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예언서 JAPAN INSIDE-OUT :네이버 블로그 / 日本內幕記 李承晩 博士 原著/박마리아 譯自由黨宣傳部/1954년,초판하드커버;쟈켓,,324페이지 /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한 베스트셀러《일본내막기》,뉴데일리 기사 전문 / 미국 최초의 한국인 베스트셀러.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1941년 7월 미국 워싱턴에서 펴낸『Japan Inside Out』.
그 동안 책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강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잊혀진 책이 되었다가, 최근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성화되면서 뒤늦게 다시
출간되었다. 참고로 1954년에 번역된 초판 번역자는 당시 이화여대 교수이며 정치인 이기붕의 부인이었던박마리아 입니다.
이후 번역본은 1987년 나남에서 출간된 <일본군국주의살상> 이 있고, 최근에
번역된 것은 <일본가면의 정체>(청미디어,2007년)가 있습니다.
『일본, 그 가면의 실체』는
'새로운 질서'란 명분으로 영토확장에 광분하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심리적 상태를 꿰뚫어 보고
그들의 침탈 아욕과 야만적인 행위를 당시의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집필된 책이다.
또한 평화주의에 도취되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픈 목적도 있었다. (출처;교보문고서평)
[목차] 서문 (국문판발간을위하여) / 리대통령각하 = 1 간행사 = 7 저자서문 = 10 제一장 일본의 황도(皇道)와 전쟁심리 = 18 제二장『다나까』(田中) 수기 = 35 제三장 일본 그정체를 폭로하다 = 52 제四장 중일전쟁의 시초 = 70 제五장 외국기자는 물러가야만한다 = 99 제六장 외국선교사 = 103 제七장『레이디버-드』호와『파내이』호 사건 = 137 제八장 미국국민과 그들의 이권 = 165 제九장 九개국 회담 = 185 제十장 일본인의 정복행과 그반향 = 202 제十一장 미해군의 증강 = 240 제十二장 일본의 선전은 저지 되어야한다 = 252 제十三장 미국의 반전론자 = 261 제十四장 반전론자는 오열과같다 = 281 제十五장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 297 결론 = 314 역자의 말 = 32
최근에 출간된 다른 제목의 일본내막기,
일본 그 가면의 정체- 이승만 지음 (청미디어,2007년), 414쪽
목차발간사 선고를 회상하며 필자 서문 제1장 황권신수설과 전쟁심리 제2장 세기의 괴문서 타나카 메모 제3장 가면으로 가린 일본의 야욕 제4장 중·일 전쟁의 불이 번지는데... - 인명피해 / 외국의 금화 손실 제5장 "외국기자들은 나가라" 제6장 죽음을 두려워 않는 선교사들 제7장 레이디버드호와 파네이호 피습 - 레이디버드]호 / 파네이호 사건 / 일본측의 주장 / 영화필름 / 일본의 배상 / 하리 E. 야넬 제독 제8장 일본에게 수모당하는 미국인 - 국기사건 제9장 휴지조각이 된 9개국 조약 제10장 일본의 정복과 그 반향 - 인도지나 / 홍콩 / 버마도로 / 네덜란드 영토 / 태국 / 필리핀군도 / 괌 / 위임통치 제도 /하와이 / 알래스카 / 오스트레일리아 / 멕시코 / 아르헨티나 / 우루과이 제11장 미해군력의 증강 - 해군회의 / 해군영역에 관한 문제 제12장 일본의 선전전략 막아라 제13장 미국 평화주의자들의 착각 제14장 반전론자는 오열과 같다 제15장 민주주의냐 전체주의냐 결론 이승만박사 경력 번역을 끝내면서
당시 65세의 이승만 박사가 태평양전쟁 발발 전인 1941년 7월 미국 워싱턴에서 펴낸 JAPAN INSIDE OUT』 그 동안 책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강했기 때문에 번역돼 나오지 못하다가 최근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성화되면서 뒤늦게 출간되었다.
