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건국 새 유적지 공개…"고구려 계승 증거" / 발해 제 1부 최초의 중원침공, 당을 정벌하라 / 발해 제2부 발해 황제의 나라가 되다 / 발해渤海 재발견 제2부 동북아 대륙의제국 / 발해, 고구..

2023. 2. 16. 22:47역사의 연구/전쟁역사

발해 건국 새 유적지 공개…"고구려 계승 증거" / SBS

https://youtu.be/dBYQ0nbJCgM

                                                                                      Apr 17, 2021 

 

중국에서 발해의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유적지가 공개됐습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만큼 의미 있는 발견인데, 같은 유적을 놓고도 중국은 우리와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베이징에서 김지성 특파원입니다.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 발해를 건국하다! (feat. 천문령 전투)

https://youtu.be/UBJ3b71ygpY

Feb 28, 2020

 
 
 
 

KBS 한국사전_발해 제 1부 최초의 중원침공, 당을 정벌하라 – 무왕 대무예

https://youtu.be/-2qW-r2NMAw

- 발해 무왕(武王) 대무예, 세계 최강대국 당(唐)에 도전하다

 

732년 9월, 발해 수군은 당나라 산둥반도를 향해 발해만을 건넌다. 건국한지 불과 30년도 되지 않은 신생국 발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통일제국이었던 당(唐)의 무역과 국방 거점 등주로 진격한다. 발해 무왕 대무예가 명한 기습공격이었다. 아버지 대조영의 죽음 후 고구려 옛 땅을 정복하며,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던 무왕 대무예. 그러나 발해에 복종했던 흑수말갈에 당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건국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동북쪽에 위치한 흑수말갈이 당의 세력이 되면 발해가 앞뒤에서 협공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 고구려의 막강한 수군을 계승한 발해군은 등주성을 맹렬히 공격, 자사 위준을 죽인다. 세계 최강대국을 굴복시킨 발해의 완벽한 승리였다.

 

- 피를 나눈 동생의 배신 : 동생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하다. 발해의 승리로 다급해진 당의 현종은 신라에 파병을 요청, 신라의 10만 대군이 발해 공격에 나서지만 실패하고 만다. 현종은 마지막 비수를 꺼내든다. 발해를 가장 잘 아는 장수를 당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 발해 공격군의 수장으로 지목된 이는 바로 대조영의 둘째 아들이자 대무예의 동생, 대문예였다. 흑수 말갈 공격 당시 형 대문예의 믿음아래 흑수 토벌 사령관으로 임명됐었던 대문예. 그는 왜 조국과 형제를 향해 칼을 빼들었을까? 형 대무예는 급기야 동생을 죽이기 위해 당에 자객을 보내기에 이른다. 형제는 이제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 시작한다.

 

-중원을 침공한 대무예,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다! 난공불락의 요새 등주성을 뚫은 발해군. 이제 중원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733년, 무왕 대무예가 이끈 발해 연합군은 마도산에 이르러 그 일대를 휩쓸며 당군을 무너뜨렸다. 당의 입장에선 마도산이 함락되면 만리장성까지 뚫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에 이른 당은 돌로 4백리의 장벽을 쌓아 필사적으로 방어했고 가까스로 마도산을 지켜냈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던 대당 정벌. 무왕 대무예는 세계 최강인 당나라를 2차례나 선제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강대국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실현되었고, 마침내 무왕은 당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한국사전 26회 – 발해 2부작 1부 최초의 중원침공, 당을 정벌하라 무왕 대무예(2008.1.5. 방송)

 

 

 

KBS 한국사전 – 발해 제2부 발해 황제의 나라가 되다 – 문왕 대흠무

https://youtu.be/VSLeu3MmGoM

-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황제의 나라, 발해 1949년 중국 지린성 돈화시 육정산에서 최초로 발해의 공주 ‘정혜’의 묘비가 발견됐다. 묘비에 선명하게 새겨진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 황상(皇上). 바로 대조영의 손자이자 발해의 3대왕, 문왕 대흠무에 관한 기록이었다. 문왕 대흠무는 자신이 ‘왕 중의 왕’ 황제임을 공언했다. 이는 발해가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선언한 것이다. 중국에 예속되지 않는 독립국가임을 명백하게 밝힌 문왕 대흠무. 또한 그는 71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 자신을 天孫, ‘하늘의 자손’이라 칭하며 국가적 자신감을 드러낸다. 스스로 천손임을 공언한 그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세계의 중심, 대제국 발해의 ‘황제’였다.

