 고조선과 연결되고 고조선의 후예인 한민족과도 깊은 관계에 있다는 내용에 대한 문헌학적인 고증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칭기스칸은 고구려-발해의 후손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을 쓴 전원철 박사는 
역사를 민족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비봉출판사>

 

현재 전원철 박사는 울룩벡이 쓴 <사국사>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필자가 출간을 지원하고 있다. 이 사서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쓰였고 그 원본은 하버드대와 옥스퍼드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994년에 세계 최초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우즈벡어로 번역된 바 있다. 현재 하버드대 도서관으로부터 받은 페르시아어 원본과 우즈벡어 본을 대조하면서 번역을 진행 중이다. 다음은 앞서 언급한 사서들을 통해 전원철 박사가 밝혀낸 사실을 필자가 종합한 내용이다.

기원전 1세기에서 시작하여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 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했다.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직계 가족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이때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의 ‘말-고을’, 즉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통치자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현재 차오양)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거란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 틈을 타 대조영 일가는 동쪽으로 탈출했고 698년 동모산에서 진국고려震國高麗(후에 발해)를 세웠다. 대조영은 고구려 왕족의 후예인데 서자 가문이기 때문에 고씨高氏(커씨) 대신 걸씨乞氏(클씨), 곧 대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건국한 지 채 30년이 못 되어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자 당 현종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흑수말갈(오늘날 아무르강 저편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주)을 발해로부터 분리시켜 당이 직접 통치하려 하였다. 이에 발해 무왕(대무예)은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으나 친당파인 대문예는 전쟁에 반대하다가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후 대무예의 맏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대도리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등으로 두 나라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드디어 732년 9월 발해 무왕 대무예는 당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고 선제공격에 나섰다.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한 발해군은 장문휴의 지휘하에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전사시켰다. 이듬해인 733년 당 현종은 당나라로 귀부한 대문예를 앞세워 발해 본토를 공격하게 하고 신라로 하여금 발해 남쪽 국경을 공격하게 하는 등 대반격에 나섰다. 개소문의 증손자인 개복순이 이끄는 당-신라의 연합군과 무왕 대무예의 사촌 대일하(일한)가 이끄는 발해군이 발해의 남쪽 접경 지역에서 맞서게 되는데 전세의 반전으로 대일하가 전사하고 말갈군(발해군)도 전투에서 대패하여 ‘일한(일하)’ 일족이 전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키안(간)’과 ‘네쿠즈(님금)’ 두 사람이 살아남아 ‘아르가나 쿤(압록강의 군, “발해서경 압록군”)’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키얀과 네쿠즈의 자손이 불어나자 아르가나 쿤에서 빠져 나와 모골(몰골, 말갈, 후에 몽골)의 고향으로 돌아가 칭기즈칸 선조의 부락이 되었다 한다. 이때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큰고려씨)’ 종족이 먼저 아르가나 쿤에서 나왔고 이어 나머지 모골(몽골) 종족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페르시아어로는 ‘황금 항아리’라는 인물인데 투르크어로는 ‘알툰 칸(황금 칸)’이고, 그는 바로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금행金幸’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금행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아고래’ ‘함보’ ‘보활리’이다. 이 세 아들이 <고려사>에 나오는 금행의 세 아들이자, <금사>에 나오는 금金나라 시조 삼형제다.

맏아들 아고래(하고라이, 고구려)는 콩그라트 종족의 시조가 되었고 가장 먼저 ‘아르가나 쿤’을 나온 콩그라트 종족은 발해의 남쪽 국토 회복을 위해 발해가 신라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참여했다. 칭기즈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부여 대 부인’의 몽골식 소리)도 이 종족 출신이다.

둘째 아들 함보는 예키라스 종족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는데 바로 이 함보의 7대손이 후일 금나라를 세우는 ‘완안 아골타’ 이다.

