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박사가 알려주는 황금 보검과 세계 3대 정복자 아틸라 / 황금 보검이 알려주는 신라와 훈족 / 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 I-III (Attila the Hun)

2023. 1. 6. 21:00역사의 연구/고대역사

이종호 박사가 알려주는 황금 보검과 세계 3대 정복자 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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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보검과 세계 3대 정복자 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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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보검이 알려주는 신라와 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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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보검이 알려주는 신라와 훈족

Que sais 2020. 8. 31. 18:05

 

끄새-TV의 끄새에게 신라의 고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출토품 두 가지를 꼽으라면 금관과 황금보검(장식보검)을 든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국보도 아닌 황금보검(보물 635)을 이야기하곤 했다.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금관보다 황금보검을 선정한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어떤 이유로 황금보검을 제일 처음으로 꼽느냐고 다시금 질문한다. 이에 대한 답을 신라에 조예가 깊은 요시미츠 츠네오의 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보로워에(현 카자흐스탄)의 귀금속 상감검의 장식은 얼핏 보면 신라의 황금보검 장식과 전혀 무관해 보일 정도로 디자인이 다르다. 그러나 제작 기법은 모두 공통적으로 복스 세팅법에 의한 귀금속 상감법이고 상감한 귀금속 주위에 금알갱이를 장식하는 누금세공 기법도 동일하다. (중략) 그러나 신라의 황금보검에 비하면 보로워에 귀금속 상감검의 디자인이나 제작 기술은 훨씬 뒤떨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황금보검은 현존하는 보검 중에서 세계 최고의 디자인과 제작 기술을 갖고 만들었다는 뜻이다. 황금보검은 전체 길이 36센티미터, 최대 폭 9.3센티미터이다. 전체 모양은 칼자루 끝장식이 반타원형이고, 칼자루의 폭은 반타원형 장식의 지름보다 좁다. 칼집 입구는 역사다리꼴이며, 그 옆은 허리띠에 차도록 만든 고리를 붙였기 때문에 산모양이다. 칼집은 끝이 넓으며, 칼집 위에 반원형 장식 금구로 구성된 단검으로 표면에 석류석 등의 귀금속과 누금세공 투각으로 전체가 장식되었다. 칼몸은 철제이지만 의례용 패도로 만들어 진 것으로 뒤쪽에는 장식이 없다. 황금보검의 표면에 보이는 나선무늬를 이루는 각 부분의 전체 바깥둘레에 금알갱이를 장식하고 메달의 틀과 공백 부분에 금알갱이를 장식했는데 이들은 모두 그리스로마 기법이다. 그런데 5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이 출토된 곳은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으로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태극무늬의 의미를 잘 아는 장인이 제작>

신라고분에서 어김없이 금귀걸이, 목걸이, 팔찌나 반지 등 금은제품들이 출토된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등의 디자인, 기법, 기술은 로마 세계에서 비롯된 누금세공 기법이다. 금사슬 기술도 특징적이다. 사슬은 원래 그리스시대에 발달하여 로마 시대에 장신구용으로 대유행했는데 사슬은 금은제의 가는 선을 어떻게 꼬았느냐에 따라 여러 방식이 있다. 즉 사슬을 만들려면 금은제 가는 선과 그것을 꼬아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되어야 하는데 신라에서 출토된 두 갈래로부터 여섯 갈래 사슬을 이용한 장신구는 그것을 만드는 기술이 신라에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가는 선이나 금알갱이를 만드는 것은 매우 특수한 기술로서 단지 아이디어 차원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는 줄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주조된 금이나 은막대를 두 점의 석판이나 브론즈판 사이에 기워 압력을 가해 굴리면서 조금씩 가늘게 늘인다. 일정한 굵기가 되면 끝을 가늘게 만들어 마노나 브론즈 덩어리의 구멍에 집어넣어 천천히 당긴다.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하여 가는 금줄이나 은줄을 만든다.

금알갱이를 만드는 방법을 금속공예명장인 경주민속공예촌 삼선방 김진배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는 금은줄을 지름과 비슷한 길이로 잘라, 탄가루에 늘어놓고 다시 그 위에 탄가루를 덮는다. 탄가루 위에 다시 잘라낸 금은조각을 늘어놓고 그 위에 또 탄가루를 뿌린다. 이런 공정을 몇 번 반복하고 이것을 가열하여 금은줄 조각이 융해될 때까지 열을 가한다. 융해된 금조각은 표면장력에 의해 작은 알갱이가 된다. 이것을 세정하여 다시 석판 등을 겹친 사이에 끼우고 연마 처리해 금알갱이를 완성한다.

 

마지막으로 땜질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녹청(동록)을 갈아서 풀과 물로 반죽 상태로 만들어 금알갱이나 가는 줄에 묻혀 기판 위에 접착한다. 섭씨 100도에서 녹청은 산화동이 되고, 섭씨 600도에서 풀은 숯이 된다. 다시 섭씨 850도까지 높이면 숯은 산화동의 산소를 빼앗아 순동 피막을 기판 위에 남기고 탄산가스가 된다. 그대로 가열하여 섭씨 850도에 달하면 피막이 된 동은 기판의 금, 금줄 등과 반응하여 합금되면서 땜질이 완성된다. 한마디로 금의 마술사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기술이다.

황금보검 중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세 개의 파무늬 즉 태극무늬이다. 일반적으로 태극무늬 안에는 다른 무늬를 새겨 넣지 않는다. 그런데 황금보검에 들어 있는 세 갈래의 태극무늬 안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들어있다. 특히 각 공간에 매우 균형 있게 능숙한 방법으로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제작한 사람은 태극무늬를 매우 자주 사용하였고 이 칼에 의도적으로 삽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태극무늬 안에 꽃봉오리와 세 잎 무늬, 때로는 사람의 머리나 동물머리 형상을 박아 넣는 것은 동유럽 트라키아(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구권) 지역에서 살던 켈트인들이 즐겨 사용한 무늬로 일반적으로 켈트파라고 한다. 이들이 잉글랜드의 북부 즉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이주하여 켈트인이 된다.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Brave Hart)는 바로 스코틀랜드의 켈트와 잉글랜드와의 알력을 주제로 삼은 것으로 아직도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이라는 것은 거부한다고 한다. 근간 스코틀랜드가 영국에서 분리될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다.