 

-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문왕 대흠무 연해주의 동쪽 끝 파르티잔스크에 위치한 발해의 성 니꼴라예프카성에서 발견된 좌효위장군 섭리계의 청동부절, 당과 주변국의 조공과 책봉 내역이 쓰인 송대의 백과사전 ‘책부원구’. 문왕 즉위 4년 후인 741년, 발해 주변 부족들의 조공이 사라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왕은 즉위 초기 북방의 불열, 월희, 철리 등 말갈족을 정복한 후 동쪽으로 계속 뻗어나 가 러시아 연해주까지 직접 통치하기에 이른다. 사방 5천리. 고구려보다 넓은 영토였다. 바다 동쪽에 있는 강성한 나라. 중국은 발해를 일컬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문왕은 5경 15부 62주의 체계적인 지방 행정 체제를 갖추고, 3성 6부의 중앙 기구를 구축하여 만주, 연해주에 이르는 거대한 발해의 영토 위에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해간다.

 

- 고구려의 후예들이 당을 위협하다 문왕은 사상 유래 없는 민족 공조를 통해 당을 위협했다. 당시 중국 산둥반도 일대의 절도사였던 이정기. 그는 고구려의 유민이었다. 당과 대립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키운 이정기는 군사용 말을 필요로 했고, 문왕은 동족인 이정기에게 말을 팔면서 경제적 이익을 취함과 동시에 당에 대한 외교적 압력까지 가할 수 있었다. 고구려 유민 이정기와의 민족 공조를 통해 외교적으로 신라보다 우위를 점한 발해는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 발해에서 시작하는 5개의 길, 동아시아 네트워크를 장악하다 동아시아의 모든 길은 발해를 통했다. 785년 문왕은 수도를 동경으로옮긴다. 동경은 바로 일본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검은 황금이라 불리는 담비가죽, 초피가 건너간다. 발해의 특산물인 초피는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며 곧 일본 왕족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게 된다. 무역에서의 우위는 바로 정치적 우위로 이어진다. 신라, 조공, 영주, 거란, 일본을 관통하는 무역로는 모두 발해에서 시작, 동아시아의 무역과 네트워크는 바로 발해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사전 27회 – 발해 2부작 제2부 발해 황제의 나라가 되다_문왕 대흠무 (2008.1.12. 방송)

 

 

발해渤海 재발견 제1부 아시아네트워크 발해의길 [역사실험]

KBS 2002.01.05 방송

https://youtu.be/YHk9sClE9kw

Sep 20, 2021

 

 

 

발해渤海 재발견 제2부 동북아 대륙의제국 [역사실험]

KBS 2002.01.06 방송

https://youtu.be/ohBZmn5ZGTk

Sep 21, 2021

 

 

KBS HD역사스페셜 – 발해, 고구려를 꿈꾸다 / KBS 2005.11.25. 방송

https://youtu.be/_oHYfUWFRRM

-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에 [발해실]이 처음 생기다 2005년 10월 28일 새롭게 문을 연 국립중앙박물관에 [발해실]이 국내 최초로 마련됐다. 그동안 [발해실]은 왜 생길 수 없었던 걸까? 발해는 고구려 멸망 30년 뒤에 세워져, 고구려보다 더 큰 영토를 가졌던 나라였지만 국내에서 소장한 유물이 거의 없었다. 특히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한국 측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는 상태라 박물관은 유물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만큼 발해의 실체도 우리는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번에 러시아와 일본을 통해 확보한 유물을 통해 발해의 실체에 접근한다.

 

- 발해의 후손이 이 땅에 살고 있다 남북으로 분단된 지금, 발해의 역사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땅에 1,400년 전 발해왕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전북의 협계태씨 집성촌. 마을 사람들은 이 집에 발해 왕가의 후손들이 산다고 알고 있으며, 협계태씨 족보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의 이름이 있었다. 발해 건국 시조의 후손들이 어떻게 이 땅에 살게 되었을까? 현재의 후손들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는 발해왕국의 정체성! 그들의 역사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 러시아 크라스키노성에서 발굴된 고구려 ‘온돌’ 우리가 가장 쉽게 발해 유물을 접할 수 있는 곳이 러시아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발해 유적지에서 고구려 양식을 보이는 발해 유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고구려만의 독특한 성 구조물인 ‘치’와 주거지에서 보이는 대형 ‘온돌유적’이 그것이다. 특히 발해가 고구려의 풍속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풍속이 바로 온돌! 온돌은 고구려의 독특한 난방구조다. 그렇다면 온돌은 백제와 신라를 제외한 고구려 지역에서만 쓰였던 걸까? 온돌이 과연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역사를 증명할 수 있을지, 파헤쳐 본다.