셋째 아들 보활리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함흥으로 들어갔다. 보활리의 3대손이 ‘코를라스(고려나씨)’인데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족으로 불리게 된다. 이 코를라스 지파에서 ‘모든 몽골인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몽골인의 조상 ‘알란고와’가 나왔는데 코를라스의 딸이다. 바로 이 알란고와의 10대손이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칸이다. 그러므로 칭기즈칸은 대조영의 19대손이 되며 고구려-발해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발해·고려·金·蒙·淸은 한 가계

<이민자 그래픽팀장>

 

전원철 박사에 의하면 몽골이 고구려-발해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이름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몽골은 칭기즈칸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즉 ‘말 고을’의 옛 소리인 ‘몰-고을’, 곧 ‘말馬-고을邑, 城’에서 생긴 말이다. 고구려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과 ‘일곱 개의 말골(말갈)’로 이 루어져 커진高 나라 ‘커구려(고구려)’였고 결국 ‘말갈’, 곧 옛 소리로 ‘몰골’이 몽골의 어원이라 한다. 전 박사는 “칭기즈칸은 당시까지 돌궐-투르키스탄으로 불리던 땅의 여러 종족들을 통일한 뒤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고구려-말갈’ 가운데 후자를 선택하여 ‘말골(몽골, 모골)’ 이라고 했다”며 “그 이유는 자신의 선조가 바로 말갈(발해) 왕족이었고, 또 그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 동쪽에서는 자신과 같은 선조에서 나와 혈통을 나누는 왕건의 ‘고려(고구려)’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라는 국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몰골(말갈)’의 전음인 ‘몽골’을 자기 국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몽골 제국이 사라진 후 몽골 제국의 재건을 기치로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제국을 세운 ‘티무르’와 인도에서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 또 한 칭기즈칸의 가계이다.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3대조 ‘카불칸’의 형제인 ‘카촐리 바하두르’의 8대손이다. 따라서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방계 5대손이 된다. 바부르는 티무르의 직계 5대손이며 바부르의 모계 또한 칭기즈칸 가문이다. 이렇게 고구려-발해 왕가는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으로 이어진다.

고려 또한 고구려-발해의 가문이다. 금행에는 금시조 함보 등 세 아들 외에 ‘용녀’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작제건’과 결혼했고 그 손자가 고구려를 건국한 왕건이다. 따라서 왕건 또한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다. 그래서 왕건은 “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라고 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북방의 강력한 신흥마군단 세력인 거란이 보낸 사신을 귀양 보내고 공물로 보내온 낙타는 만부교 다리 아래 묶어 굶겨 죽이면서까지 거란과의 통교를 거부했다. 그는 거란과 통교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훈요십조에도 포함시켰다. 망명해 온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자신의 왕씨 족보에 올린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금나라를 건국한 함보의 7대손 ‘아골타’ 뿐 아니라 후금(후에 청나라)을 건국한 ‘아이 신교로 愛新覺羅 누르하치’도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다. 누르하치는 아골타 가문의 약 20세손이 된다.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곧 고려말로 왕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하고 있는데 이는 금의 건국자 아골타가 발해 후손이며 동시에 누르하치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골타의 7대조 함보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가 신라 왕족이라 하는데 함보와 그 부친 금행은 대야발의 5대손 및 4대손으로 신라가 멸망할 시점인 936년대 인물이 아니며 발해가 존재할 당시인 840~850년대의 발해 왕족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석을 종합하면 동아시아에서 나라를 세운 ‘고구려-발해’ ‘고려’ ‘금나라’ ‘대몽골 제국(원나라를 포함하여 4칸 국)’ 그리고 ‘청나라’가 모두 한 가계에서 나왔다는 의미가 된다.

고구려-발해 후손, 이슬람 역사 뒤흔들다

한편 고구려-발해의 후손들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여러 제국을 건설했다. 돌궐 제국은 서쪽으로 이동해가면서 수많은 투르크 국가들을 건설했는데 이들 중 고구려-발해 가계가 리더가 되어 왕조를 세운 나라가 다수 있다. 대조영, 대야발의 4대조는 ‘오구즈칸’이라는 인물인데 그의 사촌 형제들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위구르 제국’이다. 그리고 오구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투르크인들을 지휘하여 서진하면서 세운 나라들이 ‘카를룩’ ‘셀주크 제국’ ‘호리즘샤 제국’ ‘카라한 제국’ ‘가즈나 제국’ ‘맘루크 왕조’ ‘악 코윤루’ ‘카라 코윤루‘ 그리고 ’오스만 제국‘ 등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셀주크 제국은 960년경 ‘셀주크 베이’가 오구즈족 일파를 지휘하여 중앙아시아 일대로 진출했고 ‘토그릴’이 중동 지역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1037년 대셀주크 제국을 출범시켰다. 셀주크는 오구즈칸의 손자인 크닉의 후손이며 토그릴은 셀주크의 손자이다. 이렇게 셀주크 제국은 고구려-투르크계 기마유목민 세력이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지배한 수니파 무슬림 왕조라 한다.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에 맘루크국을 세워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약 270년간 지배했다. 맘루크국은 흔히 노예 왕조라고 불리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싸움을 잘하고 용맹한 투르크 군인을 왕가의 노예로 사서 쓰는 관행이 있었다. 이들이 왕조까지 세운 사례가 이집트 이전에도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 제국 (977~1186년), 인도의 노예 왕조(1206~1290년) 등에도 있었다.