『JAPAN INSIDE OUT』는 ' 새로운 질서'란 명분으로 영토확장에 광분하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심리적 상태를 꿰뚫어 보고 그들의 침탈 아욕과 야만적인 행위를 당시의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집필된 책이다. 또한 평화주의에 도취되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픈 목적도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이 책을 통해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견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의 하와이나 알래스카 중 한 곳을 공격할 것이라고 전망하였고, 일본의 도발에 의해 미국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대전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매우 설득력 있게 예언했지만 출간될 당시 당시 미국내 반전주의자들에 의해 무시되었다. 당시 미국의 여론은, 일본이 태평양 건너편에서 무슨 짓을 하든 미국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평화주의, 고립주의(isolationism)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생전 들어 본적도 없는 땅, ‘코리아’에서 온 예순 일곱 살의 늙은이가 이런 미국 사람의 귀청에 대고 “정신 차려! 너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쟤들이 전쟁을 일으켜! 지금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은 곧 지구 전체의 전쟁이 될 수 밖에 없어!”라고 큰 소리로, 최초로, 제대로 외쳤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경고는 사실로 돌아왔다.
중국에 대한 소설 ‘대지’를 쓴 미국 작가
펄 벅(Pearl Buck)은 진주만 공습 전에 『JAPAN INSIDE OUT』를 읽고나서,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라고 평했다. 펄 벅은 30 년 이상 중국에서 생활했고, 아시아 전체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던 소설가였다.
실제로 이 저서가 나온지 4개월 뒤인
1941년 12월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세계를 경악시켰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책은 단번에
미국의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이승만 박사는 한국 최초의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류석춘 원장은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견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태평양전쟁 중에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 이후 어떤 국가를 세워야 할지에 대한 구상까지 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료"라고 평가했다. 이승만 박사가
『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준비한 것은
1939년 9월 1일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직후라고 한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국 동맹은 이로부터 1 년이 지나야 맺어졌지만 이승만은 이미 전쟁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진영>과 추축국 동맹의 <전체주의 진영> 사이의 싸움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챕터는 첫 문장은 이렇다.
원칙을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는 개인주의자들이다. 정부의 권력은 그 시민으로부터 나오며
국가의 기초는 바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이전체주의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만든 용어이다.
파시즘은 민족을 신성한 존재라고 선전하며 민족의 차원, 즉 전체의 차원에서 개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신성한 민족 국가 공동체’를 ‘전체’라고 불렀다. 무쏠리니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민족국가 안에 있다 . 민족국가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국가에 대한 반대는, 존재할 수조차 없는 착각 에 지나지 않는다.” 영미 정치학계에서 ‘전체주의’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 난 후, 일의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에 관한 연구를 내놓은 무렵이다. 이승만의 책은,
최소한 영어로 쓰인 책 중에 가장 먼저, 가장 정확하게 ‘전체주의’라는 말을 썼다. 그는 일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의 심리에서는 개인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이, 7 천만의 작은 전신(戰神)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나의 전신(戰神)이라고 믿는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직후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의 지식인들, 언론인들, 정치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이 어디에서 온 인간이야?”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코리아’란 곳이 어디야?” 이 책은 냉혹한 열강들의 국제정치 무대에 한국의 존재와,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알렸다. 1941년 12월 7일(현지 시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순간, 이 책은 한국의 독립을 확정지웠던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우리가 감히 예상하고 갈망하고 있는 것보다 더 일찍,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일본인들의 팽창을 꺾고 일본 영토 안으로 그들을 구겨 넣을 것이다. 그리고 평화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 우리 한반도는 전 세계의 자유국가들과 나란히 설 것이다. 그 때 우리 한반도는 또다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서 세계 앞에 당당히 서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평화주의적 풍조에 대하여 “자유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만 자유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비판하면서 전체주의자들에게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간첩의 행동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우남은, 일본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에게 이렇게 통렬하게 이야기한다. “당신들이 그토록 평화를 사랑한다면,
히틀러의 베를린, 미카도 의 토쿄, 무쏠리니의 로마에 가서 평화를 설교하라. 전쟁은 이곳 미국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versuchte er Amerikain eine blutige Fehde mit Japan zuziehen.
Ein Enthuellungsbuch ueber die japanischen Ziele
("Japan inside out-Japan von innen nach außen")
warnte die Vereinigten Staaten vor einem baldigen japanischen Ueberfall.
수년 동안 그는 미국을 일본과의 피투성심으로 끌고 가려고했다. 일본의 목표에 관한 계시록 (일본 內幕記) 미국에게 임박한 일본의 공격을 경고했다
39.