 

- 발해인은 고구려를 어떻게 생각했나? 러시아에서 발굴된 발해의 가마터 유적지에서는 독특한 모양의 발해식 기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발해의 기와가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되는 [천추묘]와 [서대묘]에서 발견됐다. 왜 고구려 왕릉에서 발해의 기와가 발견됐을까? 발해왕실에서는 고구려의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전각을 세웠던 걸까? 발해가 남긴 외교문서, 왕실의 무덤양식, 성 체제 등에서 발해왕조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쫓아가 본다.

 

- 비밀에 붙여진 발해 수도 ‘상경성’ 어떻게 복원되고 있나? 중국이 발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정비 작업에 들어갔던 발해 수도 ‘상경성’. 중국은 외부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며 상경성 궁궐지들을 하나하나 복원해 가고 있다.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만들려는 중국의 은밀한 움직임이다. 228년 발해 역사 중 무려 200여 년 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 인공위성 사진과 유물유적 발굴보고를 바탕으로 상경성을 그래픽 복원했다. 길지 않은 역사였지만, 고구려에 이어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했던 우리 역사, 발해의 모습을 확인한다.

 

HD역사스페셜 29회 – 발해, 고구려를 꿈꾸다 (2005.11.25.방송)

 

 

 

KBS 역사스페셜 – 추적! 발해황후묘는 왜 공개되지 못하나

https://youtu.be/K3VX5W7bCDk

- 중국의 발해 유적지 촬영 원천 봉쇄 발해 황후의 무덤이 발굴된 곳은 중국 길림성 용두산 고분군. 2011년 5월 KBS 역사스페셜 취재팀이 용두산을 찾았을 때 현장은 공사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제작진이 다가서자 책임자라는 한 사람이 날카로운 공구로 위협하며 취재진을 막아섰다. 다른 발해 유적지에서도 실랑이가 이어졌다. 현재 발해 관련 모든 유적지는 언론사는 물론 모든 사적인 촬영까지 차단하는 상황이다. 학자들에게마저도 철저하게 접근이 금지된 발해 유적지, 중국이 이토록 발해 유적지의 접근을 차단하는 이유는 무엇일가? 그 내막을 집중취재했다.

 

- 발해황후 묘비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한국 학자들이 발해 황후 묘의 발굴 소식을 접한 때는 지난 2009년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지극히 간략한 내용만을 담고 있어 발굴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발해의 정치체제를 밝혀줄 매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씨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후의 묘지 발굴. 황제의 부인인 황후 묘의 발굴은 발해가 황제의 나라였음을 웅변한다. 즉 자주독립국가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중국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다. 하지만 이 내용은 비문에 새겨진 141자 중 극히 일부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전체 내용은 물론 묘비의 사진마저 공개하지 않고 있다.

 

- 발해 상경성 제2궁전지 상경성은 756년 발해 문왕 대흠무가 설계한 궁궐이다. 지금까지 상경성이 중국의 장안성을 모방했다는 것이 중국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지난 2009년 제 2궁전 발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다. 상경성 제 2궁전지가 전면 19칸에 달하는 큰 규모로 나타난 것이다. 당나라 장안성에서 가장 큰 함원전은 11칸에 불과하다. 중국 측의 주장대로 발해가 당의 속국이었다면 일개 지방정권이 황제보다 더 큰 궁궐을 가진 것이 된다. 중국 내 어떤 궁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예다. 그런데 상경성 제2궁전지 19칸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고구려 안학궁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중국의 교과서 왜곡, 이미 반세기 전에 시작됐다 중국은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자국사의 한 단원으로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세계사에 포함된 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출판사 관계자는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국가(중국)의 입장이라며 태도를 분명히 했다. 그런데 발해가 중국 역사책에 실린 건 무려 반세기 전. 이미 두 세대 이상이 발해를 중국사로 배워 온 것이다. 취재진은 현지 시민 인터뷰를 통해 대부분의 젊은 세대가 발해를 당의 지방 정권으로 인식하여 발해사 왜곡이 심각한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역사스페셜 72회– 추적! 발해황후묘는 왜 공개되지 못하나 (2011.6.16.방송)

 

 

 

KBS 역사스페셜 – 역사발굴! 일본의 신라침공 발해가 막았다 /

KBS 2003.3.29. 방송

https://youtu.be/QaObDC6qNRs

- 수 년에 걸친 일본의 신라침공 작전계획 현해탄 너머 신라를 목표로 후쿠오카에 쌓은 병참기지 이토성, 3년 안에 5백 척의 배를 만들라는 759년 조정 명령과 소년들에게 신라어를 익히게 했던 일본. 한꺼번에 수백 척의 배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대외전쟁밖에 없었다. 외부침입이 없었던 당시 일본은 신라를 선제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신라를 쳐들어가기 위한 사전준비가 진행되고 있던 것이다.

