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공사창립특집 고선지루트 1부 –3부, 1부 고구려인,실크로드를 제패하다 / 2부 사상 최고의 작전,와칸계곡의 혈투 / 3부 중국산맥의 제왕,탈라스에 서다 / "대륙 속의 고구려 왕국, 제왕 이정..

2023. 1. 6. 23:15역사의 연구/한국역사

KBS 공사창립특집 고선지루트 1부 – 고구려인,

실크로드를 제패하다 / KBS 20100303 방송

https://youtu.be/upyjEpPBu4c

Apr 25, 2022

 

▶ 사라진 나라, 살아남은 유민에게 허락된 하나의 길 - 무사 668년. 요동이 당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감으로 인해 고구려 유민의 운명도 뒤바뀌었다. 당나라로 끌려가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 그로 인해 고선지는 당나라에서 태어나 자라게 되었고. 고구려 유민에게 허락된 삶은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노예가 되는 길 뿐이었지만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 스무살 장군, 고선지 – 1,300년 전 흔적을 추적하다 고선지는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을까. 구당서는 고선지의 전기를 ‘고선지 열전’으로 기록해놓았다. 구당서에 따르면 고선지는 스무 살에 장군으로 승진하는 파격적인 이력을 보이는데. 취재진은 구당서를 단서로 고선지의 행적을 추적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우웨이에서 청년기를 보낸 신장위구르 지역 쿠차로. 독립부대를 처음으로 지휘하게 된 첫 부임지 호탄에서 다시 카라샤르로. 1,300년 전의 행적을 뒤쫓는 것은 상당히 숨 가쁜 추적이었는데 그것은 고선지가 끊임없이 발탁되어 승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고선지의 흔적을 찾던 취재진은 의외의 소득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구려인의 집단 거주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중국 네이멍구에서 찾은 고려주. 무려 25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성의 흔적도 찾을 수 있었는데 성안에만 천여 명, 성 부근에는 수천 명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타클라마칸 사막을 누빈, 아름다운 장군 고선지의 부임지는 안서도호부로 지금의 신강위구르지역이다. 쿠차와 호탄, 카라샤르를 오가며 고선지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수없이 지났을 것이다. 타클라마칸은 ‘돌아올 수 없다’는 뜻으로 한반도의 1.5배에 달하는, 세계에서 사하라 사막 다음으로 큰 사막이다. 사막의 길을 훤히 꿰며 달렸을 고선지. 그런 고선지를 구당서는 “용모가 곱고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있다. 고운 용모의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소발률국 정벌에 나서 대승을 거두며 중국 대륙의 신예로 떠오르는데...

 

공사창립특집 고선지루트 1부 – 고구려인, 실크로드를 제패하다 (2010.3.3.방송)

 

http://history.kbs.co.kr/

 

 

 

"KBS 공사창립특집 고선지루트 2부 – 사상 최고의 작전,

와칸계곡의 혈투 / KBS 20100304 방송" 

Apr 27, 2022
 

▶ 아프가니스탄의 지뢰밭, 와칸 계곡을 취재하다 고선지 장군의 가장 큰 승리는 와칸 계곡의 연운보에 있다. 와칸 계곡은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의 남단부에 위치한 너비 2km, 길이 241km에 이르는 좁다란 협곡이다. 곰, 시라소니, 표범이 사는 위험지대로 중국, 파키스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과거 구 소련이 매장한 지뢰 제거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하는 위험구역으로, 지뢰를 피하기 위해 일부 지역은 촬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국경수비대의 저지로 촬영이 중단되기도 하는 어려움 속에, 취재진은 당시 토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연운보의 위치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 중국산맥의 제왕 서역수호신, 나폴레옹보다 위대한 원정 고선지가 연운보에 주둔한 토번을 함락시킴으로써 당나라는 토번의 기세를 꺾게 된다. 지금은 티베트로 중국 자치구에 속해있지만 당시 토번은 그 영향력이 대단해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였다. 고선지는 전략적 요충지인 연운보를 점령함으로 인해 당나라가 토번의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고 그 자신도 명성을 얻게 된다. 이슬람에서는 중국 산맥의 제왕으로, 중국에서는 서역수호신으로 전설적인 인물이 된 것. 그러나 고선지가 지금까지 전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다르코트 정복에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의 한 줄기, 해발 4703m의 다르코트. 1만 명의 군사와 말을 데리고 고선지는 다르코트를 넘어 소발률이라는 나라로 향했다. 이 원정을 두고 세계적인 탐험가이자 둔황학자인 오렐 스타인은 나폴레옹보다, 한니발보다 위대한 원정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중국군대를 이끈 이는 한국인 장군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1,300년전, 고선지는 어떻게 다르코트를 넘었을까. 취재진이 그 길을 답사하며 그 비밀을 풀었다.