 

요시미츠 츠네오 교수는 그리스 소용돌이무늬와 로만로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황금보검을 제작한 금세공 기술자는 로마문화에 정통한 사람이며 황금보검을 주문한 사람은 켈트파(태극무늬)를 잘 알고 있는 트라키아라는 광대한 지역에 근거지를 가진 어떤 지배자 중에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트라키아에서 신라까지의 거리는 7,0008,000여 킬로미터로 오늘날의 교통수단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거리감각으로도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거리다. 그러면 트라키아 어떤 지배자가 최고의 의례용으로 만든 황금보검을 아시아의 최동단이라고 볼 수 있는 신라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가 어떻게 갖고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보물이 동유럽에서 신라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트라키아 지배자의 사절이 직접 신라로 가져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사절이 트라키아 국에 가서 왕을 알현한 후 하사받은 보물들을 갖고 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당시의 상인들이 신라로 황금보검을 갖고 왔을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보물 중에 보물을 상인을 통해서 트라키아에서 신라로 전달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 제국의 유물들은 하나같이 신라 유적지에서만 출토되었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백제, 가야, 신라로 나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신라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은 이들 유물들의 목적지가 오직 신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금보검이 계림로에서 발견되려면>

근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매우 흥미있는 자료를 발표했다. 경주에서 발견된 치아분석 등 최근 과학적 성과를 반영한 결과이다.

 

피장자는 남성 2명으로 이들이 묻힌 시기는 6세기 초임을 밝혔다. 신장은 150160센티미터로 추정되고 두 남성이 함께 묻히게 된 이유로는 전쟁이나 전염병에 의한 사망이다. 황금보검은 유럽 고고학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물로 제작 시기는 5세기경이다. 또한 황금보검은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유행한 단검 형태로 동로마제국 및 5세기 유럽 각지의 이민족 사이에 퍼져 나가던 금세공기술(클로아조네(cloisonné) 기법)이 결합한 것으로 중앙아시아의 집단이 동유럽 즉 트라키아의 금세공 기술자에게 주문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발표에 의하면 5세기경 중앙아시아의 누군가 트라키아지방에 제작을 의뢰하였고 이것이 어떤 경위로든 신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신라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로마의 유물들을 감안하면 트라키아 지역에 있던 누군가가 직접 중앙아시아식의 단검을 제작 의뢰했고 이것이 8,0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신라로 보내졌다고 추정하는 것도 무리한 일이 아니다.

학자들이 황금보검의 발견으로 놀라지만 이러한 보물이 동유럽에서 신라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하나는 트라키아 지배자의 사절이 직접 신라로 가져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사절이 트라키아에 가서 지배자를 알현한 후 하사받은 보물들을 갖고 오는 것이다. 상인이 구입하여 경주의 지배자에게 판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황금보검 정도의 세계 최상급 보검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정도의 제품이라면 최고의 의례적인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황금보검이 제작된 5세기는 훈족이 트라키아 지역에서 명실상부한 로마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훈족의 지배민족이 신라와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로마제국과 혈투를 벌리던 훈족의 지배자가 신라 왕가에 선물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점은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의 다음과 같은 글로도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아틸라의 지배권이 어디까지 미쳤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볼가 강변까지 확보했다.

 훈족의 왕은 전사(戰士)로서 뿐만 아니라 마술사로서도 두렵게 여겨졌다.

 무서운 유연(柔然)도 아틸라가 공격해 격파했다.

 중국의 제국과 대등하게 동맹 관계를 맺고자 사절을 파견했다.

 

로마를 제패했다고 생각한 아틸라가 중국과 동맹관계를 맺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다는 사실은 아틸라가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한 결과 실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훈족은 중국과의 혈투에 패배하여 4번에 걸쳐 서천(西遷)한 이후 인근을 제압하면서 흥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훈족이 중국을 생각할 때 남다른 콤플렉스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틸라가 유럽에 들어와 로마를 제압한 후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중국과 새로운 위치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든가 그렇지 않다면 중국과 소통해야 할 남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대사건을 기획하려면 상당한 준비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고 생각한 훈족의 아틸라가 공식적으로 사절단을 보낼 정도라면 소위 사전 정지 작업을 위해 여러 번의 사신을 보냈음직하다. 이때마다 적정 규모의 선물 즉 재보를 보냈을 것이며 보다 큰 규모의 공식 사절을 보낼 때는 엄청난 재보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중국이라는 제국을 상대로 하려면 더욱 많은 재보를 보냈음이 틀림없다.

 

당시 중국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를 이어 남북조시대가 등장하는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로마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거리다. 신라에서 엄청나게 많은 로마 유물들이 발견되는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중국에서 신라보다 많은 로마유물이 발견되는 것이 정상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외국 사신의 입출입을 철저하게 기록하는데 이 당시 로마로부터의 사신이 도착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무리 당대가 매우 혼란된 시기라고는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로마의 사신이 도착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실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이 아틸라가 사신을 중국으로 보냈다고 적었지만 실제로는 신라일 가능성이 보다 높다는 뜻이다. 흉노가 중국과의 혈투 와중에서 훈족과 가야신라로 갈라졌는데 추후 자신들의 분파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연계를 맺으려고 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볼 수 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황금보검의 삼태극 문양이다. 학자들은 신라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에 삼태극 문양이 있다는 것은 이들 물건의 최종 목적지가 신라이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사절단이 최상의 예물을 선물할 때 상대국에 알맞는 디자인이나 문양을 넣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로마유리 중에서도 최상급 제품이 신라에서 다량으로 발견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러 가지 개연성을 종합하면 신라의 여러 적석목곽분에서 로마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되는 것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당대에 훈족의 여러 사절단이 신라의 알려지지 않은 집권자에게 선물했다고 하더라도 집권자가 많은 선물을 자신들의 식솔이나 지배층에게 분배해주었을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이들 유물들이 수많은 적석목곽분에서 산재되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석목곽분은 당대의 집권층이 아니면 건설될 수 있는 성질의 무덤이 아니다.

현재 최고의 보물로 간주하는 황금보검이 비교적 규모가 작은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황금보검을 반드시 왕이 갖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신라에 유입된 황금보검이 한 개가 아닐 가능성도 있으며 황금보검만이 보물로 취급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당대에 로마에서 로마유리의 가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는데 그중에서도 신라에서 발견되는 로마유리는 최상의 보물급이라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신라에서도 유리를 최고의 귀중품으로 여겼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사실 이 부분은 타임머신을 타고 현장을 확인하지 않는 한 가상의 시나리오일 수 있다. 신라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아틸라라는 걸출한 위인의 작품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대의 패자인 훈족의 지배자 집단이 어떤 방법으로든 신라와 연계하려고 생각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자신들과 친연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지구 어디엔가 살고 있으며 그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처럼 환상적인 아이디어는 없다. 현재도 자신의 조상이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서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장면을 자주 보곤한다. 한무제의 릉 옆에 배장된 김일제의 묘 앞에서 전세계에 산재한 김씨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로마 유물이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원래 인간이 사용하는 문물은 이동이 기본이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혈투를 벌이고 있었으므로 특정한 용도의 유용한 물건들이나 아이디어가 있었다면 삼국에 고루 퍼져야함이 옳다. 불교가 고구려에 처음 도입되었지만 이후 삼국의 정신세계로 자리 잡았음도 한 예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발견되는 로마 유물들이 고구려백제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이들 유물들이 무역품으로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역품이라면 상인들이 오로지 신라에만 팔겠는가? 한마디로 로마유물은 오로지 로마에서 신라로의 일방통행이었고 이 일방통행이 추후에도 철저하게 지켜졌다는 것을 뜻한다.