 

- 일본은 왜 신라를 침공하려 했는가? 서기 200년 삼한을 정벌했다는 신공황후의 전설을 사실로 믿고 있던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의 동맹군으로 참가하여 패배한 역사는 치욕적이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신라와의 외교적 긴장관계에서 일본은 신라침공을 결단하게 된다.

 

- 침공계획 뒤에 숨겨진 한 인물의 야망 신라침공 계획의 주모자는 천황마저도 좌지우지하던 당시의 절대권력자 후지와라 나카마로였다.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자신을 향한 비판과 저항을 이전시키기 위해 신라침공에 힘을 쏟았다. 나카마로는 전력이 강했던 신라를 누르기 위해 동방국 발해에 협공을 요청한다. 당시 일본과 발해는 군사동맹관계에 있었고 발해의 참전이 결정되는대로 신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 신라는 이미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침공계획을 눈치챈 신라는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의 모벌산성을 쌓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대표적 무기인 노를 사용하는 정예부대를 배치하였다. 일본이 신라정벌을 계획하던 그때, 신라는 군사력을 총동원 할 수 있도록 군사개편까지 이뤄지고 있었다.

 

- 신라침공계획, 무산되다 발해는 결국 신라협공계획을 거부한다. 마침 750년대에 신라·발해의 교류가 시작됐던 것이다. 초기 양국의 긴장·대결 상태에서 우호의 관계로 변하는 시기를 상징하는 것은 국경선의 상호연락소 탄항관문이었다. 동방국 발해와 신라는 서로를 한민족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발해는 일본의 요청을 거절하기에 이른다.

 

역사스페셜 189회 – 역사발굴! 일본의 신라침공 발해가 막았다 (2003.3.29.방송)

 

 

 

KBS 역사스페셜 – 발해는 왜 동해를 건넜는가? /

KBS 19981107 방송

https://youtu.be/NCA_I9y4ros

발해건국 1,3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우리의 관심밖에 있었던 발해의 실체를 추적하고 그 융성했던 면모를 되살려본다.

◼︎ 발해인들이 동해로 떠났던 출발지는 어디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취재팀은 블라디보스톡 종합대학을 찾았다. 그곳에서 발해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학자, 샤프꾸노프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 우리나라의 동해가 바라보이는 일본 후꾸라 항구. 이 작은 어촌의 집집마다 눈에 띄는 독특한 풍경이 있다. 바로 집 앞에 세워둔 성처럼 커다란 대나무 벽이다. 지붕 높이까지 세운 대나무 벽은 웬만한 힘에도 끄덕하지 않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겨울바람을 대비해서 이런 대나무 벽을 만드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지혜라고 했다.

 

◼︎ 중국 산동반도에 위치한 당나라의 등주성. 발해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한 때는 732년. 대장군 장문휴는 수군정예 2만여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등주성으로 진격했다. 파죽지세로 등주성을 함락한 발해군은 등주자사 위준을 죽인다. 우세한 군사력과 속전속결의 전략이 거두어낸 승리였다.

 

◼︎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는 화려했던 상경성의 영화를 엿볼 수 있는 발해 유물들이 있다. 문자기와에 나타난 이 글씨는 한자와는 다른 것으로 보아 발해가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준다. 1,300년을 거쳐온 이 흔적만으로도 발해인들의 예술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 광활한 황야 발해의 영토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유적이었다. 취재팀은 연해주 옵자리브 지역에 남아있는 발해의 유적을 찾아갔다. 산성벽 유적은 산정상에 위치한 이름없는 성이었다. 걸어가면 평지 보이고 정상에 다다르자 넓은 평지가 펼쳐졌는데 이곳이 성의 내부였을 것이다. 한바탕 치열한 전투라도 치른 것처럼 허물어져 있었지만 성의 규모나 지리적인 위치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역사스페셜 3회 – 발해는 왜 동해를 건넜는가 (1998.11.7.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