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리승만 박사 탄신 148주년 역사-이승만은 누구인가" / [이승만 탄신일 특집]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 [방송소식] TV조선, 다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방송, / [포토] 이승만..

2023. 3. 31. 03:59아시아 소식/대한민국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리승만 박사 탄신 148주년 역사

목숨 걸고 쓴 이승만 일대기 "물로 씌어진 이름" / 복거일 작가

[펜앤초대석]

https://www.youtube.com/live/llb-Nm5yxqU?si=jfPlE0enjUrXFgHq 

✅복거일의 '물로 씌어진 이름' 출판기념회
시간 : 2023년 8월 31일 오후 6시 장소 : 서울 종로구 인사동 11길 23
"아지오" 문의 : 02-2138-5881 (평일문의 : 오전 9시 30분 ~ 오후 5시 30분) 이메일 문의 - pennmike17@gmail.com
※ 주말 및 공휴일에는 이메일로 성함과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접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몰아보기] 이승만은 누구인가"

https://youtu.be/_nmQKQLWFn8?si=SpEbCsBJQlXwz5rB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는 상반된 두 가지 시각! 21세기 대한민국 역사관 논쟁은 결국 초대(初代) 대통령 이승만을 어떻게 보느냐로 귀결됩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결코 현재 우리의 삶과 무관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관의 차이와 갈등, 논쟁이 오늘날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우리는 이승만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여러분의 판단에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영상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시리즈’ (도서출판 휘선, 박윤식 저)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시리즈’는 2011년 발간 이래 교보문고에서 역사,문화도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여러차례 오른 검증된 책입니다. 교보문고 등 온,오프라인 대형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가감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정확한 사실 그대로 알아야만 대한민국이 새로운 역사 창조의 주역이 돼서 전 세계를 밝힐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시리즈 저자 휘선 박윤식 박사’
 
자료영상 : ehistory.go.kr
자료사진 : 이승만기념관닷컴

 

 

[방송소식] TV조선, 다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방송

2023-03-24 17:29

                                                                      TV조선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이승만 탄실일 특집]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Mar 26, 2023
 
Tv조선 다큐-이승만의 하와이 30년
 
 

(서울=연합뉴스) 오명언 기자 이승미 인턴기자 = ▲ TV조선, 다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방송 = TV조선은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 58주기를 맞아 특집 다큐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을 방송한다고 24일 밝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한인들의 자립과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보낸 시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승만 탄신일 특집]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https://youtu.be/lrfIjupNCTs

 Mar 26, 2023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30년 독립운동 "영화 촬영 이야기"

https://youtu.be/8LlFEcwaxqg

 

 

이승만 대통령의 100년 넘는 성경 청란교회에 기증 

  •  배성하
  •  승인 2023.02.27 19:42

청란교회, ‘성경책 컬렉션’ 영구보존 계획/
노태우 대통령과 이어령 교수 성경책도/

【뉴스제이】 배성하 기자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생전 사용하던 성경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종교개혁 500주년기념교회를 표방하는 청란교회(송길원 목사)에 기증된다. 

 

100년도 넘은 것으로 알려진 이 성경책은 갈색 표지에 이승만 대통령의 영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송길원 목사 페이스북

 

100년도 넘은 것으로 알려진 이 성경책은 갈색 표지에 이승만 대통령의 영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책 가운데에는 가족 정보를 적을 수 있는 페이지가 있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하야 할 때까지, 12년간 대한민국과 함께 했다. 경무대에 머물었던 시기에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실천했던 손떼 묻은 바로 그 '성경'이다.

송길원 목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이승만 대통령)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었던 성경”이라며 “해진 가죽, 책갈피에서 길고 긴 시간이 느껴진다. 대통령으로서의 고뇌와 한숨도 묻어 있다”고 전했다.

 

또한, 송길원 목사는 “본인은 ‘다문화가족’이란 용어를 사회에 제안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다문화가족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냈던 첫 번째 인물로 기억한다”면서, “고인의 이 성경책은, 1990번째 맞이하게 될 부활주일 아침 4월 9일에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동교회에서 이승만 박사 추모예배를 드리는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 박사의 성경책 기증자는 윤보선 대통령의 첫 번째 공보수석이었던 장성철 수석의 아들 장범 씨다. 장성철 수석은 후일 목사이자 선교사로 헌신했다. 장범 씨는 아버지 장성철 수석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청와대)근무 시절 발견하고 보관했다가 그에게 물려준 것을 평소 친분이 있던 청란교회 송길원 목사에게 기증한 것이다.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의 성경책의 경우, ‘어거의 몸 가운데서도 두 번 이상을 읽은 성경책’도 최근 청란교회(W-Story)에 기증됐다. 또 이어령 교수(초대 문교부 장관)의 생전 독본 성경책 또한 현재 청란교회에 기증됐으며, 향후 청란교회는 이 ‘성경책 컬렉션’으로 일반에게 공개되며 영구보존 할 계획이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선구자적 업적 재 조명하자 

  •  배성하
  •  승인 2023.03.27 08:55
탄생 148주년 기념식, 정관계 인사 참석/
6.25 당시 유엔과 미국의 참전 유도/
“죽는 순간까지도 성경 중심적으로 살아”/

【뉴스제이】 배성하 기자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탄생 148주년 기념예배’가 26일 오후 2시 서울 이화장에서 열렸다. 윤석열 정부 들어 처음 열린 이날 기념식에는 박진 외교부 장관과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타자를 치며 업무를 보고 있다. 

 

기념식에서 황교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가 현재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며 “이승만 대통령을 제자리에 돌려드리고 그의 공헌이 제대로 인정받도록 노력해달라”고 부탁했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은 격변의 현대사 그 자체”라며 “광복 후 이 대통령은 반공자유주의자로서 자유와 시장경제, 농지개혁, 의무교육 등을 통해 초석을 닦았다”며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역사 패륜아로 낙인찍혔다. 진영을 떠나 우리 후손들이 건국대통령 이승만 업적을 재조명하자”고 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 한미동맹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고, 현재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국민의 노력에다 한미동맹을 기틀로 했다”며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해 이승만의 선구자적 업적은 재조명 돼야 한다”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한 이승만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국민이 하나로 뭉치자”고 했다.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탄생 148주년 기념예배’가 26일 오후 2시 서울 이화장에서 열렸다.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태어남은 우리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보우하심이었다. 북한 김일성의 남침 당시 이승만의 외교력에 따른 유엔과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없었을 것”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이른바 ‘이승만 라인’을 선언하면서 독도의 영유권을 지켜냈다”며 “이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그분의 생애를 제대로 평가하고 계승하자”고 강조했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은 “1917년 레닌주의가 발동했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부당함과 동시에 자유민주정신을 강조했다”며 “북한 주체사상이 잔존하고 있는 이 때, 이승만은 위대한 선각자”라며 “위대한 반공 지도자로 자유대한민국을 세웠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켜내겠다는 이 대통령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 박사 탄신행사에 참여한 이 박사 아들 이인수 박사와 조혜자 여사.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날 예배에서 설교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이규학 감독(우남이승만전집발간 위원장)은 “하나님은 1899년 한성감옥 수감 당시 이승만을 직접 찾아가셨다”며 “수감 중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어둠 속 빛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 이승만은 ‘나를 구원하시고 내 백성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이것이 이승만의 회심 역사”라고 했다.