훈족과 신라의 연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훈족이 신라에 사절단을 보냈든 신라 사절단이 훈족에게로 갔든 한국에서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의 역사로 생각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이들 기록이 단 한 줄이라도 있어야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 역시 정답을 구하기는 어려운 상태임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자체가 삼국에 대한 내용을 기본으로 했으므로 훈족의 사신들이 설사 왔더라도 서역에 대한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삽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라와 서역과의 교역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이 여러 정황상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이 서역인이라는 것을 가정하여 서역과의 교류가 있다는 것을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를 작성할 때 사전에 수많은 자료를 확보한 후 이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확인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에드워드 기번이 아틸라가 동양으로 사절단을 보냈다고 기록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에 대한 보다 명확한 자료들이 언젠가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란 단어는 20세기부터 일본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된다. 특히 미국의 백인 이주 후손인 크리올료(creole)들이 유럽 본토인과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발명된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란 말이 정의되면서 유럽과 제삼세계로 퍼져나갔다는 분석이다.

이와 같은 민족에 대한 근대적 해석은 국내의 일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져 탈()민족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즉 민족이란 과거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발전과 함께 만들어진 근대적 가치이자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계가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한 현재 케케묵은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대답하기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 털어 20세기 최대 사건 중의 하나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공산정권인 들어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련 즉 소비에트 정권의 등장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된 공산주의자들이 봉기하여 니콜라이 2세의 전제군주 체제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은 그 후 70여 년간 서방 자본주의 진영과 각축하며 세계를 양분한 공산진영의 영주로 군림했다.

한데 1990년에 이르러 소련체제가 무너지면서 많은 독립 국가들이 탄생했는데 이들 독립국가의 기반이 바로 민족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각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민족의 개념을 억압하고 말살하려는 전체주의 소련체제 하에서도 민족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국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복기대 박사는 지적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유태인들은 2천 년 전에 나라를 잃고 조국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져 떠돌면서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결코 유태민족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잊지 않고 견뎌냈다. 바로 이런 기질과 근성 때문에 불과 몇 백만 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옛 땅으로 돌아가 이스라엘이라는 새 나라를 세웠고 10억 명이 넘는 아랍세계와 당당히 맞서 싸우면서 버티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이란 여전히 어디에서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한민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공통분모와 응집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 있을지 아무도 정확히 상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중국 주변의 동아시아사를 보더라고 수많은 민족들이 부침과 흥망을 거듭했다. 이런 속에서 대부분의 민족들은 전쟁과 각축 끝에 중국 한족에 동화되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민족도 있다. 만주족도 중국 본토를 장악하고 청나라란 대 제국을 건설했었지만 결국 중국에 매몰되어 그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한민족도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무수한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를 근거로 비록 제2차 세계대전 후 국토의 양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정신과 일체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 민족이 중국과 일본등 주변국과의 무수한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항쟁할 수 있었던 것도 한민족이란 정체성과 자부심 및 응집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조선에서는 민족이란 단어 대신에 민족을 뜻하는 단어로 아족류(我族類)’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때의 아족류는 우리 민족 또는 우리 겨레의 뜻을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용되는 아족류는 일본인이나 여진인 등 이민족과 구분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일가친척을 뜻하는 말은 ()’ 또는 족인(族人)’으로 표기했다.

과거사를 정확히 알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올라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대의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현재까지의 사료와 유물들을 참조하여 한민족에 관련된 연관성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끄새는 한민족의 뿌리 찾기에서 가야신라의 원류는 북방기마민족이며 이들 중 일부가 서천한 흉노 중에서 375년에 서유럽을 공격했던 훈족임을 밝혔다. 또한 고구려신라백제가야의 원류도 흉노와 다름 아님을 밝혔다.

원래 흉노는 선우라는 수장 중의 수장이 이끌면서 중국인과 당당하게 대항하던 제국이다. 그러나 흉노라는 국가가 워낙 넓은 영토를 확보하면서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아시아 동북방에 위치한 고구려는 흉노 속에서 점점 세력을 키워나간 후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한다.

 

흉노가 여러 국가 또는 부족으로 갈라지자 고구려는 이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과 당당히 맛서 싸우거나 또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이러한 고구려의 위상은 중국의 삼국시대 위··오의 주역인 오나라의 천자 손권이 고구려의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인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점은 거의 없고, 중국 등으로부터 수혜만 받아왔다는 스몰 콤플렉스(Small complex)’를 가지고 있다.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아틸라가 우리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만큼 더욱 그의 리더십은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45세기경,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유린했으며,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세아 동북방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물론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및 신라(진한)와 더 가까운 관계로 추정되지만, 이들이 모두 한민족이다. 아틸라가 한민족과 친연성을 갖는 선조라고 간주할 때 우리는 45세기경 각각 서양과 동양에서 패자로 군림한 당당한 두 선조,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 로마 문화 왕국, 신라, 요시미츠 츠네오,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2

한국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예담, 2007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 이종호, 백산자료원, 2005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Edward Gibbon, Penguin Classics, 1994

Attila le Fleau de Dieu, Maurice Bouvier-Ajam, Tallandier, 1982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기번, 이종호 편역, 지만지, 2011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 2003

기마 흉노국가 신라연구, 조갑제, 월간조선, 2004 3월호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70, 2004

흉노의 휴저왕 태자 김일제(김일)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88

부여족과 불가리아, 신용하, 동아일보, 2007.5.19

 

 

 

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 I (Attila the 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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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I(Attila The Hun)

Que sais 2020. 8. 31. 16:31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현재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는 광대한 지역을 한민족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뛰어다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광개토대왕(375413) 재위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 동쪽으로는 옥저와 예,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에 이르렀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413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전부 되찾은 것으로 추정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대목이다. 그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 멸망이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던가 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마자 그의 아들들 간에 권력싸움이 일어나 국가를 당나라에 바쳤다는데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곧바로 당나라와 결별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는 점을 크게 인정하더라도 아쉬움이 배어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욱이 신라 통일 영토의 75퍼센트를 잃어 버렸다는 데는 말을 잃는다.

