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4. 19:33ㆍ아시아 소식/대한민국
대한민국 국부 리승만 대통령을 선택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다(I)
KBS 한국사전 –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제1부 /
KBS 2008.8.30. 방송
최초 공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유물들.
이화장에서 소장지를 옮긴 뒤 한 번도 공개된 적 없었던 우남관의 유물들. 한성감옥소 시절 성경책과 감옥에서 편찬한 영한사전을 비롯한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2만여 장과 A4용지 15만 쪽 분량의 방대한 기록들 속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관한 진실을 한국사傳 2부작으로 담았다.
- 하와이 한인사회와 이승만에 관한 진실 하와이 독립운동가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 그녀는 하와이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이 다큐 속에는 이승만 때문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와 노선의 차이로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증언이 담겨있다. 하와이가 기억하는 이승만의 두 모습. 과연 하와이의 이승만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 사형수 청년, 미국에 가다 1898년 11월 독립협회 간부들이 경무청에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승만은 만민공동회를 열어 이 사건을 규탄하다가 투옥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옥중에서도 이승만은 학교를 여는 등 자신의 큰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갇혀 있는 가운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는 이상재 신흥우 박용만 같은 동지들을 만난다. 1904년 석방되자, 이승만은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 이즈모호 사건, 그 가운데 선 이승만 독립운동가 박용만. 그는 이승만의 옥중동지였다. 하와이에 온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세워 무력으로 국권을 되찾고자 한다. 1918년. 박용만의 국민군단이 호놀룰루 항에 정박한 일본군함 이즈모호를 폭파시키려 한다는 제보가 입수된다. 관계자들은 체포되고 박용만은 법정에 서게 된다.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이승만은 하와이의 독립운동 세력 전체를 장악한다. 하와이 독립운동 세력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이즈모호 사건.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 워싱턴발 이승만의 음성, 식민지 조선의 신화가 되다 1942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된 가운데 이승만의 목소리가 단파 라디오를 통해 조선에 전해진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이천삼백만의 생명의 소식이오,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학무도한 왜적의 철망 속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일제는 이승만의 목소리를 들은 수신자들 검거해 경성방송국 관계자를 포함한 300여명을 투옥시킨다. 그러나 이 단파방송 사건은 지식층 사이에 이승만의 이름을 신화로 남겨 놓는다.
한국사전 54회 – 이승만 제1부 (2008.8.30.방송)
이승만 대통령은 왜 하버드가 아닌 프린스턴 대학교를 택했을까? :
리승만, 의문의 편지와 차선책
리승만은 감리교회 출석한 교인이기 때문에 미국 감리교단 George Washingtin Uni.에 추천서를
써준 한국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였고 프리스톤은 장로교 선교사가 추천사를 써 주었게 때문이다.
[주요 레퍼런스]
(1) 운석 장면박사 기념관 사이트에 게제 된 1999년 6월 1일자 신동아 기사 "역대 대통령과 총리의 박사학위"
(2) 중앙일보 1995년 3월 1일 기사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 6. 이승만의 유학(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흔히 이박사로 알려진 그의 정치경력이 시작된 미국유학시절로 떠나보고자 합니다.
KBS 한국사전 –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제2부 /
KBS 2008.9.6. 방송
미국의 선택인가, 이승만의 선택인가? 혼란스러운 해방정국.
71세 나이로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 그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로 남았나!
- 맥아더 기념관에 남아있는 이승만의 흔적 미국 버지니아에 위치한 맥아더 기념관. 세계 2차 대전 전후 시기, 맥아더의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승만의 편지와 전보,맥아더가 이승만을 한국의 임시 대통령이라고 표기한 메모까지 소장하고 있다. 이승만은 어떻게 맥아더를 만날 수 있었나? 맥아더와 이승만이 만나 함께 그린 한국의 미래는 무엇일까?