Aber selbst nach Pearl Harbor wies das US-State-Department sein Liebeswerben und seine Angebote kuehl zurueck. Entmutigt und verbittert, bat er nach der Niederlage Japans, "als einfacher Buerger" in seine befreite Heimat zurueckkehren zu duerfen.
하지만 심지어 진주만에 미국 국무부는 냉담하게 구혼과 구혼을 중단했다. 낙심하고 낙담 한, 그는 자유 시민으로 돌아갈 단순한 시민으로서의 일본의 패배 이후에 물었다.
Aber selbst nach Pearl Harbor wies das US-State-Department sein Liebeswerben und seine Angebote kuehl zurueck. Entmutigt und verbittert, bat er nach der Niederlage Japans, "als einfacher Buerger" in seine befreite Heimat zurueckkehren zu duerfen.
그러나 진주만 공격이후 미 국무부는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그의 제안은 시원하게 돌아 간다. 낙담하고 격분한 그는 일본의 패배를 요구했다. "단순한 시민으로서"그의 해방 된 집으로 돌아갑니다
나찌 독일의 히틀러가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9년 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전쟁을 예감한 이승만은 1939년 4월에 활동 무대를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옮겼다. 워싱턴에서 이승만 부부는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바트 스트리트의 국립 동물원이 바라다보이는 붉은 2층 벽돌집에 정착했다.
그는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의 글을 써서 저명한 기자인 에드윈 힐을 통해 여러 신문에 싣게 했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일본에 대항한 한국인들의 투쟁상황을 설명하고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국무부를 통해 거절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동안 이승만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1941년 여름 뉴욕에서 출간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하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그런지 몇 달 안 되어 그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12월 7일 일본 항공 모함의 함재기들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다. 그에 따라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1941년초 뉴욕의 출판사 프래밍 H. 레벨사에서 간행된 이승만의 영문저서『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표지.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외교 활동
제2차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김구의 임시정부와 이승만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독일의 폴란드 공격이 있기 직전인 1939년 8월에 김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모두 국제 정세에 대해 무지몽매함을 개탄했다. 중국이 일본에 대항해 아무리 피를 흘리며 싸운다 할지라도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미국 국민의 동정을 얻기 위한 대대적인 선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장개석에게 알려 주라는 내용이었다.
▲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및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발급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 그리고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한다는 사령장.
마침내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이승만이 오래 전부터 예상해 왔던 미-일 전쟁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한국 독립의 가능성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임시정부의 외교부장 조소앙은 이승만을 주미외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워싱톤의 이승만은 그 자격을 가지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망명객의 신분으로 미국 관리들을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승만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로비스트로 고용하였다. 이승만, 일본에 선전포고..미국에 "무기 공급해달라"
로비의 목표는 상해임시정부를 미국 정부가 승인하고, 무기대여법에 따라 무기를 공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한국군을 일본과의 전쟁에서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패망 뒤에 소련의 한 반도 점령과 공산화를 막는 데도 활용함으로써 이중의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는 이승만에 맞서 미국 국무부와 정보기관을 드나들었던 한길수의 방해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원인은 알저 히스와 같은 미국 국무부 안의 친소적이고 친공적인 관리들의 책략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제 문제를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처리하려는 좌우합작(左右合作)의 기본 노선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장관에게 연락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보내오내록 했다. 그리고 그것을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스탠리 혼벡 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아직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혼벡은 그것을 정부 문서가 아닌 개인 의견서로만 받았다. 이승만은 다시 중경 임시정부에게 요청하여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미 국무부에 대해서는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을 임시정부에도 적용하여 군사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이사한 이승만 부부.
국무부의 실세로 공산주의자인 알저 히스를 만나다
이승만은 미국 설득의 방향을 국회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그의 후원자인 존 스태거스 변호사와 제이 제롬 윌리엄스 기자와 함께 질레트 상원의원을 찾아가서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국무부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 국무부가 임시정부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방침임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확인은 진주만 기습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채 안되는 1942년 1월 2일에 미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다.