전투력을 자랑하는 아시아 기마군단 투르크가 서진하면서 이집트에 서는 왕실을 경호하는 군인 용병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맘루크 군단의 ‘아이벡’이 이집트 술탄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다. 투르크 노예 출신이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자 끊임없는 저항이 뒤따랐으나 맘루크 군이 공포의 몽골군단의 침략을 막아내자 왕조의 기반이 확고히 다져졌다.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일 칸국의 초대 칸인 훌라구는 이라크를 굴복시키고 연이어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1260년 최강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남하해 왔다. 당시 몽골 제국 입장에서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는 것은 세계 정복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방으로 간 고구려-발해 왕가 일부가 투르크화한 가문인 호라즘샤 제국을 만든 후 몽골군에 망하자, 그 가문의 일원인 맘루크의 술탄 쿠투즈는 오히려 몽골군을 ‘아인 잘루트’로 유인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이슬람 세계는 몽골 제국의 파괴로부터 구원받았고 유럽에서 닥쳐온 십자군 전쟁도 끝내 카이로는 바그다드를 대신해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1299년에는 일 칸국의 카잔칸이 다시 맘루크국 정복에 나서지만 ‘나세르 무함마드’가 몽골의 침략을 다시 막아냈다. 전 박사가 분석한 이 왕가들의 ‘샤자라(족보)’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구려-발해 가문의 후예인 칭기즈칸이 대몽골 제국을 건설했고 이들 몽골군단이 이집트에까지 진출하려 했으나 또다른 고구려 가문의 후예인 맘 루크가 이를 막아냈던 것이다. 지금도 이집트 최대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가면 지중해 해변에 ‘카이트 베이’라는 맘루크 왕조 시대에 세운 기념비적인 성채가 지중해의 파도를 막아내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2018년 5월 국빈 자격으로 내한한 에르도안 터키공화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청와대 홈페이지>
 

뿐만 아니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부터 1922년에 이르기까지 600년 이상 지속된 최강의 투르크 국가였다. 오스만 제국의 시조 오스만 1세는 오구즈칸의 아들 ‘카이’의 후손으로 오스만 제국 역시 고구려 후예인 오구즈 가문의 나라이다. 오스만 제국은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칭기즈칸의 후예 티무르에게 패배한 이후 약 50년간 극심한 침체기를 겪었으나 1453년 무하마드 2세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했고, 이후 1517년에는 메카를 점령하여 칼리프의 지위에 올랐다. 술레이만 1세 때 세계 제국을 건설했지만, 18세기 말 이후 쇠락하면서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오스만 제국의 막이 내린다. 바로 이 오스만 제국의 후예가 1923년 건국된 오늘날의 터키이며 터키인들이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인식하는 것도 이와 같은 DNA의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제국들과 왕국들의 역사에서 놀라운 한국인 DNA 역사가 발견되는 것이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후예’ 주장하는 전원철 변호사

“칭기즈 칸의 조상은 추마나 콘, 곧 고주몽”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 “몽골-튀르크계 통칭하는 ‘타타르’는 고구려 ‘대대로’에서 나온 말”
⊙ “터키인의 조상 오구즈 칸은 고구려의 후예”
⊙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 몽골·만주·튀르크·아랍어 등 29개국어 해독…, UNHCR 주재관으로 체첸에서 근무

전원철
1963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美 아이오와대 로스쿨 법학박사(JD), 뉴욕주립대 법학박사 후 과정 / 외무부 유엔국제인권사회과 유네스코 자문관, 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 /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 출간
 
  
 
〈고구려 고(高)씨 왕가의 방계(傍系)인 대(大)씨가 세운 발해는 732년 당(唐)-신라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일한, 즉 발해 무왕 대무예의 사촌형 대일하(대조영의 동생 야발의 아들)가 이끌던 발해(말갈/모굴/모골)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다. 그 결과 발해는 대동강 이남에서 한강 이북에 이르는 땅을 신라에 빼앗긴다. 일한은 전사하고 그의 아들 키얀(칸)과 그의 7촌 조카 네쿠즈(니쿠즈·임금)는 아르카나 쿤(에르게네 쿤·압록군)이라고 하는 오지(奧地)로 들어간다.
 