 

▶72개국이 항복하다. 무공불극 고선지 다르코트를 넘은 뒤, 소발률을 정복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연운보를 함락시킨 고선지에게 제압당한 소발률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해온 것이다. 이 소문이 이웃 나라에 차차 퍼져나가며 무려 72개국의 나라가 스스로 항복을 자처해 왔다. 이에 고선지가 싸워서 이기지 못한 이는 없었다고, 당나라 시인 왕유는 왕우승집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상관 부몽영찰은 고선지에게 ‘고구려 노예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는데... 하지만 고선지는 당 현종의 총애로 부몽영찰을 제치고 안서절도사에 승진됨으로써 실크로드를 제패하는 서역의 주인이 된다.

 

공사창립특집 고선지루트 2부 – 사상 최고의 작전, 와칸계곡의 혈투 (2010.3.4.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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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공사창립특집 고선지루트 3부 – 중국산맥의 제왕,

탈라스에 서다 / KBS 20100305 방송"

https://youtu.be/hEEKKCmWyFw

 
Apr 29, 2022
 
▶ 고선지는 살해되었는가? 중국 10대 원장 고선지 고선지는 중국 역사에서 10대 원장, 즉 억울하게 죽은 장군(원장 寃將)에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는 고선지가 살해되었다는 의혹도 제시하고 있다. 이슬람에까지 명망이 높았던 고선지. 그는 정말 살해되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를 살해한 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해되었단 말인가.
 
▶ 동서양 최초의 전쟁, 탈라스 전투의 총사령관 고선지는 당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더욱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다. 이슬람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 당시 이슬람은 우마이야 왕조가 지고 입바스 왕조가 새롭게 집권함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있었고 그 동쪽엔 당나라가 버티고 있었다. 751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서양이 맞부딪힌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탈라스 전투다. 동서양 최초의 전투에서, 고선지는 당나라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아 10만 대군을 이끌고 탈라스 대평원으로 진군한다.
 
▶ 탈라스 전투, 문명을 전하다 현재 중앙아시아는 대부분의 지역이 이슬람 영향권이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가 있기 전까지 중앙아시아는 불교가 강성했다. 고선지가 탈라스전쟁에서 패함으로 인해,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고선지가 세계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은 그뿐 만이 아니다. 제지술을 아는 중국포로들이 압바스 왕조의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힘으로 인해 제지술의 전파가 전 세계로 이뤄져, 유럽 문명에는 르네상스를 일으켰고 코란과 성경이 보급됨으로 인해 전 세계에 종교와 문화의 교류를 가능케 했다.
 
▶ 패배, 그리고 배반 탈라스 전쟁에서 고선지는 패했다. 아군이던 갈라록 군사가 배반을 한 것이다. 고선지는 그 책임을 물어 경질돼야 했지만 오히려 당현종은 패장 고선지에게 우우림 대장군과 어사대부로 제수한다. 황제의 군사참모와 같은 직책이다. 그러나 고선지의 운도 다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마는데, 그것은 바로 안녹산의 난이다. 755년 안녹산의 난을 제압하기 위해 다시 군사를 이끌고 출정한 고선지. 그러나 더 큰 배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사창립특집 고선지루트 3부 – 중국산맥의 제왕 탈라스에 서다 (2010.3.4.방송)
 

 

 

 "KBS 한국사전 – 대륙 속의 고구려 왕국, 제왕 이정기"

https://youtu.be/yUVtVZULXZQ

Mar 25, 2020
 
- 고구려 유민 이정기, 당 절도사에 추대되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끌려온 약 20만 명의 고구려 유민들은 비참한 노예로 전락했다. 노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는 당나라의 군사가 되는 것이었다.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는 당군이 되어 뛰어난 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고 위구르 군대를 두려움에 떨게 한 이정기는 그를 시기한 당 절도사 후희일에 의해 옥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이정기를 존경한 평로군 병사들이 그를 구출하고 ‘치청번진’의 절도사로 추대한다.
 