 

이 감독은 “이승만 대통령은 감옥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방문으로 성령 체험에 따라 원수를 사랑하게 된다. 2천 년 돌아가신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모신 것”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의 한성감옥 수감 당시 조선은 콜레라 전염병 발발로 하루에 재소자만 10여 명이 죽어 나갔다. 이 대통령은 전염병 감염에 두려워 시체 처리를 꺼리는 교도관들과 달리, 시체를 직접 닦고 수습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도자가 된 이후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성경 중심적으로 살았다”고 했다. [참고기사 이승만 대통령의 100년 넘은 성경 청란교회에 기증]

 

참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그러면서 “이승만은 모세다.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모세처럼 한 가지 실수로 인해 하와이에서 여생을 마감했다.”며 “악한 세력을 다루는 카리스마가 필요하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는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웠다. 그의 카리스마는 후세대에 의해 왜곡된 측면이 있지만, 열정적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으며 성경적 나라를 세우려는 그의 업적이 기려지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진 강연에서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기독교국가건설 ▲공화주의 ▲반공주의 ▲평등사회 실현 ▲교육 상공업 등 산업 육성을 통한 부국강병 추구 등을 꼽았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이승만은 기독교의 도덕 기준이 한 나라의 건전한 도덕 기준으로 자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했다.

이어 “미·중 대립 시대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사적 흐름을 파악해 계몽과 독립운동을 통해 민중을 일깨운 사람”이라며 “그의 뛰어난 통찰과 혜안을 계승해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 전대통령은 1875년 황해도에 출생했으며 독립협회 가입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승만 전 대통령은 1875년 황해도에서 출생했으며 독립협회 가입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1운동 발발에 이어 그해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1921년 5월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61년 4·19 혁명 발발 이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미국 하와이로 넘어가 1965년 7월 19일 서거했다.

 

 

[포토] 이승만의 하와이30년 발표하는 이덕희 하와이한인이민연구소장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8/05/15/2018051500092.html

정상윤 기자

입력 2018-05-15 19:07  수정 2018-05-15 19:07

 
이덕희 하와이한인이민연구소장이 15일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서 열린 제87회 우남(雩男)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새 대한민국 만들기 위한 초석-하와이, 대한민국 건국 발판 된 이승만 제2의 고향'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1941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덕희 소장은 196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사회학 석사, 남가주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30여년 이상 하와이에서 활동하며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 등을 펴냈다.
 
정상윤 기자 jsy@newdaily.co.kr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 관련서적 | 이승만기념관 - 건국대통령 업적과 연구자료 제공

관련서적: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하와이에서 47년간 살고 있는 이 책의 필자는 30년이 넘도록 도시·환경계획가로 활동한 후 지난 10여년은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조사·연구하면서 이승만의 활동을 추적해왔다. 이승만은 그의 일지에 첨부한 낱장 문서에서 1904년 11월 4일 고국을 떠나 1940년 12월 3일까지 36년간을 미국 땅에서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이 기간 중 1913년 2월 3일부터 1939년 11월 10일 워싱턴 D.C.로 완전 이주하기까지 25년간 이승만의 본거지는 하와이였다. 이 작은 섬에서 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승만은 무슨 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을까?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지낸 12년 간 그리고 그 이전 미국 땅에서 펼쳐간 정치활동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담았다.

 

<출판사 서평>

이승만은 그의 일지에 첨부한 낱장 문서에서 자신이 미국에서 얼마동안 살았는지를 적어 놓았다. 그는 1904년 11월 4일 고국을 떠나 1940년 12월 3일까지 36년간을 미국 땅에서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그 후 1945년 10월 4일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또 다른 4년 10개월간을 워싱턴 D.C.에서 지낸 것을 포함하면, 이승만은 통틀어 41년간의 삶을 미국에서 지낸 셈이다. 이 기간 중 1913년 2월 3일부터 1939년 11월 10일 워싱턴 D.C.로 완전 이주하기까지 25년간 이승만의 본거지는 하와이였다. 하와이는 38살의 이승만이 정착하여 4반세기 동안 활동했던 제2의 고향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정착하기 10여 년 전 이미 ‘하와이 왕국’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 선교사들이 어떻게 ‘하와이 왕국’의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는지, 그리고 선교사들을 따라 들어온 미국 기업가들이 원주민들의 이익보다는 자기네들의 이익에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결국에는 미국 정부가 하와이 섬들을 모두 병합하여 미국의 영토로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하와이 왕국’의 여왕이 폐위된 전말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도 한국을 병합하는 준비단계로 미국정부가 파견한 앞잡이들이라고 간주했었다.