  훗날 ‘황금항아리’라고 불리는 영웅이 일족(콩크라트족)을 이끌고 아르카나 쿤에서 탈출, 신라군을 물리치고 평주(平州)에 정착한다. ‘황금항아리’는 바로 《고려사절요》에 나타나는 금(金)나라를 개창한 완안아골타의 선조 함보의 아버지 금행(金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이라고 하는 ‘서해용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후일 율두즈 콘(바르카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랑)이라는 손자를 두게 되는데, 그가 아버지는 신라왕, 어머니는 고구려계 여인인 궁예다. 궁예와 왕건은 같은 핏줄인 셈이다.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죽은 후, 그의 셋째 아들이 아르카나 쿤으로 들어가 발해의 지파(支派)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캐)와 합류한다. 발해가 멸망한 후 이들은 오늘날의 내몽고를 거쳐 러시아 땅 부랴티아로 떠난다. 발해가 멸망한 지 235년 후 이들의 후예들 가운데서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한다. 그가 바로 칭기즈 칸이다.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의 후예이자, 궁예의 후예인 것이다.
 
 
  칭기즈 칸과 그의 아들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다. 그중 한 갈래가 지금의 이란을 비롯한 중동 지역을 침공해 일한국을 건국한다. 일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들의 조상인 대일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일한국의 가잔 칸은 재상 라시드 웃딘에게 몽골제국의 역사를 기록하게 한다. 그 책이 《집사》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칭기즈 칸 일족의 역사는 《집사》 외에도 《몽골비사》, 티무르 왕조의 《사국사(四國史)》 등의 사서에 비밀 코드의 형태로 숨어 있다. 서양에서 몽골-튀르크계 종족을 일컫는 말인 ‘타타르’라는 말은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몽골-튀르크계 민족이 세운 왕조는 몽골제국, 일한국(이란), 테무르제국(중앙아시아), 무갈제국(인도), 맘루크 왕조(이집트),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20여 개에 달한다.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의 후예”
 
전원철 변호사의 서재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튀르크어·몽골어 등으로 되어 있는 다양한 사서들이 있다.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1·2)》(비봉출판사 펴냄)이라는 책을 낸 전원철(全原徹·53) 변호사의 주장이다. 기분 좋은 얘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지는 않는다. 이런 소리 하면 “국뽕 맞았다”거나 “당신 ‘환빠’냐?”는 얘길 듣기 십상이다. ‘국뽕’이니 ‘환빠’니 하는 얘기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류의 주장을 하는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이력이 흥미롭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미(美) 아이오와대 법학박사(JD),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근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 주재관…. 아주 ‘글로벌’한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다니….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을 펴낸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이 작년 봄 “29개국어를 하는 언어의 천재”라고 한 것도 흥미를 돋웠다. ‘1980년대 이래 《국부론》 《도덕감정론》 《자본론》 등 묵직한 책들을 펴낸 출판계의 원로가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 원고를 청탁했다.
 
  《월간조선》 작년 6월호에 ‘역사탐험/한 고대사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다’가 실렸다. 이때 그는 주몽예(朱蒙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글자 그대로 ‘고주몽의 후예’라는 의미였다. ‘칭기즈 칸’과 ‘고구려-발해’가 만났기 때문일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선pub(pub.chosun.com)에 실린 이 기사의 조회 수는 6만8967회였다. 이후 조선pub에 나간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즈 칸 가계의 비밀’이라는 기사의 조회 수는 15만9261회. 총 5번에 걸쳐 나간 글은 모두 합쳐 28만4943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조선pub의 기사로서는 기록적인 수치였다. 그의 글이 《월간조선》에 나간 후 어떤 지인(知人)이 물었다.
 