- 당대 가장 강력한 절도사, 이정기 8세기 중반, 중국대륙은 연이은 반란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러나 이정기가 다스린 지역은 달랐다. 이정기의 강력한 통치력과 군사력은 당나라 내 절도사들을 두려움에 빠뜨렸다. 심지어 이정기를 황제라고 부르며 사신을 보낼 정도로 두려워했다. 당나라는 이정기에게 여러 관직을 내리며 충돌을 피하고자 노력하지만, 이미 발해와 신라와의 교역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정기는 부의 축적과 강력한 군대로 당나라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 이정기, 그만의 왕국을 만들다 당시 이정기가 차지한 산둥반도 일대 15개 주는 통일신라보다 넓고 인구수도 더 많았다. 이정기는 치정지역 중심지인 청주에 높이 20m, 길이 13km에 달하는 성을 세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사실상 독립왕국의 탄생이다.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안정적인 통치로 태평성대를 이룬 이정기는 당나라의 황실을 넘볼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다. 드디어 10만 군대를 이끌고 당의 수도로 향하는데 …
 
이정기의 죽음과 당(唐)의 잔인한 보복 그러나 당과 일대결전을 앞둔 이정기는 뜻밖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이정기의 뒤를 이은 아들 이납은 한 달 가까이 아버지의 죽음을 속인다. 이납은 왕국을 제(齊) 라 칭하고 대외적으로 독립왕국임을 선포한다. 그러나 55년 후인 819년, 결국 제(齊)는 당나라의 집요한 공격으로 패망한다. 제나라가 패한 후, 당은 고구려 유민이 대다수인 운주병사 1,200명을 학살한다.
 
한국사전 3회 – 대륙 속의 고구려 왕국, 제왕 이정기 (2007.6.30. 방송)
 

 

 

중국을 뒤흔든 고구려 유민, 고선지와 이정기

Jan 24, 2020

#고선지 #이정기 #고구려유민 중국을 흔든 고구려 유민, 고선지와 이정기 이야기입니다.

 

한니발 보다 더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은 고구려 유민 고선지장군과 제나라의 시조가 된 고구려유민 이정기장군. 이들은 삶이 어떠했기에 이런 칭송을 받고 있는 걸까요?

 

 

 

 

KBS 역사스페셜 – 만주대탐사 1편,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

KBS 2009.8.29 방송

Aug 28, 2020

 

-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문명은 인류의 4대 문명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요하문명은 이들 4대 문명보다 시기적으로 1,000년 이상 빠르다. BC 6천 년, 요하문명의 새벽을 열었던 사해·흥륭와 유적에선 빗살무늬 토기와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그런데 이 옥귀걸이와 똑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도 출토됐다. 대륙을 건너온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 우리 민족의 시원을 밝혀줄 단서는 아닐까? - 요하문명의 꽃, 홍산문화 요하문명은 홍산에서 그 꽃을 피운다.

 

홍산인들의 성도인 우하량에서 여신묘가 발견됐다. 그곳에선 두 눈을 푸른 옥으로 장식한 여신상도 함께 발굴됐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신체의 조각들로 봐서 사람 크기의 2배, 3배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우하량 각지에선 수많은 적석총이 발견됐다. 한 변이 60m가 넘는 거대한 피라미드형이다. 제단,신전,무덤이라는 정신문명의 삼위일체의 유적들과 정교한 옥기의 대량생산 등은 홍산인들이 이미 ‘초기국가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중국으로선 커다란 충격이었다.