신라 진흥왕 시대인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영토 41.1만 제곱킬로미터, 백제 2.9만 제곱킬로미터, 신라 8만 제곱킬로미터로 52만 제곱킬로미터. 현재 남북한의 면적 22만 제곱킬로미터이므로 한반도 이북의 만주 땅에만 3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신라가 통일한 후인 8세기 중엽 신라의 영토 13.4만 제곱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신라가 가장 강성했던 진흥왕 때의 면적이 8만 제곱킬로미터였으므로 백제의 면적 2.9제곱킬로미터를 합병하고서도 통합된 면적이 13.4만 제곱킬로미터였다면 신라가 통일 후에 실제로 북방 영토에서 늘어난 면적은 2.5만 제곱킬로미터가 채 되지 못한다는 계산이다. 요컨대 삼국 시대의 총면적 52만 제곱킬로미터 신라 통일 이후에는 13.4만 제곱킬로미터로 줄어들었으므로 삼국통일이라는 명분으로 잃어버린 땅은 무려 38.6만 제곱킬로미터가 된다.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멸망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는가는 <EBS공사창립5주년특집 다큐멘터리> 설문조사의 역사학자 100인이 말하는 우리 역사의 희노애락의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설문에서는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가장 분노했던 순간을 적시했는데 고구려의 멸망 가장 슬펐던 순간  세 번째로 꼽혔다. 한국인들은 가장 슬펐던 순간 첫 번째 경술국치를 꼽았고 두 번째 한국전쟁을 선정했지만 이 사건들은 근대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5천 년 역사에서 고구려멸망을 세 번째로 꼽았다는 것은 고구려의 멸망이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역사의 순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참고적으로 가장 기뻤던 순간 815광복,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610민주항쟁이며 가장 분노했던 순간 518광주항쟁, 삼전도 치욕, 동학농민군 패배이다.

 

함석헌 선생 신라는 너무 값비싼 값을 주고 통일을 샀으나 그 통일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통일이었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는 한탄이 더욱 가슴에 닿는다. 그 기저에 깔린 아쉬움은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대국이자 정복국가였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동양에서 치열한 정복사업을 벌일 때 서양에서도 기마민족 훈(Hun)이 서양문명사를 새로 쓰게 하는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유럽의 중세 서두는 강력한 훈족이 서유럽의 본토를 침공하여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사건을 그 시발로 삼고 있다.

서기 375, 아시아의 기마 민족인 훈족(Huns)이 볼가 강을 건너와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동고트를 공격했고, 동고트 서고트를 공격했다. 이에 서고트는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에서 살게 된 지 100여년 후인 476, 서로마제국은 결국 게르만족의 수장(首長)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한다. 이후 게르만족이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등 여러 지역으로 갈라지면서 유럽에는 새 국경이 그어졌다. 이때 성립된 국경은 대부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

최근 서유럽에서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로마제국을 풍전등화의 운명 속으로 몰아넣은 주인공인 훈족 한민족의 일파임이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적 주장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도 많지만, “무슨 얼토당토한 소리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훈족이란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생소할 뿐 더러,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서기 4~5세기경 한반도에 살고 있던 한민족이 어떻게 유럽을 공격할 수 있었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훈족 한민족의 일파라는 역사적 주장이 곧 한민족이 유럽을 직접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훈족 흉노(匈奴, 북방 기마민족을 통칭한다)의 한 분파로,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약 600년간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과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했다. 이때 흉노에 속해있던 한민족의 원류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西遷)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한 부류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까지 진출하여(東遷) 가야?신라 즉 현재의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 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골 반점은 꼬리뼈 높이 엉덩이에 나타나는 색소 변색으로 유전학적으로 몽골계통의 민족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이다. 몽골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훈족은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 예맥각궁은 만드는 데만 5,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훈족이 예맥각궁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 프레스코화가 말해준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용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관습적인 공통점도 발견되고 있다. 훈족의 골상이 편두(偏頭, cranial deformation 일명 납작 머리)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의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었고, 머리 둘레에 고랑 같은 주름이 팼으며,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편두라고 알아냈다. 그런데 가야국이 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법흥왕  신라왕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진한(辰韓) 사람들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인과는 구별되는. 동이(東夷) 사이에 매우 오래 동안 성행했던 풍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 훈족에게선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족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 지역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유명한 대?소형 동복(cup cauldrons)이 발견된다. 기마로 생업을 유지하던 기마민족에게는 자신들만의 특성과 생존법, 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말에 갖고 다니는 동복(?)이다. 기원전 8?7세기 무렵에 출현하여 기원후 5?6세기 무렵에 소멸되는데 유목민족의 특성상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원래 동복은 유목민들의 상징적인 유물로도 간주되며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지는 것이다.

동복의 원래 용도는 정화의식(Purification rite)을 행할 때 고기를 삶는데 쓰는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용기로 무리 중에서 족장으로 추대되면 동복을 받아 항상 말 안장에 얹어 놓고 다닌다. 일반적으로 30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항아리처럼 생겼는데 대형 동복의 경우 높이는 50 60센티미터이고 무게는 50킬로그램이 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동복이 정화의식용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 수군이 방통 등의 연환계에 의해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 패배하자 조조가 화용도(華容道)로 달아나는데 손·유 연합군의 추격이 매섭다. 유비 측에서는 관우, 장비, 조자룡 등이 추격하고 손권 측에서는 육손 등이 합세하여 조조를 추격하므로 절대 절명의 위기가 찾아오는데 도망가는데 바빠 식량을 챙길 수도 없었다.

굶고서는 도망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결국 조조는 인근의 촌락으로 몰려가 양식을 겁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장병들에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추상같이 호령을 내리던 조조이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삼국지에서 적혀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위기에 이전(李典, ?215 이후) 허저(焦國, 2세기 말233 이전)가 나타나 조조를 구하는데 이때 군사들의 말안장에 얹어 놓은 동복(?, 청동솥)으로 촌락에서 훔쳐 온 쌀로 밥을 짓고 말고기로 배고픔을 채운다. 삼국지에서 이전(李典)과 허저(許楮)의 군대에 동복이 있다는 것은 이들 군대가 전형적인 북방기마민족인 추장 급이 편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이전과 허저는 북방기마민족의 추장급으로 조조의 휘하에서 활약한 것이다.