그런 이승만은 옥중에서 미국 선교사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가 한국 민족을 정신적, 도덕적으로 거듭날 수 있게 만들 유일한 종교라고 믿게 되었다. 그의 저서 《독립정신》(1904년 집필, 1910년 출판), 박사학위 논문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1910년 통과, 1912년 출판), 《신학월보》와 《제국신문》 등에 기고한 수많은 글속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정치, 경제, 외교 사상을 천명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하와이는 이승만이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한 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은 섬에서 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승만은 무슨 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을까?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지낸 12년 간 그리고 그 이전 미국 땅에서 펼쳐간 정치활동에 관하여는 적잖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승만이 4반세기 하와이에서 펼쳐간 총체적인 활동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관심 부족과 자료 부족 이외에 그나마도 있는 자료가 태평양 한 가운데 작은 섬 하와이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와이에서 47년간 살고 있는 이 책의 필자는 30년이 넘도록 도시·환경계획가로 활동한 후 지난 10여년은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조사·연구하면서 이승만의 활동을 추적해왔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상적으로 조사하는 신문과 잡지는 물론이고 ‘하와이 주정부 문서기록원’(State Archives)과 이승만 관련 단체 자료뿐 아니라, ‘하와이 주정부 토지 및 자연자원국’ 그리고 ‘부동산 기록원’(Department of Land and Natural Resources, Bureau of Conveyances)의 부동산 매매등록 자료, 하와이 전화번호부(Directory of Honolulu & Territory of Hawaii), 옛 지도 등 좀 더 다양한 자료를 심층적으로 조사하여 이승만의 활동시기와 장소 등을 일일이 확인하고 점검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많은 활동을 하면서 25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지만, 변동하는 국제정세에서 지정학적으로 하와이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이나 외교활동의 본거지가 될 수 없음을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와이가 한국의 새 독립국가 설립을 위한 정치활동의 본거지는 아니더라도, 새롭게 세워질 나라를 준비할 수 있는 곳으로 인지했다. 그래서 하와이는 이승만이 교육자로, 언론 출판인으로, 기독교 지도자로, 또한 기업인으로 그의 생각과 계획을 실천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의 교육활동은 건국될 새 나라의 일꾼을 기르기 위한 활동이었고, 한인 YMCA 설립은 한인단체가 처음으로 미국인 단체의 일부가 되도록 해서 한인들의 미국화 과정을 앞당기는데 기여한 활동이었다. 그의 언론활동은 단순한 잡지와 서적 출판에 머물지 않고, 대중교육까지도 포함한 그의 교육활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가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 독립해 조직한 교회는 미국 감리교의 재정에 의존한 채 자립하지 못했던 한인 기독교 교인들에게 당당하게 자립된 교회를 지켜나갈 수 있는 독립심을 심어준 활동이었다. ‘동지회’ 조직과 ‘동지촌’ 운영은 정치와 경제를 병행해야 함을 일찍이 깨달은 이승만의 또 다른 활동이었다. 이승만이 특히 1939년 이후 새로운 국제 정치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워싱턴에서 새 나라 건립을 위한 외교와 정치라는 날개를 펼 수 있기까지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곳이 이곳 하와이였다. 동시에 하와이는 이승만이 새 나라 세우기 준비과정 속에서 상처받고, 좌절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위로받고 충전할 수 있었던 그의 제2의 고향이었다.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던 ‘외국인 신부’와 함께 가난한 신혼시절을 보낸 곳도 하와이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이끌어간 교육, 언론, 종교, 그리고 ‘동지회’ 등 모든 활동은 개인 이승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설립·운영한 ‘한인기독학원’ 부지의 판매금은 인하공과대학 설립으로 이어졌고, 개인주택 단지로 개발된 그 부지에는 Kula(학교) Kolea(한국)라는 이름의 도로로 남아있어 한인 학교가 있었던 이민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 독립해 개척한 ‘한인기독교회’는 광화문 문루의 교회당을 2006년에 재건했고, 2018년에 맞이할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동지들과 조직한 ‘동지회’의 회관 매각 대금은 <우남 이승만 박사 장학기금>으로 관리되어 매해 20,000달러 이상의 장학금으로 지급되고 있다. 회관 매각 대금의 일부로 하와이에서 보낸 묘비석(墓碑石)은 지금도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그의 묘를 지키고 있다. 그가 운영했던 기업 ‘동지촌’의 숯가마 터는 개인주택 필지로 분할되어 있는데, 방문객들로 하여금 그 옛날 이승만의 수고를 기억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들이 이승만이 남긴 활동의 흔적들이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25년 동안 준비하면서 얻은 이른바 ‘노하우’(know-how)는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첫 12년을 이끌어가면서 수립한 의무교육, 농지개혁 등 수많은 정책에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오랫동안 준비한 이승만이었다.


수많은 좌절을 이겨낸 이승만이 그토록 바라던 대한민국을 수립할 때까지 그는 결코 홀로 있지 않았다. 그의 나라 세우기 준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후원한 사람들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에서 존스 목사가 준비한 환송 예배를 드리고 떠난 이들을 시작으로 하와이에 온 이민자들이었다. 이승만은 이 이민자들의 나라사랑과 그들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았다. 1951년에 대한민국의 인재를 키우는 공과대학 설립을 계획하면서 이승만은 인천항을 떠나 나라 세우기에 동참해 준 이들을 기념하고자 ‘인하’라고 이름 지었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이 함께한 하와이 한인 이민사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계속되고 있다.-- 머리말, 맺음말 중에서

 

<책 속으로>

이승만은 그의 일지에 첨부한 낱장 문서에서 자신이 미국에서 얼마동안 살았는지를 적어 놓았다. 그는 1904년 11월 4일 고국을 떠나 1940년 12월 3일까지 36년간을 미국 땅에서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그 후 1945년 10월 4일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또 다른 4년 10개월간을 워싱턴 D.C.에서 지낸 것을 포함하면, 이승만은 통틀어 41년간의 삶을 미국에서 지낸 셈이다. 이 기간 중 1913년 2월 3일부터 1939년 11월 10일 워싱턴 D.C.로 완전 이주하기까지 25년간 이승만의 본거지는 하와이였다. 하와이는 38살의 이승만이 정착하여 4반세기 동안 활동했던 제2의 고향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정착하기 10여 년 전 이미 ‘하와이 왕국’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 선교사들이 어떻게 ‘하와이 왕국’의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는지, 그리고 선교사들을 따라 들어온 미국 기업가들이 원주민들의 이익보다는 자기네들의 이익에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결국에는 미국 정부가 하와이 섬들을 모두 병합하여 미국의 영토로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하와이 왕국’의 여왕이 폐위된 전말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도 한국을 병합하는 준비단계로 미국정부가 파견한 앞잡이들이라고 간주했었다.