 

- 흔들리는 중화사상, 중국의 새로운 국가 전략 중국은 예로부터 황하문명을 자신들의 시원으로 삼고 만리장성 이남을 중원이라 믿었다. 그러나 오랑캐의 땅이라 여겨왔던 만리장성 이북의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천 년 이상 빠르고 이미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 요하문명이 속속 발굴되자 수 천 년간 지속되어온 중화사상은 크게 흔들린다. 중국은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웠다. 현재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예로부터 중화민족이며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국가 주도의 역사공정에 착수했고 그 핵심은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원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요하문명이 중국 문명의 시원일까?

 

-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은 누구인가? BC 2천 년 경, 홍산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어진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견되는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 동검 등이 발견되는데 이는 중원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은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 중화민족과는 다른 집단이라는 것이다. 치를 갖춘 석성은 고구려 성의 특징을 보여주며 비파형 동검도 그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요하유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완전한 국가단계라고 평가되는데 기원전 2천 년 경 요하유역에 있을 수 있는 국가는 모든 사서를 뒤져봐도 고조선 외에는 없다. 흥미로운 것은 홍산문화 우하량의 여신묘에서 곰의 턱뼈와 진흙으로 만든 곰의 발도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제사장으로 보이는 인골은 곰의 얼굴을 형상화한 웅룡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이는 홍산인들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곰 토템족이었다는 증거다. 우리 민족의 기원 신화인 단군 신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주류학계에서는 단군신화를 신화로서만 인정할 뿐, 단군 조선이라는 역사적 실체는 부정해 왔다. 이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요하문명을 바탕으로 단군조선의 실체에 대해 적극적인 검토를 해야 할 때이다.

 

신역사스페셜 8회 – 만주대탐사 1편,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8.29.) http://history.kbs.co.kr/

 

 

 

 

"KBS 역사스페셜 – 만주대탐사 2편, 금태조 아골타 신라인의 후예였다 /

KBS 20090905 방송"

https://youtu.be/CVSdFclJH7I

Nov 7, 2022
 
◼︎ 금태조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 그의 시조는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것은 전설이나 야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와 금 건국 시 송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에 명확히 나오고 있다. “금시조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온 신분이다”(금사본기 제1권, 세기)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는 중국말 왕과같다” (송막기문) 고려에서 온 신분이며 신라인인 금시조.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해 계산해보면 금시조 함보가 여진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말, 고려 초다. 당시 신라와 고려의 왕권교체기였던 한반도의 사정을 생각하면 두 사서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골타의 조상 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 함보, 그는 누구인가? 동명해사록에 함보의 9대손 아골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1636년) 조선의 유학자 김세렴은 여진족의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며 조선최고가문 권행의 후예라고 하고 있다.그런데 권행의 본래 성은 金(김)씨였다. 김행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외손인 금의 시조.당시 족내혼을 했던 신라왕실의 관습을 고려하면,그의 성이 金(덧말:김)이며 신라의 후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동명해사록의 금시조와 금사의 함보는 과연 동일인인가? 
 
◼︎ 신라 후예인 왕족과 발해 후손의 왕비족이 세운 나라, 금 함보를 시조로 둔 금 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해 국가체제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 청 황실의 성씨도 김씨였다 금 멸망 후 1606년, 여진은 다시 중원을 장악했다.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이다. 그런데 청나라 황제 성은 아이신 줘러 였다. 아이신이란 금, 줘러란 겨레부족 씨 등을 뜻한다. 결국 금 부족, 김씨들이라는 뜻이다.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그의 후예인 금 황실, 청 황실까지 그들은 모두 금을 뜻하는 김씨들이었던 것이다.
 
◼︎ 만주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신역사스페셜 9회 – 만주대탐사 2편, 금태조 아골타 신라인의 후예였다 (2009.9.5.방송)
 

 

 

 

"고선지루트 / 1부 서역으로 간 고구려인 [역사실험]

KBS 2001.01.06 방송" 

https://youtu.be/Kx_DJ679cQo

 
Sep 1, 2021
 
 
 
 
 

"고선지루트 / 2부 파미르를 넘어 신화가 된 탈라스전투

[역사실험] KBS 2001.01.07 방송" 

https://youtu.be/5BtFxSak4X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