▲ 1936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무성의 고문이었고 국제연합 창립총회 당시(1945) 임시 사무총장이었던 알저 히스(Alger Hiss). 1950년 그는 소련 간첩혐의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알저 히스는 국무부의 실세로 나중에 얄타 회담이나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를 조직하는 등 사실상 국무부의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따라서 국무부 안에는 그의 심복들이 많았다. 만남의 자리에는 스탠리 혼벡 박사가 같이했다. 이승만은 평소의 주장대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무기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미국은 이중의 이득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즉, 미국은 일본과 전쟁하는 데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항복한 다음에는 한 반도로 밀고 들어올 소련군을 막는 데도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이승만의 주장에 알저 히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 나찌 독일과 싸우고 있는 소련을 비난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화를 냈다. 한반도는 소련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므로 소련과 아무런 협의도 거치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했다.
소련 간첩 알저 히스, 이승만은 까맣게 몰랐다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알저 히스는 소련 간첩이었다. 그 사실은 나중에 소련 제국이 무너지고 난 뒤인 1994년에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알 리 없었던 이승만은 단지 경험없는 젊은 미국인에게 한국인들의 운명이 걸려 있는 현실을 서글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용기를 잃지 않고 알저 히스의 상관인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자 헐 국무장관은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서한을 보내왔다. 이승만은 감격했다. 그래서 그는 힘들게 긴 보고서를 만들어 보냈다. 그런 다음에는 아무 회답이 없었다.
목차발간사 선고를 회상하며 필자 서문 제1장 황권신수설과 전쟁심리 제2장 세기의 괴문서 타나카 메모 제3장 가면으로 가린 일본의 야욕 제4장 중·일 전쟁의 불이 번지는데... - 인명피해 / 외국의 금화 손실 제5장 "외국기자들은 나가라" 제6장 죽음을 두려워 않는 선교사들 제7장 레이디버드호와 파네이호 피습 - 레이디버드]호 / 파네이호 사건 / 일본측의 주장 / 영화필름 / 일본의 배상 / 하리 E. 야넬 제독 제8장 일본에게 수모당하는 미국인 - 국기사건 제9장 휴지조각이 된 9개국 조약 제10장 일본의 정복과 그 반향 - 인도지나 / 홍콩 / 버마도로 / 네덜란드 영토 / 태국 / 필리핀군도 / 괌 / 위임통치 제도 /하와이 / 알래스카 / 오스트레일리아 / 멕시코 / 아르헨티나 / 우루과이 제11장 미해군력의 증강 - 해군회의 / 해군영역에 관한 문제 제12장 일본의 선전전략 막아라 제13장 미국 평화주의자들의 착각 제14장 반전론자는 오열과 같다 제15장 민주주의냐 전체주의냐 결론 이승만박사 경력 번역을 끝내면서
당시 65세의 이승만 박사가 태평양전쟁 발발 전인 1941년 7월 미국 워싱턴에서 펴낸 JAPAN INSIDE OUT』 그 동안 책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강했기 때문에 번역돼 나오지 못하다가 최근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성화되면서 뒤늦게 출간되었다.
『JAPAN INSIDE OUT』는 ' 새로운 질서'란 명분으로 영토확장에 광분하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심리적 상태를 꿰뚫어 보고 그들의 침탈 아욕과 야만적인 행위를 당시의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집필된 책이다. 또한 평화주의에 도취되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픈 목적도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이 책을 통해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견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의 하와이나 알래스카 중 한 곳을 공격할 것이라고 전망하였고, 일본의 도발에 의해 미국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대전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매우 설득력 있게 예언했지만 출간될 당시 당시 미국내 반전주의자들에 의해 무시되었다. 당시 미국의 여론은, 일본이 태평양 건너편에서 무슨 짓을 하든 미국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평화주의, 고립주의(isolationism)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생전 들어 본적도 없는 땅, ‘코리아’에서 온 예순 일곱 살의 늙은이가 이런 미국 사람의 귀청에 대고 “정신 차려! 너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쟤들이 전쟁을 일으켜! 지금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은 곧 지구 전체의 전쟁이 될 수 밖에 없어!”라고 큰 소리로, 최초로, 제대로 외쳤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경고는 사실로 돌아왔다.
중국에 대한 소설 ‘대지’를 쓴 미국 작가
펄 벅(Pearl Buck)은 진주만 공습 전에 『JAPAN INSIDE OUT』를 읽고나서,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라고 평했다. 펄 벅은 30 년 이상 중국에서 생활했고, 아시아 전체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던 소설가였다.