- 상해임시정부에 불어 닥친 대통령 논란 1919년 임시정부 국무총리직과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에 임명된 이승만은 국무총리나 집정관 총재가 미국식으로 해석하면 'president'라고 주장하고 이 호칭을 사용한다. 이에 임정 지도자들은 반발해 경고 전보를 보낸다.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그는 왜 탄핵되었나? 1919년 9월6일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그러나 1923년 대통령직에서 탄핵된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상해를 떠난다면 대통령직에서 탄핵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이승만은 상해를 떠난다. 임시정부 대통령의 의무를 저버리면서까지 미국으로 향하는 이승만. 그가 미국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 같은 꿈 다른 길,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노선 차이 1908년 샌프란시스코. 한반도 일본통치에 동조한 미국인 스티븐슨이 장인환에 의해 숨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인들은 이승만에게 장인환의 법정통역을 부탁하지만 이승만은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이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열 투쟁 때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던 이승만. 그는 이런 행위는 ‘무법한 개인행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 혼란한 해방정국, 고국으로 향하는 이승만의 행보 미국에서 교육과 외교활동을 펼쳤던 이승만은 그의 나이 71세에 조국 해방을 맞이한다. 미군정의 대대적인 이승만 환영식이 있던 날, 미군 중장 하지는 이승만이 연설하는 내내 부동자세로 서서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임정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던 때 미군의 환대를 받으며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 그는 어떻게 미군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 이후 이승만의 행보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한국사전 55회– 이승만 제2부 (2008.9.6.방송)
“대한민국 제헌국회 첫 시작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72년전 대한민국의 제1대 국회인 제헌국회의 첫 시작이 기도였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을 알고 계시나요? 72년 전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됐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해 공포한 것입니다.
제헌국회는 제1대 국회로서 1948년 5월 31일 개원해 그해 12월 18일까지 총 203일간 활동했습니다. 제헌국회는 개원식과 함께 1차 본회의를 열었습니다. 당시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단상 의장석에 등단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회의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그 자리에서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면서 기도를 제안했고, 감리교 목회자이기도 했던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198명의 초대 국회의원들은 모두 기립해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국회 본회의를 시작하면서 드린 기도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제헌국회 이윤영 국회의원의 기도문 중]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 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옵소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이윤영 의원의 기도는 초대 국회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기독교인 국회의원들은 본격적으로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5월 31일, 21대 국회가 문을 열면서 국회의원들은 4년간의 의정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21대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기독의원은 125명입니다. “1948년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 “업무”를 완수하도록... 72년 전 기도가 기독의원 125명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역사를 이어 가길 바라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부 대통령 리승만 박사 / 리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문무일 사무총장 [추석특집]
Sep 21, 2021
[사실연구소 The Fact Lab] 이승만 대통령의 북한 수복작전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남침.
그날 바로 경무대 회의에서 전쟁 4원칙을 세우고 전쟁에 돌입 38선까지의 반격만 부여받았다는 맥아더 장군과 북진을 지체하는 우리군을 향한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하라" 북한을 수복하고 통일 대한민국의 거대한 일보를 이룬 역사적 사건을 알아봅니다
포인트 1. 낙동강 전선의 위기_ 데이비드슨 라인으로 철수
포인트 2. 38선에서 멈춰서 UN군_ 북진은 38선 까지
포인트 3. 이승만의 결심 _ 38선을 넘어 북진하라
포인트 4. 10월 1일 국군의 날 기원
6탄 당신이 몰랐던 6.25 이야기_"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하라!"
(김용삼, 최대현, 염윤희; 20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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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멘터리극장 – 영부인 리금순 프란페스카 여사
Franziska Donner Rhee / KBS 19.04.24 방송
◼︎ 대한민국의 첫번째 영부인이 된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이금순 여사.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함께 겪은 ‘푸른 눈의 이방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대기를 당시의 정세와 함께 정리한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만남과 미국에서의 결혼시절, 영부인으로서의 역할과 언어장벽, 피난시절과 하와이 망명시절, 그리고 1970년 귀국 후 생활과 일화들을 소개한다.
다큐멘터리극장 47회 – 파란 눈의 영부인 (1994.4.24.방송)
파란 눈의 영부인이자 대한민국 초대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
행복한 아침 734 회
절약의 아이콘이었던 최초의 외국인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화들
최초 대통령 이승만 박사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이금순)를
며느리가 들려주는 생생한 비화
이화장에서 듣는 국부 이승만 대통령 며느리의 프란체스카 여사의 이야기
오이박사의 제1차 역사바로알기 프로그램
비엔나에 '리승만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거리'가 있다. 그 길을 걸었다!
Jun 23,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