그런 이승만은 옥중에서 미국 선교사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가 한국 민족을 정신적, 도덕적으로 거듭날 수 있게 만들 유일한 종교라고 믿게 되었다. 그의 저서 《독립정신》(1904년 집필, 1910년 출판), 박사학위 논문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1910년 통과, 1912년 출판), 《신학월보》와 《제국신문》 등에 기고한 수많은 글속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정치, 경제, 외교 사상을 천명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하와이는 이승만이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한 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은 섬에서 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승만은 무슨 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을까?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지낸 12년 간 그리고 그 이전 미국 땅에서 펼쳐간 정치활동에 관하여는 적잖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승만이 4반세기 하와이에서 펼쳐간 총체적인 활동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관심 부족과 자료 부족 이외에 그나마도 있는 자료가 태평양 한 가운데 작은 섬 하와이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와이에서 47년간 살고 있는 이 책의 필자는 30년이 넘도록 도시·환경계획가로 활동한 후 지난 10여년은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조사·연구하면서 이승만의 활동을 추적해왔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상적으로 조사하는 신문과 잡지는 물론이고 ‘하와이 주정부 문서기록원’(State Archives)과 이승만 관련 단체 자료뿐 아니라, ‘하와이 주정부 토지 및 자연자원국’ 그리고 ‘부동산 기록원’(Department of Land and Natural Resources, Bureau of Conveyances)의 부동산 매매등록 자료, 하와이 전화번호부(Directory of Honolulu & Territory of Hawaii), 옛 지도 등 좀 더 다양한 자료를 심층적으로 조사하여 이승만의 활동시기와 장소 등을 일일이 확인하고 점검했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많은 활동을 하면서 25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지만, 변동하는 국제정세에서 지정학적으로 하와이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이나 외교활동의 본거지가 될 수 없음을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와이가 한국의 새 독립국가 설립을 위한 정치활동의 본거지는 아니더라도, 새롭게 세워질 나라를 준비할 수 있는 곳으로 인지했다. 그래서 하와이는 이승만이 교육자로, 언론 출판인으로, 기독교 지도자로, 또한 기업인으로 그의 생각과 계획을 실천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의 교육활동은 건국될 새 나라의 일꾼을 기르기 위한 활동이었고, 한인 YMCA 설립은 한인단체가 처음으로 미국인 단체의 일부가 되도록 해서 한인들의 미국화 과정을 앞당기는데 기여한 활동이었다. 그의 언론활동은 단순한 잡지와 서적 출판에 머물지 않고, 대중교육까지도 포함한 그의 교육활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가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 독립해 조직한 교회는 미국 감리교의 재정에 의존한 채 자립하지 못했던 한인 기독교 교인들에게 당당하게 자립된 교회를 지켜나갈 수 있는 독립심을 심어준 활동이었다. ‘동지회’ 조직과 ‘동지촌’ 운영은 정치와 경제를 병행해야 함을 일찍이 깨달은 이승만의 또 다른 활동이었다. 이승만이 특히 1939년 이후 새로운 국제 정치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워싱턴에서 새 나라 건립을 위한 외교와 정치라는 날개를 펼 수 있기까지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곳이 이곳 하와이였다. 동시에 하와이는 이승만이 새 나라 세우기 준비과정 속에서 상처받고, 좌절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위로받고 충전할 수 있었던 그의 제2의 고향이었다.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던 ‘외국인 신부’와 함께 가난한 신혼시절을 보낸 곳도 하와이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이끌어간 교육, 언론, 종교, 그리고 ‘동지회’ 등 모든 활동은 개인 이승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설립·운영한 ‘한인기독학원’ 부지의 판매금은 인하공과대학 설립으로 이어졌고, 개인주택 단지로 개발된 그 부지에는 Kula(학교) Kolea(한국)라는 이름의 도로로 남아있어 한인 학교가 있었던 이민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 독립해 개척한 ‘한인기독교회’는 광화문 문루의 교회당을 2006년에 재건했고, 2018년에 맞이할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동지들과 조직한 ‘동지회’의 회관 매각 대금은 [우남 이승만 박사 장학기금]으로 관리되어 매해 20,000달러 이상의 장학금으로 지급되고 있다. 회관 매각 대금의 일부로 하와이에서 보낸 묘비석(墓碑石)은 지금도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그의 묘를 지키고 있다. 그가 운영했던 기업 ‘동지촌’의 숯가마 터는 개인주택 필지로 분할되어 있는데, 방문객들로 하여금 그 옛날 이승만의 수고를 기억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들이 이승만이 남긴 활동의 흔적들이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25년 동안 준비하면서 얻은 이른바 ‘노하우’(know-how)는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첫 12년을 이끌어가면서 수립한 의무교육, 농지개혁 등 수많은 정책에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오랫동안 준비한 이승만이었다.


수많은 좌절을 이겨낸 이승만이 그토록 바라던 대한민국을 수립할 때까지 그는 결코 홀로 있지 않았다. 그의 나라 세우기 준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후원한 사람들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에서 존스 목사가 준비한 환송 예배를 드리고 떠난 이들을 시작으로 하와이에 온 이민자들이었다. 이승만은 이 이민자들의 나라사랑과 그들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았다. 1951년에 대한민국의 인재를 키우는 공과대학 설립을 계획하면서 이승만은 인천항을 떠나 나라 세우기에 동참해 준 이들을 기념하고자 ‘인하’라고 이름 지었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이 함께한 하와이 한인 이민사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계속되고 있다.-- 본문 중에서 

 

<목 차>

머리말

제1부 미국 하와이 한인사회

1장 미국 하와이 한인사회의 형성
1. ‘하와이왕국’과 이민 계약 노동자
2. 하와이 감리교 교단
3. 한인 이민과 주한 미국 선교사
4. 한인 감리교회 설립
5. 한인사회의 형성과 이승만의 첫 하와이 방문

제2부 이승만의 하와이 활동 25년

2장 언론 및 출판 활동
1. 《한국교회핍박》 출간
2. 《태평양잡지》와 《한인교회보》 발간
3. 대한인동지회의 기관지 《태평양잡지》와 《태평양주보》

3장 교육 활동
1. 한인중앙학교
2. 한인여학원
3. 한인기독학원
4. 인하공과대학

4장 선교활동 및 교회개척

1. 한인 감리교회 지도자 양성 집회
2. 호놀룰루 한인YMCA 조직
3. 한인기독교회
4. 한인선교부 조직
5. 광화문 문루 교회당

5장 대한인동지회 활동
1. 대한인동지회 조직
2. 동지촌(同志村)
3. 대한인동지회와 하와이 단체 통일운동
4. 워싱턴 D.C.로 이주

6장 생활비와 부동산 투자
1. 생활비
2. 부동산 투자

7장 인간관계
1. 김노디
2. 미국 본토에서 온 새 지도자들
3. 백인 협조자들

제3부 하야 후 하와이 5년

8장 환국 후 하와이 방문

9장 대통령 하야 후 5년

맺음말

부록

1. 이승만의 학교 관련 부동산거래
2. 이승만의 회계수첩, 1923~1924
3. 이승만의 만(Mann) 법 위반 혐의 이민국 조사 보고서(영문)
4. 이승만의 만(Mann) 법 위반 혐의 이민국 조사 보고서(번역문)
5. 김현구에 대한 이승만의 사실 설명
6. 이승만의 하와이 활동 연표
참고문헌