실제로 이 저서가 나온지 4개월 뒤인
1941년 12월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세계를 경악시켰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책은 단번에
미국의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이승만 박사는 한국 최초의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류석춘 원장은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견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태평양전쟁 중에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 이후 어떤 국가를 세워야 할지에 대한 구상까지 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료"라고 평가했다. 이승만 박사가
『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준비한 것은
1939년 9월 1일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직후라고 한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국 동맹은 이로부터 1 년이 지나야 맺어졌지만 이승만은 이미 전쟁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진영>과 추축국 동맹의 <전체주의 진영> 사이의 싸움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챕터는 첫 문장은 이렇다.
원칙을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는 개인주의자들이다. 정부의 권력은 그 시민으로부터 나오며
국가의 기초는 바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이전체주의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만든 용어이다.
파시즘은 민족을 신성한 존재라고 선전하며 민족의 차원, 즉 전체의 차원에서 개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신성한 민족 국가 공동체’를 ‘전체’라고 불렀다. 무쏠리니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민족국가 안에 있다 . 민족국가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국가에 대한 반대는, 존재할 수조차 없는 착각 에 지나지 않는다.” 영미 정치학계에서 ‘전체주의’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 난 후, 일의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에 관한 연구를 내놓은 무렵이다. 이승만의 책은,
최소한 영어로 쓰인 책 중에 가장 먼저, 가장 정확하게 ‘전체주의’라는 말을 썼다. 그는 일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의 심리에서는 개인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이, 7 천만의 작은 전신(戰神)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나의 전신(戰神)이라고 믿는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직후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의 지식인들, 언론인들, 정치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이 어디에서 온 인간이야?”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코리아’란 곳이 어디야?” 이 책은 냉혹한 열강들의 국제정치 무대에 한국의 존재와,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알렸다. 1941년 12월 7일(현지 시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순간, 이 책은 한국의 독립을 확정지웠던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우리가 감히 예상하고 갈망하고 있는 것보다 더 일찍,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일본인들의 팽창을 꺾고 일본 영토 안으로 그들을 구겨 넣을 것이다. 그리고 평화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 우리 한반도는 전 세계의 자유국가들과 나란히 설 것이다. 그 때 우리 한반도는 또다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서 세계 앞에 당당히 서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평화주의적 풍조에 대하여 “자유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만 자유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비판하면서 전체주의자들에게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간첩의 행동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우남은, 일본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에게 이렇게 통렬하게 이야기한다. “당신들이 그토록 평화를 사랑한다면,
히틀러의 베를린, 미카도 의 토쿄, 무쏠리니의 로마에 가서 평화를 설교하라. 전쟁은 이곳 미국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versuchte er Amerikain eine blutige Fehde mit Japan zuziehen.
Ein Enthuellungsbuch ueber die japanischen Ziele
("Japan inside out-Japan von innen nach außen")
warnte die Vereinigten Staaten vor einem baldigen japanischen Ueberfall.
수년 동안 그는 미국을 일본과의 피투성심으로 끌고 가려고했다. 일본의 목표에 관한 계시록 (일본 內幕記) 미국에게 임박한 일본의 공격을 경고했다
39.
Aber selbst nach Pearl Harbor wies das US-State-Department sein Liebeswerben und seine Angebote kuehl zurueck. Entmutigt und verbittert, bat er nach der Niederlage Japans, "als einfacher Buerger" in seine befreite Heimat zurueckkehren zu duerfen.
하지만 심지어 진주만에 미국 국무부는 냉담하게 구혼과 구혼을 중단했다. 낙심하고 낙담 한, 그는 자유 시민으로 돌아갈 단순한 시민으로서의 일본의 패배 이후에 물었다.
Aber selbst nach Pearl Harbor wies das US-State-Department sein Liebeswerben und seine Angebote kuehl zurueck. Entmutigt und verbittert, bat er nach der Niederlage Japans, "als einfacher Buerger" in seine befreite Heimat zurueckkehren zu duerfen.
그러나 진주만 공격이후 미 국무부는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그의 제안은 시원하게 돌아 간다. 낙담하고 격분한 그는 일본의 패배를 요구했다. "단순한 시민으로서"그의 해방 된 집으로 돌아갑니다
나찌 독일의 히틀러가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9년 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전쟁을 예감한 이승만은 1939년 4월에 활동 무대를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옮겼다. 워싱턴에서 이승만 부부는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바트 스트리트의 국립 동물원이 바라다보이는 붉은 2층 벽돌집에 정착했다.