  “그 주몽예라는 사람, 혹시 본명이 전원철 아니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 다닐 때에도 몽골어·터키어 공부한다고 하던 인간이야. 한여름에도 외투 입고 다니던 괴짜….”
 
 
  체첸 갈 때도 《몽골비사》 챙겨
 
체첸 현장 주재관 시절 오세티야의 이슬람 사원 앞에서.
  지난 2월 전원철 변호사가 원고를 보내왔다. 이번에 보내온 글은 〈투르크족의 선조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이라는 제목이었다. 터키인들이 자신들의 선조(先祖)로 여기고 있는 《집사》 속의 인물 오구즈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예라는 내용이었다. 문득 ‘전원철’이라는 인간에 대해 궁금해졌다.
 
  “역사 얘기는 책을 보면 되는 거고, 당신 살아온 인생 얘기나 들어보자”고 했다. 그의 집 문을 열었을 때, 묘한 냄새가 확 풍겼다. 바나나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냄새였다. 베란다에서는 뭔가 퍼덕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꿩이었다. “웬 꿩이냐?”고 묻자, “잡아먹을까 하다가 그냥 기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17평짜리 아파트 거실에는 요가 깔려 있고, 한쪽에는 아랍어·영어·몽골어 책들이 쌓여 있었다. 작은 방에 있는 책장에도 다양한 외국어 책들이 꽂혀 있었다. 전 변호사가 말했다. “이 책들은 페르시아어, 이 책들은 몽골어, 이건 튀르크어, 이건 우즈벡어…” 전 변호사는 책을 펼쳐들면서 설명을 했지만, 기자가 보기에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 이력을 보니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일했다.
 
  “1993년 3월 유엔국제공무원시험 정무관(사무관)급 시험에 합격했다. 임용을 기다리는 동안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국제협력관, 외무부 인권사회과 유네스코담당관 겸 자문관을 지냈다.”
 
  —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체첸 주재관도 지냈다.
 
  “1996년 3월 UNHCR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다짜고짜 ‘미스터 원철 전이냐’고 묻더니 ‘선불 비행기 티켓을 준비해 놓았으니, 내일 제네바로 오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불타고 있다’고 했다. 어디냐고 했더니, ‘체체냐(체첸)’라고 했다. 준비할 게 뭐냐고 물었더니 ‘롱부츠와 여권’이라고 했다. 《몽골비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제네바에서 계약서와 유언장을 쓰고 체첸 인근 다게스탄으로 갔다. 체첸에 도착해 보니, 온통 진흙탕이었다. 왜 롱부츠를 준비하라고 했는지 알겠더라.”
 
  — 무슨 일을 했나?
 
  “전쟁으로 집과 일자리를 잃은 난민들에게 의약품과 식량, 천막, 구호물자 등을 지원해 주는 일을 했다.”
 
 
  “체첸어 익힌 덕에 위기 모면”
 
체첸어를 익힌 덕분에 현지인들과 격의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 유엔기구에서 나갔다고 해도, 러시아군이나 체첸반군의 위협에서 자유로웠을 것 같지는 않다.
 
  “밤 12시면 미사일이 날아가고,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조수인 샤미르와 함께 무전기와 보드카,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챙겨서 차를 타고 들판으로 달려갔다. 현장 사무소로 포탄이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 들으면서 새벽 4시경까지 있다 보면 상황이 끝나고, 그러고 나면 아침부터 난민들이 사무실로 몰려들었다.”
 
  —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카프카스 산악 지역 마을들에 구호물자를 배급하러 갈 때였다. 유엔 표식이 달린 차량을 타고 가는 데도, ‘전투행위자들’이 유엔 차량이라는 걸 알면서도 총격을 가해왔다. 헬기나 초소에서 총격을 가한 일도 있었다. 적십자사 간호원 5명이 사살된 적도 있다. UNHCR 직원도 나를 제외하고는 한 번씩은 납치당하는 경험을 했다.”
 
  전 변호사는 “나는 체첸어를 익힌 덕에 그런 위험은 겪지 않았다”고 말했다.
 
  “체첸어로 현지 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자, 현지인들이 나를 자기들 편이라고 여기게 됐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주민들이 먼저 알려줬다.”
 
  — 체첸 사람들은 어떠했나?
 