 

동복 내몽골의 오르도스 지방에서 다수 발굴되었고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로 추정되는 몽골의 노인 울라 고분군(Noin Ula, 고분 212기가 발견된 노인 울라(몽골어로 왕후(王侯)의 산’)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북방 약 100킬로미터 지역에 있다)를 비롯한 북몽골 지대의 도르닉나르스, 알타이 산맥의 데레츠고에, 볼가 강 유역의 오도가와 그 지류인 가마 강 유역의 페룸, 서우랄의 보로쿠타 지방, 남러시아 돈 강 유역의 노보체르카스크, 헝가리, 프랑스, 독일에서도 발견되었고 중국의 북부 초원지대에서 발견된다. 헝가리, 프랑스, 독일에서 동복이 발견되는 것은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이 이들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두 가지 형태로 발견된다. 첫째는 동으로 된 용기 형태이며 둘째는 금관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간주되는 국보 제91 기마인물상과 같은 토기 형태이다. 기마인물상 토기는 신라의 경주 근교인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되었는데 높이 23.5센티미터, 길이 21.5센티미터이다. 기마상의 주인과 하인이 말을 타고 있는데 이들의 뒤 쪽에 동복을 갖고 있다. 말 엉덩이 위에 솥처럼 생긴 것이 바로 동복이다. 게다가 기마인물상의 주인공도 편두이다. 또한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한민족의 금관 등 머리 장식 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형상(出字形 장식) 녹각형상(鹿角形 장식)이 많다. 이는 북방에게도 나타나는 풍습으로 북방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정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존 카터 코벨은 기마인물상 토기에 대해 매우 주목할 만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녀는 상류층 사람들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로 술잔과 함께 말 모양 토기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말 앞가슴에 나 있는 주둥이의 위치. 말 잔등에 있는 배구로 액체를 부어 넣은 후 말 앞가슴의 주둥이로 액체가 흘러나오게 된다. 말의 꼬리가 부자연스런 각도로 뻗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이 손잡이로 조정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코벨은 시베리아의 무속에서 말을 제물로 바쳐 죽인 뒤 의례의 하나로 그 피를 받아 마시는 과정이 있다고 적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의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목곽 위에 얹어놓은 형태가 발견되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입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들을 숭배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참고적으로 많은 한국 사람들이 흉노라는 말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 오랑캐를 뜻하며 ()자는 대체로 한자에서 비어(卑語) 이나 노예의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자를 첨가해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더욱 연상되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그러므로 주채혁 박사는 흉노에서 ()를 떼어내고 선비(鮮卑)에서도 ()를 떼어내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는 (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Hun, )으로 불렀음을 볼 때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흉노라는 말이 자신을 비하하여 부르는 노예와 같은 오랑캐?라는 말이라면 중국보다 3배나 더 큰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던 흉노가 이를 용납했을 리는 없다.

 

이는 기원전 3세기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가 지휘하는 흉노가 동호를 격파하고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되어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을 때 그 영토는 중국의 거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이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는 한반도 북부(예맥조선), 북으로는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 이르렀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 ()’으로 표기되는 집단들이 상당수 나타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때의 ()’ ()’, ‘()’, ‘()’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土地)를 의미한다고 지병목 박사는 적었다. 고구려에서의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 흉노(匈奴)와 마찬가지로 노()자가 들어있는데,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에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의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의 성장과 더불어 정복?융합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정수일 박사는 원대(元代)의 극 공작담(孔雀膽)의 대사 중에 나오는 ()’ 아노(阿奴)’의 어의를 볼 때 남편을 지칭하는 ()’이나 낭자(郎子: 그대, 그이, 낭군)’의 뜻이거나 자를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인식했다. 흉노의 어감과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선입감을 이제 버려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 II (Attila the 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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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 II(Attila The Hun)

Que sais 2020. 8. 31. 16:32

학자들은 고대 한민족의 원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훈족과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인으로 갈라서게 됐을까 추적했다. 이는 진시황제 때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흥망성쇠와 연계된다.

흉노 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기간에 걸쳐 혈투를 벌였다.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하였지만 곧바로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나라를 세운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와 같이 으르렁 거리면서 지냈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로 칭하고 노관 ()으로 봉하는데 노관이 201,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태어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흉노를 치기 위해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 유방 백등산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등 수모를 당하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이 때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한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한나라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실현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는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해 갔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의 액수도 한과 흉노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한의 조공 액은 매년 증가되었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하튼 ()은 유방 이후 무제가 집권하기 전까지 60여 년 간 공물과 공주(본래는 황녀를 가리키지만 종실 일족의 딸이나 후궁을 황녀라 속였다)를 보내고 평화를 유지하였다. 중국학자들이야 이런 표현에 반대하겠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아 맞는 말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57년에 흉노는 동과 서로 양분되어 서로 전쟁을 벌인다. 서흉노의 선우(‘탱리고도선우(?孤塗單于)의 약어로 탱리(?)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 아들이란 뜻의 흉노의 왕을 뜻한다. 선우의 공식 명칭은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정해주신 흉노 대선우이다) 질지(?)가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 너머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도착한다. 이것이 흉노의 1차 서천(西遷)이다. 질지는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웠다. 서유럽은 이때를 흉노 제국 출현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중국에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세가 불리함을 느낀 남흉노는 48년 고비사막 이남의 8개 집단을 이끌고 광무제(기원전 6기원후 57)를 찾아가 투항했다. 광무제는 투항한 남흉노에게 아예 내몽골 영토를 주어 투항하지 않은 북흉노를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73년에 이르러 한나라는 남흉노와 연합해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패배의 고배를 든 북흉노는 북쪽 막북(漠北)으로 이동하는데, 이것이 흉노의 2차 서천이다. 북흉노는 서역제국을 장악한 후 그 세력을 규합하면서 한나라와의 대결을 꾀한다.

 

그러나 한나라는 화제(和帝, 89105) 원년인 89년에도 남흉노를 규합하여 북흉노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치명상을 입고 사분오열된 북흉노는 대부분 동호(東胡)에서 분리된 선비(鮮卑)에게 예속되었다. 그러나 일부 흉노는 천산산맥 북쪽으로 계속 서진하여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발하시호와 아랄해 사이의 강거(康居) 에 이르렀다. 이것이 흉노의 3차 서천이다.

흉노와 훈족을 연결시키는 또 다른 연결 고리는 한나라 왕조가 붕괴될 무렵에 등장하는 남흉노이다. 304년 당시 산서의 태원에 자리 잡고 있던 유연(劉淵 ?310)은 진()나라 혜제에 의해 남흉노의 왕으로 책봉된다. 그러나 유연은 과거 선조 중에 한나라의 공주가 있었음을 근거로 자신이 한나라의 후예라고 내세우며 스스로 황제로 칭했다. 그는 308년 태원에서 北漢(前趙)을 세운다. 318년 석륵(石勒 274333) 前趙를 폐하고 後趙로 알려진 새로운 흉노국가를 세웠고 349 석민(石閔) 後趙의 정권을 잡았다. 석민은 350년 흉노에게 원한이 많은 한인(漢人)들을 부추겨 대대적인 흉노 토벌에 나서도록 한 뒤 무려 20여만의 흉노가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흉노로서 이것이 결정적인 패배였다. 중국에 동화된 흉노와 유목생활을 하던 흉노가 연합했음에도 패배하자, 살아남은 흉노들은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흉노의 4차 서천으로, 이들은 이미 13차에 걸쳐 서천했던 흉노와 합류(또는 압박)한다. 설상가상으로 370년경부터 혹독한 한파가 엄습하자, 흉노는 보다 서쪽으로의 이동을 단행, 375년에 서유럽을 공격하기에 이르며 이것이 게르만민족 대 이동을 촉발하는 단초가 된다.