 

이승만 대통령 서한 자료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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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10월 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사진 제공=건국이념보급회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독립운동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이 오는 9월 7일 오후 2시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된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25년간 독립운동을 한 내용과, 하야 후 5년간의 하와이 생활을 담은 이번 다큐멘터리는 1934년 미국 뉴욕에서 촬영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결혼식 사진`은 물론, 이승만이 하와이 한인들의 자립과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운영한 `숯가마터` 등 국내에서 한 번도 소개되지 않았던 미공개 자료들을 수록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특히 이번에 공개되는 결혼식 사진은 이승만의 `양녀` 김노디 지사(2021년 애국장)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김 지사 사후 그녀의 딸 위니프레드 리 남바 씨가 보관해오다 제작진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운동하다 일제 탄압 피해 1913년 `하와이行`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난 이승만은 12살에 사서삼경을 모두 외울 정도로 천재였으나, 부정부패한 조선의 과거에 수차례 낙방하고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국민 계몽 활동을 하다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돼 한성감옥에 갇힌 이승만은 감옥에서 `독립정신`이란 근대정치사상서를 집필하며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게 된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8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이승만은 미국에서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과정을 5년 만에 마치고 돌아와 YMCA 청년부 간사로 활동한다.

그러다 `105인 사건`에 연루되면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2년 4월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도미, 이듬해 2월 하와이에 정착했다.

`한인 자립` `독립자금` 마련 위해 `숯가마터` 운영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은 일제의 압박을 피해 하와이로 피신한 이승만이 그곳에서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출판을 통해 한인들의 계몽에 앞장섰던 모습을 따라가 본다.

한인 동포들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한인공동체를 만들고, 930에이커에 달하는 힐로 지역 나무 임야를 매입해 숯가마터를 세우는 등 지금껏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승만의 행적도 그려진다.

건국이념보급회 김효선 사무총장은 "그동안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각종 오해와 루머가 난무했다"며 "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 가서도 국민의 계몽과 자립을 위해 힘썼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환율이 너무 올라 매우 힘들었는데, 많은 분들이 후원해 주셔서 끝까지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며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특히 국회의원 대회의실을 대관하는 데 힘써 주신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님께도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오는 11월 하와이 국제영화제에 출품됐으며, 영화제 이후 미국 유일 한인 지상파 채널인 KBFD TV와 미국 전국 위성방송 채널 TAN TV에서 방영된다. 한국에서는 케이블TV 등을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30년 독립운동 "영화 촬영 이야기"

https://youtu.be/8LlFEcwaxqg

May 6, 2022

 

 

 

윤 대통령 “국가보훈부 승격, 재외동포청 신설…헌법 정신 실천”

등록 2023-03-02 18:13
수정 2023-03-02 18:25
 

정부 출범 뒤 9개월 만에 첫 정부 조직 개편

윤석열 대통령이 2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가보훈부 승격·재외동포청 신설 내용이 담긴 정부조직법 공포안에 서명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2일 국가보훈부 승격, 재외동포청 신설을 뼈대로 하는 정부조직법 공포안 공개 서명식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국가는 미래가 없다”며 “대한민국의 부름에 응답한 분들을 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 자유홀에서 서명식을 열고 “국가보훈부 승격, 재외동포청 신설 모두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일이고,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재외동포 보호라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윤 대통령이 이날 서명한 정부조직법에 따라 오는 6월, 국가보훈처는 ‘부’로 격상되고, 외교부 산하에는 재외동포청이 신설된다. 윤석열 정부 출범 뒤 9개월 만에 이뤄지는 첫 정부 조직 개편이다.
 
윤 대통령은 서명 뒤 모두 발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들이 존중받고 예우받는 보훈 문화 확산”이라고 국가보훈부의 역할을 강조했고, “750만 재외동포 여러분이 체감할 수 있도록 지역별, 분야별 맞춤형 동포정책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윤 대통령은 “보훈 문화는 곧 국격입니다. 국가보훈부 승격을 축하합니다”, “재외동포 글로벌 네트워크의 중심 재외동포청 신설을 축하합니다”라는 축하의 메시지도 남겼다.이날 서명식에는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고 윤영하 소령의 부모님 등 국가유공자 및 유가족, 김영근 세계한인네트워크 상임대표 등 재외동포청 초청인사 등 총 30여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고 이도운 대변인이 서면 브리핑 자료에서 밝혔다.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사설] 3/28(화) - 4·19 주역들의 이승만 재평가, 나라에 희망 주는 화해와 통합" 

https://youtu.be/AsoshuwgIEA

Mar 27, 2023

 

 

 

이승만 前 대통령 출생 148주년 기념식 개최 / YTN

https://youtu.be/kBS33rP8zKw

Mar 26, 2023

 

국가보훈처는 오늘(26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겸 독립 운동가인 이승만 박사의 출생 제148주년 기념식이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렸다고 밝혔습니다. 기념식에는 박민식 보훈처장과 황교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장, 독립유공자 유족 등 15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박 처장은 기념사에서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 그리고 한미동맹은 이 전 대통령이 만든 토대 위에 이뤄졌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며 우리 후손들이 솔직하고, 담담하게 업적을 재조명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노래 初演 /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8주년 기념식 /

소프라노 임청화 / 이화장 2023년 3월26일 (안중규TV)

https://youtu.be/nfwE4Dy9ndE

Mar 26, 2023

 

 

 

다큐 계기로 이승만 재조명! 문재인 무슨짓을 했나? 2023.3.28 오전8시

 

https://youtu.be/jgfwucSl2aA

Mar 27, 2023

 

 

 

 

보훈처, 이승만 기념관 추진… “내년 예산반영 목표”

노석조 기자별 스토리  월요일 2023.3.27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26일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제148주년 기념식에 참석, 축사를 하고 있다. 2023.3.26/뉴스1© 제공: 조선일보

 