  “친절했다. 손님을 환대하는 풍속이 있다. 한번은 해발 3000미터쯤 되는 산길에서 차가 고장 나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됐다. 갑자기 군복을 입은 체첸전사(아팔첸시·향토수호자라는 뜻)들이 나타났다. 누구냐고 묻기에 ‘유엔이다’라고 했더니, ‘아시아에서 온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총을 내렸다. 동료에게 내 차를 고쳐주라고 하더니, 양떼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저중에서 어떤 양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라고 하기에 ‘고동색에 검은 점이 박힌 양’이라고 했더니 그 양을 잡아주었다. 동네 남자 10여 명과 함께 보드카를 마시며 밤을 보냈다.”
 
  — 체첸 그 지역도 칭기즈 칸의 서방 원정로와 관련이 있지 않나?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 아무르 티무르의 원정 루트다. 체첸인은 유럽인도, 동양인도 아닌 모습을 하고 있다. 체첸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먼 옛날에 동쪽에서 온 눈이 찢어진 남자와 아랍 여인이 카프카스산에서 만나 결혼, 체첸인들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이 조선의 속국이었다”
 
  체첸에서 근무를 마친 전원철 변호사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이오와대학 로스쿨에서 인도법(人道法)·전쟁범죄법 등 국제법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대로 나갔으면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길이 달라졌다. 왜일까? “아이오와대학에는 중국계 학생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 우리 조공국(朝貢國)에서 왔구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애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우리가 왜 너희 속국(屬國)이냐?’고 하면 ‘당(唐)나라 이래 원(元)·명(明)·청(淸) 등을 거치면서 내내 조공을 바치지 않았느냐?’고 했다.”
 
  — 그래서 뭐라고 했나?
 
  “‘너희가 우리의 속국이었다’고 했다.”
 
  — 무슨 논리인가?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6대조 멍케티무르(孟可帖木兒)는 이성계의 지방장관이었다. 너희는 우리 함경도 사람에게 지배를 당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 ‘자금성을 지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어머니는 고려 여인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인 후예의 정권이었다’고 했다.”
 
  —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나 명나라를 조선의 속국이라고 하는 건, 역사를 과도하게 소급(遡及)하는 것 아닌가?
 
  “맞다. 하지만 나는 중국인들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리를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다. 중국인들은 ‘조선은 기자·위만 등 중국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의 고지(故地)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언젠가는 지금의 한국 땅도 되찾아야 할 중국의 영역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내 주장은 ‘역(逆)동북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일부 한국인의 선조가 중국에 건너가서 피가 섞였다고 해서 그걸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나?
 
  “일본도 마찬가지 아닌가? 일본 황족에게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피가 섞였다는 건, 일본인들도 인정하고 있지 않나?”
 
  — 설사 그렇다고 해도 한국, 중국, 일본은 이미 수백,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중국, 일본의 역사까지 우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나? 몽골인들이 이란에 가서 일한국을, 이집트에서 맘루크 왕조를, 인도에서 무갈제국을 세웠다고 해서, 그 역사가 몽골의 역사가 되나?
 
  “국가, 땅을 중심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피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얘기가 다르다. 맘루크 왕조는 땅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이집트라는 나라의 역사이지만, 몽골 사람이 이집트로 들어가서 현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만든 몽골 종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화 속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여”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국사》. 티무르제국의 황제 미르조 올룩벡이 서술한 사서이다.

 
  — 칭기즈 칸이 고구려-발해인의 후예라는 건, 무슨 근거에서 하는 얘기인가?
 
  “《몽골비사》를 수없이 읽으면서 나는 칭기즈 칸의 선조인 부르테 치노(푸른 이리·蒼狼)와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慘白色鹿)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들 신화(神話)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것이 실존인물이며, 고구려-말갈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다가 티무르 왕조의 역사책인 《사국사》에서 칭기즈 칸의 10대모(代母)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코와(알란 고와)의 아버지 이름이 추마나 콘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추마나 콘은 곧 주몽 칸(朱夢 可汗)이다. 추마나 콘의 형은 이름이 위마나 콘, 즉 위만 칸(衛滿 可汗)이다. 주몽과 위만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이 우리 민족 말고 누가 있겠나?”
 
  — 그것만으로 고주몽이 칭기즈 칸의 선조라는 건 약하지 않나?
 