 

한편 한반도 내에서 훈족과의 친연성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가야와 신라지방인데, 중국과의 전쟁 와중에 훈족의 지배집단 중 일부가 동천(東遷)하여 한반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기서 훈족의 지배집단이란 유목민의 수령(首領)이 속한 부족을 말한다.

학자들은 흉노?동호?선비?오환 등 북방 기마민족들의 흥망이 가야국의 건립시기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늦어도 13세기까지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3세기 중엽 이후 마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로 통합되었고 변한은 3세기 이후 가야라는 명칭을 갖게 된다. 이는 3세기말4세기 초에 변한이 가야사회로 전환됐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가야란 나라가 신라나 백제와 달리 내부에 다양한 여러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가야의 건립시기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 무려 5세기의 차이를 보이는 등 논란이 많다.

학자들은 경상도 가야고분에서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 자체가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특히 금관가야는 흉노가 직접 한반도에 들어와 세웠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흉노 속에 포함됐던 한민족의 일파가 서천하여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다른 일파가 동천하여 가야 등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결혼 조건으로 로마의 절반 요구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대국을 건설한 역사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징기스칸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아틸라(Attila, 395453)를 꼽는다.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보다 20년이 늦은,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한지 20년이 지난 395년에 문주크 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틸라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쿠스나 요르다네스에 의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로마 훈족에 공물을 주어 화친(和親)하면서 게르만족을 견제했다. 이에 따라 당시의 외교 관례대로 아틸라는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자랐다.

 

434년 아버지의 후임자였던 삼촌 루가가 사망하자. 훈족의 전통에 따라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새 왕으로서 자신들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기회를 노리던 이들은, 동로마가 훈족에게 보내야 할 공물의 납기를 번번이 어기자 435 동로마로 진격했다. 이에 동로마는 공물을 두 배로 올리기로 약속하고 아틸라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어 아틸라는 서로마로부터는 서고트인들에 대한 경찰권을 넘겨받는다. 이로서 훈족은 로마제국을 제치고 사실상 서양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443년 블레다가 사망하자 아틸라는 훈족의 단일 지도자가 됐다. 아틸라가 지배한 훈제국의 통치권은 남으로는 발칸 반도, 북으로는 발트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그리고 서로는 프랑스 땅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에 미쳤다. 치하의 종족만 해도 45개 종족에 달했다.

이때 아틸라 국제적 전쟁에 뛰어들게 한 여인이 등장했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가 바로 그 여인. 호노리아는 450년 동생을 황제자리에서 밀어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동로마의 수도원으로 추방됐다. 그러자 호노리아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아틸라에게 자신의 금반지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반지를 보내는 것은 구혼을 뜻했다. 아틸라는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로마제국의 절반을 결혼 지참금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는 아틸라의 요청을 거절하고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

서로마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 451,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메츠, 랭스, 오를레앙 등에 이르는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서로마 중심지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이자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 훈족과 적대관계에 있는 게르만족들을 규합해 대항했다.

451 6 20, 프랑스의 트루와 시()에선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로 불리는 살롱 대전투가 벌어졌다. 각각 2030여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 참전해 2030만 명의 전사자를 낳은 대규모 전투였다. 그러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아틸라는 살롱 대전투 후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 452년 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가 표적이 됐다. 아틸라는 아퀼레이아 점령을 시작으로 파두, 베로네, 피비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당시 훈족의 공격을 피해 해안지역으로 피난한 로마인들이 베니에티암(Veni etiam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고 외쳤는데, 베네치아란 지명이 바로 이 말에서 유래했다.

 

허망한 멸망, 유럽의 미움

아틸라와 훈족의 종말은 너무나도 허망했다. 453, 아틸라는 일디코(혹은 힐디코)라 불리는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게르만족의 유명한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는 크림힐트란 이름으로 불리는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잠든 아틸라를 살해한 것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틸라가 결혼식 날 과음으로 질식했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그의 아들인 덴기지크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469년 동로마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에 패배한 훈족의 대다수 카스피해 북부로 귀향했다. 그러나 일부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쪽과 크림 지역에 정착했다. 또 몇몇 부족들은 프랑스와 스위스 지역에 자리잡았다. 이때 훈족의 일부가 발라니아에 잔류했다가 후일 마자르인들과 합쳐 헝가리 민족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트란실바니아(현 루마니아)에 있는 세켈리족은 자신들이 훈족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드라큘라 백작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루마니아에서는 아틸라를 강력한 힘을 가진 드라큘라의 원조로 여기고 있다.

아틸라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세계 역사상 몇 명 되지 않는 지배자 중의 한 명이다. 아이들은 그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강력함과 정열, 그리고 거대한 힘에 매력을 느낀다. 아틸라가 파괴와 약탈만 일삼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비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아틸라는 교묘한 협상을 통해 상대로부터 수많은 재보를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도 보였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인 로마를 상대로 말안장에 앉은 채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으며, 호노리아와의 결혼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절반을 달라는 대담성도 보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동시에 유럽인들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유럽의 소설, 연극, 오페라 등에서 잔인한 폭군으로 나오기 일쑤인 것. 단테 신곡』〈지옥편 12에서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아틸라를 묘사했다.

1968 1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함선 프에블로호 나포되었을 때 아틸라는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북한에 나포된 프에블로호 선장 리오드 버쳐는 북한측에 아틸라 이래 가장 현명치 못한 행동이라며 사죄했다. 이같이 아틸라가 서양인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시아인인 그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심장부를 유린하는 등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아틸라가 단독으로 훈족을 다스린 기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아틸라는 동시대인들에게 실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틸라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틸라가 다른 정복자들과 달리 당대뿐만 아니라 그의 사망 후에도 어떤 군사지휘자보다 부하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다양한 민족 출신의 부족들이 아틸라 휘하의 군대에 들어가서 그에게 진정으로 충성을 바쳤다고 믿는다. 특히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아틸라 군에서 이탈한 병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아에티우스도 서로마 제국의 최고 지도자요 타고난 지휘관으로 수많은 부족을 휘하에 거느렸지만 아에티우스 군에서는 수많은 병력이 이탈했다.