보훈처 관계자는 이날 “이 전 대통령은 우리 초대 대통령이면서 가장 높은 서훈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유일무이한 인물”이라면서 “그러나 정부 수립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초대 대통령이자 최고 유공자에 대한 기념관 하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업은 ‘역사적 인물 재평가하기’ 정책의 하나로 추진하는 것으로 내년 예산 반영을 목표로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이 말년을 보낸 하와이의 한인들이 기념관을 위해 모은 성금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건립 후보지로는 이 전 대통령이 해방 전 5년 7개월간 수감된 적이 있는 한성 감옥과 연관된 부지나 정동 배재학당 인근 등이 검토된다. 이화장도 후보지이지만 면적이 크지 않고 사유 재산권 문제 등이 있다고 한다. 보훈처 관계자는 “건립 부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토하는 단계”라면서 “비용을 최소화하면서도 기념관의 뜻을 살릴 수 있는 곳으로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현재 동상 건립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백선엽 장군 동상 지원 사업은 올해 보훈처 예산에 반영됐다. 박 처장은 “이 전 대통령, 백 장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이러한 인물들에 대한 공과(功過)를 객관적으로 국민께 보여드리고 평가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박 처장은 지난 26일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제148주년 기념식에서 “진영을 떠나 이제는 후손들이 솔직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할 때”라며 기념관 건립 방침을 밝혔었다.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다큐영화 제작 홍보

Apr 11, 2022

 

2022년 8월15일 건국기념일에 상영예정인 다큐영화를 제작중입니다!

후원계좌 411401-01-234900 국민은행(건국이념보급회)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바로서야 대한민국이 바로 섭니다!

 

 

이승만 대통령 미국 의회 연설 (한글 번역)

https://youtu.be/b4ODx2lUfK4

Jan 1, 2019

 

이승만 대통령은 1954 년 7 월 28일, 미국 의회 합동 연설에서 대한민국을 군사적 재정적 지원으로 전쟁의 파괴로부터 구하여 준 미국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연설의 전반부는 한국전쟁에서 도움을 준 미국인들께 감사하는 내용이며, 후반부는 아시아에서 자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 본토를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연설 전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친구. 대통령님과 존경하는 상하원 의원님들,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미국의 저명한 시민들의 위엄있는 모임에서 연설 할 수있는 기회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 역사적인 의사당에 모여 주셔서 저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저는 제가 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 즉 저의 머리와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직하게 말함으로써으로 보답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 민주주의와 자유 정부의 위대한 전통의 일부이며, 또 제가 반세기가 넘도록 믿어 온 전통입니다. 여러분들 처럼, 저도 워싱턴, 제퍼슨, 링컨에 의하여 영감을 받았습니다. 우선 저는 여러분과 미국 국민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한 일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의지할 곳이 없는 나라를 멸망으로부터 구하였고, 그 순간 진실된 집단 안보의 횃불은 전례없이 밝게 불타 올랐습니다.

 

재정적으로, 군사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전선을 방어하는데 당신들이 우리에게 준 도움, 또 피난민과 다른 고통받는 한국인을 구호하는데 준 도움은 갚을 수 없는 감사의 빚 입니다. 우리는 트루먼 전 대통령과 그 후임으로 선출된 현재는 행정부 수장인 아이젠 하워 장군에게도 많은 빚이 있습니다. 적의 위험에 대한 그들의 도움과 지식 때문입니다. 차기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 하워)는40 년 동안 잔인한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한국에 왔습니다. 우리의 땅에온 외국 친구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역사상 처음으로, 오직 당신 군대의 힘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되찾았고, 훌륭한 당신은 대통령으로 선택되어 찾아 왔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여야 한국인을 도울 수 있는지 보러왔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미국의 전쟁 어머니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미국의 육군, 해군, 공군과 해병대의 아들, 남편, 형제들을 한국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곡과 산에서 미국과 한국 군인들의 영혼이 함께 하나님께로 올라 갔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이시여, 우리가 그들의 기억을 소중히 하오니, 그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의회의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의 고귀한 동포인 이분들은 훌륭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 딘 장군, 워커 장군, 아몬드, 리지 웨이, 클락, 헐 장군, 테일러 장군… 그리고 1951년 반 프맅 장군이 8 군을 지휘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한국 젊은이들의 군인 정신과 그들의 가정과 나라를 위해 싸울 소총에 대한 열렬한 열망을 발견 한 것은 바로 그 분이였습니다. 그는 큰 소란없이, 그들을 제주도, 광주, 논산 등 여러 곳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거의 밤낮으로 훈련시키기위해, 한국군 자문단을 파견했습니다. 몇 주 안에 그들은 최전선에 파견되어 놀라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오늘날 이 군대는 전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반 공산주의 군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수]. 이 부대는 전체 전선의 3 분의 2 이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반 프맅 장군은, 미군들이 단단한 바위라고 부르는 한국 육군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미국이, 공군 및 해군력과 함께 적절한 비율로, 이 군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한국의 액션 극장에서 미국 군인은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박수 갈채.]

 

그러나 많은 미국인들이 선한 일에 모든 것을 바쳤지만, 그들이 죽음을 다해 이기려하였던 전투는 아직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 폭정 세력은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선에서, 총은 잠시 침묵하고 있으며, 적이 힘을 쌓기 위해 이용하는 현명하지 않은 휴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잠잠해져 있습니다. 예상대로 제네바 회의는 아무런 결과없이 종료되었으므로 휴전이 끝낳음을 선언하는 것은 상당히 적절합니다. 우리 나라의 북쪽 절반은 소련의 노예인 백만 명의 중국인에 의해 점령되어 지배받고 있습니다. 군대로 가득 찬 공산주의 참호는 우리 수도에서 40 마일 이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휴전 조건을 위반하며 새로 건설한 공산주의 비행장은 제트 폭격기로 비치되어있으며, 우리의 국회에서 10 분 이내에 있습니다.