  “《몽골비사》에 보면, 알란 코와의 아버지가 ‘코리투마드’ 부족의 부족장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이라고 나온다. ‘코리’는 말갈어로 《요사(遼史)》 속의 ‘고리(稿離)’ 즉 ‘고려(高麗)’라는 말이고, ‘투마드’는 ‘투만-씨’, 곧 ‘도모(都牟)-씨’ ‘동명(東明)-씨’ ‘주몽-씨’라는 말과 같다. 결국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과 추마나 콘은 같은 사람인 것이다.
 
  《사국사》에 의하면, 알란 코와는 4촌 오빠인 도분(디븐) 바얀(도본 메르겐·위마나 콘의 아들)과 결혼한다. 하지만 도분 바얀은 결혼 3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알란 코와는 빛 속의 신비의 인물을 통해 ‘보잔자르 콘(《몽골비사》의 보돈자르)’을 낳는데, 이가 곧 칭기즈 칸의 9대조다.”
 
  — 신화를 역사로 보는 건 무리 아닌가?
 
  “고대 우리 민족은 역사를 비밀 코드로 썼다. 그 코드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신화라고 하는 것이다.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인다.”
 
 
 
“타타르족은 대대로 연개소문의 후예”
 
  전원철 변호사는 칭기즈 칸 이전에 몽골(모굴)족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오늘날 서양에서 몽골이나 튀르크계 민족을 통칭하는 표현인 타타르(Tatar)족은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타타르 종족의 시조 타타르 칸과 몽골 종족의 시조 모골 칸은 알무잔나 칸의 두 쌍둥이 아들이다. 《사국사》와 《투르크의 계보》에 기록된 ‘타타르 칸’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자유(淵子遊)이다. 타타르는 곧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온 것이다.
 
  히바 칸국(1511~1920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 걸쳐 있던 몽골계 나라)의 칸이자 역사학자인 아불가지 칸은 ‘타타르라는 말은 원래 인명으로 쓰였으나, 나중에는 종족 칭호의 형태를 띠게 됐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대대로 연개소문 가문’을 지칭하다가 나중에 이 가문이 이끄는 백성과 속민을 일컫는 말이 되어 타타르로 변화한 것이다.”
 
  — 그것만으로 타타르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는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 ‘달단(韃靼·타타르)은 말갈의 남은 씨앗(遺種)이다’라고 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말갈은 곧 고구려이다. 이 책에 의하면 〈원래 해(奚), 거란의 동북에 있었다. 나중에 거란에 공격당해 부족이 나뉘어 흩어졌다. 어떤 것은 거란에 속하고 어떤 것은 발해에 속했는데, 갈린 부락이 음산에 흩어져 살면서 스스로 부르기를 달단이라고 했다. 당나라 끝 무렵에 그 이름을 가지고 중국에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 역사책에 나타나는 단어들을 교묘하게 꿰맞추는 건 아닌가? 다른 증거는 없나?
 
  “옛 돌궐(튀르크) 지역인 카자흐스탄 서쪽 러시아 땅에는 하카스공화국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타다르(Tadar)족, 혹은 코오라이, 콩구레이라고 한다. 이들은 우리 민족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수레, 순대 만들기, 보쌈과 같은 약탈혼 풍속 등도 흡사하다. 귀틀집과 같은 집을 입(Yip)이라고 한다. 아마 이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돌궐족의 땅에 들어간 고구려의 후예일 것이다. ‘코오라이’는 ‘고려’, ‘콩구레이’는 ‘큰 고려’라는 의미다.”
 
  전원철 변호사는 “터키인들도 고구려의 후예”라고 말한다.
 
  “칭기즈 칸의 조상인 모골 칸에게는 카라(高麗) 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튀르크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하는 오구즈 칸이다. 오구즈 튀르크인들은 서방의 튀르크 지역으로 간 고구려 백성의 무리이다. 그들 중에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코로 호자라는 사람인데, ‘코로’란 ‘고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흔히 6·25 때 터키군이 참전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터키는 이렇게 혈연적으로 고구려와 형제국이다.”
 