인류 사상 징기스칸,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훈제국을 건설했던 아틸라에 대한 가장 큰 미스터리는 당대의 문명 세계인 로마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음에도 직접 통치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로마의 근거지인 이탈리아 본토 공격에 성공했음에도 레오 1세와의 협상에서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고 판단하자마자 근거지인 판노니아로 돌아갔다. 훈족들은 그들이 점령하거나 공격한 지점이 판노니아에서 아무리 멀다하더라도 겨울을 지내기 위해 판노니아로 돌아간 후 다음해에 다시 출병했다.

아틸라는 정복한 지역에서 자신들이 직접 경작하기 위해 농민들을 쫓아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기까지 했다. 도시에서도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당연히 정복지역의 국가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한 예로 게피다이족은 훈족의 지배 아래서 밀과 보리, 과일 등 농산물을 재배했다.

 

물론 아틸라가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했으면서도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조직적인 행정체계조차 도입하지 않은 이유는 보다 완벽하게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다. 아틸라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로마 제국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을 것이 틀림없으며 그로 인해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실 당대의 로마는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최강의 국가로 설사 로마시를 점령했다고 해서 곧바로 통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틸라는 로마의 예봉을 꺾은 후 훈제국의 내부를 먼저 정비하려고 했다. 로마 정복은 훈제국을 완벽히 정비한 후 시도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틸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훈족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서유럽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아틸라가 현재까지도 유럽인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를 발휘하는 것은 짧은 기간 동안 임에도 불구하고 훈제국을 하나로 통일한 후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 원정을 통해 훈족을 세계 무대에 올려놓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틸라가 로마제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결할 수 있게 된 것은 아틸라 자신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윗대 선조들의 업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틸라처럼 서양인들과 맞서 동양인의 기개를 보여 준 사람은 별로 없다.

일반적으로 아시아인으로 유럽을 침공하는데 성공한 인물로는 다리우스 1, 아틸라, 징기스칸을 꼽는다. 그러나 다리우스 1는 유럽의 발칸반도에 침공했으나 정복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했으며,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는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의 군대를 격파한 후 유럽을 진공하기 직전에 원나라 태종(오고타이)이 사망하는 바람에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한다. 바투에게는 유럽에 대한 공격보다 오고타이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현재의 유럽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의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하여 사실상 로마제국을 제치고 유럽의 패자가 되었다. 아틸라가 훈족의 단독지배자가 된 기간도 단 8. 아틸라에 대한 전설이 계속 쌓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 III (Attila the 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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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정복자, 훈족의 아틸라 III(Attila The Hun)

Que sais 2020. 8. 31. 16:35

아틸라가 훈족임에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더십이란 집단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의 행동을 지시하는 책임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특권이라고 설명된다.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지고 각각의 구성원들에게 권위의 레벨을 정해 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다른 기술들을 개발하는 데 효과적인 기초가 된다.

아틸라가 야만적인 유목민들을 이끌고 훈족의 수장이 되었을 때 그가 리더로서 직면했던 일보다 더 큰 리더십에의 도전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그의 부하 중에서 아틸라의 세계 정복과 훈족의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를 공유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결정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들을 납득시키고 극복하는 것이 아틸라의 임무였다.

 

놀라운 것은 아틸라가 그에게 닥쳐온 모든 난관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는 점이다. 그는 로마에 인질로 있는 동안 로마를 철저히 연구하여 후일 로마와 대항할 때 누구보다도 더 잘 로마를 알고 있었다. 아에티우스와 살롱 전투에서 비록 승리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패배하지도 않았지만 곧바로 철수를 단행한 후 다음 해에 다시 로마를 공격할 정도는 미래관을 갖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수족처럼 부린 부하들의 대부분이 훈족이 아니라는 점이다. 451, 훈족의 영웅 아틸라가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와 살롱에서 대제국의 운명을 걸고 혈투를 벌렸을 때 헝가리의 본거지에서 발진한 장병 20여만 명 중 훈족만으로 구성된 군대는 고작 800010,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아틸라가 훈족 자체의 병력보다 수십 배가 많은 병력을 수시로 동원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훈족에 여러 민족들이 혼합되어 있었음에도 아틸라가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아틸라가 휘하에 있는 부족들을 다독거리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틸라는 부하들에게 전 부족이 함께 뭉쳐 일한다면 적과 전투하여 승리할 수 있고 재물은 당연히 따라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융화를 강조했다. 또한 닥치는 난관을 자신과 함께 헤쳐 나가면 항상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역설했고, 자신도 부하들과 함께 똑같이 생활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로마제국을 정복하여 세계를 호령하는 위치에 도달했음에도 자신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자리에 앉았다.

 

아틸라는 이질적인 부하들을 일사불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일단 복속하는 민족은 준 훈족으로 우대하여 차별하지 않았다. 훈족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동거 동락해 온 투르크 계열은 물론 서아시아 각지의 민족들이 훈족에 귀부(귀화)하면 거의 대부분을 준 훈족으로 우대하면서 이들 민족들을 친구 또는 동반자로 불렀다.

물론 이것만이 아틸라로 하여금 세계의 정복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가 로마의 정복자가 되면서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리더십을 살펴본다.

 

 지도자의 조건

 

1. 성공을 위해 지휘관이 반드시 똑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승리를 향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와 임무에 대한 신념, 불굴의 용기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

2. 위대한 지도자 치고 자기중심적이고 독단과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없다.

3. 현명한 지휘관들은 수정할 뿐 타협하지 않는다.

4. 한 지휘관이 큰 성공을 이루면 시기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5. 평상심을 잃은 지휘관은 이미 패배한 것이다.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다.

6. 현명한 지휘관은 나쁜 소식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부하들을 죽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쁜 소식을 전달하지 않은 부하를 죽인다.

7. 잘못된 질문을 하는 지휘관은 항상 잘못된 대답을 들을 수밖에 없다.

8. 현명한 지휘관은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을 절대 하지 않는다.

9. 강한 지휘관도 나약함을 갖고 있다. 현명한 지휘관의 의무 강함이 나약함을 이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10. 적절한 스트레스는 지휘관의 능력 개발에 핵심이며 도전이 없다면 자신의 잠재력도 깨닫지 못한다.

11. 지휘관이 되는 것이 쉽다면, 누구나 다 지휘관이 될 수 있다.

 

 의사 결정

 

1. 모든 결정에는 위험이 따르며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2. 신속한 결정이 항상 최고는 아니다. 반대로, 느린 결정이 항상 최고도 아니다.

3. 지휘관이 아주 멀리 떨어진 본부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면 실패할 수 있다. 직면한 상황과 잠재 상황에 대한 판단은 전장을 직접 누비는 장수가 제일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달콤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부하들을 전쟁에 동원해서는 안 된다.

5. 현명한 지휘관은 약점이 장점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부하들을 곤경으로 넣지 않는다.

6. 포기는 위임이 아니라 나약함의 상징이다. 위임이 강인함의 상징이다.