그는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의 글을 써서 저명한 기자인 에드윈 힐을 통해 여러 신문에 싣게 했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 일본에 대항한 한국인들의 투쟁상황을 설명하고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국무부를 통해 거절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동안 이승만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1941년 여름 뉴욕에서 출간했다. 그 책에서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하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그런지 몇 달 안 되어 그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12월 7일 일본 항공 모함의 함재기들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다. 그에 따라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1941년초 뉴욕의 출판사 프래밍 H. 레벨사에서 간행된 이승만의 영문저서『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표지.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외교 활동
제2차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김구의 임시정부와 이승만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독일의 폴란드 공격이 있기 직전인 1939년 8월에 김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모두 국제 정세에 대해 무지몽매함을 개탄했다. 중국이 일본에 대항해 아무리 피를 흘리며 싸운다 할지라도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미국 국민의 동정을 얻기 위한 대대적인 선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장개석에게 알려 주라는 내용이었다.
▲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및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발급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 그리고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한다는 사령장.
마침내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이승만이 오래 전부터 예상해 왔던 미-일 전쟁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한국 독립의 가능성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임시정부의 외교부장 조소앙은 이승만을 주미외교부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워싱톤의 이승만은 그 자격을 가지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망명객의 신분으로 미국 관리들을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승만은 로버트 올리버 박사를 로비스트로 고용하였다. 이승만, 일본에 선전포고..미국에 "무기 공급해달라"
로비의 목표는 상해임시정부를 미국 정부가 승인하고, 무기대여법에 따라 무기를 공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한국군을 일본과의 전쟁에서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패망 뒤에 소련의 한 반도 점령과 공산화를 막는 데도 활용함으로써 이중의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는 이승만에 맞서 미국 국무부와 정보기관을 드나들었던 한길수의 방해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원인은 알저 히스와 같은 미국 국무부 안의 친소적이고 친공적인 관리들의 책략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제 문제를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처리하려는 좌우합작(左右合作)의 기본 노선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장관에게 연락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보내오내록 했다. 그리고 그것을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스탠리 혼벡 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아직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혼벡은 그것을 정부 문서가 아닌 개인 의견서로만 받았다. 이승만은 다시 중경 임시정부에게 요청하여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미 국무부에 대해서는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을 임시정부에도 적용하여 군사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이사한 이승만 부부.
국무부의 실세로 공산주의자인 알저 히스를 만나다
이승만은 미국 설득의 방향을 국회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그의 후원자인 존 스태거스 변호사와 제이 제롬 윌리엄스 기자와 함께 질레트 상원의원을 찾아가서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국무부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 국무부가 임시정부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방침임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확인은 진주만 기습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채 안되는 1942년 1월 2일에 미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다.
▲ 1936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무성의 고문이었고 국제연합 창립총회 당시(1945) 임시 사무총장이었던 알저 히스(Alger Hiss). 1950년 그는 소련 간첩혐의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알저 히스는 국무부의 실세로 나중에 얄타 회담이나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를 조직하는 등 사실상 국무부의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따라서 국무부 안에는 그의 심복들이 많았다. 만남의 자리에는 스탠리 혼벡 박사가 같이했다. 이승만은 평소의 주장대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무기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렇게 하면 미국은 이중의 이득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즉, 미국은 일본과 전쟁하는 데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항복한 다음에는 한 반도로 밀고 들어올 소련군을 막는 데도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이승만의 주장에 알저 히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 나찌 독일과 싸우고 있는 소련을 비난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화를 냈다. 한반도는 소련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므로 소련과 아무런 협의도 거치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했다.
소련 간첩 알저 히스, 이승만은 까맣게 몰랐다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알저 히스는 소련 간첩이었다. 그 사실은 나중에 소련 제국이 무너지고 난 뒤인 1994년에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알 리 없었던 이승만은 단지 경험없는 젊은 미국인에게 한국인들의 운명이 걸려 있는 현실을 서글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용기를 잃지 않고 알저 히스의 상관인 코델 헐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자 헐 국무장관은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서한을 보내왔다. 이승만은 감격했다. 그래서 그는 힘들게 긴 보고서를 만들어 보냈다. 그런 다음에는 아무 회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