 
  “오롱키(오랑캐)어도 공부”
 
전원철 변호사가 칭기즈 칸의 계보를 밝히는 데 활용한 역사서들. 왼쪽부터 《몽골비사》 《승리의 서》 《집사》 《행운의 정원》.
  전원철 변호사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몽골비사》나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요사》 《금사(金史)》처럼 이름만 들어본 중국 역사책(전원철 변호사는 ‘동방사서’라고 함)에서부터 일한국의 《집사》, 티무르제국의 《사국사》 《승리의 서(書)》(티무르에 대한 기록), 우즈베키스탄 콩그라트 왕조에서 나온 튀르크어 역사서 《행운의 정원》 등(전원철 변호사는 ‘서방사서’라고 함)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역사서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의 책장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몽골어·튀르크어·러시아어·스페인어 등으로 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설사 그의 주장이 ‘말장난’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다양한 언어로 된 책들을 넘나들면서 그런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 박기봉 비봉출판사 사장이 ‘언어의 천재’라고 하던데, 몇 개 국어나 하나?
 
  “영어는 기본이고, 고교 때 2외국어로 일본어를 했다. 언젠가는 소련과 관계 개선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1 때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독어는 대학교 다닐 때 마르크스와 헤겔을 읽기 위해 공부했고, 카뮈와 콩트를 읽기 위해 불어를, 《군주론》을 읽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세네카의 《성서》를 읽으려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스페인어도 했고… 그러다가 ‘서구(西歐)문명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에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알아야겠다’고 반성하게 되면서 동양어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면서 전 변호사가 꼽은 언어들은 이랬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몽골어, 중세 튀르크어, 터키어, 우즈벡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오롱키어(오랑캐어), 어웡키어, 중국어, 티베트어, 만주어, 다와르어, 거란어, 부랴트어, 타타르어…. 모두 29개다.
 
  — 만주어, 몽골어 같은 것은 어떻게 공부하게 됐나?
 
  “우리 역사로 관심을 돌리면서 전씨 집안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 전씨의 조상은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고구려를 떠날 때 데리고 온 10명의 신하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만주어, 몽골어는 기본으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졸업할 무렵에는 중국어도 배웠다.”
 
  — 몽골어 같은 건 어디서 배웠나?
 
  “대학교 도서관에서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대출해 간 적이 없는 독일어로 된 몽골어 문법서 한 권을 발견했다. 우리말과 몽골어 문법이 매우 비슷해서 기본 문법 공부는 2~3주 내에 마쳤다. 마침 우연히 알게 된 몽골인 친구가 몽골에 간다기에 《몽골비사》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 책을 독본 삼아서 몽골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 만주어 같은 건 지금도 쓰는 사람이 있나?
 
  “책으로 공부했는데, 지금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 나도 만주어로 대화할 사람이 없는 게 아쉽다. 만주어의 먼 방언인 시보(錫伯)어를 쓰는 사람이 한 10만명 정도 된다.”
 
  — 한 가지 언어를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됐나?
 
  “대학 시절에는 한 학기 이상 안 걸렸다.”
 
 
  “우리 역사 바로 알려면 중국사서(史書) 외에 다른 사서도 보아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찔러보았다.
 
  — 아무래도 말장난 같다.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계보를 기반으로 그것을 ‘동방사서’의 기록들과 철저히 대조했다. ‘서방사서’에 나오는 사람들이 ‘동방사서’에 그대로 나온다. 그 계보의 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방 이름의 뜻과 그 위치를 역사언어학적 및 지리학적으로 밝혔다. 문헌사, 역사언어학, 역사지리학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자신만만했다.
 
  — 역사학자들이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이겠나?
 
  “주류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 내 주장에 관심이 없다. 나도 그들과 토론하고 싶다. 중국 사료(史料)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튀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되어 있는 사서들도 보아야 한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 주장대로라면, 한국은 물론, 중국, 몽골, 터키 등 유라시아의 역사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게 된다. 지나친 국수주의 아닌가?
 
  “터키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오늘날 터키공화국 영토 내에서 있었던 역사만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중국 역사서에 유연(柔然), 돌궐부터 오구즈 튀르크,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아시아 대륙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활동했던 튀르크계 종족들의 역사를 모두 자기들의 역사로 기술(記述)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발해의 역사마저 말갈족의 역사라면서 우리 역사에서 배제하고 있다. 이제는 한반도 밖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아닌 걸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 않나? 나라 밖에서 행해진 우리 민족의 행위는 우리 역사가 아닌가?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한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월간조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력 있는 잡지(월간조선)

month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