 

그러나 크렘린 공모자들의 주요 목표가 미국의 파괴 이기 때문에, 워싱턴이 서울보다 죽음에서 결코 멀리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련의 수소 폭탄은 우리의 흩어져있는 마을에 떨어지기 전에 미국의 대도시에 먼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세계 정복을 위한 소비에트 전략의 본질은, 소련이 기습 공격으로 미국의 비행장과 생산 센터를 분쇄하기에 충분한 수소 폭탄과 대륙간 폭격기를 보유 할 때까지, 평화를 말함으로써 죽음의 잠으로 빠져들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국제 도덕 표준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길한 칭찬입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정부는, 보복할 수 있는 미국의 힘을 제거 할 수 있다고 확신 할만큼 소멸의 무기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임있는 정치인으로서, 우리는 소비에트 정부가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을 때 그 무기를 감히 사용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소련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6 년의 경험은 공산주의자들은 조약을 깨는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결코 조약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도덕적 망설임이나, 인도 주의적 원칙이나 또는 종교적 제재에 의해 구속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계 정복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수단도 동원합니다. 심지어 가장 악질적인, 심지어 고문과 대량 살인까지 헌신적으로 동원합니다. 소련은 자신의 의지로 중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련은 중지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국과 동맹국들이 지금 소비에트 공장에 폭탄을 투하해야함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도축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송아지처럼 서있어야 함을 의미 합니까? 세계의 자유시민들이 생존하는 방법은- 우리 한국인이 보는 유일한 방법은 - 평화가 없을 때 막연한 희망으로 평화를 바라는 방법이 아닙니다. 소비에트 정부가 세상을 정복하려는 엄청난 노력을 포기하도록 설득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악의 세력에 울며 매달리지 않고; 그러나 세계의 힘의 균형을 공산주의자들에 불리하게 강하게 움직이면, 그들은 소멸의 무기를 소유하고 있더라도 감히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수 갈채]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몇 년 안에 소비에트 연방은 미국을 정복 할 수단을 소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행동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극동에서 행동 할 수 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한국 전선은 우리가 승리하기 원하는, 아시아를 위한 전쟁, 세계를 위한 전쟁, 지구의 자유를 위한 전쟁의 조그만 일부분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20 개의 준비된 사단과, 또 20 개를 더 구성 할 수 있는 인력을 제안했습니다. 150만의 젊은이들이 인간의 자유와, 명예와,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합니다. [박수 갈채]. 우리 병사들의 용맹은 전투에서 입증되었으며, 반 플맅 장군이 '한국 군인은 세계의 어느 군인과 동등하다'고 말한 이후, 어떤 미국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박수 갈채]

 

대만 정부도 63만명의 군대와 추가 예비군을 제공했습니다. 중국 본토에있는 공산주의 정권은 진흙발을 가진 괴물입니다. 대중이 그것을 증오합니다. 붉은자(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반대하는 1500만명을 살해했지만, 수천 명의 자유 중국 게릴라가 여전히 중국 내부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붉은 중국의 군대는 250만명에 이르지만, 한국에서 붙잡힌 중국공산군 포로 14,369 명이 대만으로 가고 220 명만이 붉은 중국으로 돌아 갔을 때 증명되었듯이, 그들의 충성도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박수 갈채] 또한, 붉은 중국의 경제는 매우 취약합니다. 수입의 60 %가 바다로 들어오며, 해상 해안 교통은 북에서 남으로의 주요 통신 수단입니다. 미국 해군이 중국 해안을 봉쇄하면 통신에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붉은 중국 정권에 대한 반격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 공군과 해군은 필요하겠지만, 미국의 육군은 필요하지 않음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중국 본토를 자유 세계쪽으로 전환시키면, 자동으로 한국과 인도 차이나에서의 전쟁은 승리로 끝나고, 권력의 균형이 강하게 소련에 불리하게 기울어져, 소련은 감히 미국과 전쟁하는 위험을 저지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을 되찾지 않으면 자유 세계의 궁극적인 승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정부는 자체 지상군과 공군을 중국의 전쟁에 내보내지 않겠습니까? 혹시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 세계를 위하여 좋은 일입니다. 소련 수소 폭탄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전에 미국 공군에 의하여 소련 생산 센터의 파괴를 정당화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이 어려운 교리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부드러우면 노예가되는, 딱딱한 세상, 끔찍한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의회의 신사 숙녀 여러분, 인류 문명의 운명 자체가 우리의 최고 결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다시 반 자유 반 노예로 살수없는 연합을 방어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던 위대한 해방자 아브라함 링컨이 받들었던 이상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어 일어납시다. 나의 친구들이여, 반은 공산주의 반은 민주주의 세계에서는 평화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자유가 안전한 아시아를 만들기 위해, 지금 여러분의 중대한 결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유럽과, 아프리카와, 미국에서 세계 공산주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박수 갈채]

 

 

"건국대통령이승만의노래@가사 [The Song of the Founding president Rhee Syng-man] "

"노영애 작사 C.K Choi작곡 #소프라노임청화"

https://youtu.be/KkLARhDKHQk

 

 

소프라노 임청화

 

Mar 21, 2023‘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노래‘ 해설 //

 

소프라노 백석대 임청화 교수

 

1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어둡던 겨레의 찬란한 등불 역사의 빛나는 높은 뜻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기상이여 아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놀라운 애국충정 한반도를 넘어 세계평화의 깃발이어라 한반도를 넘어 세계평화의 깃발이어라

 

2절: 무궁화 화려한 땅에 하나님 영광이 넘치는 우리 조국의 한강의 기적은 나라 사랑 전진하리라 이승만의 비전이여 아 통일의 그날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자손만대 영원히 기쁨을 노래하리라 자손만대 영원히 기쁨을 노래하리라

 

해설 동기: 2023년 1월 1일 국립현충원에서 이승만 묘역을 방문하여 참배를 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 가사를 접한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네덜란드 유학시절 접한 이준 열사가 생각이 났고,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가 김포 공항에서 나를 유학 보내시며 ’너는 대한의 딸이다(Yoy are the daughter of KOREA!‘ 라고 하시던 생각이 나서 노래자로서 먼저 해설서를 써서 나의 노래를 70년 이상 오래 동안 기다리는 많은 애국자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해설: 이승만의 노래는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의 전환을 살신성인의 자세로 이룬 대한의 등불이 되신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노래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 농지환원제로 농민의 사유재산제를 통해서 북한 공산당의 독재자들끼리 나눠먹는 토지개혁이란 사회민주주의를 이긴 절묘한 지략으로서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이 존속하게 한 것은 이승만 박사가 현존하는 최고의 국제 정치 전략가라고 하는 "헨리 키신저" 박사를 능가하는 신의 한 수였다고 본다. 오히려 네덜란드의 국부이셨던 아브라함 카이퍼 수상과 같은 차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연구하고 온 국민이 다시 흠모해야 나라가 융성하게 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전은 일본이 아시아를 재폐하기 위해서 그 야심으로 만국유람단을 유럽에 보냈듯이 이승만 대통령도 일본인 그 이상으로 천재시니 미국에 수많은 영재들을 보내서 미국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배워오게 함으로써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의 과학자들‘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이 G-7에 들어가는 쾌거를 이루게 하였다.