 

 위임의 기술

 

1. 지휘관 혼자 모든 책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

2. 지휘관들은 필수적인 지휘권을 위임해서는 절대 안 된다.

3. 훌륭한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위임했던 임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4. 지휘관이 한 번 책임을 위임했으면 결코 참견하지 말아라.

5. 부하가 위임받은 일에 대히 도움을 청하면 반드시 도와라

 

 외교와 정치

 

1. 정치적 전쟁에서 항상 뒤를 조심해야 한다. 지휘관은 종종 가장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한다.

2. 승리 어디에서, 언제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이다.

3. 훈족은 승리할 수 있는 전쟁에만 참여한다.

4. 훈족은 외교가 실패했을 때 전쟁을 한다. 그러나 전쟁이 외교적 접근의 시작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도 숙지해야 한다.

5. 목적이 분명할 때만 적을 만들어라.

 

 목표의 설정

 

1. 천박한 목표 천박한 결과를 가져온다.

2. 성공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다음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다.

3. 목표는 노력한 만큼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4. 순응이 항상 원하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5. 항상 목표를 높게 잡고 안전한 길을 찾기보다는 어려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용병술

 

1. 지휘관 대행을 임명하지 않는다. 가장 적임의 부하를 그 자리에 앉히고 그에게 책임과 권한을 준다. 그런 다음 그가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한다.

2. 현명한 지휘관은 절대 운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고된 노동과 힘, 끈기와 긍정적 태도가 보장하는 미래를 믿는다.

3. 현명한 지휘관은 부하들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숙지해야 한다.

4. 한번 행동을 개시했다면 지휘관들은 무승부가 아닌 승리를 위해 전념해야 한다.

5. 지휘관은 적시에 적절한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6. 뒤꽁무니에서 말을 달리는 지휘관은 지휘관이 아니다.

7. 무능한 지휘관이 파직될 때, 그의 부하를 그 자리에 임명하지 않는다. 지휘관이 실패했을 때, 부하 지휘관도 마찬가지로 실패한 것이다.

8. 무능한 지휘관 임명의 나쁜 점은 부하들이 그를 권위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으로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9. 뛰어나지 않지만 충성스런 부하를 가까이 한다. 유능하지만 불충한 부하를 멀리한다.

 

 문제와 해결

 

1. 문제보다는 기회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2. 위대한 지휘관들은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일부에 대한 실패를 받아들인다.

3. 모든 훈족이 자신의 인생의 경험과 지식을 성공으로 발전시킬 의무가 있다. 어떤 민족도 자신이 꺼리는 일을 해 줄 수는 없다.

4. 부하들이 잘 배우도록 하고 잘 가르치는 재주가 있는 지휘관들을 중용한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란 단어는 20세기부터 일본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된다. 특히 미국의 백인 이주 후손 크리올료(creole)들이 유럽 본토인과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발명된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란 말이 정의되면서 유럽과 제삼세계로 퍼져나갔다는 분석이다.

이와 같은 민족에 대한 근대적 해석은 국내의 일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져 ()민족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즉 민족이란 과거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발전과 함께 만들어진 근대적 가치이자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계가 일일 생활권으로 변모한 현재 케케묵은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대답하기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 털어 20세기 최대 사건 중의 하나는 1917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공산정권인 들어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련 즉 소비에트 정권의 등장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된 공산주의자들이 봉기하여 니콜라이 2 전제군주 체제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은 그 후 70여 년간 서방 자본주의 진영과 각축하며 세계를 양분한 공산진영의 영주로 군림했다.

한데 1990년에 이르러 소련체제가 무너지면서 많은 독립 국가들이 탄생했는데 이들 독립국가의 기반이 바로 민족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각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민족의 개념을 억압하고 말살하려는 전체주의 소련체제 하에서도 민족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국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복기대 박사는 지적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유태인들은 2천 년 전에 나라를 잃고 조국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져 떠돌면서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결코 유태민족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잊지 않고 견뎌냈다. 바로 이런 기질과 근성 때문에 불과 몇 백만 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옛 땅으로 돌아가 이스라엘이라는 새 나라를 세웠고 10억 명이 넘는 아랍세계와 당당히 맞서 싸우면서 버티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이란 여전히 어디에서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한민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민족이라는 공통분모와 응집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 있을지 아무도 정확히 상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중국 주변의 동아시아사를 보더라고 수많은 민족들이 부침과 흥망을 거듭했다. 이런 속에서 대부분의 민족들은 전쟁과 각축 끝에 중국 한족에 동화되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민족도 있다. 만주족도 중국 본토를 장악하고 청나라란 대 제국을 건설했었지만 결국 중국에 매몰되어 그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한민족도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무수한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를 근거로 비록 2차 세계대전 후 국토의 양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정신과 일체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 민족이 중국과 일본등 주변국과의 무수한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항쟁할 수 있었던 것도 한민족이란 정체성과 자부심 및 응집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조선에서는 민족이란 단어 대신에 민족을 뜻하는 단어로 아족류(我族類)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때의 아족류는 우리 민족 또는 우리 겨레의 뜻을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용되는 아족류는 일본인이나 여진인 등 이민족과 구분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일가친척을 뜻하는 말은 () 또는 족인(族人)으로 표기했다.

과거사를 정확히 알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올라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시대의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현재까지의 사료와 유물들을 참조하여 한민족에 관련된 연관성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필자는 한민족의 뿌리 찾기에서 가야?신라의 원류 북방기마민족이며 이들 중 일부가 서천한 흉노 중에서 375년에 서유럽을 공격했던 훈족임을 밝혔다. 또한 고구려신라백제가야의 원류도 흉노와 다름 아님을 밝혔다.

원래 흉노는 선우라는 수장 중의 수장이 이끌면서 중국인과 당당하게 대항하던 제국이다. 그러나 흉노라는 국가가 워낙 넓은 영토를 확보하면서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아시아 동북방에 위치한 고구려는 흉노 속에서 점점 세력을 키워나간 후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한다.

흉노가 여러 국가 또는 부족으로 갈라지자 고구려는 이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과 당당히 맛서 싸우거나 또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이러한 고구려의 위상은 ?삼국지?의 주역인 오나라의 천자 손권 고구려의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인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韓民族이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점은 거의 없고, 중국 등으로부터 수혜만 받아왔다는 스몰 콤플렉스(Small complex)를 가지고 있다.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아틸라가 우리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만큼 더욱 그의 리더십은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4~5세기경,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유린했으며,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세아 동북방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물론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및 신라(진한)와 더 가까운 관계로 추정되지만, 이들이 모두 한민족이다. 아틸라가 한민족과 친연성을 갖는 선조라고 간주할 때 우리는 45세기경 각각 서양과 동양에서 패자로 군림한 당당한 두 선조,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을 얻게 되는 것이다. .