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장병 묘역에 묻어달라” 죽어서도 사병들과 함께이길 바랐던 故 채명신 장군 | 다큐공감 “우리 시대의 군인, 채명신” / 월남파병, 박정희 대통령의 승부수였다 / 모두가 의심했던 인..

2023. 1. 25. 23:20유용한 정보/군사소식

“파월장병 묘역에 묻어달라” 죽어서도 사병들과 함께 있길 바랐던 

故 채명신 장군 | “우리 시대의 군인, 채명신” (KBS 140603 방송)

https://youtu.be/dDbSJ80lK7c

Nov 30, 2020

초대 주월한국군 총사령관・육군 예비역 중장 故채명신 장군 (1926.11.27~2013.11.25)

 

KBS 다큐공감 “우리 시대의 군인, 채명신” (2014.6.3 방송) “나를 파월장병이 묻혀있는 사병 묘역에 묻어달라” 현충원 설립 사상 처음으로 장군 묘역을 마다하고 병사들 곁에 잠든 故채명신 장군. 세상을 떠난 후에도 현충원에는 그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언제나 부하들과 함께하는 사령관이었던 그의 마지막 소원은 죽어서도 사병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故 채명신 장군의 묘를 찾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故채명신 장군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KBS 역사스페셜 – 월남파병, 박정희의 승부수였다 / KBS 2003.5.24 방송

https://youtu.be/yvPmViOiN9c

Oct 23, 2020

- 한국정부는 베트남에 의용군을 보내려 했다 1965년 1월 미국이 의무대에 이은 2차 파병을 요청 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된 극비문서의 말미에는 "파병은 불가피하나 의용군의 형식을 취하고, 충분한 대가를 받을 것“ 이란 메모가 적혀있다. 월남전으로 국내 안보에 불안을 느낀 한국정부는 월남파평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당시 국제사회는 미국의 월남전쟁에 대해 비판적 반응을 보이고 있었고, UN가입을 준비하고 있던 한국은 이러한 국제사회의 반응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현실상 불가피한 파병과 명분 사이에서의 갈등! 전쟁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 지려했던 한국정부는 베트남에 의용군을 보내려 했다.

 

- “충분한 대가를 받아라” 그런데 막상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것은 정규군 파병안이었다. 1965년 1월 28일 비전투부대 정규군 파병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같은 해 5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은 美 존슨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방미길에 오르게 된다. 이 초대는 전투부대 파병요청에 목적이 있었다. 이에 박대통령은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 파월기간 동안 미군의 군원이관중지, 차관제공, 베트남 군수물자를 위한 구매국에 한국을 포함시키는 등의 조건을 만족시키고 전투부대를 파병하게 된다. - 월남특수, 한국경제 그리고 박정희 파월장병들은 월급을 한국으로 송금해 국내 외화보유고를 늘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또 월남 내의 한국 군대 시설 뿐 아니라 하역, 건설 등 분야까지 진출하여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은 고속도로 등 경제인프라를 확충시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당시 심각했던 실업률도 감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성장은 박대통령 장기집권의 기반이 된다.

 

- 1961년부터 월남파병을 제안한 박정희 최초의 월남파병 논의는 1961년 11월 박정희가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이던 시절 이루어졌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파병을 먼저 제의한 것은 의외로 박정희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쿠데타 직후였던 당시 박정희는 백악관에게 의혹의 대상이었고 케네디대통령은 파병제의를 거절한다. 그러나 1962년 5월 12일 박정희는 비밀리에 월남으로 군사시찰단을 파견하고 월남국민의 감정까지 염두에 두고 구체적 파병방안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먹고살기도 어려운 한국경제와 쿠데타에 의한 정통성이 약한 정권, 박대통령은 월남파병을 한국과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돌파구라고 여겼던 것이다.

 

역사스페셜 210회 – 월남파병, 박정희의 승부수였다 (2003.5.24. 방송)

 

 

 

 

KBS 다큐멘터리극장 – 월남특수 / KBS 19940605 방송

https://youtu.be/iCkUMmMd7-c

Sep 30, 2022

◼︎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파병이자 1970년대 경제도약의 밑거름이 된 베트남 파병.

 

그런데 전투병력 파병 이후 미국과 작전지휘권 문제를 놓고 갈등이 발생한다. 한국정부가 지휘권확보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본다. 또한 월남파병 군인들의 무수한 희생도 함께 조명한다.

 

다큐멘터리극장 53회 – 월남특수 (1994.6.5.방송)

 

 

 

 

[명작다큐] 모두가 의심했던 인천상륙작전. 전황을 완전히 뒤집은 맥아더.

세계 100대 다큐멘터리 선정 "한국전쟁 10부작" | 4부 북진 KBS 20100620 방송

https://youtu.be/6tVImy9mj8o

KBS특별기획 한국전쟁 제4편 북진 (2010년 6월 20일 방송)

 

타임 워너사의 "세계 100대 다큐멘터리"에 선정된 1990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 기초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과 자료들을 증보하여 10부작으로 제작한 프로그램 인천방어지구사령부: 북한은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13일,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질풍 같은 북진: 38선을 넘느냐 마느냐의 딜레마에서 압록강 점령까지 D-DAY, 1950년 9월 15일. 작전명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 한국전쟁의 새로운 반전이었다. 인천에 상륙한 UN군이 서울을 수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13일. 인민군은 강렬하게 저항했고, 이로 인해 UN군은 인천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13일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인민군은 남한 내 주요 병력을 철수하고 주요 인사들을 비롯한 각종 서적과 문서들을 북으로 이송시켰다.

 

9월 28일 처음의 전선을 회복한 UN군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의 북진 결정과 함께 UN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한다. 서울을 잃은 지 불과 넉달 만에 평양에 입성한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한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북한으로 행정권을 확대한다는 입장이었지만, 38선 이북지역은 군정을 해야 한다는 UN의 입장은 강경했다. UN군과 국군의 입장 차이로 생겨난 행정의 공백에서 북한 주민들은 갖가지 혼란 속에 방치됐다. 질풍 같은 진격이었다. 압록강을 점령하고 만주 땅을 바라보며 승리의 감격에 도취되어 있던 UN군과 국군.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끝이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다시 38선에 선 UN군과 국군이 압록강까지 숨가쁘게 몰아쳤던 북진 시기의 전쟁 양상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