 

이제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네덜란드 등 전 세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수많은 영재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스포츠, 철학, 과학, 서비스 등 모든 영역에서 세계 속의 한국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노래를 부르며 우리는 보무도 당당하게 한국 속의 세계를 통한 초일류 문화 강국의 비전을 실현하는 것만이 G-2(경제대국 2위)가 되어서 강대국들의 경쟁구도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C-1 (문화강국 1위)이 되어서 저들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관광 오게 하는 것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고 명예로운 나라가 되라‘고 하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교수인 나로서는 여기서 이승만의 노래의 해설에 역사적인 해설이 조금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아래와 같이 좀 더 글을 연장하기로 한다. 이 시대가 바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2.0 모멘트이다.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의 잠수함이 미국의 상선을 공격하자 미국이 이런 조폭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2차 대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고 이를 제일 먼저 실천한 나라가 미국의 기독교인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민족자결주의를 들은 이승만 박사가 중국의 상해에 전달했고 일본의 동경에 전달이 되어서 2. 8. 독립선언서가 나왔고 곧 이어서 국내에서 3. 1. 독립선언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죠 바이든께서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에 사이버전을 선포하면서 북한의 김정은이 핵 야망으로 암호 화폐를 탈취하고 군사수단 등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관련 단체를 파괴하고 해체한다고 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사이버 전쟁이 시작이 된 듯 하지만 이 또한, 사이비(似而非) 전쟁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힘 있는 나라가 힘이 없는 나라를 공격하는 메타버스 세상에서 미,중간의 전쟁이 심화가 되고 있으니 이제는 전쟁에 대한 정보를 먼저 가진 자가 정보를 나중 가진 자를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우리 국민의 의사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전국민자결주의’ 즉, 좋은 의미에서의 각자도생인 각자도생 플러스를 주장하는 바이다. 1863년 11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게티즈버그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국민에 의한(by), 국민을 위한(for), 국민의 정부(of)는 영원할 것이다」라는 명연설을 남겼다. 이 말은 미국의 국시인 동시에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롤 모델이 되었다. 민주(民主)라는 말은, 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뜻을 투표로 결정하고 대표자로 뽑힌 사람은 국민을 위하고,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맞다.

 

대한민국은 1948년 이승만 박사에 의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워졌다. 이제서야 이승만의 노래가 울려퍼진다고 하니 (사)이승만기념사업회의 이사인 나로서는 송구스러운 마음 뿐이다. 우리는 사회주의 중국의 위세에 눈이 가리워서 미국의 힘의 지수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겨울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미국은 중국보다도 3.3배 이상 힘이 강한 나라이다. 우리나라보다는 20배 북한보다는 800배 힘이 강한 나라이다.초대 대한민국을 건립한 이승만 대통령 정부가 UN의 감시 하에 투표를 한 합법성을 가진 하나님이 세우신 한반도내에서 유일한 Protestant 정부이다.

 

2030년 초일류 대한민국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언급해야 한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의 요인이었으나 민족주의자였지 영어도 못하고 해양문화를 보는 안목이 없었기에 국제적인 인물은 아니었고 미국이 개입하여 남한의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이 되었기에 국부로서의 존엄의 가치는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부름을 받지 못한 반면에 도산 안창호는 이미 일제 시대에서 해방을 앞두고 순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민족의 아픔과 염원을 해결할 수 있는 역할을 100년 전에 일류 대한민국을 선언한 이승만 대통령이 한 것으로 본다.( 한기총신문, 2015. 5. 24.)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윤대통령이 이승만-박정희를 계승한 대통령이 되어서 일류에서 초일류로 가자는 것이다. 그가 세우고자 했던 나라는 기독교 민주국가였다. 그는 죽는 날까지 신앙생활을했다. 그가 즐겨 읽던 성경은 마태복음이었는데, 특히 좋아하는 귀절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모래 위에 세운 집은 서있지 못하리라 등이다. 제헌국회가 기도로 시작한 것은 바로 그의 그런 신앙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ibid., 93.)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하면 아래와 같다:

 

1. 이승만이 없었다면 남한은 건국도 못하고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2. 동맹의 중요성을 아는 외교의 달인이었다.

3. 대한민국을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옮겨놓은 선각자였다.

4. 해양문화에 적합한 새로운 엘리트를 보존하고 육성하려고 애썼다.

5. 국가안보와 치안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6. 과오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틀을 깬 적이 없었다. (제158회 자유대한수호월례세미나, 한국기독교연합회관, 2014.10.28, 이주영,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외교정책평가 강의안; 이주영, 이승만평전, 살림출판사, 2014, 목차 요약.)

 

기독교 음악가인 내가 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영적이고 힘이 있고 예쁘고 건강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류 국가 비젼 6R:

 

아래의 6R은 이승만 대통령이 세례 요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1.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민족에 새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Revitalization).

2.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민족에게 동맹의 소중함을 아는 국제적인 사고를 재확인했다(Rethinking).

3. 이승만 대통령의 독트린은 해양 문명으로의 시각을 교정하는 역할을 했다(Reset).

4. 이승만 대통령은 새로운 엘리트를 일본, 미국을 포함한 서구 세계에 유학을 시켰다(Raise Up).

5.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에는 결코 타협을 하지 않았다(No Return).

6.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유지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formation).

 

내가 부른 이승만의 노래를 내가 졸업한 숙명여대를 지나가는 데 이런 시상이 떠올랐다. 이승만의 노래를 부르며/ 임청화 작시 숙대입구역을 지나며 "이승만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생각합니다 이승만의 노래를 부르며 "애국자"가 됩니다 아버지의 면전에 서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미간을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노래를 부르며 "애신자"가 됩니다 오직 성경을 펼칠 뿐입니다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요 이승만의 노래를 부르며 "애족자"가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날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독생자의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예수 피를 외칩니다 이승만의 노래를 부르며 "애민자"가 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변개하고 부끄러워하니 회개 이후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승만의 노래를 부르며 "애송자(노래를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지나온 걸음 걸음마다 아무 공로 없어도 오직 예수님이 주신 밥으로 살았습니다

 

이승만의 노래를 부르며 "애종자(종을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오직 영광입니다. 영광의 빛이 비춰오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 하시니 쉐키나 영광 속에서 주님의 얼굴을 뵙습니다. 이승만의 노래를 듣는 독자들이 이와 같은 댓글을 많이 달아주셔야 이승만의 노래가 제2의 해군 군가처럼 전국민이 최애하는 애창곡이 되며 그 결과로, 현재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키시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초일류 대한민국으로 나가도록 하실 것이다 praise381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